믿는 자=고백하는 자 (요일2:20-23)
본문
20123절,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 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20절, .
그런데 너희들은 거룩하신 자로부터 기름부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 본문에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성경 아무곳에도 기름부음이란 말로 성령님을 표시한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만 이 성령님을 기름 부음이라, 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기름 부음, 혹은 기 름 부어진 것. 이것은 소위 전적으로 사도 요한에는 그리스도의 세례 받음, 성령님 세례 받음과 오순절을 연결시켜서 여기서 성령님을 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보 혜사로 말하고 있는 것도 사도 요한의 글에서 뿐이듯이 성령님을 로 기름부음으 로 말하고 있는 성경도 요한의 글에서 뿐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있어서 성령님으로 세례 받음, 혹은 성령님으로 충만케 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고 그가 성령님 세례로 하나님의 나라 를 시작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성령님을 받아 자기만이 담지하고 계셨던 것 이 아니라 그가 담지하고 계셨던 성령님을 오순절 날에 아버지로부터서 많은 사람들에게 부어주셨습니다. 바로 이 부어주심에, 부어주심의 사실에서 성령님을 기름 부음이라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마치 기름이듯 오순절 날 그리스도께서 물을 붓 듯 부어주셨습니다. 바로 이 사실에서 사도 요한은 성령님을 기름 부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름 부음은 누구에게서 왔느냐 여기 이 기름 부음 을 기름 부으신 이가 바로 거룩하신 자라. 그럴 때에 오순절과 연관해서 라고 한 사실에 비추어서 여기서 거룩하신 자는,는 성부 하나님을 말 한다기 보다 직접적으로 오순절 날 성령님을 부어주신 그리스도 주 그리스도를 거룩하신 자 로 말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문맥상 바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로부터서 너희들도 기름 부 음을 받아가지고 있다. 거룩하신 자로부터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성령님을 받아 가지고 있어 서, 그 다음. 그래서 모든 것을 안다. 만일에 정상적인 문맥으로 한다면 성령님을 받아 가지고 있으므로 너희들은 모든 것을 안다고 문맥을 구성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본래 어부 출신이고 또 히브리 내지 아람어권의 전통에서 자라온 사람이기 때문에 희랍어로 글을 써도 그냥 자기 어법 그대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예를 이 현대에서도 구할 수 있습니다. 영어에는 과거 를 표시하는 말이 오면 반드시 과거형 문장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독일어와 특별히 화 란어의 경우는 과거의 문장을 표시하는 부사가 들어와도 시제를 나타내는 말이 들어가 도 그 표시하는 말은 많은 경우에 현재 완료형을 사용하는 거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살아도 많은 경우에 영어 과거를 표시하는 부사 가 있으니 과거 동사를 사용해야 될터인데 상당히 많은 경우에 아직도 화란 자기들 본 래 말투대로 현재 완료형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기름 부음을 거룩하신 자로부터 받아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것을 안다 고 해야할 문맥을. 그냥 가지고 있고 모든 것을 안다로 히브 리어의 [왜1왜]의 용법 [그리고1그리고1그리고]의 용법 그대로 여기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저자는 저작자가 누구라고 본문에 명기되지 아니해서 저자에 대한 시비를 많이 하지마는 요한복음의 저자와 동일한 저자임을 이 문맥의 구성들과 문장의 사상들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너희들이 알고 있다. 여기 서 라고 하는 말은 세상의 모든 사물의 지식을 세상적인 지식을 다 안다는 뜻 이 아니고 소위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진리의 지식을 특히 구원의 도리에 관하여 모든 것 을 다 안다고 하는 말입니다. 왜 구원의 도리에 관한 지식을 다 아느냐 하면 바로 성령님 께서 진리의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구원의 도리에 관한 모든 진리들을 다 우리가 가르침 없이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무식한 사람들도 예수 믿고서 유식해진 사람 들 많습니다. 왜 진리의 지식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서도 세상에 관한 것도 눈이 열려 서 바로 알게 됩니다. 예수 믿어서 성령님을 모시게 되면 하나님과 그의 아들에 관하여서 도 가르침 없이도 잘 압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신학적으로 배우지 아니해도 예수 믿어 성령님을 가진 자는 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2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진리를 다 안다고 하는 것,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 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데에 분명히 합니다. 