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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빌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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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빌립보서 2장 1-11절)





 


초대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의 여러 가지 논의들을 결정하기 위해서 각 교회들의 대표자들이 모인 일들이 있는데, 이를 일컬어 ‘공의회(Councils, 公議會)’라고 부릅니다. 정통적인 견해로는, 대략 7번의 초대교회 공의회가 있었습니다. 처음 공의회가 열린 장소는 지금의 터키 북부에 있는 니케아(Nicaea, 터키 북서부에 있는 이즈니크(Iznik)의 옛 이름)라는 곳에서 열렸습니다. 이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조’라는 것이 정해졌고, 이는 오늘 날 사도신경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니케가 공의회에서는 또한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논의 하여 결정했는데, 교회는, 사도적이고(사도 전통 계승), 통일성이 있고(하나의 교회), 거룩(성)하고, 보편적이다 라고 정의 했습니다. 여기서 보편적인이라는 용어가 천주교를 지칭하는 ‘카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1500년 간 지속 되다가, 종교개혁 이후에는 새롭게 바뀌어서, 현재 기독교 개혁교회에서는 참 된 교회의 표지로써, ① 말씀, ② 성례, ③ 권징(치리)이라고 규정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이 세가지가 제대로 작동되어야, 교회다운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교회역사를 간단하게나마 소개 드린 것은, 교회의 본질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보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교회 다니시면서, 신앙생활 하시면서,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교회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배우셨습니까? 머릿속으로는 무언가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입으로 말하려면 잘 정리되지 않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교회로서의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등의 여러 가지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교회는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읽어 드립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아멘.


 


‘그러므로’라고 하는 접속사는 앞의 이야기가 연결되고 있는 겁니다. 1장 마지막 부분(27-30절)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 너희는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라, / 대적(핍박, 방해,거짓)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말라, / (구원의)은혜를 주신 것은 고난도 받게 하려 함이라, / 복음을 위해 나도 싸웠고, 여러분도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동역자입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말을 한 후에 그러므로~ 라고 연결된 겁니다.


 


1절에서 보면, 복음을 위해 합당하게 생활하고, 모든 일에 협력하고, 대적하고, 고난을 받고, 싸우려고 앞장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네 가지의 마음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고 합니다. 이 네가지가 모든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데 있어서 근본적인 능력의 원천입니다. 네 가지를 설명해 드리면,


 


첫째는, ‘권면’인데, 이것은 지시나 훈계의 의미 보다는 격려와 응원의 의미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위로’ 이며, 셋째는, ‘성령의 교제’이며, 넷째는 ‘긍휼이나 자비’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네가지가 끊임 없이 일어남으로 인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 하게 하고, 합력하고, 대적하고, 고난받고, 선한 싸움을 해 나가는 것들을, 거뜬 하게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저와 여러분들에게는 이 네가지가 수시로, 끊임없이, 그리고 전혀 부족함이 없이 항상 충만하게, 내려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치지 아니하고 언제나 풀 충전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이 바울의 모습이었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네가지를 우리에게 주시는 단 하나의 주된 이유와 목적은, ‘하나되게 하기 위함’ 이었다는 겁니다.


 


2~4절 말씀을 읽어 드립니다.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아멘.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과 위로와 교제와 긍휼과 자비가 일어나게 하시는 이유는, 마음을 같이 하고 한 마음을 품어 하나 되게 하시려는 우리 주님의 일관된 목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다른 어떤 것 보다 우선해서,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마음을 같이하고, 한 마음으로 하나되지 않으면 절대로 유지 되거나 성장하지 못합니다. 하나되지 못하면, 오히려 혼란과 분열만 일어납니다.


 


하나되게 하는 핵심적인 단어가 ‘겸손’입니다. 2절 후반부에서와 같이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 이것이 겸손한 마음의 태도이며 자세입니다. 모든 교회의 구성원 각자 각자에게서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이 충분하게 나타날 때 그 교회는 건강한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 영적인 부흥과 성장을 이루어 가는 교회로 세워질 겁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하고 있는 미래의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내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일까요? “낫게 여긴다” 라는 말과 “낮게 여긴다”라는 말은 자음 받침 하나 차이인데, 그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진리의 성경 말씀은, 은혜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는남을 낫게(나보다 나은 사람으로)여기기 보다는, 남을 낮게(무시, 흉, 차별, 폭언과 폭력 등) 여기려는 마음이 훨씬 더 많습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기 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는 눈빛과 표정과 말투에서, 함부로 대하는 것이 다 나타납니다.


