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가정을 교회처럼
본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행복한 가정의 모습입니다.
사랑스런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는 부부와 그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자녀들의 모습은 그 누구나 동경하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대체로 건강한 가정입니다.
가정은 무엇으로 가득차 있느냐에 따라서 건강한 가정이 될 수도 있고 병든 가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정이 건강하면 교회가 건강해 지고, 사회도 건강하고 나라도 건강해집니다.
그런데 가정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때때로 병이 납니다.
그럴 때 사회도 불안하게 되며 국가도 흔들려 위태롭게 됩니다.
가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요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상의 선물입니다.
또한 이 사회의 가정 기본적인 질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이 가지고 있는 본래 의미가 점차로 변질되어가고 있는 느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장차 우리 사회에서 가정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예측해 보면 낙관적이 아니라 비관적인 쪽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사이 신문지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가정파탄”, “이혼급증, 세계 2위 48%”, “결손가정”, “인신매매”, “가정 파괴범”.. 한마디로 귀를 막고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우리를 괴롭게 만듭니다.
점점 붕괴되어 가는 가정들, 이것은 마치 침몰직전의 난파선을 보는 것처럼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1970년도에 출판된 엘빈 토를러의 “미래의 충격”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11장 제목을 보면 가슴에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파괴될 가족”이라는 무서운 타이틀입니다.
미래사회는 초산업시대가 되어서 생명공학이나 생식생물학이 발달한다고 합니다.
이미 우리가 매스컴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인간 복제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 사회에는 지금 우리가 죄악시하는 시리즈 결혼이나 실험결혼 등이 성행한다고 합니다.
요즘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결혼도 유행하고 있습니다.
또 일부에서는 독신주의가 팽창하는 반면에 일부다처제까지 등장하고 동성연애가 공공연히 법적으로 공인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토플러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문명은 인간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과학문명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인격을 무시하는 기계화 시대, 로버트 시대가 되면 가정도 파괴됩니다.
이와 같은 심각한 미래를 앞두고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정을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지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우리 후대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살아남는 길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각 가정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는 영적인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하는 우리 자신을 막을 길이 없고 붕괴되어 가는 가정을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요즘 가정문제가 너무 심각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문을 두드려 봅니다.
가정이 평안하고 행복할 수 있다면 교회 다니는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정의 어떠함이 교회의 어떠함을 결정짓는다고 할 때 가정의 위기 상황은 교회의 위기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살아야 교회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교회처럼, 교회를 가정처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골로새서 본문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얼른 와서 닿는 내용은 아닙니다.
여기에 보면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울을 통해서 라오디게아 지역에서도 교회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신자가 한두 명 생기고 하니까 그들이 모여서 예배드릴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누구 집을 예배장소로 할까 의논 중에 부담 없이 모일 수 있고, 마음놓고 찬송하고 기도할 수 있고, 서로 교제할 수 있는 장소로 눔바라는 여인의 집을 만장일치로 결정을 했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눔바의 집은 다른 가정에 비해서 좀 독특한 면이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인들 가운데는 성도들이 자기 집에 오는 것을 강경하게 사양하는 분이 계십니다.
아마 특별한 사정이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우리 집은 언제나 열려있어요, 언제라도 좋아요,
우리 같이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해요!”라고 하며 기쁘게 자기의 가정을 개방하는 교우가 훨씬 마음에 끌리는 법입니다.
이런 교인과는 마주 앉으면 서로 부담 없이 마음을 터놓고 무엇이나 얘기하고 싶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눔바의 가정은 라오디게아에 있는 다른 가정에 비해서 훨씬 더 신앙적이고 모범이 될 만한 가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 하나를 떠올리게 됩니다.
만약 이 시간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물으신다고 가정해 봅시다.