여기에 라고 하는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는 뜻이 아니고 진리 의, 지금 바울 사도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아버지의 관계에 관한 그리고 그의 구속의 도리에 관한 모든 진리를 다 안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을 받은 자는 진리의 지식에 서 이탈해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른 진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기이한 말을 하는거 보면, 그들은 성령님을 진짜로 받 았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을 이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모신 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그릇된 도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을 모시 지 못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릇되이 알고 그릇되이 전할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 를 바로 아는 자는 성령님을 모신 자이고 성령님을 모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로 알 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관한 한은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 한 근본 도리를 다 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21절, 너희들이 여러분들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내가 여러분들에게 쓴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진리를 알기 때문에 내가 여러분들에게 글을 썼다. 진리가 무엇이냐 바로 성령님께서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역사하신 아버지에 관한 모든 것이 진리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진리가 무 엇이냐 그러면 칸트가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그런 유명한 말을 했어요. 진리가 무엇이냐는 말처럼 해묵은 말도 없고 그리고 그 내용을 뭐라고 정의하는 말처럼 참 싱거운 말이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통적으로 진리가 무엇이냐고 할 때 내 주관과 대상과가 내 판단하고 앞 에 사물과 일치하면 그것은 진리라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진리가 그런 소박한 진리가 아니고 생명을 가져다 주는 진리, 생명의 근원되신, 사람을 살게하는 그 생명, 그것을 바로 사도요한은 여기서 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님께서 가르 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구원의 도를 모르기 때문에가 아니고 여러분들이 그 진리를 알기 때문에 내가 편지를 썼는데,
그런데
그런데 모든 거짓은 진리로부터서 말미암지 않는다. 우리말 번역에 진리 에서 나오지 않는다. 거짓은, 여기서는 한낱 내 판단하고 사물이 일치하지 않는 그런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부정으로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 기서 말하는 거짓는 그냥 단순한 어느것이 참이고 어느것이 거짓이다 그런 의미의 거짓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부정을 말합니다. 진리를 부정함은 진리에게서 나오 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은 바로 그 생명의 원천이신 그분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데서 유래했습니다. 그것은 21절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도에 관하여 그리고 또 아버지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신 그 섭리에 관해서 부인하는 이 거짓은 진리로부터 나오지 아니합니다. 정말 참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서 나오고 그가 진리이신데 그가 이 세상을 지으시고 이 세상이 타락하였는데 타락하여 악한 자에게 속했는데 그것은 다시 자기에게로 돌리심,
그러므로 하나님 이 만유 중에 만유가 되심, 그것이 성경이 말한 근본 진리입니다. 다른 것은 부차적인 것이요 부수적이요 생명을 주관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참 진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시고 이 세상이 타락하였는데 타락하여 악한 자에게 속한 것을 다시 아들로 서 자기에게로 돌이키심, 그것이 진리요 그 외에 다른 진리가 있지 않습니다. 이것만이 바른 진리이고 다른 것들은 다 그림자와 같은 진리입니다. 이 진리만이 진정한 진리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세상에 허구한 철학과 그릇된 이론들이 분분합니다. 진리를 부인 하는 모든 것은 진리에게서 오지 아니합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왔느냐 그것이 인제 22 절부터의 이야기인데, 진리를 부인하는 악한 자에게서 왔고 적그리스도에게서 사탄에게 서 유래한 것입니다. 자, 우리말은 이 문맥에 맞게 번역했는지, 거짓말 하는 자가 누 구뇨 거짓말장이가 누구냐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자, 아니면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냐 이 사람이 바 로 적그리스도다. 그러면 거짓말이 무엇이냐 그럴 때 바로 사도가 해명을 하고 있습니다. 거짓이 무엇 이냐 진리를 부인함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진리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 아니라고 하는 자, 시비하는 자 외에 누가 거짓말 하는 자 냐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시비하는 자, 의 원형동사는부인하다 도 되지마는 어떤 사람에게서 어떤 권리를 거부하고 그리고 그것을 시비 하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단지 그러니까 어떤 사실을 부인한다 정도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실로 그러한지에 대한 시비를 하고 그와같은 바른 자격을 가진 것에 대해서 그 걸 부인하는 것이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본문에 의하면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시비하는 자 외에는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함이 거짓이요 그리고 그가 거짓말장이 입니다. 바로 거짓말장이가 누구냐 여기서 말하는 거짓말장이, 거짓말하는 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사람이 되심을 부인하는 자가 거짓말하는 자 입니다. 이것 만이 진 정한 진리요. 