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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의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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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5월에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한 이명직은 1909년5월에 강태온.김두엽이 세운 동양선교회 개성교회로 부임하여 전도사로 시무하였다.또한 1914년 4월 22일 조선 성결 교회 최초로 김상준. 이장하. 강태온. 이명헌과 함께제1회 목사 안수를 받고 박제원의 뒤를 이어 규암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916년까지 시무하였다.그는 점점 모든 사람에게 기대받는 전도유망한 목사로 컸으나 성령의 역사가 떠났다. 그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인기있는 목사가 되는 것에 만족하여10년 가까이 중생의체험을 잊고 살았다.그러다가 1920년 겨울 동양선교회 감독 킬보른과 자기 동료목사들에게 지나간 자기의 허물과 실수를 고백하고 영적인 구도행각에 들어갔다.그리고 1921년 가을 어느날 자신의 성결을위하여 골방문을 걸어 잠그고 '성결의확신'이 있기까지 기도하였다. 문을 잠그고 기도한 지 3일째되는 저녁에 주의 음성이 임하고, 그의 거룩하심을체험하는 순간적인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이러한 이명직 목사의 성결체험은 그의 주변을 변화시키고 신학교및 성결교회의 부흥운도으로 확산되어1921년 성격교회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명직 목사 한사람의 성결체험은 그대로 성결교회의 신앙 정체를 형성하여 나갔고, 성결교회의 교리정치와 조직에 있어서도 그는 초창기 성결교회 신학형성의 교부(교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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