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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LAND

  • 세겜(shechem)


    곡창지대 끼고 수자원 풍부한 북 왕국 이스라엘 첫 수도
    세겜의 위치와 고고학적 발견
    세겜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첫 수도이자 아브라함이 땅을 약속받은 장소로 유명하다. 1903년까지만 해도 세겜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진 바 없었다. 주후 1세기 유대 역사기록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세겜은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에 위치해 있다고 전해졌다. 주후 4세기 교회 역사학자 유세비우스는 네아폴리스로 불리는 장소에 있는 야곱의 우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있다고 말했다.
    1903년 독일 학자들은 세겜의 위치를 밝히기 위해 네아폴ㅁ리스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네아폴리스는 헬라어 발음인데 아랍어와 섞여 현재는 나블루스라 불리는 도시였다. 전통적으로 야곱의 우물과 요셉의 무덤이라 불리는 장소가 있어 이곳에서부터 탐사를 시작했다.
    결국 나블루스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 텔 발라타(Tell Balatah)에서 고대 유적의 흔적이 발견됐다. 1913년 셀린(E Sellin)은 세겜에서 발굴을 시작했지만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발굴은 중단됐다. 1928년, 1932년, 1934년의 발굴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0∼6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미국의 발굴은 세겜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족장시대의 세겜
    세겜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65㎞ 떨어진 곳이다. 동서남북으로 연결되는 주요 도로 선상에 위치해 있다. 오늘날에도 예루살렘에서 출발해 팔레스타인의 서안(웨스트뱅크)을 지나 갈릴리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겜을 통과해야만 한다. 세겜은 에브라임 산지의 곡창지대를 끼고 있으며 남동쪽으로 400m 떨어진 곳에 야곱의 우물이라 불리는 장소가 있을 만큼 수자원 역시 풍부했다.
    덕분에 세겜은 수천년 전부터 사람이 거주하는 도시로 성서 외의 자료에도 자주 등장하는 고대도시였다. 세겜은 가나안 땅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주전 19세기 이집트의 세소트리스 3세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이집트 장군 쿠-세벡(Khu-Sebek)의 무덤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이집트가 ‘skmm’ 즉 세겜을 정복했다는 사실이 언급돼 있다. 비슷한 시기의 또 다른 점토판에는 세겜이 이집트에 저항하는 주요 도시 중 하나라고 명시돼 있다. 유사한 시대에 성서도 세겜을 언급하고 있는데 하람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 온 아브라함은 세겜 상수리 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을 만나 이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며 이곳에 제단을 쌓았다(창 12:6∼8).
    밧다아람에서 돌아와 얍복강 해변에서 형 에서와 화해를 했던 야곱은 세겜에 정착했다. 세겜의 아들들로부터 밭을 사들여 그곳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지칭했다(창 33:18∼20). 그러나 세겜의 아들들은 야곱의 집안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들은 야곱의 딸 디나를 범하였고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을 죽였다(창 34장). 세겜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위한 제의적인 의미를 가진 장소가 아니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게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창 35:1)고 명령했다.
    이상한 점은 이러한 피 흘림과 복수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세겜의 정복은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오히려 세겜 땅에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정리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이 계약 백성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언약의 증표로 돌을 세웠다(수 24장). 대부분 학자들은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의 남자들을 죽인 후 아마도 세겜에는 야곱의 친척들이 남아 있었고 세겜은 이후에도 야곱의 자손들과의 연이 닿아 있었다고 보고 있다. 요셉의 무덤 역시 이곳에 마련된 이유이기도 하다(수 24:32). 실제로 세겜은 가나안 정복 시기에 파괴된 고고학적 흔적이 없다.
    바알 브릿 신전
    고고학적 발견은 족장들의 시대에 세겜에 요새화된 도시가 있었음을 알렸다. 더불어 주전 14세기 기록된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에서도 가나안의 중심 도시로서 샤크무(Shachmu)라 불리고 있다. 세겜은 아마르나 문서 중 11개의 문서에 등장하고 있는데 세겜의 라바야라는 인물이 하비루와 대적하고 있음도 언급됐다.
    세겜은 물과 양식 모두 풍부한 곳으로 도시가 세워질 조건은 갖추었지만, 지형은 적을 막기에 유리하지 못한 평지에 가까웠다. 결국 도시는 튼튼한 성벽과 성문을 갖출 수밖에 없었다. 높이 8m의 성벽을 둘러 인공 언덕을 쌓아 공격을 막았다.
    주전 20세기부터 건축된 성문은 양쪽에 각각 3개의 기둥이 세워져 마치 2개의 방을 갖춘 모양이었다. 이 성문은 주전 12세기까지 계속 사용됐다. 기둥 아래 부분은 당시 시리아에서 유행하던 ‘오토스타트(잘 다듬은 석판)’를 둘러 성문을 더욱 강화하거나 장식하는 효과도 나타냈다. 가장 안쪽의 기둥과 가장 바깥쪽의 기둥 사이에는 나무로 만든 성문이 끼워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전 20∼12세기 지속적으로 사용된 요새화된 신전은 벽의 두께가 5m가 넘는다. 신전의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길게 놓인 방에 두 줄의 기둥들이 있다. 가장 안쪽은 지성소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신전은 사사기 9장에 나오는 세겜의 신인 바알 브릿의 신전이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은 세겜의 바알브릿 신전에서 전쟁을 위한 은 70개를 후원받아 자기 형제 70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다.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아들 요담만이 숨었으며 아비멜렉은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왕이 되었다.
    이에 요담은 그리심산 꼭대기로 가서 목소리를 높여 세겜 사람들을 회유했고 저주의 예언을 퍼부었다. 요담의 예언은 아비멜렉에게 임했으며 결국 세겜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신전으로 도망간 사람들과 함께 이 신전을 불살랐다. 실제로 신전과 도시는 주전 1100년께 화재로 무너진 것이 발견되었다.
    왕국시대의 세겜
    주전 10세기 세겜은 솔로몬의 행정구역 중 에브라임 산지의 중심지로 다시 세워졌다. 르호보암은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세겜으로 갔지만 거기서 그가 행한 어리석은 판단 때문에 나라가 분열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 지파의 여론을 모아 북 왕국 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이 선택한 수도는 세겜이었다. 세겜의 지리적 입지와 풍요로운 환경은 분명 수도로서 좋은 조건이었을 것이다. 고고학적으로도 주전 10세기 포곽성벽이 건설된 흔적이 나타났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로보암은 수도를 부느엘로 옮겼다(왕상 12:25). 세겜은 복수를 피해 도망가는 죄인들의 도피처로서의 기능을 할 뿐이었다(수 20:7, 대상 6:67).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세겜은 주전 722년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파괴됐다. 이후 세겜은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가 됐다. 다만 자신들을 사마리아인이라 부르는 사람들만이 그리심산에 모여 살 뿐이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야곱의 우물이 세겜에 있었다는 것(요 4:5∼6) 외에 신약에서 세겜은 더 이상 언급이 없다. 주후 70년 이후 고대 도시가 있었던 세겜은 잊혀졌고 평지에는 로마의 네아폴리스 즉 ‘new city’가 세워졌고 후대에 아랍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a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출처] - 국민일보

