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창지대 끼고 수자원 풍부한 북 왕국 이스라엘 첫 수도
세겜의 위치와 고고학적 발견
세겜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첫 수도이자 아브라함이 땅을 약속받은 장소로 유명하다. 1903년까지만 해도 세겜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진 바 없었다. 주후 1세기 유대 역사기록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세겜은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에 위치해 있다고 전해졌다. 주후 4세기 교회 역사학자 유세비우스는 네아폴리스로 불리는 장소에 있는 야곱의 우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있다고 말했다.
1903년 독일 학자들은 세겜의 위치를 밝히기 위해 네아폴ㅁ리스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네아폴리스는 헬라어 발음인데 아랍어와 섞여 현재는 나블루스라 불리는 도시였다. 전통적으로 야곱의 우물과 요셉의 무덤이라 불리는 장소가 있어 이곳에서부터 탐사를 시작했다.
결국 나블루스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 텔 발라타(Tell Balatah)에서 고대 유적의 흔적이 발견됐다. 1913년 셀린(E Sellin)은 세겜에서 발굴을 시작했지만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발굴은 중단됐다. 1928년, 1932년, 1934년의 발굴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0∼6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미국의 발굴은 세겜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족장시대의 세겜
세겜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65㎞ 떨어진 곳이다. 동서남북으로 연결되는 주요 도로 선상에 위치해 있다. 오늘날에도 예루살렘에서 출발해 팔레스타인의 서안(웨스트뱅크)을 지나 갈릴리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겜을 통과해야만 한다. 세겜은 에브라임 산지의 곡창지대를 끼고 있으며 남동쪽으로 400m 떨어진 곳에 야곱의 우물이라 불리는 장소가 있을 만큼 수자원 역시 풍부했다.
덕분에 세겜은 수천년 전부터 사람이 거주하는 도시로 성서 외의 자료에도 자주 등장하는 고대도시였다. 세겜은 가나안 땅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주전 19세기 이집트의 세소트리스 3세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이집트 장군 쿠-세벡(Khu-Sebek)의 무덤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이집트가 ‘skmm’ 즉 세겜을 정복했다는 사실이 언급돼 있다. 비슷한 시기의 또 다른 점토판에는 세겜이 이집트에 저항하는 주요 도시 중 하나라고 명시돼 있다. 유사한 시대에 성서도 세겜을 언급하고 있는데 하람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 온 아브라함은 세겜 상수리 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을 만나 이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며 이곳에 제단을 쌓았다(창 12:6∼8).
밧다아람에서 돌아와 얍복강 해변에서 형 에서와 화해를 했던 야곱은 세겜에 정착했다. 세겜의 아들들로부터 밭을 사들여 그곳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지칭했다(창 33:18∼20). 그러나 세겜의 아들들은 야곱의 집안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들은 야곱의 딸 디나를 범하였고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을 죽였다(창 34장). 세겜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위한 제의적인 의미를 가진 장소가 아니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게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창 35:1)고 명령했다.
이상한 점은 이러한 피 흘림과 복수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세겜의 정복은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오히려 세겜 땅에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정리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이 계약 백성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언약의 증표로 돌을 세웠다(수 24장). 대부분 학자들은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의 남자들을 죽인 후 아마도 세겜에는 야곱의 친척들이 남아 있었고 세겜은 이후에도 야곱의 자손들과의 연이 닿아 있었다고 보고 있다. 요셉의 무덤 역시 이곳에 마련된 이유이기도 하다(수 24:32). 실제로 세겜은 가나안 정복 시기에 파괴된 고고학적 흔적이 없다.
바알 브릿 신전
고고학적 발견은 족장들의 시대에 세겜에 요새화된 도시가 있었음을 알렸다. 더불어 주전 14세기 기록된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에서도 가나안의 중심 도시로서 샤크무(Shachmu)라 불리고 있다. 세겜은 아마르나 문서 중 11개의 문서에 등장하고 있는데 세겜의 라바야라는 인물이 하비루와 대적하고 있음도 언급됐다.
세겜은 물과 양식 모두 풍부한 곳으로 도시가 세워질 조건은 갖추었지만, 지형은 적을 막기에 유리하지 못한 평지에 가까웠다. 결국 도시는 튼튼한 성벽과 성문을 갖출 수밖에 없었다. 높이 8m의 성벽을 둘러 인공 언덕을 쌓아 공격을 막았다.
