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혜원 의학당
본문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병행하여 시행하였다.서양의술에 대한 신망이 깊어짐과 동시에 서양교육에 대한 동경도 점점높아갔다.한국정부의 노력이 비록 활발하지는 못하였으나 현대식 교육을 도입하려고 희망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특히 고종 국왕의 관심은 상당히 컸으며 일본을 비롯하여 중국, 미국 등지에 시찰단을 파송하였고 또는 유학생을 보내 세계정세를 연구시찰케하는 일은 소홀히 하지 아니하였다.1883년 6월 미국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민영익은 곧 국왕에게 현대식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주달하였다. 그러했기에 그해 7월에 서울을 방문한 매클레이 목사에게 고종은 쉽게 교육사업의 윤허를 내리셨던 것이다.한국에서의 최초 현대식 교육기관은 몰렌돌프(Mollendorf)에 의하여시작된 영어강습소인 것 같다. 외교 통역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영국인 해리 팩스 (T.E.Hallifax)와 중국인 교사가 가르쳤다. 한국으로부터 현대식 교육의 지도자를 파송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미국정부의 문교장관 이튼(John Eaton)은 [건전한 생각과 훌륭한 정신]을 가진 헐버트(H.B.Hulbern)와 벙커 (D.A.Bunker)와 길모아(George.W.Gilmore)의 세 사람을보내기로 하였다. (Annual Report of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for 1886P,148)그러나 한국의 국내사정이 갑신정변이 일어나는 등 불안정하였으므로도착이 얼마간 지연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었다. 이들을 중심하여1886년 7월 4일 설립된 육영공원은 한국 최초의 국립학교로써 정부에봉사할 관리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한국 최초의 서양식병원 광혜원 안에서 1885년 가을에 알렌 의사에 의하여 의학반이 설립되었다. 의학반은 1886년 4월 10일부터 알렌,언더우드, 혜론등이 교사가 되어 정식으로 개교되었다. 그러나 광혜원은 장로교 경영의 선교병원이었으며 동시에 정부에 소속한 국립병원이었다. 빈톤 (C,C.Vinton)은 병원에서 종교행사를 하지 못하게 금지당하자 원장을 사임하고 말았다.장로교 선교본부에서는 에비슨 (O.R.Avison)을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하면서 병원책임자로 추천하였다. 그는 1893년 7월 한국에 도착하였다.그는 1893년 7월에 한국에 도착하였고 왕실의 시의가 되었으며 조용한교섭을 통하여 정부로부터 병원에서 종교사업을 할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국왕은 에비슨에게 호감을 갖었으며 그의 활동을 지지하였다. 당시 병원 관리를 맡은 정부관리들의 부패행위는 극심하여 운영면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1895년부터 선교회가 직접 병원 운영의 재정 책임까지 맡게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말썽 많던 국립병원이 완전히 선교회기관으로 전환되고 말았다.이제부터는 병원안에서 전도하는 기능을 공개적으로 발휘하게 되었으므로 전도인을 채용하여 환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전도하였다. 국내에 의료사압을 보급시킬 목적으로 한국인 의사를 양성하는 과업에도 착수하였다. 에비슨은 [선교사가 하는 모든 일은 임시적임을 알아야한다. 병원사업도 한국인이 운영할 때를 내다보면서 청년들에게 의학교육을 시행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The Severance Hospital,The Korea Review,November 1904,P 490) 그는이러한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의학교육을 본격화하였다.에비슨 의사는 세브란스 (Louis H.Severnce)의 후원을 얻어 1904년 종합병원의 건물을 완성하였고 연합의학교와 간호학교를 만들어 한국인기독청년 의사와 간호원을 양성하는 중심이 되게 하였다. 1908년 이 학교는 7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여 이들이야말로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되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