내가 진리를 위해서 왔다고 할 때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냐고 그렇게 빌라도가 시비하였는데 바로 예수가 진리 자신, 즉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구속주이실 뿐만 아니라 그가 창조주이심을 부인함이 이것이 거짓말장이요. 다른 것은 다 부차적인 진리요. 학문에 서 말하는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것도 이 진리에 비기면 부차적인 것이요 핵심에 이르지 못한다. 학문이 말하는 참 진리, 학문에서도 참 진리에 이를려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세상 의 구주로 오신 분이심을 바로 고백해야 만이 학문도 바른 진리에 이를 것입니다. 이 진리 를 인정함이 없이 말하는 학문에서의 참이나 거짓의 시비는 다 그림자와 같은 것이고 부수 적인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초대교회에 벌써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 니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비하는 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육신 해서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시비하고 부인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만이 참 진리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이 진리가 있으면 처음부터서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모든 종파들 중에 정통과 이 단 시비가 늘 있기 마련이지마는 기독교만이 늘 이단 시비가 그치지 아니하는 종교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시비하는 자 외에 누가 거짓말하는 자냐 즉 말을 바꾸면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자 만이 거짓말하는 자다. 바로 이 사람이 이 사람이 적그리스도라. 이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를 부인 하는 자이고 그의 사역을 훼방하는 자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부인하면 그의 사역이 자동적으로 부인된다. 그러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아니라고 말하며는 그가 죽으심이 세상을 위하여 죽으신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부인됩니다. 그러니 바로 사도 요한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말하지 아니하고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시비하는 자가 바로 거짓말하는 자로서 적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참 진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까 말했던 것의 다시 반복이요. 하나님께서 세상 을 창조하셨는데 세상이 타락하여 악한 자에게 속하였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되어 오셔서 이 세상을 하나님께로 회복시키는 것, 그것이 모든 학문이 추구하고 증명 해야할 진리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선포해야 할 끊임없이 선포해야 할 진리입니다. 바로 이 렇게 말하는 자가 적그리스도 입니다. . 그리고 그 자는 바로 아버지 의 아들을 부인하는 자라.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곧 아버지를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를 자기의 아들로서 보내셨다고 하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부인함은, 그리스도를 부인함은 곧 아버지를 부인함이요. 왜냐하면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세상에 오셨는데 이것을 부인하기 때문이요. 그러니 그리스도이 심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의 아들을 동시에 부인하는 자 입니다. 23절,아들 을 부인하는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다가 아버지를 갖지 못한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 하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생명에서 끊겼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 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의 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둘을 떼어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기독교가 가르치는 신비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누구든 지 다 아버지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을 부인하므로 이미 아버지를 부인해버 리고 생명에서 끊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어도 그냥 선생으로 좋은 사람으로 도 덕적으로 훌륭한 교사로 훌륭한 모본으로 종교적인 천재로 가르치는 기독교 교회도 아버지 가 없습니다. 그 말씀은 무슨 말이냐면 참 생명에서 끊겨졌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에게만 아버지가 있어서 생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후반절,. 아들을 고백하는 자가 아버지를 갖습니다. 아버지를 갖는 길은 아들을 믿으므로 아들을 신앙고백 해서만 입니다.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자는 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 들로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자이고 아버지께서 보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들을 고백하는 자 만이 아버지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인제사도가믿는다 라고 하지고백하는 자 라고 썼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라고 하지 아니하고 아들을 고백하는 자, 23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 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그러니 원문을 읽어야 좋은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아들을 고백 하는 자는 또한 아들도 갖는다. 