“눔바의 가정에는 교회가 있었다. 지금 너희 가정에도 교회가 있느냐”하고 주님이 물어 보신다면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예”라고 대답할 수 있나요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만약에 우리 가운데 “눔바와 같이 우리 가정에도 교회가 있어요”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분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귀한 은혜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성도들은 무엇인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지금 이 시간을 계기로 우리의 가정에, 또 우리의 신앙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정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또 가정을 바탕으로 할 때 신앙생활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너희 집에 교회가 있느냐 라고 묻는 말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지금 가정에 교회가 없는 신자라고 한다면 그의 신앙생활은 불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그런 사람은 자기의 신앙생활 자체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고통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가정교회가 든든하게 서 있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왜 우리들의 가정이 성숙하지 아니합니까
가정에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의 가정이 말못할 고민을 안고 신음하고 있나요
가정에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의 가족들이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힘을 잃고 비틀거리고 있나요
가정에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은 모두다 가정에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눔바 그 여인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처럼 누구 누구 성도, 그분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불리워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은 가정에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 교회가 있으면 무엇보다도 두 가지 면에서 특별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그 가정의 절대권위로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요, 그분은 교회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 교회가 있으면 그 가정의 머리는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가정에 가장 존귀한 분이요,
제일 먼저 경배를 받으실 분이요, 권위 중의 권위가 되시는 것입니다.
모든 가족이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을 때 그 가정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알다시피 오늘날 현대가정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 안에 절대권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권위의 부재현상, 이것은 현대가정이 붕괴되는 가정 큰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어떤 권위로 군림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입니다.
권위를 상실한 가정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가정교회입니다.
성도들이 가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가정 안에 그런 교회가 세워지지 못하도록 갖가지 방해공작을 해서 깨뜨리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마귀의 계략을 알고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일까요
불행하게도 많은 가정들이 이와 같은 마귀의 음흉함을 모르고 사정없이 농락을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자로 모시고 사는 가정은 그 분위기가 세상 사람들의 가정과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런 가정의 가장은 자기의 권위를 가지고 가족들을 다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를 위하는 좋은 가장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가정의 머리되신 예수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권위자로 모시고 사는 가정의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을 잘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아내의 위치가 어떠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덕을 가지고 남편을 섬기고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권위자로 모시고 사는 가정의 자녀들 또한 부모를 잘 공경합니다.
단지 자기 부모니까 할 수 없어서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가려쳐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서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가정을 한번 돌아봅시다.
이와 같은 절대권위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권위자로 인정받고 있습니까
어떤 가정에는 아내가 오히려 이와 같은 절대권위의 자리에 군림을 하여 남편으로 하여금 자기 구실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가정이 내적으로 얼마나 고통 하겠습니까
뭇 남성들이여! 무너져 가는 가정의 헤드십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남자의 머리됨은 성경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 남자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이름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물론 남자와 여자에게는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지만 역할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중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남자를 머리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바로 이 헤드십을 끓임 없이 공격해 왔습니다.
실제로 남성들이 가지는 권위의 끝없는 추락이 가정파괴의 한 단면이 되고 있습니다.
옛날 아버지들은 아이들 아침잠을 깨우는 목소리에 그나마 힘이 실려 있었습니다.
“야, 일어나, 어니 빨리 일어나라니까 뭘해, 빨리 일어나. ”
그러나 요새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럽니다.
“야, 너희 엄마가 일어나란다. ”
“안, 일어나면 혼난다. 너 엄마한테 일러준다. ”
여기에 결혼하신 여성분들이여! 다들 결혼식 할 때 면사포 썼죠.
결혼식 때 신부들이 면사포를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제 내게는 머리가 없습니다. 오직 남편만이 나의 머리입니다. ” 하는 고백의 상징적 표현이 바로 면사포를 쓰는 이유입니다.
남편들에게 한 번 물어 보겠습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뜰거린다는 말이 있는데 왜 꿈틀거리나요
“살아보려고” “아프니까”
누구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밟으니까
그러나 대답은 이것입니다.
“안 죽어서 그렇습니다. ”
여자들이 남편에게 왜 앙탈을 부르는지 아세요 안 죽어서 그럽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밟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남자들을 가리켜 무식한 사람이라 그럽니다.
요즘 여자들이 힘이 드센데, 밟힐 여자가 어디 있나.
요즘 여자들이 얼마나 잘 먹는데, 남편들은 공장에게 가서 땀흘리며 일하는 데 식당에 가보세요. 식당마다 점심시간에 여자들이 터져 나갑니다.
