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보다 더 무서운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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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반대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이들은 얼른 [미움]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미움이라기 보다는 [무관심]이 아닐까 생각한다.요즘 사람들은 어디에 관심을 쏟고 있을까일찍이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면 사람들의 관심이 "자기"와 "돈" "쾌락"에 쏠릴것을 예언한바 있다.(딤후3:2-4)마태복음 8장은 백부장이라고하는 로마 장교가 자기집 하인에게 보여준 아름다운 관심하나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중풍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 하는종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다. 당시 그 사회에서 천한 대접을 받는종의 문제를 마치 자기 친 자식의 문제처럼 신중히 여겨 도움을 요청하러 찾아온 이 높은 계층의 따뜻한 인간관심의 정성이 예수님까지도 놀라게 했다.그래서 예수님은 즉시"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고 응답하셨다.그러나 그는"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그저 말씀만 하시면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그의 믿음대로 종의 병은 그 시간에 고침을 받았다.한번은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쉬운가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쉬운가]라는 제목을 가지고 토론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사랑하는 것이 쉽다고들 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고 계시지만 사람들 중에는 사랑스럽지도 않고 사랑을받을 자격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러나 성경은[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없다]라고 하지 않았던가(요일4:20-21)우리는 예수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유명한 비유를 잘알고 있다.한 율법사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예수께 물은 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님의 이 비유가 시작됐다.이 비유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 즉 피해자를 놓고 한 번 생각해 보자.우선 강도에게 있어서 그 피해자는 [약탈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의 가진바를 다털고 반쯤 죽게하고 도망친 것이다. 그때 마침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길로 내려가다가 그 피해자를 보고 그들은 피해서 지나가 버린다. 아마 그들에게는 피해자가 귀찮은 존재였을 것이다.그런데 그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피해자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 자기 나귀에 태워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다음날 자기 주머니를 털어 여관 주인에게경비를 주면서 그 사람을 잘 돌보아 줄것을 부탁하며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길에 갚아 주겠노라고 하고 떠나갔다. 이 사람에게는 그 피해자가 봉사해야할 이웃이었다.과연 누가 나의 이웃인가내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나를 돕는 손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우리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바로나의 이웃인 것이다.예수님은 이 비유뒤에 이 말씀을 덧붙이셨다."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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