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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패스워드 (행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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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패스워드/사도행전 3:6~10




어느 날 인터넷 뱅킹을 해야 하는데 공인인증서 유효기간이 끝났다고 메시지가 뜨더군요. 그래서 공인인증서를 다시 만들려니 비밀번호가 영 기억이 안 나요. 몇 번씩 이런 저런 비밀번호 쳐보며 한참 애를 먹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일 겪어본 일 있나요? 세상이 참 편리해졌다고 하나 오히려 우리가 이런 문명의 이기들을 사용하려면 수많은 ID와 비밀번호를 기억해야 하니 이거 쉬운 일 아닙니다. 어떤 도둑이 시골을 돌면서 연세 많은 어르신들 통장만 훔치다가 잡혔습니다. 왜 돈도 별로 없는 시골 노인들 통장만 노렸냐? 노인들 중에 비밀번호를 통장에다 써놓은 분들(친절하게 도장까지 같이 보관)이 많아서 그랬다네요. 어르신들이 비밀번호 외우기가 너무 힘드셨나봐요.



이렇게 외우기 힘든 비밀번호, 그 비밀번호 하나 잃어버렸다가 수천억을 날리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스테판 토마스라는 미국 사람은 10년 전, 요즘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비트코인이라는 암호화폐 영상을 제작해준 대가로 7천 2비트코인을 받았습니다. 당시 비트코인 가격으로 따지면 4,600만 원 정도 되는 액수였지요. 그런데 10년이 흐르는 동안 비트코인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올라서 우리 돈 2천 600억 원이 된 겁니다.



토마스는 전자지갑을 열기 위해 여덟 차례 비밀번호를 넣어봤지만 다 실패했습니다. 이제 남은 기회는 2번뿐입니다. 비밀번호 입력오류 10번이 되면 전자지갑에 내장된 비트코인을 영영 찾을 수 없게 된대요. 그 바람에 그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렸다고 합니다. 우울증 걸릴 만 하지요. 그깟 비밀번호 하나 기억 못해 2,600억 원을 날리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이제 기회가 딱 두 번 남았으니 겁나서 비밀번호 쳐볼 엄두도 못 내고 있다네요. 그 안에 돈이 엄청나게 들어있으면 뭐합니까? 비밀번호 모르면 아무 소용없는데요.



뉴스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사람 얘기가 딱 우리 인생과 같구나. 물론 우리는 통장에 수 천 억은 없지만 아무리 우리 수중에 많은 재물과 금은보화가 있으면 뭐합니까? 아무리 엄청난 것들을 소유하고 있으면 뭐합니까? 그 모든 것을 꺼내서 제대로 사용하려면 결정적으로 비밀번호가 필요합니다. 수 천 억을 가져도 비밀번호가 없어 꺼내 쓰지 못하는 사람처럼, 우리 인생에도 결정적인 비밀번호를 몰라서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없게 되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비밀번호를 영어로 ‘PASSWORD’라고 부릅니다. 패스(pass), 통과하기 위해,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암호입니다. 이 인생의 패스워드, 결정적인 비밀번호를 모른다면 그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소유했더라도 그것을 찾아 쓸 수도, 사용할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닫힌 것을 풀어줄 수 있는 비밀번호, 그 결정적인 우리 인생의 패스워드가 뭘까? 오늘 본문은 그 답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 은과 금을 소유해도...



오늘 본문에 나온 사건은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직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성령강림으로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세워지고, 하루에 삼천 명의 성도가 늘어나고,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기적이 날마다 일어났습니다. 이 엄청난 역사의 중심에 서있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어느 날 성전에 올라가다가 한 장애인을 만나게 됩니다. 때는 제 구 시, 즉 오후 3시인데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고 오후3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러 성전에 모이는 시간이었어요. 베드로와 요한은 아마 이렇게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시간에 전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던 것 같습니다.



그때 성전 미문 앞에 한 걸인이 앉아있었습니다. 미문, 아름다운 문이라는 뜻입니다. 거지도 좋은 자리, 명당자리 잘 잡아야 돈 잘 번답니다(자릿값). 아마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중에 미문이 가장 많은 사람이 드나들던 문이었는지, 이 이름 모를 걸인은 그 명당자리 딱 잡고 앉아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한 푼 줍쇼.” 하다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난 거지요. 그런데 성경은 이 거지가 어떤 사람인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는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옛날 우리가 읽던 개역성경에는 ‘앉은뱅이’라고 나와 있었는데 성경을 새로 개정하면서 비속어를 다 바꿨고, 그래서 ‘못 걷게 된 이’라고 번역했지요. 이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다보니 그는 정상적인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구걸해서 먹고 살 수밖에 없었고 아마 가족이나 동료가 날마다 그를 메고 와서 성전 미문에 앉혀놓았던 것 같습니다.