여자들은 밟아야 사람된다라고 하는 무식한 남자들은 이것이 헤드십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참된 헤드십은 여자들 위에 군림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헤드십이 의미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란 뜻입니다.
영적 권위를 상징합니다.
남자들은 가정에서 영적 제사장이 되십시오.
남자가 가정의 머리가 되기 위해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돌보셨던 것처럼 가정을 돌보아야 합니다.
마치 목회자가 교회를 돌보거나 목동이 양을 돌보는 것처럼 가정은 가정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남자를 가장으로 세우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둘째로 아내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사단은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신 아담의 헤드십을 무시한 채 아담을 상대하지 않고 하와를 상대했습니다.
따라서 사단의 가정 파괴가 아담의 헤드십에 대한 도전에서 시작된 점을 유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하와가 걸려 넘어진 것은 남편을 앞지른 것입니다.
즉 가장 사랑스러워야 할 아내가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은 무서운 경고입니다.
그는 그 순간 돕는 배필이 아닌 방해하는 배필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내는 남편을 앞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에게 조언을 구하고 그의 의견을 먼저 구하는 부인이야말로 현명한 여인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순종함으로 남편에게 명령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실제로 아내가 가정의 머리가 되려고 하면 문제가 많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아내가 남편을 머리로 세워주고 자신은 그 머리를 지탱하고 움직이는 목이 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됩니다.
목을 한번 좌우로 돌려보세요.
자신이 목이 되기만 하면 머리는 아내를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가정의 절대권위자로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을 가정의 헤드십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날 왜 가정의 파괴되고 깨어집니까
왜 비극적인 일들이 가정 안에 일어납니까
예수님을 절대권위로 모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정의 주인이 되시고 그 가정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경배를 받으시면 자연히 가정의 분위기는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 주님이 주시는 기막힌 행복이 찾아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 줄 압니까
어떤 이론적인 설명보다도 이런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 닿을 것입니다.
어떤 가정이 경제적인 압박 속에서 퍽 진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생활에 몹시 쪼들리다 보면 마음의 여유도 없어지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누구나 마찬가지로 생활에 위협을 받으면 단란하던 가정에 검은 구름이 덮이기 마련입니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터를 찾아 뛰어다녔지만 처자식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줄만한 일은 하루종일 생기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내는 남편이 무엇인가 기쁜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돌아오기를 기대하면서 정성껏 식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을 열자 거기에는 어깨가 축 늘어진 채 초췌한 모습의 남편이 서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식사를 끝내기를 기다렸다가 가만히 남편 곁에 다가가 앉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여보, 힘을 내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지켜주실 거예요.
우리 같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찬송해요!”라고 말한 뒤 나직하게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니
슬픔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아내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찬송을 불렀지만 남편은 말없이 고개만 푹숙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여보, 초막이나 궁궐이나 예수님 모신 곳이 천국이라고 하잖아요. 우리 같이 기도해요!”라고 말한 뒤 남편의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우리 가정에 좋은 아빠와 자녀 주심을 감사합니다.
지금은 매우 어렵지만 우리 가족에게 이 어려움을 헤쳐나갈 힘 주실 것을 믿습니다.
특별히 아빠에게 힘과 용기와 능력을 주시옵소서”
아내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자 드디어 그 남편이 마음에 환한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마음에 무엇인가 뭉클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었나 봅니다.
“그래, 여보, 우리 한번 잘 해 보자 구.
당신 말처럼 우리 가정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다면 잘 될거야!” 하고 남편이 모처럼 활짝 웃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정에 행복의 조건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 예화가 우리에게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예수 믿는 성도들이 누리는 행복은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가정에 교회가 있으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가정에 머리되신 주님이 남모르게 주시는 그 기쁨, 그 즐거움을 아시나요!
그 행복을 아시는 분들은 그 축복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의 가정은 지금 이런 복을 누리고 있나요
다시 한번 자신에게 반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 가정에 과연 교회가 있는가”
가정이 살아야 교회가 삽니다.
