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 태풍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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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판 고개숙인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절벽산책(슈나이더 지음김정우 옮김)은 실직당한 중년의 뼈시린 고통,가족부양을 못하는 가장의 아픔,사회에 대한 분노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논픽션이다.4명의 자녀를 둔 41세의 영문학 교수가 해고된 뒤 1년4개월동안 1백11개대학에 지원서를 냈지만 모조리 거절당한다.교수직을 포기하고 골프장 청소원,시간당 15달러를 받는 목수 등을 전전하다가 페인트공으로 취직한다.필자는 실직생활은 생사를 건 외줄타기처럼 아슬아슬한 절벽산책에 비유하고있다.실직 중년남성의 또 다른 얘기를 다룬 美 스릴러 소설 도끼(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는 산업자동화로 제지회사에서 밀려난 버크가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를 차례로 살해한다는 섬뜩한 내용이다.'사장이 그랬던 것처럼나도 전혀 죄의식이 없다'는 주인공의 독백은 실직이 얼마나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지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한반도에 失業 태풍경보가 발효되면서 일자리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부장급 이상을 대상으로 일괄사표를 받은 회사가 있는가 하면 감원 대신임직원 임금을 삭감하겠다는 그룹도 있다.IMF 한파에 금융권의 빅뱅(대개혁) 돌풍까지 겹쳐 직장인들은 목을 잔뜩 움츠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다.경제성장률이 1% 떨어질 때마다 10만명의 실업자가 더 생기는 통계를 감안하면 IMF의 요구에 따라 무려 3%가 떨어지는 내년에만 30만명의 실업자가 추가로 발생한다.여기에 고용 구조조정이 겹쳐 실업자는 더욱 늘어난다.더구나 산업구조가 노동집약적 형태에서 기술집약적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는 상황에서 실업증가와 고용불안은 심화될 것이다.재경원은 내년 실업자수를 83만명으로 예측하고 있지만,민간 경제연구소의분석은 1백만명으로 추정한다.잠재실업자를 포함하면 2백만명에 육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이래저래 거리로 내몰려 절벽산책을 해야 할 고개숙인 아버지들이 늘어날 판이다.감원공포가 샐러리맨들을 옥죄는 가운데 월급쟁이를 선택한 것이 애당초잘못이었다는 자탄이 나오고,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조직생리에 분통을 터트리기도 한다.언제 감원통보 시한폭탄이 자신에게 떨어질지 몰라 좌불안석이다.직장 분위기도 살풍경해졌다.살길을 찾아 떠나려는 철새파가 있는가하면 눈치보며 악착같이 버티려는 낙지파도 있고,물밑에서 부업을 찾는문어파가 있다는 신조어가 나돈다.큰 아들은 입대시키고 어린 자식은시골 할머니집으로 보내며 아내는 처가로 보낸다는 시사만화의 가족 구조조정이 실감난다.실업사태는 심각한데 대책은 겉돌고 있다.정부가 내놓은 고용안정대책은지극히 원론적이어서 실효를 거둘지 의문이고 실업대책자금 1조2천억원의예산확보조차 불투명한 상태다.3당 대선후보들이 제시한 고용·노동분야 공약도 비현실적인 요소가 많아 기대하기 어렵다.고용창출 등 장기적 대책은장밋빛이고 노동시장 유연성 등 단기대책은 부실하다.재벌기업들은 돈 끌어다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다 경영에 실패했는데도 책임지는 총수는 없이 근로기준법 폐지나 정리해고제의 즉각시행을 요구하고 있다.먼저 경영자측이 고통분담에 솔선해야 한다.근로자들이 평생직장으로 알고 회사와 운명을 함께해온 인정이나 도리로 보나,대량 실업이 몰고올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서라도 근로자를 거리로 내모는 결정엔 눈물이 있어야 한다.창업 1백년만에 파산한 일본 야마이치 증권의 노자와 사장이 TV앞에서고개를 숙인 채 '모두 내 책임입니다.우리 사원들이 재취업할 수 있도록도와주십시오'하며 눈물로 호소하던 모습은 시사하는 바 크다.기업들은 자구노력 없이 가장 손쉬운 감원부터 단행해서는 안된다.근로시간과 조업을 단축하고 임금을 동결하거나 깎더라도 감원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발등의 불만 끄려들지 말고 장기적 경영전략 차원에서 잉여인력 감축에 신중해야 한다.재교육·창업교육을 실시해 전직을 유도하는 것도 바람직하다.勞使政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고용안정 대책기구를 서둘러 결성하여 실업태풍의 피해를 줄이는데 모두 힘을 모아야 한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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