  • 한눈으로 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와 성경연대기

  • 한 눈으로보는 이스라엘 성서지도


  • 고라신(chorazin)

    사자상·메두사… ‘우상숭배’ 넘쳐 저주받은 도시
    예수께서 권능을 행하신 도시지난 호에 소개된 벳새다와 함께 고라신은 갈릴리 주변의 유대인 도시로서 예수께서 활동했던 무대이기도 하다. 고라신은 마태복음(11:20∼24)과 누가복음(10:13∼15)에 각각 한 번씩 언급되고 있는데 두 구절은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애석하게도 고라신은 예수께서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과 함께 회개하지 않은 도시로 책망을 받았다. 고라신에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 같은 이방인의 도시에서 행했다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며 심판 날에 오히려 이 이방인의 도시들이 고라신과 벳새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말했을 정도로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신약성서는 벳새다가 제자들의 고향이라고 말하면서 예수의 사역을 다루고 있지만 고라신에서 어떤 사역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안타깝게도 고고학자들마저 고라신에 주후 1세기쯤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는 흔적만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주후 3∼4세기 유대인의 거주지역이 발견되면서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유대인이었을 확률이 높아졌다.유대인의 흔적이 발견되다고라신은 갈릴리 호수 북쪽 해변가에 있는 도시로 가버나움에서 동쪽으로 2.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1962∼64년 처음 유적지에 대한 조사와 발굴이 시작되었고 1980∼87년 보다 광범위한 발굴이 실행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적+지에는 주후 1세기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주요 건물들은 주후 3∼4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건물들의 대부분은 갈릴리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산석인 현무암으로 지어졌다.도시의 전체 면적은 10만㎡에 달하는데 회당을 중심으로 5구역으로 나눈 모습과 유대인들이 안식일 전이나 회당에 가기 전 몸을 씻는 정결례를 행했던 미크베가 발견된 것은 이 도시가 유대인의 거주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적지 내에서 많이 발견되는 올리브기름을 짤 때 사용한 압축 돌들은 올리브기름 생산을 통해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고라신이 발굴되었을 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곳에서 발견된 회당에 관심을 가졌다. 우선 회당의 연대가 예수의 공생애 시기인 주후 1세기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무암으로 지어진 회당은 전형적인 갈릴리 양식으로 지어졌다. 갈릴리 양식의 회당 건물들은 두 줄의 기둥들이 세워져 전체 건물을 세 부분으로 나누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고 세 개의 입구가 있으나 가운데가 가장 크게 만들어졌으며 실내의 벽을 따라 벤치 형태의 돌 의자가 마련돼 있었다. 회당은 주후 2세기부터의 흔적이 발견되며 주후 4세기 파괴되었다가 주후 6세기 다시 세워졌다.회당, 유대인들의 신앙적·민족적·정치적 중심회당은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발견되는 건물의 이름이며 동시에 유대인들의 모임을 칭하는 말로 오직 예루살렘에만 있을 수 있었던 성전과는 달리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모든 곳에 존재했다. 그렇다 보니 이방 도시들 가운데서 회당은 유대인의 상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무너지고 희생제사가 더 이상 드려지지 않으면서 제사장의 역할은 사라졌다. 유대인들은 제사 대신 함께 모여 기도와 토라를 연구하며 토론하였다. 회당은 헬라어로 시나고그로, 히브리어 카할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모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회당은 이스라엘의 바빌론 포로기(주전 586∼537년)에 혹은 페르시아에서 돌아와 제2성전을 짓던 시기에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성전이 없어진 포로기에 유대인들은 성전 파괴를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하는 날들(슥 7:5)과 말씀을 자손들에게 항상 읽어주는 관습을 행하던 특별한 장소가 필요했을 것이며 이 장소는 세대를 거쳐 건물의 형태로 발전해 기원전 1세기 전후 유대인 삶의 구심점이 되었으리라고 본다.가장 오래된 회당은 그리스 델로스 섬에서 발견된 회당(주전 150∼128년)이며 팔레스타인 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회당은 하스모니아 왕조가 지은 여리고에 위치한 겨울궁전 안의 것(주전 75∼50년)이다. 로마의 점령 이후 유대인들은 그들이 가서 사는 곳마다 회당을 지었다. 고라신을 비롯해 가버나움 그리고 쯔팟 같은 유대인의 도시에서는 의례히 발견되는 것이 회당이다. 회당은 큰 방을 중심으로 작은 방 몇 개가 붙어 있는 형태로 지어졌는데 전체 구조는 시대와 장소에 유행하는 스타일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건물의 동일한 특징은 중앙을 중심으로 두 줄의 기둥이 세워져 있고 건물의 벽면을 따라 계단이 벤치 형태로 깎여 있거나 돌을 쌓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벤치는 회당에서 모이는 회중이 벽면을 따라 둘러앉아 있을 수 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신약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회당에는 회당장이 있어(막 5:22, 35∼36, 눅 8:49; 13:14; 행 13:15; 18:8, 17) 집안 대대로 회당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회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식과 공동체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던 사람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1세기쯤 기록된 테오도투스(Theodotus) 석비의 경우 이 석비를 만든 테오도투스는 본인을 회당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회당장의 지휘 아래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기도를 했고(마 6:5), 안식일과 절기에 성찬 예식을 행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관습이 있었다. 때로 마을에서 벌어지는 재판이 회당에서 행해지기도 하였는데 예수께서도 회당에서 채찍질이 있으리라 말씀하셨다(마 10:17; 23:24; 막 13:9). 회당은 각 마을에 가장 큰 건물로 사람들이 회합할 수 있는 장소였다. 덕분에 회당에서는 종교적 모임 외에도 정치적 모임을 갖기도 했다.모세의 자리그러나 무엇보다 회당에서 이루어진 가장 큰 활동은 토라 즉 구약의 5경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다. 예수 역시 회당에서 토라를 읽고 토론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이셨으며(마 4:23; 9:35; 13:54; 막 1:21∼39; 6:2; 눅 4:15, 16; 6:6; 13:10; 요 6:59; 18:20) 사도행전에서도 스데반과 다른 제자들 또한 성경을 읽고 토론하며 예수의 복음을 전파했다. 성서는 토라를 읽을 때 “회당의 높은 자리”(마 23:6; 막 12:39; 눅 11:43; 20:46)에 서서(눅 4:16)에서 읽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토라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토라를 읽는 자는 높게 만들어진 단상으로 올라갔다. 토라를 읽고 나면 강론과 토론이 잇따랐고 선생들 즉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 혹은 회당장은 “모세의 자리”(마 23:2)에 앉아 토론을 이끌었다. 특별히 고라신의 회당에서는 “모세의 자리”라고 새겨진 현무암으로 만든 의자가 발견돼 성서 속의 회당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일반인은 회당 벽을 따라 깎아져 있었던 벤치에 앉아 있었다.고라신의 회당 건물에서 또 다른 우리의 이목을 끄는 것은 한 쌍의 돌로 만든 사자 조각상과 건물 곳곳을 장식한 동물 형상과 독수리, 무장한 군사,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메두사의 머리 등의 조각들이다. 형상을 조각하는 것은 금기시하던 유대인들의 건물이 대부분 꽃이나 식물 혹은 기하학적 무늬들로 장식되는데 반해 고라신의 회당은 율법을 어기고 있어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고라신을 향한 예수의 저주를 떠올리게 한다.◇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김진산 박사<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출처] - 국민일보

