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가는 믿음 (요4:46-54)
본문
허브 윌러라고 하는 분이 쓴 'Connecting with God'라고 하는 "하나님의 연결", "하나님과의 연결"이라는 그런 책이 있는데 그 책 속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한적한, 아주 평화로운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에 나이트 클럽이 개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이트 클럽이 문을 열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 마을 사람들은 큰 걱정에 빠졌습니다. 이 평화로운 마을이 시끄럽게 됐고 젊은 사람들이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면서 타락하게 될 것이다. 큰 걱정이 돼서 교회에서는 철야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철야기도 하는 가운데에 좀 극성스러운 교인들은 뭐라고 기도를 했는고 하니 '하나님 이 나이트 클럽을 불태워 주십시오' 불을 질러 달라고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죄악으로부터 우리 마을을 건져 주십시오.' 했는데 얼마 후에 정말 벼락을 쳐서 나이트 클럽이 그만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이트 클럽 주인은 이 사실을 알고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 불 탄데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를 한 것은 사실이지마는 그 기도 때문에 나이트 클럽이 불탔다는 말은 말도 안 된다고 책임을 부정하게 됩니다. 재판장이 양쪽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재판을 하면서 하는 말씀을 좀 들어보세요. "누가 범죄를 했던지 간에 분명한 것은 나이트 클럽의 주인은 기도의 능력을 믿고 있는데 교회의 교인들은 믿지 않고 있으며 기도의 능력은 완전히 부정하고 있군요. 그 내가 보기에는 나이트 클럽 주인의 믿음이 더 훨씬 훌륭하다"고. 여러분 우리가 어떤 때 기도합니다. 기도의 응답과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아요. 기도하면서도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아요. 이게 얼마나 넌센스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한 왕의 신하의 그 믿음이 여기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특별한 뜻이 계셔서 이 헤롯왕의 신하되는 이 지체 높은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성장케 하시고 믿음을 훈련시키시고 믿음을 훌륭한 믿음으로 이렇게 완성시켜 가는 그 과정을 오늘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의 역사는 하나님 자신이 주도하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아시는 대로 이 왕의 신하가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 사람이 왕의 신하로서 이 30세 밖에 안된 갈릴리, 바로 같은 마을이거든요. 자기 동리인데 가버나움, 이 동리에 사는 이 청년 한 사람에게 가서 무릎을 꿇게 되지 않습니까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 아들이 병들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상대도 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병 들었고 백방으로 애 썼지만은 병이 낫지를 않아요. 그리고 이 아들이 죽어 갑니다. 정말로 다급했어요. 아주 급하게 되니까 이제 뭐 체면이고 지위고 할 것 없이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이 병들었다고 하는 이 사건은 매우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이 지체 높은, 교만한 헤롯왕의 신하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가서 무릎을 꿇게 됐다―거기까지 인도했습니다. 이 병들었다고 하는 사건이 이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적지만은 소문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헤롯왕의 신하가 소문을 들었어요.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도 고치고 열병환자도 고치고 장님의 눈도 뜨게 한다더라―하는 소문을 들었어요. 이 소문에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 소문을 듣고 '말도 안돼! 그럴 리가 없어. 뭐 갈릴리 청년 그 목수의 아들 예수, 내가 잘 아는데 없다. 뭐 그런 일없다. 아니다.' 그랬으면 이 일은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소문에 대한 믿음을 가졌어요.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정보에 대한 믿음, 전도에 대한 믿음, 증거에 대한 믿음을 가졌어요. 그리할 때에 이 사건 앞에서 이 같은 예수님 앞에 나오고자 하는 그런 결심과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 이제 보니까 다급해진 것 같아요. 거의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적으로 급하게 됐고, 인간의 방법이 다 끝났고 한계에 왔어요. 지금 시간을 다투어요. 이제 빨리 손쓰지 않으면 그냥 죽을 거예요. 이런 시간에 저는 조급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와서 간구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적어도 인간의 한계를 몇 가지 한계를 넘어서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고는 예수님 앞에 바로 설 수가 없었고, 예수님의 그 주신 능력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첫째가 감각적 한계를 극복해야 했습니다. 