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라 (아6:11-13)
본문
돌아오라/아 6:11-13
<본문>
11.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12.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
13.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설교>
아가서가 노래하는 사랑은 끊어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든 끊어지고 변할 수 있는 세상의 사랑과 비교하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아가서입니다. 이처럼 끊어지지 않는 사랑이 평안함이 되는 것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알고 사랑을 믿는 것을 천국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사랑의 나라가 천국인 것입니다.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면 자신의 노력으로 사랑을 지키려고 하거나 자기에게로 끌어오려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으려고 선한 노력이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 없는 이방인의 행위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있는 신자는 지켜야 할 것이 없습니다. 지키고 실천한 행위가 함께하며 참된 신자로 인정받게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십자가의 사건이 함께 하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사건으로 거룩한 성도라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본래 세상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특이한 존재입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지음 받은 것이 신자라는 점에서 없는 데서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세상에는 없는 특이한 현상을 증거 할 자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아야 합니다.
11,12절을 보면“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에서 이상한 점은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보려고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호도 동산으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호도 동산에서 보게 되는 것은 호도 나무, 호도 열매인 것이 당연합니다.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면 푸른 초목이 있는 골짜기로 가야 하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지 보려면 포도나무가 있는 포도원으로 가야 합니다. 이것을 잘못되었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여자의 행동이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이 남자가 한 말인지 여자가 한 말인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새 번역에는 여자가 한 말로 기록되어 있고, 현대인의 성경에는 남자가 한 말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 한 말이든 우리가 중점을 둘 것은 호도 동산으로 가서 포도나무의 순을 보고 석류나무의 꽃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데서 있게 하는 현상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율법의 행위를 가르친 유대 기독교인의 말을 받아들이고, 한국교회가 행함을 믿음의 실천으로 가르치는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마디로 말하면 없는 데서 있게 되는 현상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지도 않고 사랑받을 일을 한 것도 없이 구원을 받고 완전한 자로 여김을 받는 사랑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든 복이든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믿음의 행함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욥 4:7-9절을 보면“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의 말입니다.
엘리바스는 고난의 원인을 죄에서 찾습니다. 욥처럼 모든 부요를 잃어버리고 망하는 것은 심판이고 저주인데 죄없이 망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렸기 때문에 심판과 저주를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포도나무 순을 보려면 포도원으로 가야 한다는 세상의 통념입니다. 결국 우리도 엘리바스와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세계를 생각한다면 사랑받을 이유와 조건을 갖추는 것에 관심 둘 것이고 그것이 옛사람 속성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자를 가리켜 나의 사랑하는 자, 나의 완전한 자로 부르는 것은 세상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세상 안에 있는 종교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자의 부족함, 허물 그 모든 것을 이기고 등장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임을 안다면 사랑을 받은 신자 또한 세상 밖에서 사랑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11절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술람미 여자에게 우리가 너를 보게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남자는“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라고 말합니다.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당시 마하나임의 춤으로 불리는 아름다운 춤이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시 7장에서 술람미 여자의 아름다움에 대해 언급되는 것을 생각하면 신랑의 끊어지지 않는 완전한 사랑으로 어떤 허물이 있다 해도 변함없이 아름답고 완전한 자로 불려지는 술람미 여자를 보고 싶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보고 싶으니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자는 남의 사랑에 의해 이미 완전한 아름다운 신부로 존재합니다. 세상이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아름다움입니다. 따라서 세상은 사랑으로 인한 신부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호도 동산에서는 포도나무를 볼 수 없다는 생각으로는 자신들보다 나을 것 없는 여자인데 신랑의 사랑이 완전하기에 완전한 신부가 되었다는 관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을 줄 건데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라는 요구가 성경에는 없습니다. 이런 사랑에 살을 받은 신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사랑에 의해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여겨지는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보지 않고 완전하다 하십니다. 이 사랑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에게‘이렇게 되어라’는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이 여러분께 자유가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오신 우리의 신랑 예수님만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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