주전 20세기부터 건축된 성문은 양쪽에 각각 3개의 기둥이 세워져 마치 2개의 방을 갖춘 모양이었다. 이 성문은 주전 12세기까지 계속 사용됐다. 기둥 아래 부분은 당시 시리아에서 유행하던 ‘오토스타트(잘 다듬은 석판)’를 둘러 성문을 더욱 강화하거나 장식하는 효과도 나타냈다. 가장 안쪽의 기둥과 가장 바깥쪽의 기둥 사이에는 나무로 만든 성문이 끼워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전 20∼12세기 지속적으로 사용된 요새화된 신전은 벽의 두께가 5m가 넘는다. 신전의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길게 놓인 방에 두 줄의 기둥들이 있다. 가장 안쪽은 지성소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신전은 사사기 9장에 나오는 세겜의 신인 바알 브릿의 신전이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은 세겜의 바알브릿 신전에서 전쟁을 위한 은 70개를 후원받아 자기 형제 70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다.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아들 요담만이 숨었으며 아비멜렉은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왕이 되었다.
이에 요담은 그리심산 꼭대기로 가서 목소리를 높여 세겜 사람들을 회유했고 저주의 예언을 퍼부었다. 요담의 예언은 아비멜렉에게 임했으며 결국 세겜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신전으로 도망간 사람들과 함께 이 신전을 불살랐다. 실제로 신전과 도시는 주전 1100년께 화재로 무너진 것이 발견되었다.
왕국시대의 세겜
주전 10세기 세겜은 솔로몬의 행정구역 중 에브라임 산지의 중심지로 다시 세워졌다. 르호보암은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세겜으로 갔지만 거기서 그가 행한 어리석은 판단 때문에 나라가 분열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 지파의 여론을 모아 북 왕국 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이 선택한 수도는 세겜이었다. 세겜의 지리적 입지와 풍요로운 환경은 분명 수도로서 좋은 조건이었을 것이다. 고고학적으로도 주전 10세기 포곽성벽이 건설된 흔적이 나타났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로보암은 수도를 부느엘로 옮겼다(왕상 12:25). 세겜은 복수를 피해 도망가는 죄인들의 도피처로서의 기능을 할 뿐이었다(수 20:7, 대상 6:67).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세겜은 주전 722년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파괴됐다. 이후 세겜은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가 됐다. 다만 자신들을 사마리아인이라 부르는 사람들만이 그리심산에 모여 살 뿐이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야곱의 우물이 세겜에 있었다는 것(요 4:5∼6) 외에 신약에서 세겜은 더 이상 언급이 없다. 주후 70년 이후 고대 도시가 있었던 세겜은 잊혀졌고 평지에는 로마의 네아폴리스 즉 ‘new city’가 세워졌고 후대에 아랍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a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출처] - 국민일보
사자상·메두사… ‘우상숭배’ 넘쳐 저주받은 도시
예수께서 권능을 행하신 도시지난 호에 소개된 벳새다와 함께 고라신은 갈릴리 주변의 유대인 도시로서 예수께서 활동했던 무대이기도 하다. 고라신은 마태복음(11:20∼24)과 누가복음(10:13∼15)에 각각 한 번씩 언급되고 있는데 두 구절은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애석하게도 고라신은 예수께서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과 함께 회개하지 않은 도시로 책망을 받았다. 고라신에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 같은 이방인의 도시에서 행했다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며 심판 날에 오히려 이 이방인의 도시들이 고라신과 벳새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말했을 정도로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신약성서는 벳새다가 제자들의 고향이라고 말하면서 예수의 사역을 다루고 있지만 고라신에서 어떤 사역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안타깝게도 고고학자들마저 고라신에 주후 1세기쯤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는 흔적만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주후 3∼4세기 유대인의 거주지역이 발견되면서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유대인이었을 확률이 높아졌다.유대인의 흔적이 발견되다고라신은 갈릴리 호수 북쪽 해변가에 있는 도시로 가버나움에서 동쪽으로 2.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1962∼64년 처음 유적지에 대한 조사와 발굴이 시작되었고 1980∼87년 보다 광범위한 발굴이 실행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적+지에는 주후 1세기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주요 건물들은 주후 3∼4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건물들의 대부분은 갈릴리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산석인 현무암으로 지어졌다.