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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염려하지 말라 (마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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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염려하지 말라(마6:25-34)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단편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정 러시아 시대, 시청의 동서기가 잘못해서 시장의 장화를 밟았습니다.


그는 즉각 사과를 했지만 시장은 누군가와 열을 올리며 토론 중이어서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시장이 나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되면 나는 목이 달아나고 그럼 가족들은 어떻게 되나?” 하는 걱정에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결국 다음날 시장을 찾아가 잘못을 빌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시장은 그를 본 척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가 다시 “아마 나를 용서하지 않을 모양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그는 다시 시장을 찾아가 애원을 합니다.


“한번만 봐 주십시오. 모르고 그랬습니다. 저는 처자식이 있는 몸입니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매일 찾아와 알지도 못하는 소리를 늘어놓는 것을 보고


화가 난 시장은 “아니 당신 뭐하는 것입니까? 당신 혹시 미친 것 아닙니까?”


이 말을 들은 그는 “시장은 끝까지 나를 용서하지 않는구나.” 절망적인 상태가 됩니다.


다음 날 아침 아내가 깨우려고 흔들었을 때 그는 걱정과 절망으로 지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염려와 걱정에 사로잡힌 사람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근심 걱정 중 80, 90%가 다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장은 구두를 밟았던 그 일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으며 그 일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데


괜히 자기 스스로 지나친 근심과 걱정의 구렁텅이를 파고 그 속에 빠져 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연구한 어느 미국 대학의 심리학 팀이 있었습니다.


그 조사결과를 보면 사람들의 걱정거리 중 40%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공연한 걱정을 그 만큼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걱정거리 중의 30%는 이미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간 것이고 이제 와서 걱정한다고 되는 일들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쓸데없는 걱정거리를 가지고 걱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10%는 병에 관한 한 걱정거리인데 그중엔 실제는 걸리지 않을 병에 관한 것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조사결과 진짜로 걱정할만한 것은 8%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8% 중에서도 정말로 머리를 싸매고 걱정해야 할 것들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걱정해야 소용도 없는 일들에 대해 걱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쓸데없는 걱정들을 가지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집이나 빌딩에 화재가 났을 때 불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연기입니다.


연기 속에 있는 치명적인 유독가스로 인해 순식간에 질식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인간 삶에도 무거운 짐과 괴로운 일 자체보다 그 짐이나 일로 인하여 생겨난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등이 마음의 파탄을 가져옵니다.


염려는 인간 삶에 치명적인 유독가스와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이 염려의 가스에 질식하여 죽어가고 있습니다.


염려가 마음속에 가득 차게 되면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도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고 그래서 불신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신하게 되면 여러 가지 죄악 된 생각들을 하게 되고 망령된 일을 행하게 됩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염려하다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결국 자신이 스스로 제사를 드리는 잘못을 범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염려는 죄를 잉태하게 되고 또 다른 죄를 낳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염려를 극복해야 하고 염려를 이겨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염려를 정복할 수 있다면 이와 같은 다른 수많은 죄악들에 대해서도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를 극복하지 못하게 되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많은 고통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육신과 정신의 건강도 잃게 될 것이고 많은 죄를 짓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서 하나님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염려한다고 무슨 일을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염려는 정말 백해무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이런 것들도 하나님이 기르시고 입히시는데 자녀 된 너희들을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겠느냐?


그러니 너희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염려 많은 세상을 살아가게 되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염려 없는 삶을, 평안한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염려를 극복하고 이기며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먼저는, 염려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대적하여 맞서 싸워야 합니다.


 


노만 빈센트 빌 박사가 거리를 걷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매우 괴로운 표정을 하며 인사를 하였습니다.


‘자네 무슨 근심이 있는가? 왜 그렇게 죽을상이 되어있는가?’


“말씀 마십시오, 요즘은 근심과 걱정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필 박사님 어디 근심 걱정이 없는 곳이 없을까요?”


“있지. 딱 한 군데가 있지” “그 곳이 어딘데요?”


필 박사는 그곳을 공동묘지로 말하면서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 걱정과 근심을 피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정말 근심과 걱정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꼭 염려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염려와 싸워서 이기고 평안의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차를 끌다보면 차가 더러워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차가 더러워지면 깨끗하게 세차해서 끌고 다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갈 때 수많은 걱정과 염려가 생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인 것처럼 보이고 어쩔 수 없는 일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 염려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염려를 자꾸만 키웁니다.


아이가 들어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으면 걱정을 합니다.


그렇게 걱정하다가 한 10분이 지나면 혹시 사고나 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10분이 더 지나면 누가 납치해간 것은 아닌가? 엉뚱한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뉴스를 통하여 전달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듣다보면 우리 속에도 그러한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염려 많은 세상을 살아간다고 해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과 맞서 싸워서 이기고 염려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삶이고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염려가 없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염려 없이 살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염려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염려와 대적하여 평안의 삶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평안을 선포하십니다.


내게로 오면 내가 평안을 주겠다, 염려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염려 없이 살아갈 수 있는데 염려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얼마나 손해 보는 삶입니까?


우리는 얼마든지 믿음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염려의 감옥에 갇히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염려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염려와 대적하시고 염려와 싸워 이기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늘 정립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확인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 주시고 그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핵심이자 근거가 됩니다.


이 사실을 확신했던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이렇게 외쳤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까지도 아끼지 아니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까지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는 확실한 안전보장입니다.


아들까지 주신 마당에 우리에게 주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합니다.


아들을 가진 부모님들이 사랑하는 아들을 군대에 보내면서 그것이 안타까워 운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왜 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도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32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주시고 사랑하면 언제나 함께 하시고 사랑하면 언제나 도와주십니다.


사랑하면 언제나 안전하고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할 때 염려는 사라지고 평안이 오게 될 줄 믿습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장래에 베푸실 은혜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의 약속들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염려가 생기는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위해 제시하신 모든 약속들을 신뢰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염려와 싸워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서 약속하신 모든 은혜를 확신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놀라운 약속들을 해 주시고 계십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몸을 부여해주셨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음식과 의복을 제공해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25절)


자녀를 낳고 방치해두는 부모는 없습니다.


하물며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자녀 된 우리를 그냥 버려두시지는 않습니다.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귀하고 소중한 위치에 우리를 놓고 계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26절)


공중의 새와 같은 미미한 존재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기르신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우리를 하나님이 왜 먹이지 않고 입히지 않고 기르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존재이기에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32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들에 대하여 잘 모르신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그것을 주실 수 있는 능력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네 번째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개인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안달하기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의 뜻을 이루고 영광을 돌리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틀림없이 채워주십니다.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다섯 번째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고전10:13)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날 동안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차원을 넘어서는 고난과 어려움은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 모든 날에 하나님의 은혜와 성실하심은 그날에 당하는 곤경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할 것입니다.


 


이 외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약속들을 해 주시고 계십니다.


이 말씀들을 염려를 물리치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장래에 대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점에서 염려가 되는 분들이 있습니까?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32:8)


적대자들을 대면해야 할 때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 미약하다는 염려가 엄습할 때가 있습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사랑하는 이들의 평안이 염려될 때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몸이 아파 염려될 때에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34:19)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염려가 될 때에는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 46:4)


죽음에 대한 염려가 엄습할 때에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14:7-9) 는 말씀으로 불신앙과 염려와 맞서 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다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신앙과 싸워야 합니다.


불신앙은 수많은 죄를 유발시키는 염려의 뿌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신앙에 맞서 선한 싸움을 싸울 때 염려는 사라지고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가운데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2021.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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