그냥 사적으로 사사로이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항상 공적인 신앙고백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 세례 받을 때 처음 예수 믿을 때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은 늘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므로 연속됩니다. 그 신앙고백 없이 기독교 신앙이 계속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예배 때마다 신앙고백, 그것이 사도신경으로 이든지 혹은 니케야 신경으로 이든지 혹은 콘스탄티노플 신경, 혹은 아타나시우스 신경으로 어느 신경으로 이루어지든지 그렇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를 우리의 주로 우리의 구주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공적인 신앙고백이 우리에게 늘 계속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가 분명히 그리스도에게 속하였음을 우리의 입으로 증거하게 되고 그리고 그렇게 하므로 영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들을 고백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갖는 다고 했는데 20절에는 로 영을 갖는다고 기름 부음을 갖는다고 해놓고도 그 다음절에 성령님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공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신앙고백하면 성령님은 함께 와 계십니다. 그것이 사도가 가르치고 있는 성령님에 관한 특이한 가르침 입니다. 별도로 성령을 고백하므로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을 고백하면 성령님은 우리가 함 께 모시고 있어서 역사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름 부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을 현재형 동사로 사용했으므로 우리가 한번 받은 성령님이 우리곁은 떠나지 않고 영 구히 계심을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을 고백하면 성령님을 항상 모시고 있으 며 성령님은 항상 역사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과 아버지를 신앙고백 하게 하시는 이도 다른 분이 아니고우리에게 기름부어 주시므로 오신 성령님의 사역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들을 고백하므로 아버지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 냐 성령님께서, 너무 어려운 신학적인 이야기이지마는, 성령님께서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연 결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아들을 신앙고백 하므로 아버지를 가지게 됩니다. 항상 아들을 신앙고백 하면 자동적으로 필연적으로 아버지를 갖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역사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진리를 잘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아들을 믿고 신앙고백 하므로 아버지를 모셔서 새 생명의 원천에 연결된 것은 다 성령님의 역사하시기 때문이요 우리의 신앙고백은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그 리고 아버지와 아들을 신앙고백 하면 성령님께서 거기에 함께 와 계시게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려고 합니다. 오늘은 정말 사도 요한이 성령님에 관하여 아주 깊은 진리 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 진리를 잘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을 모신 자는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으로 아들을 고백하면 성령님으로 인해서 아버지를 모 시고 즉 생명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 자에게 만이 참 생명이 있기 때 문입니다. 성령님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우리가 이와같은 진리에 이르러 갈 수가 없습니다. 그 리고 우리가 신앙고백 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한 것은 교회는 신앙하는 자는 항상 교회로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신앙고백이 교회와 연결됩니다. 그냥 믿는다가 아니고 신앙고 백 하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신앙고백은 공적인 일이요. 공적인 신앙고백은 교회에서 이루 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교회를 이루게 되어 있고 그 교회에서 공적인 신앙고 백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그냥 믿는다가 아니라 아들을 신앙고백 하는 자는 아버지를 갖 습니다. 즉 아들을 신앙고백 하므로 교회가 이루어지고 그 교회가 공적으로 신앙고백 하므 로 교회가 하나님의 생명을 갖게 되어 잇씁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은 교회와 분리되어 성립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음은, 항상 그리스도인 됨은 항상 교회와 이렇게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진리를 아들을 신앙고백 하는 자라고 하는 이 말씀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여러분들 의 예배에서 신앙고백이 늘 바르게 이루어지므로 아버지의 아들을 가져 영생하는 생명을 풍성하게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아버지와 아들을 신앙고백 하면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힘있게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거룩하신 자로부터 기름부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 본문에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성경 아무곳에도 기름부음이란 말로 성령님을 표시한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만 이 성령님을 기름 부음이라, 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기름 부음, 혹은 기 름 부어진 것. 