자, 생각해 보세요. 이 나면서 못 걷는 장애를 가진 사람, 어쩔 수 없이 거지로 살아야 했던 그에게 소망이 뭐였겠어요? 그의 유일한 소망이란 “오늘 돈 좀 많이 벌면 좋겠다. 백 원, 이백 원 말고 천원, 운 좋으면 만 원 주는 사람 만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거밖에 없는 거지요. 무슨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이 걸인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베드로와 요한을 만났을 때 여느 때와 같이 손을 내밀어 “한 푼 줍쇼.” 했던 거지요. 두 사람 옷차림을 보아하니 뭐 돈이 많아 보이지는 않고 그저 몇 백 원 집어주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말입니다. 더 이상 뭘 기대했겠어요?



그러자 베드로가 걸인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보라!” 봤지요. 거지는 습관적으로 사람 얼굴을 보지 않고 바닥을 보고 손만 내민 모양인데 고개를 들어 자길 쳐다보라니, “뭘 얼마나 주려고 그러는가?” 싶었나 봅니다. 바로 그때 베드로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6절 말씀 읽읍시다.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베드로는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다!” 그렇죠. 사도들이 무슨 돈이 있었겠어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대, 돈주머니 가지지 말고 전도하라고 하셨으니 수중에 돈 한 푼 없었던 거지요. 이 말을 듣고 걸인이 얼마나 실망했겠어요? “아니, 돈 한 푼 없으면서 나보고 왜 쳐다보라고 한 거야?” 그런데 그 순간, 베드로가 놀라운 말을 합니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네, 사도들은 돈이 없었습니다. 은도 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로 베드로는 명령합니다. “일어나 걸으라!” 그리고 걸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방금 전까지도 미문 앞에 엎드려 구걸하던 장애인이 벌떡 일어나 걷고 뛰면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나를 고쳐주셨습니다!”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거지요.



바로 이 장면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교훈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은과 금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이름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는 겁니다. 은과 금, 돈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물질을 위해, 돈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해요. 하지만 돈은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입니다. 돈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될 수도 없고, 돈에서는 어떤 능력도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돈의 능력, 은과 금의 능력을 의지하고 살게 되면 생계는 이어갈 수 있고, 잘 먹고 잘 살 수는 있을지 몰라도 능력 있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가 은과 금의 능력을 의지하면 그 어떤 영적 능력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미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중세 시대 위대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에서 교황 이노센트 3세와 대화할 때 일입니다. 교회로 은금보화를 가득 싣고 물밀 듯 밀려오는 수레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교황이 이렇게 말합니다.



최초의 교황인 베드로는 은과 금이 내게 없다고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시대는 지나갔도다!



그 말을 들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하지 않게 되었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말도 더 이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 교회에는 은과 금이 넘쳐난다.”고 자랑하는 교황 앞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지금 교회에 금은보화가 넘쳐나는 대신 교회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과 권능은 잃어버렸다.”고 말한 것입니다. 교회가 거대하고 화려하게 성당을 지었고, 은과 금은 차고 넘치도록 많지만 문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성도가 진정 의지해야 할 능력은 무엇입니까? 은과 금의 능력도 아니고, 돈의 권세, 물질의 권세도 아닙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능력뿐인 줄 믿습니다! 지금 혹시 우리 교회가 너무 배부른 것 아닌지요? 담임목사인 저와 우리 성도들이 너무 배불러진 것 아닌지 두렵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가난해도, 아무리 성도의 수가 적어도 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그 권세를 품은 교회는 반드시 권능이 나타납니다. 반드시 기적을 일으키게 됩니다. 회복과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고 성령의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줄 믿습니다. 우리 효자교회와 모든 성도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명심하고 우리에게 이 권세를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어떤 권세입니까? 세상의 그 어떤 권세도 아닌,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권세입니다. 이 권세만 있으면 우리는 영적싸움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힘들어하고, 모두가 지친 이때 특별히 우리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는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 내게 있는 것



