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교령 선포와'애기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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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한국교회 신도들의 성분과 분포상황을 살펴보면, 의주지방은 상업차 중국을 왕래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서울사람으로는 선교사들의한국어 교사와 선교회기관에서 일하는 직원이나 고용인들이었고 그외에도 서민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초창기의 한국교회는 천주교와는 다르게 서민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강력하게 고유의 종교 내지 정통 의식과의 대립이나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비교적 용이하게교세가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혀 박해가 없은 것은 아니었다.1888년 4월 28일 한국정부의 조병식으로부터 미국의 딘스모어(Dinsmo-re) 공사에게 기독교 전도를 금지하라는 공문이 전달되었다. 이 금교령은 주로 천구교에 대하여 행해진 것이었지만, 기독교의 선교 단체에도적지않게 영향이 미쳤다. 천구교에서는 한국의 문화가 개방되어 종교의자유가 인정되는 기미가 보이자 한국인 교도의 이름을 빌려 선교와 인연 있는 장소를 구입하여 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약현성당은 천주교인의 처형 장소였던 서소문밖 언덕위에 세워진 것이고, 종현성당은순교자 김범우의 집터에 세워졌으며 이곳은 천주교의 요람이기도한 명례동 즉 오늘의 명동성당 자리가 된다. 그런데 이 명동성당 자리는 궁궐보다 높은 장소였고 역대 국왕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를 내려다볼 수있는 건축 금령에 해당되는 지역이었다. 국왕은 그 계획을 듣고 성당터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하명하였다. 그러나 건축은 그대로 진행되었다.정부에서는 금교령을 선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언더우드와 아펜셀라 목사는 북부지방을 전도여행하다가 딘스모아 공사로부터 즉시 귀경하라는 공한을 받고 서울에 돌아와보니 선교사들 사이에 논란이 분분하였다. 어떤 선교사는 이 포고가 천주교에 해당하는것이지 우리에게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고, 알렌같은 선교사는 너무 내륙에까지 깊이 들어가 전도함으로 우리에게도 꼭같이 해당되는 금령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여튼 이러한 사정으로 5월부터 9월까지는 주일예배를 포함하여 일체의 종교행사를 중단하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였다.금교령이 내린 직후, 선동분자들은 모든 외국인은 국외로 추방돼야한다고 험담을 퍼트렸다. 시국의 공기는 험악해져 중국 텐진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같은 서양인 학살이 국내에서 일어날 것같은 우려도 없지않아 있었다.허무맹랑한 유언비어가 떠돌아 서양인들이 어린 아이를 잡아다가 눈알을 뽑아서 약에 쓴다는 등의 말도 퍼졌다.이 금교령과 [애기소동](Baby-Riot)의 결과가 전화위복으로 되었음은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스크랜튼 의사의 말과같이 선교사들은 전혀어린아이의 눈알을 뽑지도 아니하였고 아이들을 잡아먹지도 아니하였다. 선교사들은 정부 명령에 곧 순종함으로 좋은 인상을 주었고 무지와 편견으로 된 모해는 시일이 지나자 저절로 해명되었다. 선교사들의하는 사업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Annual Report of Missionary Society of the Nethodist EpiscopalChurch for 1889, PP.293-294)이러한 호전된 분위기를 이용하여 정부 측근의 알렌같은 인물이 적극적으로 한국 관리를 설득하며 나섰다.1886년 한불조약의 [교회] 라는 글귀가 바로 선교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선교사업을 인정함이 마땅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1890년이후 척사법은 사실상에 있어서 死文化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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