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 (마7:7-11)
본문
Knocking on heaven's door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가 상당히 감명 깊게 본 영화 중 하나입니다. 물론 내용이야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지만, 그 제목이 주목할 만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천국 문을 노크하는 상상을 해보신 적이 있으세요? 누가 언제 천국 문을 노크하게 될까요? 옛날 사람들은 성도의 삶을 마치 그림처럼 표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는 것도 머나먼 여행처럼 묘사됩니다. 여러 가지 고난과 시험을 지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믿음을 지키다가 마침내 천국에 도착하게 되지요. 그러면 그 천국 문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 심사를 해서 들여보내겠지요? 옛날 사람들은 베드로를 천국의 문지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천국까지 갔는데 문지기인 베드로가 화장실에 가느라 자리를 비웠다면 천국의 커다란 대문을 쾅쾅 두드려야 하는 걸까요? 그게 천국 문을 노크하는 모습입니까?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천국 문을 두드린다고 한다면 천국에 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 구도자의 모습, 뭐 이런 것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마 11:12)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물론 노력하고 애쓴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천국을 향한 순례길을 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노력하고 애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탱자탱자 놀면서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자동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늘 우리가 살펴볼 예수님의 말씀은 기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것을 문을 두드리는 것에 비유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기도를 천국 문을 노크하는 모습으로 그려보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도 주님은 이미 여러 차례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본격적으로 우리가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기도는 구하는 것입니다. 구한다는 것은 요청한다, 부탁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걸인이 구걸을 하듯이 간절하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짱을 부리거나 아니면 말지 하는 식의 태도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종종 기도하는 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거 안 들어주시면 하나님 손해니까 알아서 하세요. 그렇게 말하는 분들의 속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썩 그렇게 듣기 좋은 말도 아닙니다. 함부로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본질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손해나는 게 어디 있어요? 아쉬운 것은 우리지요. 거지가 구걸하면서 ‘안 주면 당신이 착한 일 못한 게 되니까 당신 손해요’ 이러면서 구걸하나요? ‘당신이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나는 죽습니다’ 하는 심정으로 땅에 바짝 엎드린 자세로 요청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기도하는 기본적인 자세는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또 늘 강조하는 것이지만, 기도는 내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부분을 강조하다 보면 우리의 기도가 또 이상하게 되는 수가 있어요. ‘하나님, 주시려면 주시고, 안 주시려면 마십시오.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도움이 그렇게 절박한 것 같지가 않군요. 거지가 구걸하면서 ‘주려면 주고 말려면 마시오. 안 주면 죽고 말지 뭐’ 이런 식으로 하나요? 자꾸 거지의 구걸하는 행위에 비유해서 죄송합니다만, 기도하는 기본적인 자세는 바로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공급하심이 아니면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로서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하면서 배짱을 부린다거나 아니면 만다는 식으로 나온다면 이것은 우리 자신의 분수를 망각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세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전능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과 삶의 근원이 되시며,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번이 뭔가요?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라.”
그런데 또 주님은 기도를 찾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냅다 구하기만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열심히 찾는 것이 기도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수고를 의미합니다. 어렸을 때 소풍가면 반드시 하는 놀이가 보물찾기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가지고는 보물을 찾을 수 없습니다. 여기 저기 보물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녀야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보물을 내가 수고해서 찾았으니까 내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선생님이 거기다 숨겨두신 것을 내가 찾았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셨는데 그걸 찾지 못하고 백날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우리의 숨겨진 재능을 찾아 쓰는 것,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식구들 먹여살리는 것,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찾아내고 발견해서 앞서나가고 성공하는 것,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을 찾아 쓰는 일 아닌가요? 우리의 기도에서 구하는 것과 찾는 것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야곱은 형 에서가 대대 병력의 군대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간이 녹아내렸습니다. 영락없이 죽는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가족과 재산을 절반으로 나누어 배치합니다. 한쪽이 공격을 당하면 한쪽이라도 도망가서 살도록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준비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모두 강을 건너보내고 혼자 남아 밤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처절하고 급박했는지 죽기 살기로 겨루는 천사와의 씨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에서 구하기만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를 행하지 않는 무책임한 반쪽짜리 기도입니다. 찾기만 하고 구하기를 빼먹는다면 자칫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망각하고 자신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그래서 기도의 본질과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로 주님은 기도를 문 두드리는 것에 비유하십니다. 구한다, 찾는다, 문을 두드린다, 모두 간절히 염원하는 자세라는 면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여러 모양으로 설명하심으로써 기도의 다양한 기능이나 측면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문을 두드리는 그림의 쉬운 예를 든다면 결혼식을 기다리던 처녀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도착하고 문이 닫혀버린 후에 밖에서 문 열어달라고 문을 두드리는 모습입니다. 밖은 춥고 어두운 곳입니다. 반면에 집 안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고 결혼식 잔치가 열리고 있습니다. 너무 대조적인 안과 밖의 모습입니다. 그 처녀들이 두려움과 또 결혼식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에 얼마나 정신없이 문을 두드렸을까요?
