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재든 데 께꾸치기
본문
성종(成宗) 때 정성근(鄭誠謹)이라고 하는, 이름 만큼 성실하고 근엄한 선비가 있었다. 성종이 돌아가시자 장성근은 직소를 올리고 고향에 돌아가 3년상을 치렀다.바른말을 간(諫)하는 선비들이 미워 죽겠던 연산군은 이 정성근을 잡아 들여, `우리 아버지(成宗)가 돌아가셨는데, 네가 뭐라고 삼년상을 치르느냐.'고 어린애 같은 탓을 붙여 죽이고 만다.전통 사회에서는 비단 정성근 같은 선비가 아니더라도 임금이나 스승이나 친지의 부모가 돌아가시면 심상(心喪)이라 하여 탈상할 때까지 상주(喪主)의 행동거지에 준하는 근검한 절제 생활을 하는 것이 도리였다. 같은 스승 아래 공부를 한 동문(同門)이나 같은 해, 같은 과거에 급제한 동방(同榜) 그리고 보부상(褓負商) 같은 결속력이 강한 동업자끼리도 동료의 부모가 죽으면 탈상 때까지 비단 옷이나 무색 옷을 입지 않고 주육(酒肉)을 삼갔으며 아내와 방을 같이 쓰지 않는 등의 심상을 치렀던 것이다.남의 불행에 공감(共感)하여 그 불행을 나누어 갖고자 절제하는 미풍은 초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불이 나거나 홍수가 들어 집을 잃으면 마을 사람들은 가구당 통나무 한 그루와 지붕 이는 이엉 한 단과 기름횃불 하나씩 들고 가서 하루 품을 제공하게끔 향약(鄕約)에 약정이 돼 있었다.뿐만 아니라 재앙을 입은 집의 이웃에 사는 사람은 굴뚝에 연기를 내고 밥 냄새를 풍겨서는 안 되었기에 일가 친척집에 분산, 이웃이 겪고 있는 불행에 동고(同苦)를 했던 것이다.한강에 홍수가 나 이재민이 생기면 남은 고생하는데 나만이 돈벌이할 수 없다 하여 나루터마다 상행위(商行爲)가 시한부로 중단되고 상행위가 중단되기에 나루터의 기생이나 색주가(色酒家)들은 개문 폐업을 해야 했다. 그래서 이런 민요까지 탄생하고 있다.`한강 샛강에 큰물이 지면/송파(松坡)기생들 발뻗고 울고/삼개(麻浦) 색주가 머리 잘라 판다.'한 고을에 재민(災民)이 생기면 원님이, 한 나라에 재민이 생기면 임금님이, 그 재민과 고통을 같이한다는 뜻에서 밥먹을 때 반찬을 두가지로 줄이는 감선(減膳)을 했으니 고통 공감의 미풍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보편화돼 있었던 것이다. 일산, 원당 주민이 큰 재난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데 재난 현장에 이웃한 경기도 소재 골프장에 6천여 명이, 전국적으로는 1만여 명의 골퍼들이 지난 주말을 그린에서 즐겼다 한다.고약한 놀부심사에 `삼재(三災)든 데 께꾸치기'란 대목이 있다. 께꾸란 격구(擊毬) - 곧 작대기로 공을 치는 놀이이니 1만 명의 놀부가 삼재 든 데 께꾸를 친 것이 된다. 놀부심사에 그치지 않고 고통 공감의 아름다운 유전질에 난도질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떨떠름한 여운이 남는다.9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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