도시의 전체 면적은 10만㎡에 달하는데 회당을 중심으로 5구역으로 나눈 모습과 유대인들이 안식일 전이나 회당에 가기 전 몸을 씻는 정결례를 행했던 미크베가 발견된 것은 이 도시가 유대인의 거주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적지 내에서 많이 발견되는 올리브기름을 짤 때 사용한 압축 돌들은 올리브기름 생산을 통해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고라신이 발굴되었을 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곳에서 발견된 회당에 관심을 가졌다. 우선 회당의 연대가 예수의 공생애 시기인 주후 1세기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무암으로 지어진 회당은 전형적인 갈릴리 양식으로 지어졌다. 갈릴리 양식의 회당 건물들은 두 줄의 기둥들이 세워져 전체 건물을 세 부분으로 나누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고 세 개의 입구가 있으나 가운데가 가장 크게 만들어졌으며 실내의 벽을 따라 벤치 형태의 돌 의자가 마련돼 있었다. 회당은 주후 2세기부터의 흔적이 발견되며 주후 4세기 파괴되었다가 주후 6세기 다시 세워졌다.회당, 유대인들의 신앙적·민족적·정치적 중심회당은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발견되는 건물의 이름이며 동시에 유대인들의 모임을 칭하는 말로 오직 예루살렘에만 있을 수 있었던 성전과는 달리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모든 곳에 존재했다. 그렇다 보니 이방 도시들 가운데서 회당은 유대인의 상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무너지고 희생제사가 더 이상 드려지지 않으면서 제사장의 역할은 사라졌다. 유대인들은 제사 대신 함께 모여 기도와 토라를 연구하며 토론하였다. 회당은 헬라어로 시나고그로, 히브리어 카할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모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회당은 이스라엘의 바빌론 포로기(주전 586∼537년)에 혹은 페르시아에서 돌아와 제2성전을 짓던 시기에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성전이 없어진 포로기에 유대인들은 성전 파괴를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하는 날들(슥 7:5)과 말씀을 자손들에게 항상 읽어주는 관습을 행하던 특별한 장소가 필요했을 것이며 이 장소는 세대를 거쳐 건물의 형태로 발전해 기원전 1세기 전후 유대인 삶의 구심점이 되었으리라고 본다.가장 오래된 회당은 그리스 델로스 섬에서 발견된 회당(주전 150∼128년)이며 팔레스타인 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회당은 하스모니아 왕조가 지은 여리고에 위치한 겨울궁전 안의 것(주전 75∼50년)이다. 로마의 점령 이후 유대인들은 그들이 가서 사는 곳마다 회당을 지었다. 고라신을 비롯해 가버나움 그리고 쯔팟 같은 유대인의 도시에서는 의례히 발견되는 것이 회당이다. 회당은 큰 방을 중심으로 작은 방 몇 개가 붙어 있는 형태로 지어졌는데 전체 구조는 시대와 장소에 유행하는 스타일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건물의 동일한 특징은 중앙을 중심으로 두 줄의 기둥이 세워져 있고 건물의 벽면을 따라 계단이 벤치 형태로 깎여 있거나 돌을 쌓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벤치는 회당에서 모이는 회중이 벽면을 따라 둘러앉아 있을 수 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신약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회당에는 회당장이 있어(막 5:22, 35∼36, 눅 8:49; 13:14; 행 13:15; 18:8, 17) 집안 대대로 회당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회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식과 공동체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던 사람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1세기쯤 기록된 테오도투스(Theodotus) 석비의 경우 이 석비를 만든 테오도투스는 본인을 회당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회당장의 지휘 아래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기도를 했고(마 6:5), 안식일과 절기에 성찬 예식을 행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관습이 있었다. 때로 마을에서 벌어지는 재판이 회당에서 행해지기도 하였는데 예수께서도 회당에서 채찍질이 있으리라 말씀하셨다(마 10:17; 23:24; 막 13:9). 회당은 각 마을에 가장 큰 건물로 사람들이 회합할 수 있는 장소였다. 덕분에 회당에서는 종교적 모임 외에도 정치적 모임을 갖기도 했다.모세의 자리그러나 무엇보다 회당에서 이루어진 가장 큰 활동은 토라 즉 구약의 5경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다. 예수 역시 회당에서 토라를 읽고 토론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이셨으며(마 4:23; 9:35; 13:54; 막 1:21∼39; 6:2; 눅 4:15, 16; 6:6; 13:10; 요 6:59; 18:20) 사도행전에서도 스데반과 다른 제자들 또한 성경을 읽고 토론하며 예수의 복음을 전파했다. 