소문은 경험이 아닙니다. 소문은 내 경험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경험입니다. 내가 본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본 것입니다. 나는 못 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꼭 보아야 되고 내가 경험해야 된다고 고집을 했다면 이 사람은 끝까지 예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표적을 믿는 믿음, 그것은 내 자신의 경험 속에 없는 일이지마는 우리는 그 증거를 받고 그 사실을 사실대로 믿을 수 있는 감각적 한계를 넘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보아야 되고 내가 손으로 만져야 되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꼭 죽어봐야만 알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진리는 내가 죽기 전에 모르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해결할 수가 없겠지요. 그런고로 우리는 이 감각, 내가 받는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는, 넘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한가지는 공간적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지금 아들이 병들어 누워있지요. 아버지는 예수님께 찾아와서 "우리 집에 가십시다" 그래요. '빨리 가서 지금 죽어 가는데 그 여러 말 하시지 마시고 빨리 가서 이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십시오'하고 부탁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 공간적인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이 나았느니라." 이것 참 답답한 일입니다. 나았는지 안 나았는지 알 수가 없거든요. 자기 소원 같아서는 예수님이 같이 가서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이런 장면이 있었으면 딱 좋겠는데 예수님은 아주 단호하게 잘라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이 나았느니라.' 갈 필요 없다 그거예요. 이걸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요새 말로 remote control이요. 원격조정을 하는 겁니다. 이것을 믿어야 되는데요. 우리는 가만히 보면은 이걸 믿지 못해요. 내 손에 있어야 하고 바로 여기 있어야 하지 저기서 이루어지는 것을 믿지 못해요. 저 먼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내가 여기서 믿지 못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공간을 초월하는 그런 믿음을 가져야 했고요, 또한가지는 시간적 한계를 초월해야 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어쨌든 예수님께서 즉시 내려오셔서 자기를 도와주시기를 바랬는데 예수님은 즉시 가시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이 가지는 느긋한 시간이 있습니다. 여유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조급합니다. 아주 조급하고 답답한데, 초조한데 예수님은 아주 여유 있습니다. '네 아들이 나았느니라.'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에디슨이라고 하는 발명왕을 여러분이 아실 겁니다.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발명가인데 어느 날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얘가 유학을 떠난답니다. 그런고로 선생님께서 일생동안 마음에 두고 좌우명으로 기억할 한 마디 귀한 말씀을 좀 주십시오." 에디슨이 일하다 말고 가만히 갑자기 이 말을 듣고 생각하다가 시계를 쳐다보더니 그 때서야 시계를 쳐다보고 하는 말이 '시계를 보지 마라.' 한마디 했다고 합니다. 자꾸 시계 쳐다보는 거 좋은 거 아니에요. 여러분 설교 듣다가 시계 보는 거 그거 좋은 거 아니에요. 무엇인가 몰두하고 있는 동안 시계 쳐다보는 거 좋지 않아요. 여러분 누구하고 만나서 대화할 때 시계 보는 거 큰 실례입니다. 빨리 가세요, 그만 하라고 하는 얘기거든요. 여러분 우리가 시간을 여러 시간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는 Calendar time입니다. Calendar에서 보는 시간. Physiological Time입니다. 생리학적 시간.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시간이 있어요. 내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 엄청난 거리가 있는 것이에요. 나는 죽어 가는 사람이요, 나는 나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초조합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그러나 하나님께는 여유가 있습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습니다.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서 내가 가진 초조하고 답답한 시간 관념을 극복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더 큰 것을 더 영원한 것을 주시려고 해요. 내가 가지는 이 시간적인 잣대로 하나님을 비판해서는 안돼요. 그런고로 시간적 한계를 넘어서는 그 믿음이 필요합니다.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갈 때 빨리 가고 싶어서요, 그거 뭐 부지런히 걸어가면 아무리 늦어도 보름이면 갈 수 있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생각한 시간은 40년이에요. 자 두 주일이면 갈 수 있는 것을 40년을 걸려서 갔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시간이요. 도대체 우리는 너무나 초조해요. 