미안하지만 그 처녀들에게는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딴 얘기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문을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문이 꽉 닫혀버린 때가 많습니다. 길이 꽉 막혀서 갈 곳이 없습니다. 오직 절망과 두려움만이 어두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서 있습니다. 바로 그런 꽉 닫혀버린 문 앞에서 우리는 열어달라고 두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두 번 두드리다 말아야겠어요? 문을 열어주려고 나오다가도 두드리는 소리가 그친 것을 보고 다시 들어가버릴지 모르겠습니다. 열릴 때까지 죽기로 두드려야 열리든지 무슨 끝장이 나지요.
여기서 주님 말씀의 포인트는 뭔가 하면 우리의 기도는 응답된다는 사실입니다. 구하는 이는 얻을 것이고 찾는 이는 찾을 것이고 두드리는 이에게 문이 열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는 들으시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의 기도를 못들은 척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늘의 아버지는 선하시고 거룩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아끼시며 돌보시는 분입니다. 그런 아버지께서 우리가 간절히 구하고 열심히 찾아다니고 문이 깨지도록 절박하게 두드릴 때 그냥 내버려두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들이 햄버거 달라고 하는데 돌맹이를 갖다주면서 햄버거 대신 먹으라고 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딸내미가 피쉬앤칩스 사달라는데 징그러운 뱀을 갖다주면서 그거나 잡아먹으라고 하는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는 겁니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식은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심지어는 동물도 본능적으로 새끼들을 위해서 희생합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의 부르짖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헛되이 공중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의를 끌고 하나님의 대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명한 부흥사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은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거야 우리가 그만큼 쓸데없는 기도, 의미없는 기도를 한다는 것이지, 간절히 구하고 열심히 찾고 열릴 때까지 문을 두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중요하지 않게 취급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기도는 일방적인 통보나 선언이 아니라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곤고합니까? 왜 이처럼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을까요? 왜 하는 일마나 꼬이고 되는 일이 없습니까? 왜 늘 불안하고 걱정과 근심 속에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주지 않으신다고 불평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신다고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구해라, 그러면 주겠다. 찾아라, 그러면 찾게 해 주겠다.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열어주겠다.
그런데도 귀찮아서, 게을러서, 또는 믿어지지가 않아서 기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불행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기도는 하늘의 창고를 여는 열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 외에 무엇으로 하늘의 문을 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이 행동하시도록 할 수 있겠어요? 기도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요, 하나님의 응답과 공급하심을 얻을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 문을 여는 열쇠, 간절하고 신실한 기도로 하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고 그 응답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천국까지 갔는데 문지기인 베드로가 화장실에 가느라 자리를 비웠다면 천국의 커다란 대문을 쾅쾅 두드려야 하는 걸까요? 그게 천국 문을 노크하는 모습입니까?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천국 문을 두드린다고 한다면 천국에 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 구도자의 모습, 뭐 이런 것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마 11:12)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물론 노력하고 애쓴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천국을 향한 순례길을 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노력하고 애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탱자탱자 놀면서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자동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늘 우리가 살펴볼 예수님의 말씀은 기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것을 문을 두드리는 것에 비유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기도를 천국 문을 노크하는 모습으로 그려보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도 주님은 이미 여러 차례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본격적으로 우리가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기도는 구하는 것입니다. 구한다는 것은 요청한다, 부탁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걸인이 구걸을 하듯이 간절하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짱을 부리거나 아니면 말지 하는 식의 태도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종종 기도하는 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거 안 들어주시면 하나님 손해니까 알아서 하세요. 그렇게 말하는 분들의 속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썩 그렇게 듣기 좋은 말도 아닙니다. 함부로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본질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손해나는 게 어디 있어요? 아쉬운 것은 우리지요. 거지가 구걸하면서 ‘안 주면 당신이 착한 일 못한 게 되니까 당신 손해요’ 이러면서 구걸하나요? ‘당신이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나는 죽습니다’ 하는 심정으로 땅에 바짝 엎드린 자세로 요청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기도하는 기본적인 자세는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또 늘 강조하는 것이지만, 기도는 내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부분을 강조하다 보면 우리의 기도가 또 이상하게 되는 수가 있어요. ‘하나님, 주시려면 주시고, 안 주시려면 마십시오.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도움이 그렇게 절박한 것 같지가 않군요. 거지가 구걸하면서 ‘주려면 주고 말려면 마시오. 안 주면 죽고 말지 뭐’ 이런 식으로 하나요? 자꾸 거지의 구걸하는 행위에 비유해서 죄송합니다만, 기도하는 기본적인 자세는 바로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공급하심이 아니면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로서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하면서 배짱을 부린다거나 아니면 만다는 식으로 나온다면 이것은 우리 자신의 분수를 망각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세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전능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과 삶의 근원이 되시며,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번이 뭔가요?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라.”
