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결핍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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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세종로 복판 교보문고 외서 책가게 앞에서 친구 하나 만나기로 약속하고 서 있었던 적이 있다. 20대로 보이는 젊은 어머니가 네댓 살 먹어 보이는 사내 아이와 계집 아이 손을 잡고 지나 가다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서 있는 장식용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 아이들을 세워 놓고 사진을 찍고 싶었던 것 같다. 핸드백에서 카메라를 꺼내더니 날더러 찍어 달라는 것이었다.거리를 조절하며 초점을 잡고 있는데 이 어머니 부탁이, 웃겨서 찍어 달라고 한다. 스마일, 치이즈...해도 알아듣질 못하고 히히, 해해 광대짓을 해도 웃질 않는다. 고양이 소리 쥐 소리를 내어 겨우 웃겨놓은 것이 웃는 상이 아니라 찡그린 상이었고, 마냥 그러하고만 있을 수 없어 셔터를 눌러 버렸다. 못마땅했던지 그 젊은 어머니는 `웃지 않았는데...' 하며 카메라를 빼앗듯 돌려 받더니아이들 뒤쫓아 가버린다.나의 노역은 조금도 감사 받지 못하고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애들 아비가 곰처럼 무뚝뚝하겠거니 생각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새끼 사슴처럼 발랄한 여학생 하나가 뛰어 오더니 메었던 가방을 내앞에 벗어 던지면서 `아저씨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한다. 가방 좀 지켜 달라는 것같다.귀밑머리 희끗희끗한 것을 보고 안심했던 것 같다. 색깔 바랜 인생을 한숨 쉬고 있는데, 돌아온 그 아가씨는 벗어진 신발이라도 줍듯 제가방 주워 메고는 뒤돌아 보지도 않고 총총 뛰어가 버린다. 이 역시 나의 가방지기 노역은 조금도 감사 받지 못하고 만 것이다.한 장소에 연속적으로 일어난 이 감사 증발이 우연의 일치이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나, 요즈음 젊은 사람들 대체로 감사할 줄 모르는 것 같다. 거스름을 받지 않고 택시 요금을 주었을 때 감사하다고 말하는 운전 기사를 별반 본 일이 없다.택시 스톱에서 바삐 구는 아가씨에게 차례를 양보했을 때 감사 받기도 힘든 일이다. 단골집에 물건 사러 갔을때, 또 오십시오...하는 이기적 인사는 들어도 감사하다는 말듣기는 어렵다. 아이들에게 과자 나부랭이를 사 주었을 때 신난다고는 외치지만 감사하다고 답례하는 아이가 몇 이나 되겠는가.말끝마다 감사가 뒤따르는 기독교 문화권과 비겨 감사 결핍증은 너무 혹심하다.유태교의 성전에도 `혓바닥(舌)에게 감사합니다는 말을 버릇들이기 전에 아무 말도 하지말라'는 가르침이 있다. 감사 한다는 것은 신에게 감사하건, 사람에게 감사하건 물건에 감사하건 그것을 소중히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과보호의 `응석'속에 유아독존이요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온 탓인지 요구만 할 줄 알고 감사할 줄 모르는 이 한국인의 감사 결핍증은 국제화 시대에 소외 받을 한국병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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