모든 일에서 너무 조급하고 급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다가 실수를 많이 합니다. 급하게 부하려고 하다가 많을 것을 잃었습니다. 여러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 그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가 하면 경험적 한계를 또 넘어서야 됩니다. 내 경험에서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고정관념을 버려야 됩니다. 이 답답하고 협소한 이 생각이 이것이 다인 줄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 의견 내 경험이 그거 하잘 턱없는 거예요. 아시는 대로 옛날 어른들, 뭐 저를 비롯해서 다 그런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어쨌는데…" 그건 그 때 얘기지 지금 그렇게 고집 부린다고 되나요 그게. 밀어 부치면 된다는 건 그건 옛날 얘기지요. 이젠 잠꼬대 같은 소리하지 마세요. 다 지나갔어요 이제는. 그 때는 그 때요, 지금은 내 경험 내가 가진 경험 다 일단 잊어버려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요, '한나'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아이가 없어서 그것 때문에 모든 사람으로부터 수모를 받고 너무 억울하고 분하게 느껴서 하나님 앞에 아들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소박한 한 여인의 기도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몰두하고 기도했던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어요. 이것을 제사장이 보고 "이 젊은 사람이 대낮에 무슨 술을 마셨나" 하고 책망을 합니다. "아니올시다. 내 간절한 소원 때문에 이러는 겁니다." 제사장이 마음이 감동을 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네가 구한 것을 들어주시기를 원하노라." 축복기도를 해 주었어요. 이 말을 듣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서 먹고 다시는 얼굴에 수색이 없느니라." 굉장한 믿음이에요. 우리 애 난다―이거야 두고 봐야 알지. 열달을 지내봐야 알지. 또 낳아 가지고도 무사히 살려는지 두고 봐야 알지. 어떻게 이 말씀을 믿고 갑니까 먹지고 않고, 자지도 않고 슬퍼하던 여자가 이 한마디를 듣고 돌아가서 "평안한 마음으로 먹고 다시는 수색이 없었다" 그래요. 그러니까 어느 의사는 그러대요. 그 심리적 변화만 가지고도 아이를 가질 수 있었을 거라고. 뭐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어쨌든 이 믿음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에 고통이 있다가 믿고 갔어요. 평안한 것이에요. 결국은 사무엘을 낳게 되고 훌륭한 믿음의 어머니로 우리 성경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들어본 일도 없고 이런 경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믿고 나아갈 때에 창조 전 역사를 이루게 됐다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인격적 한계를 넘어서야 했습니다. 보세요. 오늘 이 장면을 자세히 들으세요. 헤롯왕의 신하입니다. 그는 귀족입니다. 이 귀족이 초라한 청년, 30세의 청년 앞에 와서 무릎을 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부탁 조로 얘기 했지만은 그건 신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내 집에 오셔서 내 아이를 좀 돌보아 주세요."하는 요청입니다. "즉시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부탁이 있는데 이제는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왕의 신하가 순종해야 될 시간입니다. "네 아들이 살았다." 끝. 자, 이 말을 듣고 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이 엄청난 시간이에요 지금. 여기서 한 마디 더 했다고 생각합시다. "낳고 죽고는 고사하고 좌우간 우리 집에 좀 갑시다." 이러고 대들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 왕의 신하로서 예수님의 명령 앞에 꼼짝 못하고 순종합니다. 자기의 처지, 자기의 경험, 자기의 신분 다 부정해 버리고, 다 비하 시키고 다 비우고 깨끗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시간이에요.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입니까. "가라." 갑니다. 믿고 갔어요. 성경에 보면 이 같은 얘기가 여러 곳에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에게 열두살 난 딸이 있는데 병들어 죽었습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가서 "오셔서 내 딸을 좀 돌아봐 주세요." 그러니까 그 땐 또 예수님이 가시겠다고 해요. 예수님과 같이 지금 일행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고 있는데 노상에서 야이로의 집에서 온 하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 하인의 말이 "딸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을 더 괴롭히지 마세요. 뭐 이미 죽었는데 가고 오고 할 것 없이 그만 시간이 지났습니다." 바로 이 시간에 참 중요한 기로에 섰습니다. 예수님을 한 의사로 본다면 여기서 끝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한다면 이제 시작입니다. 바로 이 순간 그가 당황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믿음을 주십니다. "믿기만 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야이로는 아무 말 없이 순종하고 따라 들어갑니다. 