둘째, 하나님은 내게 이미 있는 것으로 일하신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통 ‘내게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난 돈이 없어, 난 건강이 없어, 난 남들처럼 내세울만한 스펙이 없어.” 이런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살 때가 많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겁니다. “집사님, 성도님, 이것 좀 해보세요.” 하면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목사님 저는 ○○가 없어요.”입니다. 뭐가 없다고 할까요? “저는 시간이 없어요. 저는 능력이 없어요. 저는 건강이 없어요.” 심지어 “저는 숫기가 없어서 그런 일 못 합니다.” 이런 말을 제일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너무 아쉬운 것은 왜 나한테 ‘없는 것’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생각 안 하냐는 거에요. 시간은 없어도 마음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능력은 없어도 순종하는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건강이 없거나 숫기가 없으면 거기 맞는 일을 찾든지, 하나님께 담대함과 건강을 달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그런데 뭘 하라고 할 때 ‘없는 것’부터 찾는다면 평생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일 못합니다. 왜? 시간이 생겨도 또 다른 이유, 또 다른 없는 게 있다고 생각하면 못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일을 시키시려고 채워주셔도 항상 그 사람은 없는 것 타령하고 핑계 대다가 하나님 일 못합니다. 너무 안타까워요.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은 절대 ‘나한테 없는 것’으로 일하라고 안 하십니다. 반드시 ‘내게 이미 있는 것’으로 일하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라는 하나님 명령을 받고도 온갖 핑계 대며 발뺌합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출애굽기 4:2)



뭐긴요? 모세의 손에는 양을 치던 목자의 지팡이가 있었지요. 하나님은 그 말라빠지고 볼품없는 지팡이를 뱀으로 만드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그 지팡이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고, 홍해바다를 가르게 하시고,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십니다. 이미 모세의 손에 들린 지팡이를 사용해 역사를 일으키고 기적을 일으키신 거에요. 이것은 그 지팡이 때문이 아니라 모세에게 하나님이 권능을 주시고 영적권위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권능을 받고 영적권위가 있는 사람은 그 손에 이미 무엇이 들려있던 그것으로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이미 있는 것’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게 뭐였습니까?



6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와 요한 사도에게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이미 그 안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라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앉은뱅이 걸인을 향해 담대하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이 권세,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권세를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미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 권세, 이미 내게 주신 그 권능을 절대 땅에 묻어두지 말고 사용해야 합니다. 귀신과 악한 영을 몰아내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 권능을 갖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권능입니까? 예수 이름의 권능, 나사렛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이 예수 이름의 권능을 받으면 우리는 생각과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전에는 항상 ‘내게 없는 것’부터 생각났는데 이제는 ‘내게 있는 것’부터 생각나게 됩니다. 전에는 항상 ‘내가 못 할 이유’부터 생각났는데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이유’부터 생각납니다. 전에는 시작도 하기 전부터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난 못해, 안 돼”를 외쳤는데 이제는 승리의식에 사로잡혀 “난 할 수 있어, 주님의 이름으로 충분히 할 수 있어.”를 외치게 됩니다.



또한 이 예수 이름의 권능을 받게 되면 신앙수준이 확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에 세 가지 신앙수준이 나와요. 첫째로 가장 낮은 수준, 성전 미문에 앉아 오늘 하루 벌어 하루 근근이 먹고사는 거지 수준, 태어날 때부터 아예 걸을 수 없었던 앉은뱅이 수준의 신앙이 있습니다. 이런 무기력한 신앙에서 무슨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둘째로는 그 다음 낮은 수준, 습관적 신앙입니다. 성전에 부지런히 들락거리면서 매일 세 번씩 기도는 하지만 어떤 능력도 권능도 받지 못한 유대인들을 보세요. 그들의 신앙은 습관적 신앙이고 무의미한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에서 어떤 권능이 나오겠습니까? 교회만 오래 다니고 성전만 들락거리며 성전 뜰만 밟았지 그 어떤 능력도 안 나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베드로와 요한 같은 사도수준의 신앙이 있습니다. 그 수준은 어디서 나옵니까? 바로 내 안에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나옵니다. 다른 거 다 필요 없어요. 은과 금도, 그 무엇도 다 없어도 이거 딱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바로 이 예수 이름에서 권능이 나오고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에서 최고 수준의 신앙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 모두가 이런 수준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 모두가 이런 권능을 가진 사도수준의 신앙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과 금은 나 없어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할 때 평생 그를 괴롭히던 장애가 떠나고 그 사람은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금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네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아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돈만 있으면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설교 첫 머리에 무슨 얘기 했습니까? 수 천억이 통장에 있어도 비밀번호 모르면 소용없습니다. 바로 인생의 패스워드입니다. 모든 것을 통과시키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패스워드,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막힌 것을 해결해 주시고, 닫힌 문을 열어주시고, 꼬인 것을 풀어주시는 패스워드가 바로 ‘예수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풀고 모든 장애를 해결하시려면 이 PASSWORD 란에 주저하지 말고 JESUS라고 쓰시면 됩니다. 다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이 예수 이름의 권세, 내게 있는 그것을 지체 없이 사용하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 받는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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