이것은 소위 전적으로 사도 요한에는 그리스도의 세례 받음, 성령님 세례 받음과 오순절을 연결시켜서 여기서 성령님을 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보 혜사로 말하고 있는 것도 사도 요한의 글에서 뿐이듯이 성령님을 로 기름부음으 로 말하고 있는 성경도 요한의 글에서 뿐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있어서 성령님으로 세례 받음, 혹은 성령님으로 충만케 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고 그가 성령님 세례로 하나님의 나라 를 시작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성령님을 받아 자기만이 담지하고 계셨던 것 이 아니라 그가 담지하고 계셨던 성령님을 오순절 날에 아버지로부터서 많은 사람들에게 부어주셨습니다. 바로 이 부어주심에, 부어주심의 사실에서 성령님을 기름 부음이라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마치 기름이듯 오순절 날 그리스도께서 물을 붓 듯 부어주셨습니다. 바로 이 사실에서 사도 요한은 성령님을 기름 부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름 부음은 누구에게서 왔느냐 여기 이 기름 부음 을 기름 부으신 이가 바로 거룩하신 자라. 그럴 때에 오순절과 연관해서 라고 한 사실에 비추어서 여기서 거룩하신 자는,는 성부 하나님을 말 한다기 보다 직접적으로 오순절 날 성령님을 부어주신 그리스도 주 그리스도를 거룩하신 자 로 말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문맥상 바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로부터서 너희들도 기름 부 음을 받아가지고 있다. 거룩하신 자로부터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성령님을 받아 가지고 있어 서, 그 다음. 그래서 모든 것을 안다. 만일에 정상적인 문맥으로 한다면 성령님을 받아 가지고 있으므로 너희들은 모든 것을 안다고 문맥을 구성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본래 어부 출신이고 또 히브리 내지 아람어권의 전통에서 자라온 사람이기 때문에 희랍어로 글을 써도 그냥 자기 어법 그대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예를 이 현대에서도 구할 수 있습니다. 영어에는 과거 를 표시하는 말이 오면 반드시 과거형 문장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독일어와 특별히 화 란어의 경우는 과거의 문장을 표시하는 부사가 들어와도 시제를 나타내는 말이 들어가 도 그 표시하는 말은 많은 경우에 현재 완료형을 사용하는 거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살아도 많은 경우에 영어 과거를 표시하는 부사 가 있으니 과거 동사를 사용해야 될터인데 상당히 많은 경우에 아직도 화란 자기들 본 래 말투대로 현재 완료형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기름 부음을 거룩하신 자로부터 받아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것을 안다 고 해야할 문맥을. 그냥 가지고 있고 모든 것을 안다로 히브 리어의 [왜1왜]의 용법 [그리고1그리고1그리고]의 용법 그대로 여기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저자는 저작자가 누구라고 본문에 명기되지 아니해서 저자에 대한 시비를 많이 하지마는 요한복음의 저자와 동일한 저자임을 이 문맥의 구성들과 문장의 사상들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너희들이 알고 있다. 여기 서 라고 하는 말은 세상의 모든 사물의 지식을 세상적인 지식을 다 안다는 뜻 이 아니고 소위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진리의 지식을 특히 구원의 도리에 관하여 모든 것 을 다 안다고 하는 말입니다. 왜 구원의 도리에 관한 지식을 다 아느냐 하면 바로 성령님 께서 진리의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구원의 도리에 관한 모든 진리들을 다 우리가 가르침 없이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무식한 사람들도 예수 믿고서 유식해진 사람 들 많습니다. 왜 진리의 지식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서도 세상에 관한 것도 눈이 열려 서 바로 알게 됩니다. 예수 믿어서 성령님을 모시게 되면 하나님과 그의 아들에 관하여서 도 가르침 없이도 잘 압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신학적으로 배우지 아니해도 예수 믿어 성령님을 가진 자는 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2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진리를 다 안다고 하는 것,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 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데에 분명히 합니다. 