마침내 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 이 순간에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그러나 모든 지식, 경험 다 버리고 야이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이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기로에 설 때가 있습니다. 믿고 가야 하느냐, 아니면 믿지 못하고 여기서 계속 머물러서 원망과 불평을 해야 하느냐.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명한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할 때 홍해 광야 길로 나와서 홍해를 직면하게 됩니다. 뒤에서는 애굽군대가 따라오고 앞에는 홍해가 있습니다. 독 안에 든 쥐와 같이 꼼짝 못하고 60만은 지금 죽게 됐습니다. 그 때 하나님 앞에 호소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지팡이로 홍해를 치고 건너가라." 자 이 말을 듣고 이제부터는 전설의 얘기입니다. 전설대로 보면은 이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딱" 하고 쳤는데 안 갈라졌답니다. 그래서 모세가 당황하고 있을 때에 옆에 있던 청년이 말을 했습니다. 그를 아마 모름지기 여호수아라고들 전합니다. 이렇게 말했답니다. "방금 홍해를 치고 건너가라 하셨는데 왜 서 계시는 겁니까." 물 속에 뛰어 들었답니다. 그랬더니 쫙 갈라지더라고. 난 그것이 마음에 들어요. 지팡이로 딱 치니까 갈라졌다 그 다음에 들어갔다. 그것보다 치고 건너가라 할 때에 치고 물 속에 뛰어 드니까 갈라졌다 이거예요. 전설에 있는 얘기입니다만은 저는 그 쪽에 아주 매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감상이 아니에요. 이것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되는 것이에요. 믿고 건너 갈 때에 갈라지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네 고향을 떠나라. 만민의 아버지가 되게 하리라. 큰 민족을 이루리라."
그런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갑니다. 동으로 가라는 건지 서로 가라는 건지 몰라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익숙하고 평안한 고향을 떠나서 이방 땅으로 나섭니다. 나선 다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마."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믿음입니다. 믿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극복해야 될 것이 많아요.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다 잃어버렸습니다. 구구하게 말할 것 없이 다 잃어 버렸어요. 신용도 지식도 우리의 능력도… 지금 어느 누구 하나 뭐 말들은 많이 합니다만은 하나의 대책도 내세우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이제 가야합니다.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기적을 보았습니다. 기적을 보고 간 것이 아닙니다. 믿고 갈 때에 저 만큼에서 이적이 나타난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그가 확증을 얻고 기뻐하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 앞에 있는 약속을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믿고 가는 긍정적이고 적극적 행동이 있을 때에 이제 저 먼 앞에서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철야기도 하는 가운데에 좀 극성스러운 교인들은 뭐라고 기도를 했는고 하니 '하나님 이 나이트 클럽을 불태워 주십시오' 불을 질러 달라고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죄악으로부터 우리 마을을 건져 주십시오.' 했는데 얼마 후에 정말 벼락을 쳐서 나이트 클럽이 그만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이트 클럽 주인은 이 사실을 알고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 불 탄데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를 한 것은 사실이지마는 그 기도 때문에 나이트 클럽이 불탔다는 말은 말도 안 된다고 책임을 부정하게 됩니다. 재판장이 양쪽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재판을 하면서 하는 말씀을 좀 들어보세요. "누가 범죄를 했던지 간에 분명한 것은 나이트 클럽의 주인은 기도의 능력을 믿고 있는데 교회의 교인들은 믿지 않고 있으며 기도의 능력은 완전히 부정하고 있군요. 그 내가 보기에는 나이트 클럽 주인의 믿음이 더 훨씬 훌륭하다"고. 여러분 우리가 어떤 때 기도합니다. 기도의 응답과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아요. 기도하면서도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아요. 이게 얼마나 넌센스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한 왕의 신하의 그 믿음이 여기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특별한 뜻이 계셔서 이 헤롯왕의 신하되는 이 지체 높은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성장케 하시고 믿음을 훈련시키시고 믿음을 훌륭한 믿음으로 이렇게 완성시켜 가는 그 과정을 오늘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의 역사는 하나님 자신이 주도하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아시는 대로 이 왕의 신하가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 사람이 왕의 신하로서 이 30세 밖에 안된 갈릴리, 바로 같은 마을이거든요. 자기 동리인데 가버나움, 이 동리에 사는 이 청년 한 사람에게 가서 무릎을 꿇게 되지 않습니까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 아들이 병들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상대도 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병 들었고 백방으로 애 썼지만은 병이 낫지를 않아요. 