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기 유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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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기는 참으로 쓸모가 많은 물건이다. 덩치가 작아서 놓이는 장소를 가리지 않는 복사기는 사무실과 학교에 차려진 작은 인쇄공장이다.복사기가 가져오는 편리함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모임 안내부터 친지들에게 보내는 안부 편지까지 복사기는 손으로 일일이 쓰는 수고를 덜어준다.무더운 여름날 도서관에 앉아서 책과 씨름할 일도 없어진다. 어렴풋이 그 부분인가 싶으면 해당하는 페이지 전체를 복사하면 된다.정교하게 지폐와 수표를 위조하는 컬러복사기까지 등장했으니 웬만한 사진은 차라리 복사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복사기의 전성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변화들이다.그러나 복사기의 편리함에 빠져 우리는 그 명백한 한계점을 잊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같은 모양, 같은 색깔을 복제해내는 복사기는 모든 것을 손쉽게 거두어 들일 수 있다는 안일함을 낳는것은 아닐까 복사한 종이 몇 장이 어찌 책 한 권의 깊이를 가질 수 있으랴. 복사한 종이에서는 책을 읽는 진지함이 없다. 고민하며 쓰고 지우는 노력을 복사기는 모두 생략한다.요즘 대학의 강의실에서는 교수의 강의를 열심히 받아 적는 학생들이 적어졌다. 한 학기 내내 강의를 몇 번 안들어와도 학기말에 가서 친구의 노트를 복사하면 된다는 생각에서다. 노트에는 미처 옮겨지지 않았지만 머리속에 새겨진 지식과 강의도중에 이루어진 진지한 토론을 복사기는 결코 재현할 수 없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우리네 정서에 비추어 볼 때, 메시지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다소 곱지 못하더라도 정성들여 또박또박 쓴 편지가 깔끔하게 모양을 낸 복사 편지보다 더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잔뜩 멋을 부려서 보내온 [복사본] 편지를 받아보면서 얼핏 근사해 보이는 이 말들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똑같이 해대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충남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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