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의 먼지 나는 시골길 (마4:23-25)
본문
저는 종종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만약 자동차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서 마운트까지 넘어가는 데 한 15분가량 걸리는데, 만약 자동차가 없다면 아침을 든든히 먹고 열심히 걸어서 점심때쯤 도착해서 일을 보고 다시 돌아오면 해가 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에 매주 해밀턴을 다녀오는데, 여기서 해밀턴까지의 거리가 딱 100km입니다. 조금 서두르는 기분으로 운전을 해서 가면 1시간 30분이면 갑니다.
그런데 자동차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괴나리봇짐을 지고 열심히 걸어서 카이마이 산을 넘으면 아마 해가 지겠지요? 그러면 주막이나 또는 민가에 들러 하룻밤을 보내고 그 다음날 아침에 또 서둘러 길을 재촉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100km 행군을 하는데 보니까 50분 행군하고 10분 휴식하는 것으로 해서 딱 24시간이 걸리더군요. 그러니 군대의 행군이 아닌 여행길이라면 사흘이나 나흘이 걸려야 해밀턴에 도착하지 않겠어요? 올 때도 마찬가지로 그만한 날이 소요될 것이구요.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면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가르치셨다고 했는데, 만약 제가 그 예수님께 선물을 하나 해드릴 수 있다면 자동차를 한 대 사드리고 싶습니다. 갈릴리 지역이라고 해봐야 남북으로 약 80km, 동서로 약 45k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지역입니다. 그러나 자동차가 있는 우리에게는 작은 지역이겠지만 자동차가 없이 늘 걸어서 여행을 하셔야 했던 주님께는 갈릴리 지역만 해도 엄청나게 넓은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뙤약볕 아래 먼지 나는 길을 걸어서 이 동네 저 동네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을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다리도 많이 아프셨을 것이고, 배는 고픈데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았던 적도 많았을 것입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잠자리는 얼마나 편했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능력을 뒀다 뭐에 쓰시려고 하시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손가락 하나 까닥하시면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며 복종을 할 텐데,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그냥 내버려두시니까 끔찍한 범죄도 일어나고 잔인한 전쟁과 학살도 일어나잖아요? 또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재해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능력을 조금만 행하시면 우리가 사람들에게 예수 믿어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수고하면서 전도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엊그제 터키의 쿠르드족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선교사님을 만났는데, 무슨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거기 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더군요. 전도를 하면 즉시 추방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조금만 신경써주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터인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시는군요.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질 때도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야 하는지, 하나님은 왜 그냥 침묵하고 계시는지 이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충성스럽게 살아보려고 애를 썼는데, 축복은커녕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혼란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오셔서 기적을 일으켜주시지 않는 걸까요? 과연 하나님은 그 많은 능력을 아꼈다가 어디에 쓰시려는 걸까요?
갈릴리의 척박한 땅을 고향으로 삼으시고 그 땅을 두루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던 예수님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분은 왜 하필 자동차도 없는 그 시대에 오셔서 그렇게 고생을 하셨을까요? 땀과 먼지를 뒤집어쓴 피곤한 육신을 그대로 땅에 눕히고 잠을 청하셨을 그 주님, 능력이 없어서 그러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도 언급되고 있습니다만, 예수께서는 각종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분은 의과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으셨고 침술을 배우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은 사람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고 명하실 때 바람이 멈추고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그분은 배가 없이도 물 위를 걸어서 호수를 건너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한 시간에 4km를 걸으며 발이 부르트도록 여행을 하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왜 그렇게 고생을 사서 하셨을까요? 그것은 고생하는 우리와 똑같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슬퍼하는 것처럼 그분도 슬픔을 겪으셨고,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이 그분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앞에서 우리의 고난이 부당하다고 따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느냐고 항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처럼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카운셀링을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는데, 사람들이 고통과 문제를 가지고 카운슬러에게 찾아옵니다. 여기서 그 카운셀러의 역할은 그 사람들의 고통과 문제를 해결하고 없애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카운셀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어요. 카운셀러가 하는 일은 그 고통과 문제에 짓눌려 못살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그 문제를 안고 살 수 있도록 강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알 수 없는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가 신음하며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당장 오셔서 그 고통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벗겨주시는 것보다 우리가 그 고통을 감당하고 살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 고난에 짓눌려 압사당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더 강하게 훈련되고 더 아름답게 다듬어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았던 욥은 그의 고통 가운데서 말하기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했던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고난이 찾아올 때, 갈릴리의 뙤약볕 길을 걸으셨던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큰 위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 고난에 짓눌려 살지 않고 그 고난을 이겨내고 더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셨기에, 그분 스스로 그 고난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를 응원하셨던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나도 개종자 하나 얻지 못할 만큼 힘겨운 선교사역을 해야 하는 선교사들을 위로하고 응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스스로 샌들을 신고 먼지 나는 갈릴리 땅을 걸어 이 동네 저 동네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특별한 단어 세 개가 나오는데, 가르치셨고, 전파하셨고,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예수님의 사역의 내용입니다. 