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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의 노춘경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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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알렌(Allen) 의사가 한국에 들어왔고 그 이듬해부터는 선교사들이 연이어 들어오면서, 그들은 주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에 종사하면서한국민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선교사들은 복음을 공식적으로 전하는 기회가 쉽게 이르지아니하여 그날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1882년 한미조약이 체결되어 미국인의 국내거주권이 인정되고 또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의 윤허가 내리기는 하였으나, 종래의 排外 범령은그대로 발효중이어서 기독교 선교는 계속 금지된 상태에 있었다.선교사들은 지난달의 천주교 신부들이 하던것처럼 상복을 입는 변장으로 비밀히 전도하거나 또는 정부나 민중으로부터 반감을 사면서까지 전도를 강행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자유로히 합법적으로 전도할 날이 오기를 고대하면서 조심스럽게 제반사를 준비하고 있었다.그동안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한 언도우드 (Underwood) 목사는 한국어를좀 말할 수 있게되자 서서히 전도하기를 시작하였다. [나는 한국말을 좀알게되자 나무밑이나 약수터 근처에 나가 책을 꺼내들고 읽었다. 그러면하나씩 둘씩 사람들이 모여들어 질문을 하였다. 나는 이 책은 어떤 것이며 그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에 애썼다. 이러한 노방전도는차츰 확대되어 예배처소 (Street Chapel)로 발전하였다. (H.G.Underwood,The Call of Korea PP.106-107)언더우드 목사의 꾸준한 노력의 결과는 마침내 한 열매를 맺게하였다.그것은 한국 국내에서의 최초의 구도자인 노춘경이가 1886년 7월 11일 언더우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사실이다. 노춘경은 한문서적을 읽다가 기독교는 無父 無君의 敎라 하여 비난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그것이 무엇이지 알고 싶은 마음의 충동이 일어났다. 알렌 의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던 노춘경 (노도사라고도 함) 은 알렌의 책상위에 놓여있는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에 눈길이 멎었다. 그것은 중국 만주에서 로쓰목사가 백홍준을 비롯한 의주의 청년들과 함께 번역한 복음서이었다.노춘경은 별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그책을 옷소매속에 감춰넣고 집으로 가져왔다. 그는 밤새도록 단숨에 독파하였다. 다음날 그는 언덕우드목사를 방문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질문하였다. 그의 눈초리는 진리를 찾으려는 갈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기독교가 誣天 난倫의 잡풍을 유발하는 나쁜종교가 아니고 유교보다 훨씬 우수한 진리가 있다고 발견하였다. 노춘경은 언더우드 목사가 주는 한문 복음서를 계속하여 받아 읽었으며 또 성당 수위 심령의 구원, 예수교 교리 등의 교리서를유심히 살폈다. (Mr Underwood's Letter from Seoul, October 1886sus).그러하던 어느날 그는 언더우드목사는 심히 놀라면서도 한편 너무나 큰기쁨을 금할길이 없었고, 이 나라의 국법이 기독교 신앙을 금하고 있는사실을 알고있는가고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신중히 고려해야한다고 당부하였다. 노춘경은 결연한 표정으로 그러한 상황은 다알고 있으며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목숨을 걸고 예수를 잘 믿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러한 노춘경은 신앙고백은 완전히 자의로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그는 언더우드 목사가 묻는 모든 질문에 분명한 말로 대답하여 세례문답에 합격하였다.이리하여 피비린내 나는 기독교인 박해의 사건이 아직도사람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 시기에 노춘경은 진리를 깨달아구원의 길로 용감하게 들어서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노춘경은 [내가 기독교 진리를 깨닫게 된 유일한 길은 복음서를 읽은데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벅찬 감격을 누르지 못한채 한국에 들어온지 2년만에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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