가정을 교회처럼, 교회를 가정처럼 만듭시다.
사랑스런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는 부부와 그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자녀들의 모습은 그 누구나 동경하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대체로 건강한 가정입니다.
가정은 무엇으로 가득차 있느냐에 따라서 건강한 가정이 될 수도 있고 병든 가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정이 건강하면 교회가 건강해 지고, 사회도 건강하고 나라도 건강해집니다.
그런데 가정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때때로 병이 납니다.
그럴 때 사회도 불안하게 되며 국가도 흔들려 위태롭게 됩니다.
가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요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상의 선물입니다.
또한 이 사회의 가정 기본적인 질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이 가지고 있는 본래 의미가 점차로 변질되어가고 있는 느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장차 우리 사회에서 가정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예측해 보면 낙관적이 아니라 비관적인 쪽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사이 신문지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가정파탄”, “이혼급증, 세계 2위 48%”, “결손가정”, “인신매매”, “가정 파괴범”.. 한마디로 귀를 막고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우리를 괴롭게 만듭니다.
점점 붕괴되어 가는 가정들, 이것은 마치 침몰직전의 난파선을 보는 것처럼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1970년도에 출판된 엘빈 토를러의 “미래의 충격”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11장 제목을 보면 가슴에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파괴될 가족”이라는 무서운 타이틀입니다.
미래사회는 초산업시대가 되어서 생명공학이나 생식생물학이 발달한다고 합니다.
이미 우리가 매스컴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인간 복제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 사회에는 지금 우리가 죄악시하는 시리즈 결혼이나 실험결혼 등이 성행한다고 합니다.
요즘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결혼도 유행하고 있습니다.
또 일부에서는 독신주의가 팽창하는 반면에 일부다처제까지 등장하고 동성연애가 공공연히 법적으로 공인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토플러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문명은 인간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과학문명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인격을 무시하는 기계화 시대, 로버트 시대가 되면 가정도 파괴됩니다.
이와 같은 심각한 미래를 앞두고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정을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지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우리 후대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살아남는 길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각 가정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는 영적인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하는 우리 자신을 막을 길이 없고 붕괴되어 가는 가정을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요즘 가정문제가 너무 심각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문을 두드려 봅니다.
가정이 평안하고 행복할 수 있다면 교회 다니는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정의 어떠함이 교회의 어떠함을 결정짓는다고 할 때 가정의 위기 상황은 교회의 위기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살아야 교회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교회처럼, 교회를 가정처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골로새서 본문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얼른 와서 닿는 내용은 아닙니다.
여기에 보면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울을 통해서 라오디게아 지역에서도 교회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신자가 한두 명 생기고 하니까 그들이 모여서 예배드릴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누구 집을 예배장소로 할까 의논 중에 부담 없이 모일 수 있고, 마음놓고 찬송하고 기도할 수 있고, 서로 교제할 수 있는 장소로 눔바라는 여인의 집을 만장일치로 결정을 했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눔바의 집은 다른 가정에 비해서 좀 독특한 면이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인들 가운데는 성도들이 자기 집에 오는 것을 강경하게 사양하는 분이 계십니다.
아마 특별한 사정이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우리 집은 언제나 열려있어요, 언제라도 좋아요,
우리 같이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해요!”라고 하며 기쁘게 자기의 가정을 개방하는 교우가 훨씬 마음에 끌리는 법입니다.
이런 교인과는 마주 앉으면 서로 부담 없이 마음을 터놓고 무엇이나 얘기하고 싶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눔바의 가정은 라오디게아에 있는 다른 가정에 비해서 훨씬 더 신앙적이고 모범이 될 만한 가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 하나를 떠올리게 됩니다.
만약 이 시간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물으신다고 가정해 봅시다.