그리고 이 아들이 죽어 갑니다. 정말로 다급했어요. 아주 급하게 되니까 이제 뭐 체면이고 지위고 할 것 없이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이 병들었다고 하는 이 사건은 매우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이 지체 높은, 교만한 헤롯왕의 신하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가서 무릎을 꿇게 됐다―거기까지 인도했습니다. 이 병들었다고 하는 사건이 이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적지만은 소문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헤롯왕의 신하가 소문을 들었어요.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도 고치고 열병환자도 고치고 장님의 눈도 뜨게 한다더라―하는 소문을 들었어요. 이 소문에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 소문을 듣고 '말도 안돼! 그럴 리가 없어. 뭐 갈릴리 청년 그 목수의 아들 예수, 내가 잘 아는데 없다. 뭐 그런 일없다. 아니다.' 그랬으면 이 일은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소문에 대한 믿음을 가졌어요.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정보에 대한 믿음, 전도에 대한 믿음, 증거에 대한 믿음을 가졌어요. 그리할 때에 이 사건 앞에서 이 같은 예수님 앞에 나오고자 하는 그런 결심과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 이제 보니까 다급해진 것 같아요. 거의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적으로 급하게 됐고, 인간의 방법이 다 끝났고 한계에 왔어요. 지금 시간을 다투어요. 이제 빨리 손쓰지 않으면 그냥 죽을 거예요. 이런 시간에 저는 조급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와서 간구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적어도 인간의 한계를 몇 가지 한계를 넘어서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고는 예수님 앞에 바로 설 수가 없었고, 예수님의 그 주신 능력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첫째가 감각적 한계를 극복해야 했습니다. 소문은 경험이 아닙니다. 소문은 내 경험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경험입니다. 내가 본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본 것입니다. 나는 못 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꼭 보아야 되고 내가 경험해야 된다고 고집을 했다면 이 사람은 끝까지 예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표적을 믿는 믿음, 그것은 내 자신의 경험 속에 없는 일이지마는 우리는 그 증거를 받고 그 사실을 사실대로 믿을 수 있는 감각적 한계를 넘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보아야 되고 내가 손으로 만져야 되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꼭 죽어봐야만 알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진리는 내가 죽기 전에 모르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해결할 수가 없겠지요. 그런고로 우리는 이 감각, 내가 받는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는, 넘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한가지는 공간적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지금 아들이 병들어 누워있지요. 아버지는 예수님께 찾아와서 "우리 집에 가십시다" 그래요. '빨리 가서 지금 죽어 가는데 그 여러 말 하시지 마시고 빨리 가서 이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십시오'하고 부탁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 공간적인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이 나았느니라." 이것 참 답답한 일입니다. 나았는지 안 나았는지 알 수가 없거든요. 자기 소원 같아서는 예수님이 같이 가서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이런 장면이 있었으면 딱 좋겠는데 예수님은 아주 단호하게 잘라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이 나았느니라.' 갈 필요 없다 그거예요. 이걸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요새 말로 remote control이요. 원격조정을 하는 겁니다. 이것을 믿어야 되는데요. 우리는 가만히 보면은 이걸 믿지 못해요. 내 손에 있어야 하고 바로 여기 있어야 하지 저기서 이루어지는 것을 믿지 못해요. 저 먼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내가 여기서 믿지 못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공간을 초월하는 그런 믿음을 가져야 했고요, 또한가지는 시간적 한계를 초월해야 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어쨌든 예수님께서 즉시 내려오셔서 자기를 도와주시기를 바랬는데 예수님은 즉시 가시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이 가지는 느긋한 시간이 있습니다. 여유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조급합니다. 아주 조급하고 답답한데, 초조한데 예수님은 아주 여유 있습니다. '네 아들이 나았느니라.'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에디슨이라고 하는 발명왕을 여러분이 아실 겁니다.