 


‘갑질’이라는 것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갑질’이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자신이 우위에 있는 ‘갑’의 위치라고 생각해서, ‘을’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방에게 모욕과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갑질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갑질이 별게 아니고, 상대적인 우월감, 그거 하나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별로 잘난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사람이, 자신 보다 조금 연약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남을 낮게 여기는 말들은 이런 말들입니다. “너 빌라에 산다며, 너 사는 아파트 조그만 평수라며, 네 남편 연봉이 3천도 안 된다며, 너 해외여행 한번도 못가봤다며, 그 사람 대학도 못나왓다며...” 주변에서 이런말 많이 하기도 하고, 쉽게 듣기도 하는 말들입니다. 이런 말들은 전부 다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낮게여기는(깔보고 무시하는) 지극히 불량한 마음입니다. 겸손함이 없으면, 누구라도 상대적인 갑의 위치에서 남을 함부로 대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남을 낮게 여기는 것이 꼭 교회 밖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너 아직 방언도 못하지 그래가지고 성령 충만하겠어, 그 사람 아직 집사 직분도 못 받았다며, 그 사람 기도 너무 못하더라, 감히 권사(장로)에게 어따 대고 버릇 없이 대들어, 교회 다닌지 얼마 됐다고 그런말을 해, 그냥 하라는데로 하기나 해....” 이런 말들이 교회 안에서 부지기수로 들린 다는 것이 참으로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누구 누구 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남을 낮게 여기는 겸손하지 못한 마음들이 내 안에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남을 낮게 여기려고 하는 삐뚤어진 내 마음을 바로 잡지 않고서는, 남을 낫게 여기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도저히 실행 시킬 수 없습니다. 남을 낮게 여기는 나쁜 버릇을 뜯어 고치지 않고서는, 교회 공동체가 하나됨을 이루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힌 상대적인 우월감, 그로 인해 나보다 조금만 못해 보이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고, 비웃고, 조롱하고, 심지어는 저주를 서슴치 않았던 과거의 언행들에 대해서 철저하게 회개를 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남을 낮게 여기는 것이 지나쳐서 형제자매중에 한 사람이라도 실족하게 했다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하심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내가 함부로 했던 말과 행동으로 인해 형제자매가 상처 받고, 교회를 떠나는 일이 있었다면 가슴을 찢으며 회개와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또한, 앞에서는 웃으며 말하다가 뒤 돌아서 안 보이는 데에서는 형제자매를 욕하고 저주하며 온갖 나쁜 말들을 쏟아낸 적이 있었다면, 이 역시 또한 가슴을 찢는 심정으로 철저하게 참회 해야 합니다.


 


다시는 그런 언행들을 함부로 하지 않게 해 달라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 후에, 이제는 남을 낮게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 않게 해 달라고, 모든 상황 속에서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철저한 회개와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변화 시켜 주시는 능력으로 역사 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겸손의 사람으로 바뀌어 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가는 순서가 있습니다. ①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② 남을 낮게 여기는 언행을 하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합니다. ③ 각자가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으로 생활 할 때, 비로서 교회(성도)가 하나 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참 되다고 인정 받고,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 했던 교회들은, 이러한 과정속에서 성장해 왔습니다.


 


어떤 교회가 참 된 교회인가? 라는 물음에, 이제는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과 성례와 권징이 제대로 작동 되는 가운데, 모든 성도가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함으로 변화되어, 무슨 일을 하든지,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됨을 지향하는 곳이 참 된 교회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결론은 내렸지만, 정말 교회가 이렇게 되어가는 것은 어렵고 힘든 과정입니다. 일시적으로는 교회다운 모습을 보일 수 있으나, 이를 계속 유지해 나가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 합니다. 아무리 다수의 구성원이 노력한다고 해도 교회 안에 몇 몇 사람이 남을 낮게 여기는 구태를 반복하게 되면, 금방 혼란과 분열이 일어납니다.


 


사탄은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도록 교회 안에 나쁜 분열의 씨앗을 뿌리고 다닙니다. “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그래 너나 잘해, / 왜 나만 그렇게 해야 돼 나는 못해 나는 안 해, / 왜 내 말을 안들어, 이렇게 하라니까, 내 말이 정답이야” 이런 부정적인 태도나, 일방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는 것들이 사탄이 뿌려대는 분열의 씨앗들 입니다.


 


또한, 나 하나쯤이야 하는 안일하고 소극적인 태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나부터 먼저 하자 라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 합니다. 그런 열심있는 사람들이 모이고 모일 때 교회의 전체 모습이 남을 낫게 여기는 교회로 분위기가 좋아지게 되고, 모든 성도가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함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다 연약하고, 충분하게 겸손하지 못합니다. 남을 낫게 여기려는 마음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부터도, 쉽고, 편하고, 뒤로 빠지고, 시키기만 하고, 다 된 일에 수저만 얹으려고 하고, 말 만 앞세우려는 나쁜 마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희생하고, 섬기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앞장서려는 행동은 마지 못해 눈치보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우리 스스로의 의지나 노력으로는 겸손함에 이른 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5절에서 말하기를, “(겸손하고자 하는 너희들은) 너희 마음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라” 라고 겸손에 이르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겸손해지는 방법은 간단하며 명료합니다. 예수님처럼 태도를 갖추면 누구라도 겸손해 집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셨던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겸손해 집니다. 예수님이 하라고 알려주시는대로 묵묵히 실천하기만 하면 겸손해 집니다. 예수님만이 겸손의 정답입니다.


