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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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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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 아니 50 년 전만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빨리 늙기를 원하고 빨리 노인이 되기를 희망했던 유일한 나라가 우리 나라가 아니었던가 싶다.종 황제의 밀사 노릇까지 했던 미국인 헐버트(Homer Bezaleel Helbert)는 '이 세상에서 관습적인 노인 복지가 가장 완벽하게 된 나라......조선'이라 했고, 미국 공사를 역임한 샌즈의 회고록에도 '나의 노년을 위해 조선 땅에 다시태어나고 싶다'했으며, 최초의 선교 의사인 앨런도 '노인(老人)과 망인(亡人)사이가 단절되지 않고 연결되어 이 세상에서 가장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 즐거운 노인 천국'이라고 극찬하였다.따지고 보면 모두가 맞는 말들이다. 노인 천국의 증거로서 내외국인이 써 남긴 많는 문헌 가운데 몇 가지만 추려보아도 알 수 있다.첫째, 문성(問晟)이라 하여 아침에 일어나거나 저녁에 잠들 때 아들 며느리로부터 문안을 받는다.둘째, 신과(新果)가 나거나 별식이 생기면 반드시 노부모가 먼저 드신 후에 입을 댄다.셋째, 주부권을 상징하는 뒤주 열쇠와 안방 차지는 늙어 죽을 때까지 맏며느리에게 이양하지 않는다.넷째, 문중 사람은 물론이요, 한 마을에 사는 남들일지라도 출타하거나 출타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마을 노인에게 인사를 드린다.다섯째, 길가다 노인을 만나면 말에서 내리거나 말을 타지 않았으면 걸음을 멎고, 지나갈 때까지 두 손 들어 읍을 한다.여섯째, 마을에서 잔치가 있으면 아무 연고가 없더라도 반드시 마을 노인들을 모셔다 상석에 앉혀 대접한다.일곱째, 마을에서 추렴해 돼지나 소를 잡으면 배장(配臟)이라 하여 내장을 그 마을의 노인들에게 등분하여 보내드린다.여덟째, 부모가 늙으면 벼슬을 고향 가까이 옮겨주어 봉양케 하고, 보다 늙으면 봉양을 위해 유급 휴직시켰다.아홉째, 그러다가 죽으면 영혼이라도 3 년 동안 한 집에 살며 조석으로 살아 있는 식구들과 똑같은 밥상을 받으면서 공생 공존하며, 3 년 후라도 1 년에 한 번 제삿날에 상봉하니 죽어도 영생하는 것이 된다.열째, 회갑이 지나면 그 고을 현감이, 고희가 지나면 감사(監司)가, 백수(百壽)가 지나면 임금님이 춘추를 가려 주시어 옷을 내려 연지(年齒)를 치하하였다.동서고금에 이렇게 노인을 우대한 나라가 어디 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지도 또 책에서 보지도 못했다. 그 노인 천국이 노인 지옥으로 타락하고 만 것이다. 노부모 모시기가 힘겹다 하여 관광지에 유기하고 훌쩍 이민 떠나버리는 자식들이 있는가 하면, 병도 없는 노부모를 병원에 강제로 입원시켜 몇 달간이고 유기하는 신판 고려장이 예사로 자행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지게에 져다 거리나 쓰레기통이나 산속에 버림받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조선은 기노국(棄老國)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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