  • 벳새다(bethsaida)

    오병이어 등 기적 보고도 회개안해 예수님이 책망한 땅
    어부의 집 벳새다성서의 여러 지역 중 구약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갑자기 신약에 등장하여 마치 역사의 연속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이스라엘의 복잡한 역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시대적으로 그 지역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다르기도 했을 뿐 아니라 시대적 화자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구약은 주로 정치적 경계나 전쟁의 접전지 등을 묘사한 데 반해 신약은 예수의 발자취와 복음의 경로를 이야기하고 있다.이스라엘의 경우 물이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에 수자원만 있다면 항상 거주지가 되었다. 덕분에,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신약의 유적지들은 구약 시대에도 거주했던 흔적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예들 중 갈릴리에 위치한 벳새다가 있다.벳새다는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로 예수의 발자취와 관련이 있다. 벳새다는 예수의 제자들 중 빌립과 안드레 그리고 베드로의 고향이다(요 1:44; 요 12:21).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로 남자만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에 남은 음식을 모은 기적과 관련하여 언급된 장소이기도 하다(막 6:45; 눅 9:10). 벳새다에서 눈 먼 소경이 그에게 나오자 예수는 그의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안수했고 소경은 눈을 떴다(막 8:22∼26). 이러한 예수의 권능을 눈으로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벳새다의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결국 예수는 벳새다를 두로와 시돈, 심지어 소돔과 비교하며 심판 날에 그들이 얼마나 고통당할 것인가 책망하였다(마 11:21; 눅 10:13∼15).성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갈릴리 호수변에 위치했었던 벳새다를 찾는 노력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미 1839년 이스라엘을 조사하여 성서의 땅들을 찾아냈던 성서학자 로빈슨은 요단강 동편, 갈릴리 호수 북쪽에서 2㎞ 떨어진 엣-텔(et-Tell)을 벳새다일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유적지가 호수변에서는 너무 멀고 더불어 도시의 이름이 ‘어부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보아 분명 어업이 성행했을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보다 해변가에 위치해야 하며 현재 엘-아라즈(el-Araz)라는 장소가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최근 지형학적 조사에 의하면 갈릴리 해수면은 과거에 보다 높았고 고대 지진으로 인해 해수면의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발견되면서 엣-텔이 벳새다일 확률이 높다는 주장이 나왔고 라미 아라브(Rami Arav)에 의해 1987년부터 실행된 발굴은 이 사실을 입증했다. 엣 텔에서는 주후 1세기경 어업을 생업으로 한 도시가 발견되었고 예수가 책망한 도시의 모습이 세상에 드러났다. 여러 채의 가옥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어부의 집이라고 불릴 만큼 낚싯바늘이라든가, 납으로 만든 그물 추, 돌로 만든 닻 같은 물고기 잡이와 관련된 여러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심지어 선두가 말 머리 모양을 한 베니게 어선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새겨진 인장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유명한 집은 포도주 제작자의 집으로 헬라시대의 포도주 항아리 4통과 값비싼 수입산 도기들이 발견되었다.그술 땅의 요새신약에서의 잦은 언급과는 달리 벳새다는 구약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그러나 주전 14세기경 이집트에서 씌어진 아마르나 문서에 이미 등장하는 갈릴리 북쪽에 살았던 그술 사람들의 주요 도시였던 것으로 보인다.여호수아 13장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은 마아갓 사람들과 더불어 그술 사람들을 내쫓지 못했고 결국 그들과 함께 거주하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수 13:13). 다윗은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와 결혼하여 압살롬을 낳았다(삼하 3:3;13:37). 압살롬은 아버지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 결국 왕위를 잇지는 못하지만 그의 어머니와 같은 이름을 지어준 그의 딸 마아가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 르호보암은 마아가를 그의 어떤 아내들보다 더욱 사랑했지만(대하 11:21) 그녀는 분명의 그술 출신인 할머니 시대에 이미 전수된 가나안 신앙을 답습하여 아세라 신상을 만들어 그의 아들 아사에게 결국 폐위당하고 말았다(왕상 15:6).고고학 발굴을 통해 신약시대 유적지 층 아래에서 발견된 구약 시대의 벳새다에는 주전 10∼9세기 상당히 요새화된 도시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9세기 이후 북왕국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지만 아람과의 국경선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의 잦은 전쟁 탓에 여러 차례 통치자가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전 732년 경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Ⅲ세에게 결국 도시는 함락당했고 화재로 불탄 도시의 흔적이 그대로 발견되었다.함락되기 전의 도시 전체는 잘 다듬은 현무암을 쌓아 건축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벽은 표면은 하얗게 회칠을 하여 멀리서 보면 흰색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요새였다. 성문 안 쪽에는 도시의 영주나 재판관들이 백성을 만날 수 있는 돌로 만든 벤치가 놓여 있었다. 성문은 양 쪽에 두 개의 방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태양에 말린 흙벽돌로 만들어졌으며 그 두께가 3m에 달한다. 성문 방들 중 하나에는 불에 탄 보리가 가득히 발견되어 식품 저장고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방에는 디글랏 빌레셀 Ⅲ세와의 전쟁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화살과 창 촉들이 발견되었다.성문의 또 다른 특징은 벽면을 움푹 판 벽감이 양쪽에 마련되어 있어 이곳에서 제의가 행해진 것이다. 오른쪽 벽감에는 두 개의 계단으로 높게 만들어진 단상이 발견되었고 현무암으로 만든 큰 그릇과 향을 피웠던 제대와 용기들이 발견되었다. 아마도 이곳은 성을 출입하는 이들이 제의를 위해 향을 피우거나 제수를 부었던 장소로 보인다.이곳에서 발견된 것들 중에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현무암으로 만든 석상이다. 이 석상은 한때 위의 단상 위에 세워져 있던 것으로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입상이나 주상이다. 석상의 한쪽 면에 조각된 두 뿔이 달린 황소는 마치 인간처럼 서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장검을 차고 있다. 이 석상에 대해서 학자들은 뿔의 모양이 마치 달의 모습을 하고 있어 메소포타미아의 달의 신인 ‘신’이라고 보거나 황소가 상징인 가나안의 천둥 번개의 신 바알로 보고 있다. 왼쪽의 벽감 앞에는 계단은 없지만 또 다른 제의를 위한 단상이 마련되어 있었다.성 안에서는 주전 9세기에 건축된 궁전이 발견되었다. 궁전은 왕좌가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중앙의 방과 이 방을 둘러싼 8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안에서는 이집트의 장인의 신 프타에코의 작은 신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궁전은 앗수르의 공격에도 허물어지 않고 남았지만 이후 몇 차례 보수되어 사용되었다.앗수르의 대학살에서 벳새다는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오랫동안 작은 마을로 존재했었다. 주전 4세기경 헬라시대에 가나안 땅을 나누어 가졌던 프톨레미 왕조와 셀루시드 왕조의 경계 지역으로 상당히 번성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후 30년 경 요세푸스에 의하면 도시는 헤롯 빌립보에 의해 로마 황제의 어머니의 이름을 따라 줄리아스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큼 성장했지만 주후 70년 이스라엘의 로마의 손에 멸망하면서 도시는 작은 유대인 어촌이 되었다.◇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김진산 박사<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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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삼열 목사3(Samuel A. Maffett, 1864-1939)