“눔바의 가정에는 교회가 있었다. 지금 너희 가정에도 교회가 있느냐”하고 주님이 물어 보신다면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예”라고 대답할 수 있나요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만약에 우리 가운데 “눔바와 같이 우리 가정에도 교회가 있어요”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분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귀한 은혜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성도들은 무엇인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지금 이 시간을 계기로 우리의 가정에, 또 우리의 신앙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정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또 가정을 바탕으로 할 때 신앙생활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너희 집에 교회가 있느냐 라고 묻는 말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지금 가정에 교회가 없는 신자라고 한다면 그의 신앙생활은 불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그런 사람은 자기의 신앙생활 자체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고통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가정교회가 든든하게 서 있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왜 우리들의 가정이 성숙하지 아니합니까
가정에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의 가정이 말못할 고민을 안고 신음하고 있나요
가정에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의 가족들이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힘을 잃고 비틀거리고 있나요
가정에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은 모두다 가정에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눔바 그 여인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처럼 누구 누구 성도, 그분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불리워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은 가정에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 교회가 있으면 무엇보다도 두 가지 면에서 특별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그 가정의 절대권위로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요, 그분은 교회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 교회가 있으면 그 가정의 머리는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가정에 가장 존귀한 분이요,
제일 먼저 경배를 받으실 분이요, 권위 중의 권위가 되시는 것입니다.
모든 가족이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을 때 그 가정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알다시피 오늘날 현대가정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 안에 절대권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권위의 부재현상, 이것은 현대가정이 붕괴되는 가정 큰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어떤 권위로 군림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입니다.
권위를 상실한 가정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가정교회입니다.
성도들이 가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가정 안에 그런 교회가 세워지지 못하도록 갖가지 방해공작을 해서 깨뜨리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마귀의 계략을 알고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일까요
불행하게도 많은 가정들이 이와 같은 마귀의 음흉함을 모르고 사정없이 농락을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자로 모시고 사는 가정은 그 분위기가 세상 사람들의 가정과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런 가정의 가장은 자기의 권위를 가지고 가족들을 다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를 위하는 좋은 가장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가정의 머리되신 예수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권위자로 모시고 사는 가정의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을 잘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아내의 위치가 어떠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덕을 가지고 남편을 섬기고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권위자로 모시고 사는 가정의 자녀들 또한 부모를 잘 공경합니다.
단지 자기 부모니까 할 수 없어서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가려쳐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서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가정을 한번 돌아봅시다.
이와 같은 절대권위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권위자로 인정받고 있습니까
어떤 가정에는 아내가 오히려 이와 같은 절대권위의 자리에 군림을 하여 남편으로 하여금 자기 구실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가정이 내적으로 얼마나 고통 하겠습니까
뭇 남성들이여! 무너져 가는 가정의 헤드십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남자의 머리됨은 성경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 남자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이름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물론 남자와 여자에게는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지만 역할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중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남자를 머리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바로 이 헤드십을 끓임 없이 공격해 왔습니다.
실제로 남성들이 가지는 권위의 끝없는 추락이 가정파괴의 한 단면이 되고 있습니다.
옛날 아버지들은 아이들 아침잠을 깨우는 목소리에 그나마 힘이 실려 있었습니다.
“야, 일어나, 어니 빨리 일어나라니까 뭘해, 빨리 일어나. ”
그러나 요새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럽니다.
“야, 너희 엄마가 일어나란다. ”
“안, 일어나면 혼난다. 너 엄마한테 일러준다. ”
여기에 결혼하신 여성분들이여! 다들 결혼식 할 때 면사포 썼죠.
결혼식 때 신부들이 면사포를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제 내게는 머리가 없습니다. 오직 남편만이 나의 머리입니다. ” 하는 고백의 상징적 표현이 바로 면사포를 쓰는 이유입니다.
남편들에게 한 번 물어 보겠습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뜰거린다는 말이 있는데 왜 꿈틀거리나요
“살아보려고” “아프니까”
누구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밟으니까
그러나 대답은 이것입니다.
“안 죽어서 그렇습니다. ”
여자들이 남편에게 왜 앙탈을 부르는지 아세요 안 죽어서 그럽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밟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남자들을 가리켜 무식한 사람이라 그럽니다.
요즘 여자들이 힘이 드센데, 밟힐 여자가 어디 있나.
요즘 여자들이 얼마나 잘 먹는데, 남편들은 공장에게 가서 땀흘리며 일하는 데 식당에 가보세요. 식당마다 점심시간에 여자들이 터져 나갑니다.
