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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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고 긴 수염에 갓을 쓰고 흑색 두루마기를 입어야 외출을 하셨던 우리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팔남매의 막내인 나를 유독 예뻐해 주셨다. 언니들과 싸울 때 혹은 엄마에게 꾸중을 들을 때에도 늘 내 편이 되어 주셨다. 특히 할아버지는 항상 자리 밑에 돈 백원을 넣어두신 뒤 내게 넌지시 말씀하시곤 했다."옥아, 자리 밑에 돈 백원 없데이."그러면 나는 얼른 그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돈을 꺼내 들고 가게로 달려갔다. 그건 할아버지에게 용돈을 타 쓴다고 꾸중하시는 엄마를 피해 할아버지가 내게 보내는 암호였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점점 연세가 드시면서 치매기가 약간씩 생겼는데, 한밤중에 밥을 달라고 고집을 부리시고 새벽부터 식구들을 깨우며 왜 낮인데 잠만 자냐고 혼을 내시시도 했다.그 즈음 내가 대학 입시에 떨어졌을 때였다. 절망감에 빠진 나는 방구석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며칠을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할아버지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어눌한 말투로 물으셨다."옥이가 와 이카노"엄마가 대학에 떨어졌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내 등을 토닥이며 말씀하셨다. "옥아, 옛날에 율곡 이이도 과거에 네 번이나 떨어졌단다. 사람이 더 잘 되려면 그런 일도 생기는 기다. 걱정 마래이, 괜찮다."그 뒤 나는 재수를 하기 위해 대구로 유학을 왔는데, 가끔식 시골 집에 들르면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자리 밑에 동전을 넣어 두셨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손녀딸이 슬퍼하는 모습만은 제 정신으로 받아들이고 안쓰럽게 여기시던 할아버지. 아직도 내 귓가에는 그때 할아버지가 들려 주셨던 그 말씀이 생생하게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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