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 나나미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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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계에 시오노 나나미 열풍이 거세다. 감칠맛 나는 얄팍한 글과 가벼운 읽기가 주류를 이루는 와중에서 자칫 딱딱하기 쉬운 그의 역사, 인문서적이 고정 독자층을 확보했다.이탈리아에 사는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2권이 지난해 가을 한국에 처음 소개됐을 때만 해도 이 낯선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은 몇몇 독서광들 뿐이었다. 그러나 올들어 "바다의 도시 이야기"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등 그의 작품들이속속 출간되면서 시오노의 독특한 작품 세계와 명쾌한 역사 해석,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문장에 매료된 독자들이 늘고 있다. 베스트셀러가 드문 인문 교양 서적 분야에서 15만권 이상이 나가 읽히는 작가로 자리잡았다.이런 독서시장의 돌풍을 반영하듯 "서양역사를 헤집는 동양여인"시오노가 20일 서울에 왔다. 그의 책을 독점 출간하고 있는 도서출판한길사의 초청으로 방한한 시오노는 24일까지 4박 5일동안 역자 및국내 연구가들과의 모임, 독자와의 만남, 서울국제 도서전 참관 및사인회 등을 갖는다. 한길사는 또 7월 20일부터는 독자들과 함께 시오노의 작품 배경이 되는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로마 등 이탈리아주요지역 문화예술기행을 실시키로 하는 등 '시오노 열기'를 고조시킬 계획이다. 지금까지 번역 소개된 그의 저서는 "로마인 이야기"1∼4권(김석희 옮김)과 에세이집 "남자들에게"(이현진 옮김) "바다의도시 이야기"(정도영 옮김)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 어록" 등 모두 8종 9 권.시오노 나나미의 책은 특히 정치 전쟁 군사문화 등 남성적 주체를 놀라울 정도로 흥미롭게 다룬다. 글속에는 도전과 기개 그리고 세련됨과 신중함이 섞여있다. 독자도 대부분 남성이다.로마제국의 흥망사를 다룬 로마인 이야기는 1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를 비롯, "한니발 전쟁" "승자의 혼미"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 시리즈를 통해 고대로마와 르네상스 등 한국인에게는 조금 낯선 역사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준다.2006년까지 매년 한 권씩 나올 로마인 이야기는 각 작품이 긴밀한연관관계를 갖지만 연대기적 서술방식을 피하고 철저한 현장자료와고증을 바탕으로 소설처럼 풀어쓴 것이어서 시오노의 독특한 글쓰기의 마력과 독자의 호흡까지 예리하게 파악하는 천부적 화술이 돋보인다. "바다의 도시 이야기"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건국에서 몰락까지1,000년 역사가 던지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현대 비즈니스맨이 이책을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모든 노력을다한 뒤 결과를 기다리는 베네치아식 사고는 현대를 살아가는 하나의교훈이다. 이 베네치아 역사와 대조적으로 르네상스의 황혼기를 그리고 있는 것이 바로 피렌체 역사를 엿볼 수 있는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이다.1937년 도쿄에서 태어나 일본 가쿠슈인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63년 '좌파의 꿈'에 대한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건너간 시오노에게 마키아벨리는 그녀에게 또 다른 현실적 대안으로 사상적 대전환을 가져왔다. 변화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역사와 상황에 따라 자기를 변화시키고 그것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마키아 벨리의 역사 인식을 재조명하면서 그의 어록까지 직접 발췌해 두 권의 책으로냈다. 그녀의 책들은 세련된 맛으로 서양 역사의 대중화에 성공했다.사료중심, 교과서 중심의 역사가 아니라 '읽을 거리'를 통해 위대한오락으로서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로마는 하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로마는 하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Rome was not built in aday)라는 말은 "큰 사업은 일조일석에 이룰 수 없다"라고 할 때 사용하는 유명한 속담인데 이것은 스페인의 작가 세르반테스(SaavedraMiguel de Cervantes,1547∼1616)가 저 유명한 풍자소설 "돈키호테"(Don Quijote, 1605∼1615)에서 쓴 말이다.로마는 테베레강 연안의 한 조그만한 도시국가로부터 출발하여 광대한 지중해 연안국가들을 지배하는 대 제국이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오랜 역사가 지났는 바 그것은 많은 노력의 결정이었다.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 to Rome. 방법은 달라도 도달한 지점 <결론>은 마찬가지다)는 말은 프랑스의 시인 라 폰테느(Jean de La Fontaine, 1621∼95)의 "우화시"(제12권)에서 나온 격언이다. 로마는 그의 군사적, 경제적인 의도로부터, 수도 로마를 기점으로 훌륭한 군사도로를 그의 광대한 지배지역의 말단까지 부설했다. 그후 유럽각지에서는 이 도로를 보수, 유지하여 근세에 이르기까지 국도로서 사용해 왔다. 그러므로 유럽에서는 문자 그대로 "모든길은 로마로 통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문화적인 의미도 있다. 독일의 사학가 란케(Leopold von Ranke, 1795∼1886)의 유명한 말에 "일체의 고대사는 말하자면, 하나의 호수에 흘러드는 물줄기들로 되었다. 모든 역사는 로마 역사에 흘러들었고, 근세사의 전체는 로마사속에서 다시 흘러 나온다"는 것이었다.이 말은 문화사에도 적용되는 바, 고대문화는 일단 로마에 집중되고 그로부터 서유럽으로 확산되었다. 때문에 유럽문화의 거의 대부분의 원류는 로마에서 출발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로마의 평화기원 9년, 로마군의 정예부대 3개군단이 오늘날의 서부독일지역인토이토부르크(Teutoburg) 숲에서,아르미뉴스(Hermann Arminius, B.C.18<16>∼A.D. 19<21>)가 이끄는 게르만인에 의해 3일간의 격전 끝에 전멸되었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 아우구스투스(옥타비우스)는 적극적으로 로마제국의 영토 팽창정책의 추진을 중지하고, 이미 확보한지역의 유지책을 취했다. 이리하여 오래 계속된 내란과 전쟁은 그치고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시에 "평화의 제단"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그후도 로마제국의 영토는 확장되어, 트라야누스 황제(Marcus UlpiusCrinitus Trajanus, 52∼117, 98∼117 재위) 치세 때는 최대 판도가되었다. 이 때부터가 로마제국의 최성기로서 평화적인 통치가 계속되었다. 이것을 "로마의 평화"라고 한다.로마는 세번 세계를 통일시켰다.이 말은 독일의 법학자 예링(Rudolf von Jhering, 1818∼92)이 그의 저서 "로마법의 정신"(Geist des r mischen Rechts auf denverschiedenen Stufen seiner Entwicklung, 4권, 1852∼65)의 서두에 쓴 것이다.즉, 로마는 처음에는 무력으로, 두번째는 기독교로, 그리고 세번째는 로마법으로 세계를 통일시켰다고 갈파한 것이다. 로마인은 문화적으로는 그리스인의 아류였다고 그때까지 일컬어져 왔지만, 실용적인면에서는 재능이 뛰어나 도로, 수도 등 대토목 공사를 남겼으며 또로마법을 만든 것이다. 이 로마법은 유럽각국의 법제의 모범이 되었으며, 현대 법률도 모두 이것의 흐름을 받아들였는데 예링이 한 말은이런 것을 뜻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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