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계7:1-17)
본문
어떻게 살 것인가?(계7:1-17절)
1. 성경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저는 요사이 이런 생각을 하며 삽니다. 에덴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요한 계시록에서 완성되어 나타납니다. 에덴동산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사이에 누가 있습니까? 구약의 성도들이 있고 신약 교회의 순교자들이 있으며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간을 우리는 말세라고 부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한 때 두 때 반 때, 천이백육십일, 마흔 두 달 등등의 다양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천년이라는 표현도 바로 이 기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기간에 성도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있습니다.
에스겔은 구약 역사의 마지막 부분을 보여줍니다. 이미 북 이스라엘은 멸망한지 140여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남 유다만 겨우 남아서 명맥을 유지하는데 하나님은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성도답지 못하다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바람은 단 하나입니다. 뭡니까?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받은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구약에 에스겔이 그렇다면 신약의 요한계시록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그 메시지는 인봉된 책을 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인이 떼어지고, 나팔이 울려 퍼집니다.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뭘 기다립니까? 앞서 일곱 유형의 교회들로 분류된 이 땅의 교회들 가운데 회개해야하는 교회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이 땅에 더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와 영원한 영벌의 심판을 면하게 되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 기간을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 여부는 우리가 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형편없어 보이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좋은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기준이 어긋나 있을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구원 여부에 대해서 말 할 권리를 갖지 못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정확하게 말씀하시기를 개인의 구원은 철저하게 개인의 문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면 구원 받는다는 말로 구원 여부를 결정해 주는 구원파가 문제가 되는 것이요, 또 신비한 지식을 가진 우리가 진정한 구원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한 가장 분명한 것은 예수 믿으면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를 믿음에 있어서 장차 주님이 알곡과 가라지를 골라내실 텐데 그 권한은 주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네가 알고이네, 네가 가라지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부인하거나 구원의 도리를 다르게 말하는 사람들은 현실 교회에서도 이단으로 정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진리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는 이들 가운데 알곡과 가라지를 골라내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 알곡과 가라지를 판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이 땅에 공존하고 있는 알곡과 가라지 사이에서 알곡으로 자라 열매를 맺는 것으로 소임을 다한 것입니다.
또 주님이 오실 때는 만인이 볼 수 있는 분명한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분에 혼란이 생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신비한 지식이 있다고 말하고 내가 메시아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 또 주님 오실 때를 예측해서 내미는 사람들은 전부 성경과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을 사는 성도들에게 올바른 교회를 이루어 영원한 천국을 상속 받는 성도가 되라는 도전입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이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때 주님이 알파와 오메가가 되셔서 함께 해 주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2. 십사만 사천의 인침 받은 사람들
자, 오늘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은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이단들을 양산해 내었던 문제의 본문입니다. 가만히 본문을 읽어보면 여기서 왜 이런 잘못된 해석이 ㅇ나올 수 있는지 의문이 갑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현대판 영지주의자들이 자신들만이 인 맞은 십사만 사천 명의 무리라고 주장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잘 읽어보면 그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주장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7장은 여섯 번째 인 심판과 8:1-5절의 일곱 번째 인 심판 사이에 삽입된 말씀입니다. 7장은 6:17절의 “누가 하나님의 극렬한 심판 앞에 설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즉 6:17절의 질문은 하나님이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원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이 7장입니다. 7장은 신, 구약의 끝까지 믿음의 정절을 지킨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는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정확히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일곱 유형의 교회들에게 이와 같은 성도들이 되라고 도전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서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이 네 천사는 사실 땅을 보호하려고 바람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상에 심판을 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2절에 네 천사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뭐라고 합니까?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그럽니다. 그러니까 이 네 천사는 원래 바람을 붙잡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심판하기 위해서 대기 중인 것입니다. 넷이라는 숫자는 우주적인 숫자여서 네 모퉁이는 땅 전체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땅은 요한계시록에서 대체적으로 사탄을 추종하는 자들의 삶의 영역을 의미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을 향하여 부는 바람은 사탄의 추종자들의 삶의 영역을 파괴하기 위하여 동원되는 심판의 도구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해 돋는 데서부터 올라온 다른 한 천사가 네 천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그럽니다. 그러니까 원래는 심판하기 위해서 왔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심판을 보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와 병행되는 표현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인을 찍는 일은 지금 진행 중입니까? 따라서 무엇도 보류중입니까? 심판도 보류 중인 것입니다. 인을 찍는 작업이 이미 완성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7장 전반부와 후반부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 구약의 그리스도인들, 즉 이미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천국에 가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정해져 있습니까? 정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얼마나 되는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이미 영원한 천국에 영생복락을 누리고 있을 줄로 믿습니다. 하늘 보좌 환상과 보좌 아래 제단의 순교자들의 탄원들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등장한 숫자가 십사만 사천입니다. 사도 요한은 구체적으로 각 지파이 이름을 언급하면서 12000명씩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인침을 받았다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즉 구약의 성도들은 이미 다 죽어 천국에 갔던지 지옥에 갔던지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본 누가 이 환난 날에 설 수 있겠는가 하는 답변에 1차적으로 해당되는 사람들은 이미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이라는 것입니다.