"믿는 것인데는"모펫 목사는 신학교에서 교리학을 가르쳤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다. 모펫 목사가 한글에 서툴러 강의 중에도 버릇처럼 하는 말 중 "–데는"으로 말을 맺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삼위일체를 가르치면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이렇게 꼭 믿는 것인데는 형제들도 그렇게 믿을 것인데는 무엇이든지 물을 것인데는 그래도 나는 어떤 방정식 같이 그런 대답으로 여러 형제의 질문에 대답을 못할 것인데는 나는 믿기는 그대로 믿는 것인데는 여러 형제들도 그렇게 믿을 것인데는 믿으려는데 물어 보실 수도 있는 것인데는 내 대답은 여러분의 묻는 그 물음에 대답을 못할 것인데는 그래도 나는 그렇게 믿는 것인데는 여러분도 그렇게 믿을 것인데는 믿는 그 어떤 부분에 물을 수도 있는 것인데는 그 대답을 못할 것인데는 그래도 나는 그렇게 믿기는 믿는 것인데는 여러분도 그렇게 믿을 것인데는 얼마든지 물을 수 있기는 있는 것인데는 그 대답을 잘 못할 것인데는 대답 못해도 나는 꼭 그렇게 믿는 것인데는 여러 형제들도 그렇게 믿어야 될 것인데는……"이라고 "데는 데는“을 반복하면서 이 말을 몇 십분을 반복해서 이야기 했다고 한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은 삼위일체를 꼭 믿으며 여러분도 그렇게 믿게 되어질 것이라는 말을 진지하게 어눌한 우리말로 반복하여 학생들이 크게 웃었다는 이야기이다.큰 인재를 키우신 이모펫 목사가 키워낸 인물은 무수히 많다고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평양 신학교 1회 졸업생들의 면면만 살펴봐도 한국 교회사에 기록된 쟁쟁한 인물들을 얼마나 많이 키워냈는지 알 수 있다. 제1회 졸업생 방기창, 서경조, 양전백, 한석진, 이기풍, 길선주, 송인서 중에는 33인 민족대료로 독립만세에 서명한 길선주 양전백이라는 인물도 있고, 조선 땅 곳곳에 교회가 굳건히 세워지도록 일조한 한석진, 제주도의 복음화의 개척자 이기풍, 아들에게 한국 최초 유아세례를 받게 했고 군 선교에 일조했던 서경조 목사 등이 있었다. 특히 한국 교회 부흥의 단초를 만들었던 길선주 목사는 최초의 부흥 사경회를 시작해서 많은 교회를 순회하며 지대한 영적 영향력을 키쳤던 인물이다.모펫 목사의 품위모펫 목사는 키가 크고 위풍이 당당한 성격이었다. 그래도 극히 인자하하였고 그 돈독한 신앙을 자기 삶으로 보여준 사람으로 당시 사람들은 평가한다. 교회 개척과 교육기관을 다양하게 세워 애국 애족의 인재를 많이 길러낸 인물이었지만 교회의 행정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그에 합당한 인물을 발탁하여 그들이 담당하게 했다고 한다. 세워진 교회에 문제가 발생할 때에도 자신이 직접 관여하지 않고 제자들을 파견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그 중 한명이 한석진 목사였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분야의 탁월함을 이미 알고 전국교회로서 난문제 해결에 한석진 목사를 보내 해결하도록 했다.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웠지만 시작은 자신이 하되 그 후에는 적절한 인물을 앉혀 운영을 하도록 하였다. 전국 곳곳에 좋은 땅을 발견하여 사두고 교회를 세울 인물을 찾으면 그들로 교회당을 짓도록 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일체 간섭이나 충고를 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였다. 재정적 어려움이나 운영의 난관을 만날 때도 뒤에서 모금을 하거나 도움이 될 만한 이들을 보내 어려움을 처리하게 하였지 그가 앞에 나서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어떤 일에 자문을 구하면 그의 특유의 어눌한 한국어 표현으로 "해 볼 것인데는 하나님과 의논할 것인데는!!"라고 대답하기 일쑤였다고 한다.이러한 그의 모습이 한국교회가 빨리 스스로 독립하여 세워지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고 사람들은 이야기 한다.유학생 하나 없이 이처럼 스스로 깨달아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교회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 한국 교회 신앙의 초석을 놓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포 삼열 목사2(Samuel A. Maffett, 1864-1939)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모펫 목사의 교회당 터모펫 목사는 가는 곳마다 위치가 그들의 중심이 되어질 곳에 땅을 사두곤 하셨다. 구 한국시대라 엽전을 사용할 때에 엽전 몇 푼씩 주고 땅을 곳곳에 사두었다. 후에 그곳에 믿는 사람이 생기고 교회당을 짓게 될 때가 되면 그 준비해 둔 땅이 그 동리엔 중심지라 교회가 좋은 곳에 세워질 수 있었고 자연적으로 성도수 증가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한 번은 교회당을 지으면 좋은 곳이라 알아보니 모펫 목사의 소유지였다. 모펫 목사를 찾아가 의논하면 "땅은 참 좋은데 내 그 땅을 팔지요. 사서 지으시오“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냥 쉽게 무료로 땅을 얻을 줄 알았던 구매자가 땅값이 나름 많이 올라 살 수 없을 것을 알고 실망을 하고 있는데 독촉을 하며 "문서를 씁시다. 그래야 소유를 넘기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터를 거래 가격에 살 만한 처지가 아니라 말없이 잠잠히 있는데 모펫 목사의 서기를 시켜서 종이를 가져오게 하여 매매계약서를 썼다. 찾아간 이는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는데 대금을 일금 몇 전이라 썼다고 한다. 너무 터무니 없이 싼 가격을 쓴걸 보고 어안이 벙벙하고 있는데 "내가 살 때의 그 값이요. 산 값으로 파는 겁니다"라고 말하여 매수자가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일화가 한번은 아니었던 것 같다.또한 이런 일화도 있다. 모펫 목사가 평양의 요지에 사두었던 땅이 후에 값이 크게 올라 큰 값이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모펫 목사를 잘 모시던 신학교 서기로 일하던 문서기라는 분이 있었는데 하루는 문서기를 찾아 "내 아무데 있는 땅을 문서기에게 팔려고 하는데 오늘 문서를 씁시다"라고 말하였다. 문서기가 "저는 그럴 힘이 없습니다. 그 땅을 제가 어떻게 사요?"라고 대답하자 모펫 목사는 “나는 그 땅은 꼭 문서기에게 팔려고 합니다. 종이 가져오세요. 문서로 계약합시다”라며 막무가내였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모펫 목사 자신이 손수 종이를 가져와 계약서를 쓰게 되었다. "내 시키는 대로 쓰시요"하면서 살 때의 그 가격으로 쓰라고 하더니 웃으면서 "그 값 내시요. 나는 산 값으로 문서기에게 팔려고 산 것이요“라고 말하였다. 이 일로 문서기는 꽤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한국 교회 뿐 아니라 함께 일한 동역자들에게 영적인 부분 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꽤 윤택한 삶을 살게 도와 주었다는 일화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모펫 목사는 그의 보수적인 신앙이 그대로 조선 땅에서도 실천되었다. 한달에 몇 번 고국에서 오는 편지조차 주일에는 우편물에 그대로 두고 만지지도 않았다고 한다. 또한 성화조차 집에 걸어두지 않았고 마리아 상 같은 성상은 아주 혐오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성화나 성상이 카톨릭이 미혹하고자 조작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배척했다고 전해진다.모펫 목사와 안익태애국가를 작곡한 작곡자 안익태 선생은 숭실대학교 출신이다. 안익태 선생은 일제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 되었는데 안익태 선생을 일본 경찰이 잡으려 하자 모펫 목사가 안익태 선생을 숨겨 주었고 그를 유럽으로 보내 주었다.모펫 목사의 가족모펫 목사는 원래 결혼했던 부인이 있었는데 부인을 사별하고 그의 처제와 결혼을 했다고 알려진다. 이 부인에게서 한국 신학 대학 원장으로 일하다가 프린스턴 신학 사학교수로 재직했던 마삼낙 목사와 대구 동산병원 설립과 운영에 큰 공헌을 한 마화일 의사가 태어났다. 그리고 모펫 목사의 두 번째 부인도 평양에서 헬라어를 가르쳤다고 한다.그의 행정 수행자1907년 처음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7인은 한석진(韓錫晉), 이기풍(李基豊), 길선주(吉善宙), 송인서(宋麟瑞), 방기창(邦基昌), 서경조(徐景祚), 양전백(梁甸佰)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가 가죽신에 버선을 신고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또 졸업증서 상단에는 손에 든 횃불로 십자가를 비추는 한반도 그림이, 오른쪽에는 데살로니가전서 2장 4절, 왼쪽에는 요한복음 8장 12절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다른 여러 교회 역사의 첫 면을 장식하는 인물이 되었고, 한국 기독교 역사의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이 되었다.