성서는 토라를 읽을 때 “회당의 높은 자리”(마 23:6; 막 12:39; 눅 11:43; 20:46)에 서서(눅 4:16)에서 읽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토라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토라를 읽는 자는 높게 만들어진 단상으로 올라갔다. 토라를 읽고 나면 강론과 토론이 잇따랐고 선생들 즉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 혹은 회당장은 “모세의 자리”(마 23:2)에 앉아 토론을 이끌었다. 특별히 고라신의 회당에서는 “모세의 자리”라고 새겨진 현무암으로 만든 의자가 발견돼 성서 속의 회당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일반인은 회당 벽을 따라 깎아져 있었던 벤치에 앉아 있었다.고라신의 회당 건물에서 또 다른 우리의 이목을 끄는 것은 한 쌍의 돌로 만든 사자 조각상과 건물 곳곳을 장식한 동물 형상과 독수리, 무장한 군사,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메두사의 머리 등의 조각들이다. 형상을 조각하는 것은 금기시하던 유대인들의 건물이 대부분 꽃이나 식물 혹은 기하학적 무늬들로 장식되는데 반해 고라신의 회당은 율법을 어기고 있어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고라신을 향한 예수의 저주를 떠올리게 한다.◇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김진산 박사<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출처] - 국민일보
오병이어 등 기적 보고도 회개안해 예수님이 책망한 땅
어부의 집 벳새다성서의 여러 지역 중 구약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갑자기 신약에 등장하여 마치 역사의 연속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이스라엘의 복잡한 역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시대적으로 그 지역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다르기도 했을 뿐 아니라 시대적 화자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구약은 주로 정치적 경계나 전쟁의 접전지 등을 묘사한 데 반해 신약은 예수의 발자취와 복음의 경로를 이야기하고 있다.이스라엘의 경우 물이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에 수자원만 있다면 항상 거주지가 되었다. 덕분에,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신약의 유적지들은 구약 시대에도 거주했던 흔적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예들 중 갈릴리에 위치한 벳새다가 있다.벳새다는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로 예수의 발자취와 관련이 있다. 벳새다는 예수의 제자들 중 빌립과 안드레 그리고 베드로의 고향이다(요 1:44; 요 12:21).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로 남자만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에 남은 음식을 모은 기적과 관련하여 언급된 장소이기도 하다(막 6:45; 눅 9:10). 벳새다에서 눈 먼 소경이 그에게 나오자 예수는 그의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안수했고 소경은 눈을 떴다(막 8:22∼26). 이러한 예수의 권능을 눈으로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벳새다의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결국 예수는 벳새다를 두로와 시돈, 심지어 소돔과 비교하며 심판 날에 그들이 얼마나 고통당할 것인가 책망하였다(마 11:21; 눅 10:13∼15).성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갈릴리 호수변에 위치했었던 벳새다를 찾는 노력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미 1839년 이스라엘을 조사하여 성서의 땅들을 찾아냈던 성서학자 로빈슨은 요단강 동편, 갈릴리 호수 북쪽에서 2㎞ 떨어진 엣-텔(et-Tell)을 벳새다일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유적지가 호수변에서는 너무 멀고 더불어 도시의 이름이 ‘어부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보아 분명 어업이 성행했을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보다 해변가에 위치해야 하며 현재 엘-아라즈(el-Araz)라는 장소가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최근 지형학적 조사에 의하면 갈릴리 해수면은 과거에 보다 높았고 고대 지진으로 인해 해수면의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발견되면서 엣-텔이 벳새다일 확률이 높다는 주장이 나왔고 라미 아라브(Rami Arav)에 의해 1987년부터 실행된 발굴은 이 사실을 입증했다. 엣 텔에서는 주후 1세기경 어업을 생업으로 한 도시가 발견되었고 예수가 책망한 도시의 모습이 세상에 드러났다. 여러 채의 가옥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어부의 집이라고 불릴 만큼 낚싯바늘이라든가, 납으로 만든 그물 추, 돌로 만든 닻 같은 물고기 잡이와 관련된 여러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심지어 선두가 말 머리 모양을 한 베니게 어선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새겨진 인장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유명한 집은 포도주 제작자의 집으로 헬라시대의 포도주 항아리 4통과 값비싼 수입산 도기들이 발견되었다.