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발명가인데 어느 날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얘가 유학을 떠난답니다. 그런고로 선생님께서 일생동안 마음에 두고 좌우명으로 기억할 한 마디 귀한 말씀을 좀 주십시오." 에디슨이 일하다 말고 가만히 갑자기 이 말을 듣고 생각하다가 시계를 쳐다보더니 그 때서야 시계를 쳐다보고 하는 말이 '시계를 보지 마라.' 한마디 했다고 합니다. 자꾸 시계 쳐다보는 거 좋은 거 아니에요. 여러분 설교 듣다가 시계 보는 거 그거 좋은 거 아니에요. 무엇인가 몰두하고 있는 동안 시계 쳐다보는 거 좋지 않아요. 여러분 누구하고 만나서 대화할 때 시계 보는 거 큰 실례입니다. 빨리 가세요, 그만 하라고 하는 얘기거든요. 여러분 우리가 시간을 여러 시간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는 Calendar time입니다. Calendar에서 보는 시간. Physiological Time입니다. 생리학적 시간.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시간이 있어요. 내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 엄청난 거리가 있는 것이에요. 나는 죽어 가는 사람이요, 나는 나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초조합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그러나 하나님께는 여유가 있습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습니다.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서 내가 가진 초조하고 답답한 시간 관념을 극복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더 큰 것을 더 영원한 것을 주시려고 해요. 내가 가지는 이 시간적인 잣대로 하나님을 비판해서는 안돼요. 그런고로 시간적 한계를 넘어서는 그 믿음이 필요합니다.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갈 때 빨리 가고 싶어서요, 그거 뭐 부지런히 걸어가면 아무리 늦어도 보름이면 갈 수 있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생각한 시간은 40년이에요. 자 두 주일이면 갈 수 있는 것을 40년을 걸려서 갔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시간이요. 도대체 우리는 너무나 초조해요. 모든 일에서 너무 조급하고 급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다가 실수를 많이 합니다. 급하게 부하려고 하다가 많을 것을 잃었습니다. 여러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 그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가 하면 경험적 한계를 또 넘어서야 됩니다. 내 경험에서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고정관념을 버려야 됩니다. 이 답답하고 협소한 이 생각이 이것이 다인 줄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 의견 내 경험이 그거 하잘 턱없는 거예요. 아시는 대로 옛날 어른들, 뭐 저를 비롯해서 다 그런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어쨌는데…" 그건 그 때 얘기지 지금 그렇게 고집 부린다고 되나요 그게. 밀어 부치면 된다는 건 그건 옛날 얘기지요. 이젠 잠꼬대 같은 소리하지 마세요. 다 지나갔어요 이제는. 그 때는 그 때요, 지금은 내 경험 내가 가진 경험 다 일단 잊어버려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요, '한나'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아이가 없어서 그것 때문에 모든 사람으로부터 수모를 받고 너무 억울하고 분하게 느껴서 하나님 앞에 아들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소박한 한 여인의 기도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몰두하고 기도했던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어요. 이것을 제사장이 보고 "이 젊은 사람이 대낮에 무슨 술을 마셨나" 하고 책망을 합니다. "아니올시다. 내 간절한 소원 때문에 이러는 겁니다." 제사장이 마음이 감동을 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네가 구한 것을 들어주시기를 원하노라." 축복기도를 해 주었어요. 이 말을 듣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서 먹고 다시는 얼굴에 수색이 없느니라." 굉장한 믿음이에요. 우리 애 난다―이거야 두고 봐야 알지. 열달을 지내봐야 알지. 또 낳아 가지고도 무사히 살려는지 두고 봐야 알지. 어떻게 이 말씀을 믿고 갑니까 먹지고 않고, 자지도 않고 슬퍼하던 여자가 이 한마디를 듣고 돌아가서 "평안한 마음으로 먹고 다시는 수색이 없었다" 그래요. 그러니까 어느 의사는 그러대요. 그 심리적 변화만 가지고도 아이를 가질 수 있었을 거라고. 뭐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어쨌든 이 믿음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에 고통이 있다가 믿고 갔어요. 평안한 것이에요. 결국은 사무엘을 낳게 되고 훌륭한 믿음의 어머니로 우리 성경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들어본 일도 없고 이런 경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믿고 나아갈 때에 창조 전 역사를 이루게 됐다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인격적 한계를 넘어서야 했습니다. 보세요. 오늘 이 장면을 자세히 들으세요. 헤롯왕의 신하입니다. 그는 귀족입니다. 이 귀족이 초라한 청년, 30세의 청년 앞에 와서 무릎을 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부탁 조로 얘기 했지만은 그건 신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내 집에 오셔서 내 아이를 좀 돌보아 주세요."