마포 삼열 목사1(Samuel A. Maffett, 1864-1939)

1864년 미국 인디아나주의 매디슨에서 태어나 청교도적인 엄격한신앙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 자란 모펫은 1888년당시 보수파 신학교로 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한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26세가되던 다음해1889년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조선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1890년 1월 서울에 도착했다.이미 서울에 와있던 선배 선교사들의 지도아래 현지훈련을 받으며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한 ‘예수교학당’ (경신중학교)의 교육사역을 하던 그는 만주의 로스 목사와 황해도의 첫 조선교회인 소래교회, 조선인 조사 백홍준, 서상륜 등의 활발한 선교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서북지역선교에 관심을 갖게됐다.그는 6개월간의 한국어 연수교육을 마친 후 1890년 8월 제1차 전도여행을 떠나 평안북도 의주을 거쳐서 황해도 소래를 방문하였으며 다음해 제2차 전도 여행 때에는 만주의 로스 목사까지도 만나보았다. 그는 현지를 직접 방문하면서 서북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선교계획을 세웠으며 1893년의 제 3차 전도여행을 통해 토마스 목사가 순교한 평양을 자신의 선교중심지로 확정하였다.서도(서도)의 개척자여기서 서도라 하면 황해도와 평안도를 가리킨다. 모펫(Maffet) 목사는 이 서도의 복음의 개척자이며 평양의 복음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교육 기관으로는 숭실대와 평양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많은 교회를 개척하였다.그의 선견지명(선견지명)모펫 목사가 평양에 온 것은 1887년이었다. 그때는 토지 등 부동산 등록도 없던 때였는데 평양시의 지리적 형태로 보아서 대동강 능라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장대현이라는 높은 언덕이 아주 선교를 위한 요충지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미 그곳은 천주교에서 경계를 세워 자신들의 영역임을 표시해 둔 상태였다. 이것이 법적인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간다면 법적인 소유권을 얻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모펫 목사는 서둘러 한국인 한명을 수소문해서 돈을 주어 그 안에 집을 짓고 등기 작업까지 마치게 한 후에 다시 자신이 그 집을 구매하여 법적인 소유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넓은 대지를 법적으로 소유권을 얻어 서도의 모 교회인 장대현 교회와 숭덕학교를 세웠다.바로 이 장대현 교회를 중심으로 강서의 탄포리교회(灘浦里敎會), 청산포교회(靑山浦敎會), 대동군의 태평(太平), 외리교회(外里敎會), 중화군의 읍내교회(邑內敎會) 등 여러 교회가 파생, 발전하여 서북계 신앙의 발상지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또한 모펫 목사는 숭실중학교, 숭실대학교, 신학교를 세워 한국 교회의 기초를 닦았다. 그뿐 아니라 숭신성경학교, 숭덕학교, 숭의녀학교 등을 세워 남자 뿐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교육의 혜택을 받도록 하였다. 또한 교육을 받지 못한 노처녀나 과부, 만학들을 위해선 숭현학교를 세워 학교 연령이 지난 부녀자들의 교육도 시켰다. 정규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를 뿐 아니라 정규 교육을 못 받은 이들 위해서 만학일망정 공부하여 교회에 크게 기여한 이들을 많이 배출시켰다. 농한기에는 학년별 성경학교를 수시로 개학하여 농촌 평신도 교육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널다리 골의 모펫 목사대동문 안에 널다리 골이라는 동네가 있다. 모펫 목사는 처음 평양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기와 집을 얻어 거주하였다. 평양 사람들은 처음 보는 파란 눈의 흰 서양인을 구경하러 떼로 모여 들었다 한다. 그 눈으로 정말 보이는가 해서 눈 앞에다 손가락을 대면서 꼬불거리기도 하고 뱅뱅 돌리는 일도 있었다 한다.처음에는 모펫 목사 혼자 조선 땅에 들어왔고, 얼마 후 가족이 조선 땅을 밟았는데 철로가 황주까지만 연결되어 그 곳까지는 기차로 와서 거기서 부터는 말을 타고 평양에 들어와야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양인을 위협하려고 황주까지 와서 그에게 돌을 던져 그 이마를 깨져 그 흉터가 이마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모펫 목사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 중에 길선주 목사의 아버지와 평양신학교 제일회 졸업생인 이기풍 목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4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평양 서대문 거리에서 기역자로 서평양 가는 거리가 뚫려 있었는데 그 길이 경창리 길이다. 이 길 좌우에 서평양을 향하여 가는 방향으로는 오른쪽에 서문밖 큰 교회(2000명) 그리고 좀 지나서 평양신학교 그리고 이어서 숭신 성경학교, 숭의녀학교 그리고 선교목사 사택들 그 건너편으로 사택들, 외인 학교, 서대문으로 오면서 숭실대학교, 중학교들이 즐비하게 들어 서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구 곳에 모펫 목사의 선교 40주년을 맞아 모펫 기념관이 세워졌다. 널다리 골에 외국인으로 들어와 숱한 놀림감과 위협과 박해도 있었었는데 경창리 길 좌우 1Km안에 교육기관과 선교사 사택, 교회와 학교로 채워지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모펫 목사가 한국 선교사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선교와 구국에 힘썼던 김세환(3.1운동 민족대표 48인 중에 한 사람)

