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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머리 남편과 실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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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불황이나 종전 등으로 실업률이 높아지면 으레 여성들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쪽으로 사회분위기가 바뀐다.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남자들도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판에 정체성 확립이니 사회적 자기실현이니 하는 '호사스런' 이유의 여성취업자들 부터 먼저 정리해고해야 한다는 여론도 적지 않다.얼마 전까지 대중적 관심을 한몸에 모았던 페미니즘이란 단어가 들어가야 장사가 잘 된다던 문화계마저도 감히 여성주의란 말을 입에 담지 못할 정도이다. 대신 고객숙인 남자, 방황하는 아버지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유도하자는 분위기가 주도적이다.일견 이런 변화는 침몰해가는 배에서 누가 남아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하는 일처럼 고실업 상황의 고육지책처럼 보인다.그러나 문제는 과연 취업여성들이 그렇게 한가한 이유로 가사와 일을 병행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통계에 이미 나와 있다시피 일부 전문 관리직을 빼고는 여성들은 대부분 단순 노무직 등에 종사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쪽은 남편이 죽거나 살아있다 하더라도 병을 앓거나 무능한 경우, 또 이혼이나 사별 뒤 가족을 혼자 먹여살려야 하는 가정이다.이런 상황에서 주부의 실업은 생존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막다른 길이다. 주부가장은 취업중에도 여러 질곡을 겪고 산다.우선은 무능한 남편, 헤어진 남편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들이다. 잔업을 하느라 귀가가 좀 늦으면 몇푼이나 벌어온다고 이제 기어들어오느냐는 식의 욕설은 약과이다. 때로는 미리 버릇을 들여야 한다며 돈 버는 아내를 신체적으로 학대하는 남편들도 있다. 따라서 이런 주부가 직장마저 잃게 되면 그야말로 가정의 파탄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는 경우도 많다.거머리처럼 붙어 아내를 부려먹으면서도 큰소리를 치는 남편과 시댁 식구들 때문에 이중고를 겪어야 하는 여성들은 오랫동안 희생자 노릇에 길들여져 있는 까닭에 자신의 인생을 능동적으로 바꿔보려는 생각을 갖지 못한다. 자기아니면 모두 굶어 죽을 판인데 한몸 희생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돈 잘 벌어오는 남편 만나 치장, 외식, 자식 과외 닥달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으면서도 인생이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상류층 여성과는 극을 달리는 고민이 아닐 수 없다.특히 저소득층 여성들이 큰 고통을 겪는 고실업 상황에서 한국의 페미니즘 진영도 기존의 서구 지향적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새로운 방향 모색이 필요하리라. 사실 대다수의 저학력, 저임금 여성들은 페미니즘이란 "배운 여자들이 허영에 겨워 서양 흉내내며 천한 일 멀리하는 젊은 것의 이기심"이라고 보지 않았던가.페미니즘의 진짜 적은 남성 그 자체가 아니라 남녀를 함께 차별하는 문화구조이며 이런 불평등 상태를 공고히하는 원흉은 전통보다는 차라리 세계를 하나로 묶는 다국적 거대자본이라는 사실에 대한 각성이 새 페미니즘의 화두가 될 듯도 싶다. 저개발 국가의 극빈 여성에게 더욱 강한 연대감과 동질감을 느끼는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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