하는 요청입니다. "즉시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부탁이 있는데 이제는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왕의 신하가 순종해야 될 시간입니다. "네 아들이 살았다." 끝. 자, 이 말을 듣고 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이 엄청난 시간이에요 지금. 여기서 한 마디 더 했다고 생각합시다. "낳고 죽고는 고사하고 좌우간 우리 집에 좀 갑시다." 이러고 대들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 왕의 신하로서 예수님의 명령 앞에 꼼짝 못하고 순종합니다. 자기의 처지, 자기의 경험, 자기의 신분 다 부정해 버리고, 다 비하 시키고 다 비우고 깨끗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시간이에요.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입니까. "가라." 갑니다. 믿고 갔어요. 성경에 보면 이 같은 얘기가 여러 곳에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에게 열두살 난 딸이 있는데 병들어 죽었습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가서 "오셔서 내 딸을 좀 돌아봐 주세요." 그러니까 그 땐 또 예수님이 가시겠다고 해요. 예수님과 같이 지금 일행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고 있는데 노상에서 야이로의 집에서 온 하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 하인의 말이 "딸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을 더 괴롭히지 마세요. 뭐 이미 죽었는데 가고 오고 할 것 없이 그만 시간이 지났습니다." 바로 이 시간에 참 중요한 기로에 섰습니다. 예수님을 한 의사로 본다면 여기서 끝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한다면 이제 시작입니다. 바로 이 순간 그가 당황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믿음을 주십니다. "믿기만 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야이로는 아무 말 없이 순종하고 따라 들어갑니다. 마침내 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 이 순간에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그러나 모든 지식, 경험 다 버리고 야이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이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기로에 설 때가 있습니다. 믿고 가야 하느냐, 아니면 믿지 못하고 여기서 계속 머물러서 원망과 불평을 해야 하느냐.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명한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할 때 홍해 광야 길로 나와서 홍해를 직면하게 됩니다. 뒤에서는 애굽군대가 따라오고 앞에는 홍해가 있습니다. 독 안에 든 쥐와 같이 꼼짝 못하고 60만은 지금 죽게 됐습니다. 그 때 하나님 앞에 호소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지팡이로 홍해를 치고 건너가라." 자 이 말을 듣고 이제부터는 전설의 얘기입니다. 전설대로 보면은 이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딱" 하고 쳤는데 안 갈라졌답니다. 그래서 모세가 당황하고 있을 때에 옆에 있던 청년이 말을 했습니다. 그를 아마 모름지기 여호수아라고들 전합니다. 이렇게 말했답니다. "방금 홍해를 치고 건너가라 하셨는데 왜 서 계시는 겁니까." 물 속에 뛰어 들었답니다. 그랬더니 쫙 갈라지더라고. 난 그것이 마음에 들어요. 지팡이로 딱 치니까 갈라졌다 그 다음에 들어갔다. 그것보다 치고 건너가라 할 때에 치고 물 속에 뛰어 드니까 갈라졌다 이거예요. 전설에 있는 얘기입니다만은 저는 그 쪽에 아주 매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감상이 아니에요. 이것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되는 것이에요. 믿고 건너 갈 때에 갈라지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네 고향을 떠나라. 만민의 아버지가 되게 하리라. 큰 민족을 이루리라."
그런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갑니다. 동으로 가라는 건지 서로 가라는 건지 몰라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익숙하고 평안한 고향을 떠나서 이방 땅으로 나섭니다. 나선 다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마."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믿음입니다. 믿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극복해야 될 것이 많아요.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다 잃어버렸습니다. 구구하게 말할 것 없이 다 잃어 버렸어요. 신용도 지식도 우리의 능력도… 지금 어느 누구 하나 뭐 말들은 많이 합니다만은 하나의 대책도 내세우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이제 가야합니다.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기적을 보았습니다. 기적을 보고 간 것이 아닙니다. 믿고 갈 때에 저 만큼에서 이적이 나타난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그가 확증을 얻고 기뻐하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 앞에 있는 약속을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믿고 가는 긍정적이고 적극적 행동이 있을 때에 이제 저 먼 앞에서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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