1. 수원에서 출생3.1운동 48인중에 한사람인 김세환 선생은, 1888년 11월 18일 수원시 남수동 242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소년으로서 한참 그의 꿈을 키워나갈 즈음,수원에는 북감리교회의 메리 스크랜톤(Mrs.Scranton,Mary Fitch,183201909)여사에 의해서 기독교가 들어와 보시동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교회 안에다 3.1남.녀학교를 세우고 한참 선교와 구국교육에 힘썼다. 이로 인해서 교회 안에는 당시 도지사 서리였던 김한목(3.1학교 교장)씨 그리고 이하영(3.1학교 교사,후에 종로교회 담임전도사)씨등 다수의 유지들이 모여,교회는 활기있게 자라고 있었다.이러한 때 김세환선생은 소년으로 기독교에 입신하여 교회안에서 기독교 신앙은 물론 교육가로서 또는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꿈을 키워 나갔다.선생은 일찌기 이러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고 생각되어,한국 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중앙대학에서 신학문을 배웠다.2. 먼저 교육에 큰 뜻을....이렇게 큰 뜻을 품고 고향에 돌아온 김세환선생은 수원상공회의소에서 부속사업으로 1909년 창립한 수원상업강습소에서 직조감독관으로 일하며, 동시에 선생으로 가르치기를 시작하였다. 이 학교는 사립학교로서 현 수원중.고교의 전신이다. 당시 수원에 있는 상인들이 단결하여 항일투쟁을 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학교이다. 이 학교에서 1916년까지 일하면서 강습소를 화성학원으로 발전시킨 후,밀러(Miss Lula a.Miller,1870- 美羅)여선교사에게 발탁이 되어,1917년 3.1여학교 학감으로 그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때 밀러 여선교사는 1909년 3.1여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이래 설립자 힐만(Miss Mary R Hilman)씨와 함께 일하면서,1913년 장안동에서 매향동대지에다 교사를 옮겨지으며 1915년에는 강당을 지어 크게 발전시켰다.그러나 1913년이래 밀러 여선교사가 교육사업만이 아니라 수원지방 부녀사업까지도 맡게 되니,날로 발전하는 학교사업에다가 지방 부녀사업을 도저히 혼자의 힘으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그래서 종로교회의 교인이며 사회의 유지요 교육의 경험자인 김세환 선생을 초빙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후 그는 3.1운동 관계로 몇년 일하지도 못하고 무직 상태에 있는 동안 선교사의 추방으로 3.1남학교가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수원의 유지 최상희씨를 움직여 일만원을 희사케하여 폐교 직전의 학교를 구출하며,1941년에 홍사훈선생을 설득하고 그의 도움을 얻어 수원상업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3. 경기.충청 일원의 책임자로...이렇게 교육가로 활약하던 김세환선생이 3.1운동에 참가하게 된 것은 3.1여학교의 학감으로 있을 때였다. 그는 학교 교사 초빙문제로 중앙 YMCA간사이며 같은 북감리교회의 교인인 박희도 전도사를 자주 만나는 동안,피차에 신앙과 인격과 사상에 공감되여 같이 일할 결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차 그의 권유로 1919년 2월 21일 밤,처음으로 이갑성 선생의 집에서 모인 독립모의에 참여하여 거기서 경기.충청도 일원의 운동 책임자로 선임을 받게 되었다. 당시 경기.충청도 지역은 북감리교회 구역으로 수원과 공주를 각각 중심해서 광활한 지역에 감리교회들이 많이 산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목사 가운데도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그러한 가운데서도 평신도인 김세환 선생이 이 지역의 책임자가 된 것은, 그 개인의 고매한 인격과 투철한 독립사상과 그리고 박희도전도사와의 개인적인 인연 등도 있었겠지만,그것들 외에도 또 다른 원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바로 노블(Noble,William Arthur,1866-1945,)선교사의 영향과 도움이었다. 노블은 1917년 이래 3차에 걸쳐 수원지방 감리사를 역임한 선교사로 수원지방 교회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친 선교사이다.그는 본래 한국민을 동정하고 사랑하던 이로써 수원지방에 온 이래 독립운동에 뜻을 둔 임응순(1882-1930)전도사를 수원지방의 중심교회인 종로교회의 담임자로 파송하는가 하면,1922년에는 3.1우동으로 옥에 갇히었던 송득후 목사를,그리고 1931년에는 3.1운동의 평양지방의 총책임자였던 김찬홍 목사를 파송함으로 계속 수원지방을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만든 선교사이다. 김세환 선생이 그 바쁜 학감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경기.충청도 지역을 찾아다니며 운동을 자유스럽게 한 것은 모두 노블의 도움이었다.김세환 선생은 책임을 맡은 이후로,첫번으로 해미읍내 감리교회에 사경회하러 온 흥성교회의 김병제 목사를 만나 3.1운동 참가 승락을 받은 후, 공주로 가서 감리교회의 목사 현석철을 만나려 했으나 못만나고,그대로 올라와서 박희도에게 보고한 다음, 수원으로 가서,남양교회의 목사 동석기를 만나 승락을 얻었다. 26일에는 이천의 이강백(일명 이강우)목사를 만나 찬성을 얻었고,오산에서 김광식 목사를 만나 찬성을 얻었으며,수원에 와서는 종로교회의 전도사 임응순을 만나 승락을 받아가지고 박희도전도사에게 갔다. 그때는 이미 33인이 결정된 후라 늦어서 안된다고 해서 집에 돌아와 소각하고 말았다.4. 48인중의 한사람김세환 선생이 2월 20일,이갑성 선생의 집 회의에서 참석해서 박희도 전도사로부터 여비로 20원과 동지 모집에 필요한 미농지 15장을 받아 가지고 나온 이래 28일까지,경기.충청도지역 감리교회를 찾아 다니면서 도장을 받은 수가 무려 40명이나 된다. 당시 경상북도를 책임맡은 이갑성선생은 마산 대구 등지로 다녔으나 한사람도 얻지 못해서,재차 다른 사람을 파송해서 전주에서 약간명을 얻은 것을 보면, 놀라운 숫자이다. 김세환선생은 3월 1일 오전 6시 서울로 올라갔다. 가보니 파고다 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부를 계획이,폭동이 일어나 희생자가 날 우려 때문에 명월관으로 장소가 변경된 것을 알게 되었다.그래서 집으로 돌아왔다가 오후 2시에 파고다에서 모이는 학생들의 선언시에 참석하였고,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면서 당주동,종로,무교정,경성일보 앞까지 갔다가 집에 돌아와 13일에 체포되었다. 그가 3.1운동을 계획하고 가장 열렬히 운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33인에 들지 못한 것은,독립운동은 이번 한번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제2,제3의 운동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었고,또 제1선에서 희생되는 이들의 뒷바라지를 맡는 이들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래서 운동 초기에 중심적 역할을 한 송진우,현상윤,최남선 등이나, 천도교에서 운동자금 조달을 맡았던 박인호,노헌용,기독교계에서 역시 핵심인물 중에 하나였던 함태영등과 함께 33인에 들지 못하게 되었다.그러나 재판과정에서는 33인중 상해로 탈출한 김병조나 예심 중에 옥사한 양한묵외 31인과,제2선에 머무르기로 되어 있던 인사들, 또 문서의 대외전달을 맡았던 인사들, 또 학생동원을 맡았던 이들 그리고 황해도 수안사건의 주모자들, 모두 17인이 경찰의 심문과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의 예심을 거쳐 한사건으로 묶어져 소위 48인이 된 것이다. 김세환 선생은 재판을 받을 때 재판장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일.한 합방에 대하여는 어떠한 감상을 가졌나?" 그때 그의 대답은["아무리 세계 대세로 합방이 되었다 하더라도 항상 가슴 속에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모든 물건을 대할 때 초목에서 흐르는 이슬도 눈물인가 하는의심을 품을 지경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래에 정정당당히 조선사람은 권리를 찾고,일본사람은 권리를 돌리어 보낼 시기가 올 줄 안다"] 라고 했다. 다음으로 "피고는 금후로 조선독립을 위하여 활동할 것인가?" 그때 그의 대답은 "그렇다"라고 간단 명료했다. 33인의 이에 대한 답변을 분석해 보면,한.일합방에 대한 질문을 받고 찬성했다는 이가 6명이요,이것조 저것도 아닌 중간이 1명이요,반대했다는 이가 26명이다.또 이후 독립운동을 계속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앞으로는 하지 않겠다는 이가 3명이나 되었다. 이런 가운데서의 김세환 선생은 대답은 높이 평가할만한 것이다.5. 묘는 국립묘지 충렬대에...김세환 선생은 1920년 10월 경성복심법원 재판엣 증거불충분으로 무죄서방되었다. 그가 1년 반동안 수감되었다가 돌아왔으니 예전의 자리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해방의 날까지 그냥 집에 머물러 있다가 병중에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그리던 해방을 맞이했으나 해방된 밝은 낮에 활보 한번 못해 본채,1945년 9월 16일 향년 57세로 그의 생을 마치었다. 그후 5.16혁명정부는 1963년에 그에게 건국 무공훈장을 추서하고 1968년에는 그의 묘를 국립묘지 충렬대에서 이장하였다.(홍석창)