여기에 라고 하는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는 뜻이 아니고 진리 의, 지금 바울 사도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아버지의 관계에 관한 그리고 그의 구속의 도리에 관한 모든 진리를 다 안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을 받은 자는 진리의 지식에 서 이탈해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른 진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기이한 말을 하는거 보면, 그들은 성령님을 진짜로 받 았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을 이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모신 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그릇된 도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을 모시 지 못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릇되이 알고 그릇되이 전할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 를 바로 아는 자는 성령님을 모신 자이고 성령님을 모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로 알 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관한 한은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 한 근본 도리를 다 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21절, 너희들이 여러분들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내가 여러분들에게 쓴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진리를 알기 때문에 내가 여러분들에게 글을 썼다. 진리가 무엇이냐 바로 성령님께서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역사하신 아버지에 관한 모든 것이 진리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진리가 무 엇이냐 그러면 칸트가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그런 유명한 말을 했어요. 진리가 무엇이냐는 말처럼 해묵은 말도 없고 그리고 그 내용을 뭐라고 정의하는 말처럼 참 싱거운 말이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통적으로 진리가 무엇이냐고 할 때 내 주관과 대상과가 내 판단하고 앞 에 사물과 일치하면 그것은 진리라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진리가 그런 소박한 진리가 아니고 생명을 가져다 주는 진리, 생명의 근원되신, 사람을 살게하는 그 생명, 그것을 바로 사도요한은 여기서 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님께서 가르 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구원의 도를 모르기 때문에가 아니고 여러분들이 그 진리를 알기 때문에 내가 편지를 썼는데,
그런데
그런데 모든 거짓은 진리로부터서 말미암지 않는다. 우리말 번역에 진리 에서 나오지 않는다. 거짓은, 여기서는 한낱 내 판단하고 사물이 일치하지 않는 그런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부정으로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 기서 말하는 거짓는 그냥 단순한 어느것이 참이고 어느것이 거짓이다 그런 의미의 거짓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부정을 말합니다. 진리를 부정함은 진리에게서 나오 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은 바로 그 생명의 원천이신 그분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데서 유래했습니다. 그것은 21절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도에 관하여 그리고 또 아버지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신 그 섭리에 관해서 부인하는 이 거짓은 진리로부터 나오지 아니합니다. 정말 참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서 나오고 그가 진리이신데 그가 이 세상을 지으시고 이 세상이 타락하였는데 타락하여 악한 자에게 속했는데 그것은 다시 자기에게로 돌리심,
그러므로 하나님 이 만유 중에 만유가 되심, 그것이 성경이 말한 근본 진리입니다. 다른 것은 부차적인 것이요 부수적이요 생명을 주관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참 진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시고 이 세상이 타락하였는데 타락하여 악한 자에게 속한 것을 다시 아들로 서 자기에게로 돌이키심, 그것이 진리요 그 외에 다른 진리가 있지 않습니다. 이것만이 바른 진리이고 다른 것들은 다 그림자와 같은 진리입니다. 이 진리만이 진정한 진리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세상에 허구한 철학과 그릇된 이론들이 분분합니다. 진리를 부인 하는 모든 것은 진리에게서 오지 아니합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왔느냐 그것이 인제 22 절부터의 이야기인데, 진리를 부인하는 악한 자에게서 왔고 적그리스도에게서 사탄에게 서 유래한 것입니다. 자, 우리말은 이 문맥에 맞게 번역했는지, 거짓말 하는 자가 누 구뇨 거짓말장이가 누구냐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자, 아니면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냐 이 사람이 바 로 적그리스도다. 그러면 거짓말이 무엇이냐 그럴 때 바로 사도가 해명을 하고 있습니다. 거짓이 무엇 이냐 진리를 부인함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진리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 아니라고 하는 자, 시비하는 자 외에 누가 거짓말 하는 자 냐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시비하는 자, 의 원형동사는부인하다 도 되지마는 어떤 사람에게서 어떤 권리를 거부하고 그리고 그것을 시비 하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단지 그러니까 어떤 사실을 부인한다 정도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실로 그러한지에 대한 시비를 하고 그와같은 바른 자격을 가진 것에 대해서 그 걸 부인하는 것이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본문에 의하면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시비하는 자 외에는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함이 거짓이요 그리고 그가 거짓말장이 입니다. 바로 거짓말장이가 누구냐 여기서 말하는 거짓말장이, 거짓말하는 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사람이 되심을 부인하는 자가 거짓말하는 자 입니다. 이것 만이 진 정한 진리요. 내가 진리를 위해서 왔다고 할 때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냐고 그렇게 빌라도가 시비하였는데 바로 예수가 진리 자신, 즉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구속주이실 뿐만 아니라 그가 창조주이심을 부인함이 이것이 거짓말장이요. 