4절에 의하면 이미 인침을 받은 자들의 숫자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미 인침을 받은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십사만 사천이 인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본 그대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7장1절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그럽니다. 그러니까 이미 인침이 끝난 그룹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미 죽어 천국에 갔던지 지옥에 갔던지 했습니다. 그럴 때 다른 천사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찍었습니다. 왜 인을 치는 것입니까? 너는 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으니 너는 내 아들이라는 확증인 것입니다. 이 인침은 하나님의 백성 됨을 확증하여 심판을 면하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렇다면 구약에 구원 받은 사람이 십사만 사천 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 등장하는 십사만 사천 명은 이미 인침이 끝난 많은 사람들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성경적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14장에서 또 다시 십사만 사천이 나오고 그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다고 인침의 의미를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에 이 숫자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고 보겠습니다. 통상적으로 구약의 구원 받은 사람들의 모든 숫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요? 14장에서는 7장에 등장하는 셀 수 없는 흰 옷을 입은 큰 무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14장의 십사만 사천은 7장의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포함하는 숫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4장의 십사만 사천은 13장의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대조되는 구원 받은 무리를 지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4장의 십사만 사천은 7장의 두 그룹을 포괄하는 구원 받은 사람들 모두를 지칭하는 말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면 7장의 구약의 구원 받은 사람들 역시 달랑 십사만 사천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구약의 성도들 가운데 끝까지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친 사람들의 모든 수를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절대로 특정한 지식을 가진 특별한 집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14장과 병행하여 이 부분에 더 이상 혼란을 겪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3.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9-14절)
자, 이 뒤에 등장하는 새롭게 인침을 받은 그룹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7장에 있어서 이 부분은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사람들이 14장에서는 한 그룹이 되어 십사만 사천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7장에서 중요한 사람들은 십사만 사천 명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이 일 후에 다시 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여전히 인을 칠 때까지 심판이 유보된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에게 인을 칠 때까지 유보된 심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찬양하기를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그랬다는 것입니다.
이 분들에 대해서는 13절에 답변이 나옵니다.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답변하기를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6장에서 누가 이 진노의 큰 날에 설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 큰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바로 그 진노의 날에 구원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노의 큰 날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그 피로 씻음 받은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단락에서 인을 쳤다는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15절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상황은 계시록 21:3-7절에 나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그럽니다.
자 다시 7장을 보십시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17절에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21장의 생명수 샘이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에서 인을 쳤다는 말씀은 없지만 이들은 21장의 영원한 천국을 상속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앞의 십사만 사천 명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뒤의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신약 교회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 교회는 어떤 사람들의 나라입니까?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어린양의 피에 그 죄를 씻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7장의 무게 중심은 십사만 사천 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오고 있는 흰 옷을 입은 큰 무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이 요한 계시록의 상황을 말씀해 주는 소중한 구절입니다. 큰 환난에서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 받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잘못된 신학과 잘못된 성경해석을 경계해야 합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누가 이 진노의 날에 승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사람들이라고 답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시록 21장에서 설명한 영원한 천국을 상속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큰 환난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 진노의 큰 날에 누가 설 수 있느냐는 질문에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이 설 수 있다고 답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큰 환난에 굴복하지 않고, 세상에지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의 핵심은 큰 환난에서 승리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영원한 천국을 선물로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로 상징되는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고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말입니다. 아마 그것이 가장 중요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