여자들은 밟아야 사람된다라고 하는 무식한 남자들은 이것이 헤드십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참된 헤드십은 여자들 위에 군림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헤드십이 의미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란 뜻입니다.
영적 권위를 상징합니다.
남자들은 가정에서 영적 제사장이 되십시오.
남자가 가정의 머리가 되기 위해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돌보셨던 것처럼 가정을 돌보아야 합니다.
마치 목회자가 교회를 돌보거나 목동이 양을 돌보는 것처럼 가정은 가정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남자를 가장으로 세우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둘째로 아내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사단은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신 아담의 헤드십을 무시한 채 아담을 상대하지 않고 하와를 상대했습니다.
따라서 사단의 가정 파괴가 아담의 헤드십에 대한 도전에서 시작된 점을 유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하와가 걸려 넘어진 것은 남편을 앞지른 것입니다.
즉 가장 사랑스러워야 할 아내가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은 무서운 경고입니다.
그는 그 순간 돕는 배필이 아닌 방해하는 배필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내는 남편을 앞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에게 조언을 구하고 그의 의견을 먼저 구하는 부인이야말로 현명한 여인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순종함으로 남편에게 명령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실제로 아내가 가정의 머리가 되려고 하면 문제가 많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아내가 남편을 머리로 세워주고 자신은 그 머리를 지탱하고 움직이는 목이 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됩니다.
목을 한번 좌우로 돌려보세요.
자신이 목이 되기만 하면 머리는 아내를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가정의 절대권위자로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을 가정의 헤드십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날 왜 가정의 파괴되고 깨어집니까
왜 비극적인 일들이 가정 안에 일어납니까
예수님을 절대권위로 모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정의 주인이 되시고 그 가정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경배를 받으시면 자연히 가정의 분위기는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 주님이 주시는 기막힌 행복이 찾아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 줄 압니까
어떤 이론적인 설명보다도 이런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 닿을 것입니다.
어떤 가정이 경제적인 압박 속에서 퍽 진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생활에 몹시 쪼들리다 보면 마음의 여유도 없어지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누구나 마찬가지로 생활에 위협을 받으면 단란하던 가정에 검은 구름이 덮이기 마련입니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터를 찾아 뛰어다녔지만 처자식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줄만한 일은 하루종일 생기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내는 남편이 무엇인가 기쁜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돌아오기를 기대하면서 정성껏 식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을 열자 거기에는 어깨가 축 늘어진 채 초췌한 모습의 남편이 서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식사를 끝내기를 기다렸다가 가만히 남편 곁에 다가가 앉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여보, 힘을 내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지켜주실 거예요.
우리 같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찬송해요!”라고 말한 뒤 나직하게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니
슬픔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아내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찬송을 불렀지만 남편은 말없이 고개만 푹숙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여보, 초막이나 궁궐이나 예수님 모신 곳이 천국이라고 하잖아요. 우리 같이 기도해요!”라고 말한 뒤 남편의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우리 가정에 좋은 아빠와 자녀 주심을 감사합니다.
지금은 매우 어렵지만 우리 가족에게 이 어려움을 헤쳐나갈 힘 주실 것을 믿습니다.
특별히 아빠에게 힘과 용기와 능력을 주시옵소서”
아내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자 드디어 그 남편이 마음에 환한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마음에 무엇인가 뭉클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었나 봅니다.
“그래, 여보, 우리 한번 잘 해 보자 구.
당신 말처럼 우리 가정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다면 잘 될거야!” 하고 남편이 모처럼 활짝 웃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정에 행복의 조건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 예화가 우리에게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예수 믿는 성도들이 누리는 행복은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가정에 교회가 있으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가정에 머리되신 주님이 남모르게 주시는 그 기쁨, 그 즐거움을 아시나요!
그 행복을 아시는 분들은 그 축복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의 가정은 지금 이런 복을 누리고 있나요
다시 한번 자신에게 반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 가정에 과연 교회가 있는가”
가정이 살아야 교회가 삽니다.
가정을 교회처럼, 교회를 가정처럼 만듭시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