다른 것은 다 부차적인 진리요. 학문에 서 말하는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것도 이 진리에 비기면 부차적인 것이요 핵심에 이르지 못한다. 학문이 말하는 참 진리, 학문에서도 참 진리에 이를려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세상 의 구주로 오신 분이심을 바로 고백해야 만이 학문도 바른 진리에 이를 것입니다. 이 진리 를 인정함이 없이 말하는 학문에서의 참이나 거짓의 시비는 다 그림자와 같은 것이고 부수 적인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초대교회에 벌써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 니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비하는 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육신 해서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시비하고 부인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만이 참 진리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이 진리가 있으면 처음부터서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모든 종파들 중에 정통과 이 단 시비가 늘 있기 마련이지마는 기독교만이 늘 이단 시비가 그치지 아니하는 종교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시비하는 자 외에 누가 거짓말하는 자냐 즉 말을 바꾸면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자 만이 거짓말하는 자다. 바로 이 사람이 이 사람이 적그리스도라. 이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를 부인 하는 자이고 그의 사역을 훼방하는 자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부인하면 그의 사역이 자동적으로 부인된다. 그러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아니라고 말하며는 그가 죽으심이 세상을 위하여 죽으신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부인됩니다. 그러니 바로 사도 요한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말하지 아니하고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시비하는 자가 바로 거짓말하는 자로서 적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참 진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까 말했던 것의 다시 반복이요. 하나님께서 세상 을 창조하셨는데 세상이 타락하여 악한 자에게 속하였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되어 오셔서 이 세상을 하나님께로 회복시키는 것, 그것이 모든 학문이 추구하고 증명 해야할 진리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선포해야 할 끊임없이 선포해야 할 진리입니다. 바로 이 렇게 말하는 자가 적그리스도 입니다. . 그리고 그 자는 바로 아버지 의 아들을 부인하는 자라.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곧 아버지를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를 자기의 아들로서 보내셨다고 하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부인함은, 그리스도를 부인함은 곧 아버지를 부인함이요. 왜냐하면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세상에 오셨는데 이것을 부인하기 때문이요. 그러니 그리스도이 심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의 아들을 동시에 부인하는 자 입니다. 23절,아들 을 부인하는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다가 아버지를 갖지 못한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 하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생명에서 끊겼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 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의 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둘을 떼어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기독교가 가르치는 신비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누구든 지 다 아버지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을 부인하므로 이미 아버지를 부인해버 리고 생명에서 끊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어도 그냥 선생으로 좋은 사람으로 도 덕적으로 훌륭한 교사로 훌륭한 모본으로 종교적인 천재로 가르치는 기독교 교회도 아버지 가 없습니다. 그 말씀은 무슨 말이냐면 참 생명에서 끊겨졌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에게만 아버지가 있어서 생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후반절,. 아들을 고백하는 자가 아버지를 갖습니다. 아버지를 갖는 길은 아들을 믿으므로 아들을 신앙고백 해서만 입니다.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자는 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 들로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자이고 아버지께서 보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들을 고백하는 자 만이 아버지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인제사도가믿는다 라고 하지고백하는 자 라고 썼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라고 하지 아니하고 아들을 고백하는 자, 23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 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그러니 원문을 읽어야 좋은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아들을 고백 하는 자는 또한 아들도 갖는다. 