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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오와 대원군의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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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도를 향한 대우너군의 심한 박해와 프랑스인 신부의 체포 및 처형에 관한 소식은 리델(F.Clair Ridel,이덕아) 신부에 의하여 서양 여러 기독교국가에 전달되었다. 중국 텐진주재 프랑스함대 사령관 로우즈(P.G.Roze)는 1866년 늦은 여름에 군함 3척을 이끌고 양화진에 이르러형세를 시찰하고 돌아갔다.프랑스함대는 한달이 지난 9월에 7척의 군함으로 인천 앞바다에 다시모습을 나타냈다.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군인들은 병기고를 파괴하고사고에 있는 서적들을 약탈하였다. 프랑스군의 다른 일대는 강화도 북단의 대안육지인 문주산성과 남단에 있는 정족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일대는 통진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약 3백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로우즈 사령관은 더 이상 교전해 보았자 이롭지 못하다는 점을 간파하여 중국 본거지로 후퇴하였다. 이로써 강화부의 함락과 한강 입구의 봉쇄는 2개월 여의 교전끝에 해제되었으며 결국 이 전투는 프랑스함대의패퇴로 끝난 셈이 되었다. 이를 가리켜 병인양요라고 부른다.그런데 이 함대에는 리델 신부가 안내인으로 탑승하여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리델신부의 뜻은 한국 천주교를 박해속에서 구출하고 아직까지 한국땅에 잔류하고 있는 선교사 2사람의 생명을 건지려고 한데 있었것이다. 그러하기는 하지만, 그 동기야 어떻게 되었든지간에 선교사가군대나 침략하는 군함의 안내 역살을 하여 전쟁행위를 부추긴 사실에있어서는 비난과 추궁을 면할 길이 없다는 대답이 나올 수 밖에 없다.이때 프랑스 군함에 의하여 구출되지 못한 페론(Feron.權) 그후 중국산동성으로 탈출하였다. 이히아여 그때붙 한 동안 한국의 천주교회는한사람의 신부도 없이 목자 잃은 양과 같이 헤메야 할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강대한 프랑스함대를 격퇴하여 기고만장한 대원군은 국내에 한사람의교도도 있을 수 없다는 호령을 내리면서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여 더럽힌 양화진 강가를 사교도의 피로 씻음이 마땅하다고 큰 소리 치면서 방방곡에서 교도를 색출하여 처형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천주교도 학살을위한 특수한 사형 도구가 등장하였는데, 이는 큰 들보와 같은 것이어서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단번에 20명 내지 30명의 생명을 박살나게 하였다.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전국팔도의 요지에 척화비를 세우게 하여 양이 배척의 기세를 세차게 북돋았다.그 비석 문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을 주장함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 되는고로 이를 자손 만대에 경계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노라 병인년(1866년)에 쓰고 신미년(1871년)에 세움]대원군 집권하에 어마어마하게 큰 사건을 치르고 난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의 니챔 경위와 그 격퇴의 사실을 침소 봉대하게 꾸며 중국정부에 알리는 한편, 무너진 성곽과 포대를 수축하고, 대포를 대대적으로주조하는 등으로 외침에 대한 방어를 더욱 튼튼히 하였다.병인양요의 원인은 1866년 1월 15일에 공포된 천주교 탄압령에 의하여베르누(Francois Berneux,장경일) 주교 등 9명의 신부에 대한 처형이직접적 원인이 되기는 하였으나, 프랑스함대의 내침은 그 결과에 있어서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더 심한 박해로 나타나게 되었고, 그의 배외쇄국의 결의를 공고히 하는데 아주 크게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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