덩케르크의 기적

덩케르크를 아는가. 영국과 프랑스의 40만 연합군이 덩케르크 항구에 포위돼 몰살 위기를 당한다. 연합군의 함선마저 독일군 잠수함의 어뢰를 맞고 침몰해 도저히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윈스턴 처칠 총리가 3만명만이라도 구출해 오라고 명령할 정도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그때 영국 왕실과 처칠 총리는 온 교회와 국민에게 ‘연합군이 무사히 탈출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했다. 처칠 자신도 웨스트민스터 사원 성가대 좌석에 앉아 하루 종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러자 갑자기 폭풍우가 밀려와 거대한 파도가 치고 소나기가 쏟아져 모든 독일 전차들이 진흙탕에 바퀴가 빠져 한 대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덩케르크의 기적이 일어난다. 수백 척의 민간 어선이 자진해서 목숨을 걸고 군인들을 구출하러 오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독일의 전투기였다. 그때 연합군의 전투기 3대가 출격해 사활을 걸고 공중전을 펼친다. 2대가 먼저 격추되고 마지막 한 대의 전투기도 연료가 떨어져 적진에 착륙한다. 그런데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전투기 조종사의 얼굴은 패배자의 절망이 아니라 승리자의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전투기 조종사와 민간 어선들의 필사적인 구출작전으로 34만여명의 연합군이 구출됐고 처칠은 그 군사들을 재정비해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지금 한국교회 역시 덩케르크의 기적이 필요하다. 한국교회 생태계를 깨뜨리려는 수많은 반기독교적 사상과 문화, 입법안이 밀려오고 있다. 이대로 가면 한국교회 역시 유럽교회처럼 급속하게 쇠퇴하다가 언젠간 사멸되고 말 것이다. 누군가는 희생해야 하는데 그런 지도자가 없어져 간다.
각자 교회에서야 잘 섬기고 있지만 개교회가 아닌 공교회를 위한 희생과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지도자가 사라져 간다. 그나마 한국교회를 지키던 몇몇 지도자도 다 은퇴해 버리고 은퇴 이후에도 무슨 건수만 있으면 여기저기서 흠집을 내려고 한다. 그렇다고 그분들처럼 맨바닥에서 개척해 기적적인 교회 부흥을 일궈 대외 사역을 힘 있게 끌고 갈 수 있는 야성을 가진 목회자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더구나 기존 교회에 새로 부임한 목회자들은 자리매김하기에 급급하고 개교회 중직자들의 협력도 요원하다. 개교회만 생각했지 공교회를 향한 희생과 섬김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국교회 전체가 지도자를 만드는 데 인색하다. 그래서 ‘리더십 블랙홀 현상’이 일어난다. 더 이상 공교회를 위한 대사회적 연합사역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중소기업이 망하면 대기업도 망한다는 원리를 알아야 한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트렌드 코리아 2017’에서 한국 소비트렌드의 키워드를 ‘치킨 런(Chicken run)’으로 선정했다. 치킨 런이란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오는 닭들처럼 위기의 담장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올해 한국교회는 치킨 런을 하지 못했다.
2018년 소비트렌드 키워드는 ‘왝 더 독(Wag the dogs)’으로 선정됐다. 내년엔 종교인 과세 등 급격한 변화 속에서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도 내년엔 덩케르크와 같은 위기가 올지 모른다. 그러므로 개교회뿐 아니라 공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덩케르크의 위기 속에서 구출해낼 수 있는 구원투수와 같은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그리고 대역전 드라마를 만드는 감독 같은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주일 오후 잠실올림픽경기장에서 한국교회가 연합해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를 개최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10만 좌석을 꽉 채우진 못했더라도 말이다.
한국교회여, 함께 힘을 모아 덩케르크의 기적을 만들자. 덩케르크 항구로 달려오던 소형 선박의 선장들처럼, 연료가 소진될 때까지 목숨 걸고 싸웠던 전투기 조종사의 불굴의 투혼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구출작전을 이끌었던 처칠 총리처럼, 우리도 공교회를 위한 섬김과 희생의 리더십을 회복하자. 덩케르크의 위기 속에서 한국교회를 구출해낼 수 있는 마지막 구원투수와 같은 지도자를 키우자.
소강석(새에덴교회 목사)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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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 <순례자의 하룻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인생은 순례의 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보편적으로 백년을 살지 못하고 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좀 더 오래, 어떤 사람은 좀 더 짧게 머물다 갑니다. 아무도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영원을 향한 순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순례의 길에서, 경험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하나님을 목자로 만나는 사건입니다. 그때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인생의 순례는 시작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례자의 아침은 흥분과 감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 되심으로 부족함이 없는 영혼의 풍성함을 경험하는 아침으로 우리의 새 인생은 시작됩니다. 우리의 아침의 식탁에는 푸르고 푸른 생명의 향연이 있습니다. 우리의 아침의 산책 길에는 잔잔한 안식이 있습니다. 새롭게 깨어난 우리의 영혼은 의의 길을 찬미함으로 걸어갑니다.
순례자의 오후길은 어떤 의미에서 보편적 인생의 고난에서 예외가 없는 골짜기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 없이 인생을 순례하는 이들과의 차별성은 명백히 존재합니다. 목자의 보호와 인도를 경험하는 특별한 은총으로 인하여 우리는 두려워 하지 않고 담대히 순례의 걸음 걸음을 옮겨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인하여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생명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례자의 저녁길은 특별한 위로가 준비된 달콤한 안식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지긋 지긋한 원수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비교적 자유롭고 가벼운 마음으로 맞이하는 저녁의 경험은 정녕 은혜의 저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의 기름이 머리에 부어지고 우리의 잔이 노래로 넘쳐날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이 후회할 필요없는 순례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가 예비하신 영원한 집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감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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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에서 신앙인의 길을 생각한다