그런데 또 주님은 기도를 찾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냅다 구하기만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열심히 찾는 것이 기도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수고를 의미합니다. 어렸을 때 소풍가면 반드시 하는 놀이가 보물찾기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가지고는 보물을 찾을 수 없습니다. 여기 저기 보물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녀야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보물을 내가 수고해서 찾았으니까 내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선생님이 거기다 숨겨두신 것을 내가 찾았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셨는데 그걸 찾지 못하고 백날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우리의 숨겨진 재능을 찾아 쓰는 것,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식구들 먹여살리는 것,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찾아내고 발견해서 앞서나가고 성공하는 것,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을 찾아 쓰는 일 아닌가요? 우리의 기도에서 구하는 것과 찾는 것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야곱은 형 에서가 대대 병력의 군대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간이 녹아내렸습니다. 영락없이 죽는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가족과 재산을 절반으로 나누어 배치합니다. 한쪽이 공격을 당하면 한쪽이라도 도망가서 살도록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준비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모두 강을 건너보내고 혼자 남아 밤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처절하고 급박했는지 죽기 살기로 겨루는 천사와의 씨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에서 구하기만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를 행하지 않는 무책임한 반쪽짜리 기도입니다. 찾기만 하고 구하기를 빼먹는다면 자칫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망각하고 자신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그래서 기도의 본질과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로 주님은 기도를 문 두드리는 것에 비유하십니다. 구한다, 찾는다, 문을 두드린다, 모두 간절히 염원하는 자세라는 면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여러 모양으로 설명하심으로써 기도의 다양한 기능이나 측면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문을 두드리는 그림의 쉬운 예를 든다면 결혼식을 기다리던 처녀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도착하고 문이 닫혀버린 후에 밖에서 문 열어달라고 문을 두드리는 모습입니다. 밖은 춥고 어두운 곳입니다. 반면에 집 안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고 결혼식 잔치가 열리고 있습니다. 너무 대조적인 안과 밖의 모습입니다. 그 처녀들이 두려움과 또 결혼식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에 얼마나 정신없이 문을 두드렸을까요?
미안하지만 그 처녀들에게는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딴 얘기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문을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문이 꽉 닫혀버린 때가 많습니다. 길이 꽉 막혀서 갈 곳이 없습니다. 오직 절망과 두려움만이 어두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서 있습니다. 바로 그런 꽉 닫혀버린 문 앞에서 우리는 열어달라고 두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두 번 두드리다 말아야겠어요? 문을 열어주려고 나오다가도 두드리는 소리가 그친 것을 보고 다시 들어가버릴지 모르겠습니다. 열릴 때까지 죽기로 두드려야 열리든지 무슨 끝장이 나지요.
여기서 주님 말씀의 포인트는 뭔가 하면 우리의 기도는 응답된다는 사실입니다. 구하는 이는 얻을 것이고 찾는 이는 찾을 것이고 두드리는 이에게 문이 열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는 들으시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의 기도를 못들은 척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늘의 아버지는 선하시고 거룩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아끼시며 돌보시는 분입니다. 그런 아버지께서 우리가 간절히 구하고 열심히 찾아다니고 문이 깨지도록 절박하게 두드릴 때 그냥 내버려두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들이 햄버거 달라고 하는데 돌맹이를 갖다주면서 햄버거 대신 먹으라고 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딸내미가 피쉬앤칩스 사달라는데 징그러운 뱀을 갖다주면서 그거나 잡아먹으라고 하는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는 겁니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식은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심지어는 동물도 본능적으로 새끼들을 위해서 희생합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의 부르짖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헛되이 공중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의를 끌고 하나님의 대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명한 부흥사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은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거야 우리가 그만큼 쓸데없는 기도, 의미없는 기도를 한다는 것이지, 간절히 구하고 열심히 찾고 열릴 때까지 문을 두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중요하지 않게 취급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기도는 일방적인 통보나 선언이 아니라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곤고합니까? 왜 이처럼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을까요? 왜 하는 일마나 꼬이고 되는 일이 없습니까? 왜 늘 불안하고 걱정과 근심 속에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주지 않으신다고 불평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신다고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구해라, 그러면 주겠다. 찾아라, 그러면 찾게 해 주겠다.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열어주겠다.
그런데도 귀찮아서, 게을러서, 또는 믿어지지가 않아서 기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불행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기도는 하늘의 창고를 여는 열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 외에 무엇으로 하늘의 문을 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이 행동하시도록 할 수 있겠어요? 기도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요, 하나님의 응답과 공급하심을 얻을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 문을 여는 열쇠, 간절하고 신실한 기도로 하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고 그 응답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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