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년 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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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요동이나 간도 등을 여행하다 보면 직감되는 것으로 산야의 모습이나 식생들이 한반도와 다르지 않고 만나는 사람마다 돌이 아빠나 순이 엄마처럼 이국 사람같이 보이지 않으며 어조도 흡사하다. 미작의 북한계가 바로 이 지역인 북위 42도선이라는 설도 있고 만주지방의 남반부가 고구려의 옛땅이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한 무제와 수 양제의 침략으로부터도 지켜냈던 그 광활한 고구려강토가 언제 어떻게 해서 우리 나라 땅이 아니게 되었는가. 당나라와연합해서 백제와 고구려 왕조를 무너뜨린 신라는 6∼7년 동안 22번의크고 작은 전쟁끝에 당병을 물리치고 대동강 이남의 소통일을 이룩한것이 병자년(676)이었다.대통일에 의한 대한국의 기틀을 이루지 못한 것이 병자년의 첫번째통한사라 할 것이다.병자년의 두번째 통한사는 눈발이 날리는 겨울 어느날 한강변 삼전도에서 벌어진다. 오랑캐에게 항복코자 남한산성을 나온 인조는 죄인이라 하여 푸른 융복을 입고 또 죄인이라 하여 정문이아닌 서문을 통해 나섰다.어미 잃은 아기가 눈위를 기어다니고 죽은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 참상을 임금은 지나가는 길에 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9단으로 높이 쌓은 수항단 아래의 오랑캐 두목 앞에서 임금님은 세번 조아려 아홉번 이마를 땅에 찧는 삼배구고의 치욕적인 신복의 예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임진년에 왜병이 겨우 20일만에 한양을 점령했고 졸지에 궁을 빠져나간 임금님은 임진강변에 이르기까지 요기도 하지 못했다더니 병자년에는 오랑캐가 겨우 7일도 못되어 남한산성을 에워 쌌으니 야반에 피난을 떠난 임금님은 발에 동상이 걸려 걷지도 못했다. 변방과 강변과 산협마다 군병이 있고 고을마다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데 저항 한번 받지않았으니 골수에 새겨두고 길이길이 되뇔 통한사가 아닐 수 없다.우리 한국사의 한 허리를 동강냈던 일제 침략의 발단이 바로 병자년에 비롯되었으니 이것이 세번째의 통한사다. 일본 군함 운양호에서의 포격사건은 한국 침략의 빌미를 잡기 위한 일본의 교활한 유도작전이었음은 일본 학계에서도 상식이 돼있다. 이를 응징하고자 일본이 보유한 전군함 8척을 정예부대로 무장시켜 강화도에 접근시키고 있는 그동안 우리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다녀온 이유원이 중국에서 본 코끼리 앞발들고 춤추는 이야기에 흥겨워하고 있었다.그리하여 일본 침략의 첫 발인 강제개항 등 수교조약이라는 미명의 족쇄에 채이고 만다. 매미가 허물을 벗듯 흘러간 병자년들은 그 허물같 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 병자년이 역사에 뿌린 씨앗들은 민족의 기억속에 싱싱하여 오늘에 영롱하게 투사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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