 


겸손함, 그 자체 이셨던 예수님이 얼마나 겸손하셨는지, 그 아름다운 모습을 기록해 놓은 것이 6~8절의 내용입니다.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아멘.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 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 이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셔서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의 모습(종의 형체)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의 모양이 되시도록 자기를 낮추신 이 모습이먈로 겸손함의 극치중의 극치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 용어로는 ‘비하(卑下)’ - 스스로를 낮춤- 라고 표현 합니다.


 


이것이 얼마 만큼의 겸손함인지 상상이 되시나요? 대기업 회장이 신입사원으로 재 입사했다. 별 네개 4성 장군이 훈련병 신분으로 입소했다, 축구스타 손흥민선수가 연봉 없이 무명의 클럽에 등록했다, 이런 뉴스가 나온다면, 아 참 겸손하시네, 라고 말하기 전에, “미친거 아니야, 장난하는 거야” 이렇게 말하게 될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러한 미친 것 같은 경우보다 백만 배, 천만 배, 비교할 수 없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입니다. 제가 공부하면서, 이 사실이 제대로 느껴졌을 때, 온 몸이 화석 같이 굳어지고 머리카락이 뻣뻣하게 세워지는 엄청난 전율을 느낀 기억이 아직도 생생 합니다.


 


왜 하나님이 이토록 충격적인 결정을 하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셨을까? 너무나도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낮게 여기는 겸손함이 어떤 정도의 수준인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배우고, 따라하도록 먼저 적극적인 모범을 보이신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유한하고 무능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그 놀라운 자기 낮추심, 그 겸손하신 모습 하나만을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낮아지고, 자존심 다 버리고 바닥까지 낮아지라고 요구 받을 지라도, 즉시 그렇게 할 수 있게 됩니다.


 


아무리 내가 낮아진다고 해도 하나님 만큼 손해 보진 않습니다. 하나님 보다 억울하진 않습니다. 하나님 보다 자존심 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낮아지심을 부끄럽고, 치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랑하시고 용서 하시고 구원하시는 마음 하나만으로, 기쁘게 결정하시고 거침 없는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그 것 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기 까지 낮아지시는 절대 복종, 절대 순종의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까지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너무나 위대하고, 위대하신 우리 예수님의 겸손, 그 하나의 겸손함만 앞세운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 주님의 겸손함을 배우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자기를 비하 시킨 예수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9-11절을 읽어 드립니다.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멘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요, 만 주의 주가 되신 단 하나의 이유는, 스스롤 낮게 여겼더니, 하나님이 예수님을 그 구누 보다도 낫게(높게) 여겨 주셨습니다. 남을 낮게 여기는 한 순간의 나쁜 권세를 추구하면, 그 결과는 영원히 낮은 곳에서 슬피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 스스롤 자꾸 낮게 여기는 겸손함으로 살려고 애쓰고 수고 하게 되면, 우리 하나님이 나를 누구보다도 낫게 여겨 주시고, 높여 주시고, 영원한 권세를 누리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시는 과정이 우리 성도와 교회들의 삶이 되어야 하겠고, 예수님의 영화로운신 높아지심(낫게 여김 받으신) 모습이 우리의 최종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내 자신은 혼자가 아니고 교회 자체라는 사실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로서 나는, 하나가 되기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도 명심해야 합니다. 내 스스로가 먼저 남을 낮게 여기려는 나쁜 마음들을 회개하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우리 주님의 겸손함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겸손함을 앞세우고, 예수님의 겸손함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힘쓸 때, 우리 모두는 성령 안에서 진정하고 참 된 하나의 교회로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닮아가는 교회, 절대로 남을 낮게 여기지 않는 교회, 남을 낫게 여기는 언행으로 칭찬 받는 참 된 교회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될 줄로 믿고 기대 합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남을 낮게 여기지 말고,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겸손하신 우리 주님을 따라, 점점 겸손함으로 변화 되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든 성도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마음으로, 말로, 행동으로 하나가 되는데 전심으로 동참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중의 교회로 세워져 나가기를 축복하고,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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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 속에 남을 낮게 여기는 나쁜 마음들은 다 제거해 주시고, 겸손하신 우리 주님을 따라, 남을 낫게 여기며 살아가는 순종의 성도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겸손한 교회, 하나가 되는 교회로 인도하여 주옵소소. 겸손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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