가르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교훈이지요. 복음서는 예수님의 교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바로 다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교훈의 핵심이라고 할 만하지요.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교훈하신 것이 가르치심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전파하셨다고 했는데, 천국 복음을 믿도록 선포하시고 전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천국 복음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매우 정치적인 용어입니다. 마치 왕이 정복한 땅에 입성하면서 ‘이제 이 성은 내가 접수한다.’ 하고 외치는 것과도 같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 대신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하나님나라라고 하지 않고 하늘나라(천국)라고 표현했다고 했지요? 말하자면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의 도래가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포하시는 예수는 그 나라의 왕이십니다. 마태복음의 테마는 왕이신 예수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사역은 고치시는 것입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했는데, 24절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이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수많은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치유를 받았을 것입니다만, 마태는 대표적으로 불치병이나 난치병이 언급하고 있겠지요. 육체적인 질병과 정신적인 질병을 모두 포함해서 인간이 고통을 겪게 되는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주님은 그렇게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수많은 병자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아름답게 지으신 인간, 창조의 절정인 인간이 그렇게 파괴되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무척 마음이 아프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고통 중에 신음할 때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지 상상이 되십니까? 그 주님의 자비하심이 여러분에게 큰 위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보통 그것을 영적인 부분이라고 분리해서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구원은 영적인 구원이 따로 있고 육적인 부분은 해당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육신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썩을 육신이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육신을 입게 될 때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에 가장 악영향을 끼친 것이 영지주의적 이원론인데,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는 거예요.
이 예수님의 세 가지 사역은 사도와 교회를 통해서 계승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은 바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알아야 할 것들을 올바로 가르치며, 또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으로 병자들을 고치신 그 사역은 다양한 영역에서 세상을 섬기는 것으로 시행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주께서 행하셨던 사역이 오늘 우리 교회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시행될 때 그곳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 부르심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구요. 오늘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사역과 삶을 구현하고 있습니까? 비록 우리가 연약하지만, 갈릴리 그 시골길을 걸으시던 예수님이 오늘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와 함께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그 주님을 힘입어 복음의 놀라운 소문을 멀리까지 퍼뜨릴 수 있는 우리 교회, 또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자동차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괴나리봇짐을 지고 열심히 걸어서 카이마이 산을 넘으면 아마 해가 지겠지요? 그러면 주막이나 또는 민가에 들러 하룻밤을 보내고 그 다음날 아침에 또 서둘러 길을 재촉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100km 행군을 하는데 보니까 50분 행군하고 10분 휴식하는 것으로 해서 딱 24시간이 걸리더군요. 그러니 군대의 행군이 아닌 여행길이라면 사흘이나 나흘이 걸려야 해밀턴에 도착하지 않겠어요? 올 때도 마찬가지로 그만한 날이 소요될 것이구요.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면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가르치셨다고 했는데, 만약 제가 그 예수님께 선물을 하나 해드릴 수 있다면 자동차를 한 대 사드리고 싶습니다. 갈릴리 지역이라고 해봐야 남북으로 약 80km, 동서로 약 45k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지역입니다. 그러나 자동차가 있는 우리에게는 작은 지역이겠지만 자동차가 없이 늘 걸어서 여행을 하셔야 했던 주님께는 갈릴리 지역만 해도 엄청나게 넓은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뙤약볕 아래 먼지 나는 길을 걸어서 이 동네 저 동네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을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다리도 많이 아프셨을 것이고, 배는 고픈데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았던 적도 많았을 것입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잠자리는 얼마나 편했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능력을 뒀다 뭐에 쓰시려고 하시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손가락 하나 까닥하시면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며 복종을 할 텐데,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그냥 내버려두시니까 끔찍한 범죄도 일어나고 잔인한 전쟁과 학살도 일어나잖아요? 또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재해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능력을 조금만 행하시면 우리가 사람들에게 예수 믿어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수고하면서 전도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엊그제 터키의 쿠르드족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선교사님을 만났는데, 무슨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거기 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더군요. 전도를 하면 즉시 추방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조금만 신경써주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터인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시는군요.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질 때도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야 하는지, 하나님은 왜 그냥 침묵하고 계시는지 이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충성스럽게 살아보려고 애를 썼는데, 축복은커녕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혼란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오셔서 기적을 일으켜주시지 않는 걸까요? 과연 하나님은 그 많은 능력을 아꼈다가 어디에 쓰시려는 걸까요?