그냥 사적으로 사사로이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항상 공적인 신앙고백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 세례 받을 때 처음 예수 믿을 때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은 늘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므로 연속됩니다. 그 신앙고백 없이 기독교 신앙이 계속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예배 때마다 신앙고백, 그것이 사도신경으로 이든지 혹은 니케야 신경으로 이든지 혹은 콘스탄티노플 신경, 혹은 아타나시우스 신경으로 어느 신경으로 이루어지든지 그렇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를 우리의 주로 우리의 구주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공적인 신앙고백이 우리에게 늘 계속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가 분명히 그리스도에게 속하였음을 우리의 입으로 증거하게 되고 그리고 그렇게 하므로 영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들을 고백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갖는 다고 했는데 20절에는 로 영을 갖는다고 기름 부음을 갖는다고 해놓고도 그 다음절에 성령님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공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신앙고백하면 성령님은 함께 와 계십니다. 그것이 사도가 가르치고 있는 성령님에 관한 특이한 가르침 입니다. 별도로 성령을 고백하므로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을 고백하면 성령님은 우리가 함 께 모시고 있어서 역사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름 부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을 현재형 동사로 사용했으므로 우리가 한번 받은 성령님이 우리곁은 떠나지 않고 영 구히 계심을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을 고백하면 성령님을 항상 모시고 있으 며 성령님은 항상 역사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과 아버지를 신앙고백 하게 하시는 이도 다른 분이 아니고우리에게 기름부어 주시므로 오신 성령님의 사역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들을 고백하므로 아버지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 냐 성령님께서, 너무 어려운 신학적인 이야기이지마는, 성령님께서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연 결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아들을 신앙고백 하므로 아버지를 가지게 됩니다. 항상 아들을 신앙고백 하면 자동적으로 필연적으로 아버지를 갖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역사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진리를 잘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아들을 믿고 신앙고백 하므로 아버지를 모셔서 새 생명의 원천에 연결된 것은 다 성령님의 역사하시기 때문이요 우리의 신앙고백은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그 리고 아버지와 아들을 신앙고백 하면 성령님께서 거기에 함께 와 계시게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려고 합니다. 오늘은 정말 사도 요한이 성령님에 관하여 아주 깊은 진리 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 진리를 잘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을 모신 자는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으로 아들을 고백하면 성령님으로 인해서 아버지를 모 시고 즉 생명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 자에게 만이 참 생명이 있기 때 문입니다. 성령님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우리가 이와같은 진리에 이르러 갈 수가 없습니다. 그 리고 우리가 신앙고백 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한 것은 교회는 신앙하는 자는 항상 교회로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신앙고백이 교회와 연결됩니다. 그냥 믿는다가 아니고 신앙고 백 하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신앙고백은 공적인 일이요. 공적인 신앙고백은 교회에서 이루 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교회를 이루게 되어 있고 그 교회에서 공적인 신앙고 백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그냥 믿는다가 아니라 아들을 신앙고백 하는 자는 아버지를 갖 습니다. 즉 아들을 신앙고백 하므로 교회가 이루어지고 그 교회가 공적으로 신앙고백 하므 로 교회가 하나님의 생명을 갖게 되어 잇씁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은 교회와 분리되어 성립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음은, 항상 그리스도인 됨은 항상 교회와 이렇게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진리를 아들을 신앙고백 하는 자라고 하는 이 말씀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여러분들 의 예배에서 신앙고백이 늘 바르게 이루어지므로 아버지의 아들을 가져 영생하는 생명을 풍성하게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아버지와 아들을 신앙고백 하면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힘있게 역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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