지난 주 수요일에는 ‘고전에서 하나님을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책 &lt;천로역정&gt;을 읽고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땜장이로 살았던 한 사람, 아무런 배움이 없었던 한 사람이 쓴 책에 감탄하고, 존 번연을 통해 이런 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출판된 지가 350년이 되어 가지만 그의 가르침은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모든 순례자에게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천로역정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교훈 10가지를 찾아보았습니다.
첫째, 구원은 은혜로 주어졌지만 천국으로 가는 길에 고난을 기억하라. 천로역정에서 존 번연은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구원을 강조하는 청교도 가르침을 곳곳에 녹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백성이 천국에 들어가기까지는 거쳐야 할 많은 고난의 다리가 있습니다. 둘째, 십자가 앞에 설 때 비로소 얻는 죄 용서와 자유를 새기라. 순례의 여정에서 주인공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등에 달라붙은 무거운 짐이 순식간에 떨어져 무덤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만이 우리를 자유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셋째, 신앙의 여정에 앞서간 선배들과 동역자에게 감사하라. 천상까지 나아가는 순례의 길은 외롭고 고단하지만 혼자가 아닙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간 길이고 성령님과 함께 현재도 곁에 많은 동역자가 있습니다.
넷째, 마귀는 언제나 곁에 있다, 방심 말고 끝까지 겸손히 순례에 임하라. 주인공 크리스천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마귀는 사람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잘 압니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더욱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다섯째, 화려한 세상 다 지나간다, 영원한 진리를 따르는 삶을 택하라. 요즘처럼 과학기술문명이 발달한 세상에서 먼지보다 작은 바이러스 하나 앞에 떨고 있는 인류를 보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가 더욱 깊이 다가옵니다. 여섯째, 세상의 지혜도 율법도 아니다, 진리와 생명인 성경을 따라가라.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님 한 분에게서만 발견된다는 사실은 세월이나 상황과 관계없는 진리입니다.
일곱째, 천성 가는 길은 편하고 넓은 길이 아니다, 좁은 길로 나아가라. 넓고 편하게 보이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적인 성향 자체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길, 주님을 따라가는 길은 늘 좁은 길입니다. 여덟째, 부름에 합당한 신자의 삶으로 주님을 드러내라. 구원받은 백성과 천국에 속한 백성다운 삶은 주님 앞에 설 때까지 보여야 할 덕목입니다. 아홉째,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다, 각자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가라. 천국의 순례길은 동행자가 많지만, 마지막 다리는 자신의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열째, 신자에게 고통은 있지만, 마침내 경험하는 승리를 확신하라. 천로역정이 마침내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메시지입니다. 순례자인 우리가 어떤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류응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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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하지 않는 이유

7남매를 둔 가난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어머니는 먹을 것이 없어서*술지게미에 사카린과 물을 타서 자녀들을 먹였다고 합니다.술지게미를 먹은 자녀들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고 합니다.그 상태로 학교에 가면 사정을 알 리 없는 선생님은 자녀들을 호되게 나무랐다고 합니다. “어린것이 술을 먹다니!”라며 벌을 줄 때마다 아이들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그렇게 가난한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항상‘정직’을 강조했고,비록 술지게미를 먹였지만 매일 자녀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또 자녀들과 함께 가정 예배를 드리며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고 합니다.“너희들은 모두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이 되어라.오늘의 시련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날을 기대하며 살거라.그리고 술지게미를 먹던 오늘의 고통을 잊지 말거라.”어머니로부터 엄격한 신앙 교육을 받았던 자녀들은 어머니의 기도대로 성장하여 훌륭한 목회자들이 되었습니다.그들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김선도 목사,김홍도 목사,김국도 목사,김건도 목사로,한국교회의 큰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남겼습니다.그는 이 책에서 진정한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상실이라고 하였습니다.그래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다름 아닌“절망”이라고 하였습니다.다시 말해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하는 것은 돈을 잃거나 명예를 잃어서가 아니라 절망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키에르케고르에게 절망이란 자기의 상실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상실이었습니다.우리가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절망에 이르는 이유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즉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인간은 결국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절망의 골짜기에서 일으키시고 마침내 정상으로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그래서 내 힘으로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갖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고 불리는 이어령 교수는 뒤늦게 예수님을 영접하고?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지필했습니다.무신론자로 한 평생을 살아온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조차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딸의 모습을 보고,그 딸이 믿는 하나님이라면 믿겠다고 마음을 연 것입니다.올해87세인 그는 병상에서 아무 약도 쓰지 않고 딸이 있는 천국을 바라보면서,또 좀 더 일찍 하나님을 믿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기쁨으로 죽음을 기다리며 산다고 합니다.하나님 안에서 절망이란 없습니다.*술지게미:술을 담고 남은 찌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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