갈릴리의 척박한 땅을 고향으로 삼으시고 그 땅을 두루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던 예수님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분은 왜 하필 자동차도 없는 그 시대에 오셔서 그렇게 고생을 하셨을까요? 땀과 먼지를 뒤집어쓴 피곤한 육신을 그대로 땅에 눕히고 잠을 청하셨을 그 주님, 능력이 없어서 그러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도 언급되고 있습니다만, 예수께서는 각종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분은 의과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으셨고 침술을 배우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은 사람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고 명하실 때 바람이 멈추고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그분은 배가 없이도 물 위를 걸어서 호수를 건너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한 시간에 4km를 걸으며 발이 부르트도록 여행을 하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왜 그렇게 고생을 사서 하셨을까요? 그것은 고생하는 우리와 똑같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슬퍼하는 것처럼 그분도 슬픔을 겪으셨고,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이 그분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앞에서 우리의 고난이 부당하다고 따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느냐고 항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처럼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카운셀링을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는데, 사람들이 고통과 문제를 가지고 카운슬러에게 찾아옵니다. 여기서 그 카운셀러의 역할은 그 사람들의 고통과 문제를 해결하고 없애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카운셀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어요. 카운셀러가 하는 일은 그 고통과 문제에 짓눌려 못살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그 문제를 안고 살 수 있도록 강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알 수 없는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가 신음하며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당장 오셔서 그 고통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벗겨주시는 것보다 우리가 그 고통을 감당하고 살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 고난에 짓눌려 압사당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더 강하게 훈련되고 더 아름답게 다듬어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았던 욥은 그의 고통 가운데서 말하기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했던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고난이 찾아올 때, 갈릴리의 뙤약볕 길을 걸으셨던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큰 위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 고난에 짓눌려 살지 않고 그 고난을 이겨내고 더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셨기에, 그분 스스로 그 고난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를 응원하셨던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나도 개종자 하나 얻지 못할 만큼 힘겨운 선교사역을 해야 하는 선교사들을 위로하고 응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스스로 샌들을 신고 먼지 나는 갈릴리 땅을 걸어 이 동네 저 동네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특별한 단어 세 개가 나오는데, 가르치셨고, 전파하셨고,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예수님의 사역의 내용입니다. 가르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교훈이지요. 복음서는 예수님의 교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바로 다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교훈의 핵심이라고 할 만하지요.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교훈하신 것이 가르치심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전파하셨다고 했는데, 천국 복음을 믿도록 선포하시고 전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천국 복음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매우 정치적인 용어입니다. 마치 왕이 정복한 땅에 입성하면서 ‘이제 이 성은 내가 접수한다.’ 하고 외치는 것과도 같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 대신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하나님나라라고 하지 않고 하늘나라(천국)라고 표현했다고 했지요? 말하자면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의 도래가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포하시는 예수는 그 나라의 왕이십니다. 마태복음의 테마는 왕이신 예수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사역은 고치시는 것입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했는데, 24절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이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수많은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치유를 받았을 것입니다만, 마태는 대표적으로 불치병이나 난치병이 언급하고 있겠지요. 육체적인 질병과 정신적인 질병을 모두 포함해서 인간이 고통을 겪게 되는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주님은 그렇게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수많은 병자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아름답게 지으신 인간, 창조의 절정인 인간이 그렇게 파괴되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무척 마음이 아프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고통 중에 신음할 때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지 상상이 되십니까? 그 주님의 자비하심이 여러분에게 큰 위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보통 그것을 영적인 부분이라고 분리해서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구원은 영적인 구원이 따로 있고 육적인 부분은 해당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육신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썩을 육신이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육신을 입게 될 때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에 가장 악영향을 끼친 것이 영지주의적 이원론인데,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는 거예요.
이 예수님의 세 가지 사역은 사도와 교회를 통해서 계승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은 바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알아야 할 것들을 올바로 가르치며, 또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으로 병자들을 고치신 그 사역은 다양한 영역에서 세상을 섬기는 것으로 시행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주께서 행하셨던 사역이 오늘 우리 교회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시행될 때 그곳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 부르심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구요. 오늘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사역과 삶을 구현하고 있습니까? 비록 우리가 연약하지만, 갈릴리 그 시골길을 걸으시던 예수님이 오늘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와 함께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그 주님을 힘입어 복음의 놀라운 소문을 멀리까지 퍼뜨릴 수 있는 우리 교회, 또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