그술 땅의 요새신약에서의 잦은 언급과는 달리 벳새다는 구약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그러나 주전 14세기경 이집트에서 씌어진 아마르나 문서에 이미 등장하는 갈릴리 북쪽에 살았던 그술 사람들의 주요 도시였던 것으로 보인다.여호수아 13장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은 마아갓 사람들과 더불어 그술 사람들을 내쫓지 못했고 결국 그들과 함께 거주하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수 13:13). 다윗은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와 결혼하여 압살롬을 낳았다(삼하 3:3;13:37). 압살롬은 아버지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 결국 왕위를 잇지는 못하지만 그의 어머니와 같은 이름을 지어준 그의 딸 마아가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 르호보암은 마아가를 그의 어떤 아내들보다 더욱 사랑했지만(대하 11:21) 그녀는 분명의 그술 출신인 할머니 시대에 이미 전수된 가나안 신앙을 답습하여 아세라 신상을 만들어 그의 아들 아사에게 결국 폐위당하고 말았다(왕상 15:6).고고학 발굴을 통해 신약시대 유적지 층 아래에서 발견된 구약 시대의 벳새다에는 주전 10∼9세기 상당히 요새화된 도시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9세기 이후 북왕국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지만 아람과의 국경선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의 잦은 전쟁 탓에 여러 차례 통치자가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전 732년 경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Ⅲ세에게 결국 도시는 함락당했고 화재로 불탄 도시의 흔적이 그대로 발견되었다.함락되기 전의 도시 전체는 잘 다듬은 현무암을 쌓아 건축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벽은 표면은 하얗게 회칠을 하여 멀리서 보면 흰색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요새였다. 성문 안 쪽에는 도시의 영주나 재판관들이 백성을 만날 수 있는 돌로 만든 벤치가 놓여 있었다. 성문은 양 쪽에 두 개의 방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태양에 말린 흙벽돌로 만들어졌으며 그 두께가 3m에 달한다. 성문 방들 중 하나에는 불에 탄 보리가 가득히 발견되어 식품 저장고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방에는 디글랏 빌레셀 Ⅲ세와의 전쟁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화살과 창 촉들이 발견되었다.성문의 또 다른 특징은 벽면을 움푹 판 벽감이 양쪽에 마련되어 있어 이곳에서 제의가 행해진 것이다. 오른쪽 벽감에는 두 개의 계단으로 높게 만들어진 단상이 발견되었고 현무암으로 만든 큰 그릇과 향을 피웠던 제대와 용기들이 발견되었다. 아마도 이곳은 성을 출입하는 이들이 제의를 위해 향을 피우거나 제수를 부었던 장소로 보인다.이곳에서 발견된 것들 중에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현무암으로 만든 석상이다. 이 석상은 한때 위의 단상 위에 세워져 있던 것으로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입상이나 주상이다. 석상의 한쪽 면에 조각된 두 뿔이 달린 황소는 마치 인간처럼 서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장검을 차고 있다. 이 석상에 대해서 학자들은 뿔의 모양이 마치 달의 모습을 하고 있어 메소포타미아의 달의 신인 ‘신’이라고 보거나 황소가 상징인 가나안의 천둥 번개의 신 바알로 보고 있다. 왼쪽의 벽감 앞에는 계단은 없지만 또 다른 제의를 위한 단상이 마련되어 있었다.성 안에서는 주전 9세기에 건축된 궁전이 발견되었다. 궁전은 왕좌가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중앙의 방과 이 방을 둘러싼 8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안에서는 이집트의 장인의 신 프타에코의 작은 신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궁전은 앗수르의 공격에도 허물어지 않고 남았지만 이후 몇 차례 보수되어 사용되었다.앗수르의 대학살에서 벳새다는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오랫동안 작은 마을로 존재했었다. 주전 4세기경 헬라시대에 가나안 땅을 나누어 가졌던 프톨레미 왕조와 셀루시드 왕조의 경계 지역으로 상당히 번성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후 30년 경 요세푸스에 의하면 도시는 헤롯 빌립보에 의해 로마 황제의 어머니의 이름을 따라 줄리아스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큼 성장했지만 주후 70년 이스라엘의 로마의 손에 멸망하면서 도시는 작은 유대인 어촌이 되었다.◇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김진산 박사<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출처] -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