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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스 목사의 개화선교 역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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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국정책을 강행하여 기독교를 박해하던 대원군이 실각하자 고종은 1876년 2월 일본과 사이에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김기수를 수신사로 하여 파견했으며 1880년에는 김홍집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보냈다.일행은 약70명에 달하였으며 부산에서 일본 기선으로 건너가 기차를 타고 도오쿄오에 들어갔다.일본의 수도의 중심지인 긴자 가두를 그들은 숙소인 아사구사의 홍간지를 향하여 행진하였는데, 그 광경 이야마로 가관이었다.행렬 선두에 큰 기빨을 들고 호굴나팔을 갈고동라에 맞춰불면서 생과 저 소기라 간드라지게 어울러들리는 취주에 혹은 가마를 타기도 하고 도보로 행진하는 관대장수의 옷을 입은 한국인의 풍묘야말로기 이한 풍경임에 틀림없었다.그때 겹겹히 싸여있는 구경꾼 사이를 헤쳐냐온 서양인 한 사람이 일본주재 미국 성서공회 총무인 헨리 루미스(Henry Loomis) 목사였다.루미스목사는 일본에 체재하고 있으면서 선교의 전개를 위하여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인을 눈앞에 보게되자 행렬가까이에 뛰어들게 된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그는 수신사를 만나보고 싶어 숙소로 찾아갔다. 그러나 면회는 사절당하였다.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품은 한국선교의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그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루미스 목사의 수고로 이수정에 의한 성서번역사업이 진해되었고 또한 미국으로부터 한국을 위한 선교사 파송도 결실을 보게되는 것이다.루미스목사는 김옥균 박영효,서재필의 개화인사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기독교 선교를 위하여 무척이나 애썼다.[어느날 김옥균은 루미스목사가 준 한문성서와 천도소원(기독교 변증서일종)을 받았다. 루미스목사가 5년후에는 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말하니 그의 대답은 2년내에 개교되도록 힘쓰겠 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표명하지 않았다.그러면서도 1884년 선교사가 입국하도록 노력하였고 또한 언더우드 목사의 주택지 획득을 위하여 조력을 아끼지 아니하였다.[우정국 낙성식에 계획한 혁명(갑신정변을 말함) 이 실패하자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이 탈주하여 일본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루미스 목사를 방문하여 보호를 받게되었으며 서재필은 루미스목사의 주선으로 도미하여 미국 우수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귀국하여 추 밀고문관에 임명되었고 후에 독립당의 총재가 되었다. 청일전쟁 당시 에는 [독립신문]이라는 한국 및 영어로 된 신문을 발간하였다.[박영효도 미국에 갔으나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곧 돌아와 루미스목사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요꼬하마에서 약 2년간 생활하였다. 그후 본국의 정세가 안정되어 귀국한 박영효는 루미스목사에게 감격에 넘치는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헨리 무리스목사여! 내가 일본에 머물러 있는 동안 안전하게 있은 것은 귀하의 보호의 덕택인줄 알고 그 감사를 무엇이라고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위의 글들은 루미스목사 자신이 쓴 글의 [Friends of the East] PP 77-95에 있는 내용에서 발취한 것이지만, 그의 또다른 저서로 [The First Korean Protestant in japan] 이 있다.루미스목사는 1885년 10월에서울을 방문하였다. 그 이후로 그는 일본과 한국 두나라를 왕래하면서 한국 정부와 가까와져 궁실로부터 받은 신임은 대단하였다.1895년 12월 민비가 일본인 도당에 의하여시해된 이후로는 고종의 요청으로 침실 곁에 있으면서 야간숙직을 하여 국왕의 신변을 보호하기까지 하였다.루미스목사는 한국의 문호개방과 개화활동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하는데 대단한 공헌을 끼쳤다. 또한 그가 초대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셀라 목사를 위한 자문의 역할을 하면서 한국 선교사업을 도운 것은 두말할 것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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