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는 안됩니다. (계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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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는 안됩니다. (계 3:14-22)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으로 인도에서 집회를 은혜 중에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여행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매일 매일 체험하며 복음을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80여 Km나 떨어져 있는 지역으로 매일 왕복 4시간의 차량이동이 좀 힘들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말씀을 사모하며 은혜를 받는 성도들의 모습과 매일 저녁마다 3가정의 선교사 가정과 한가정의 현지인이 부족한 제가 전하는 말씀에 은혜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매우 감사했습니다.
좀 힘든 일 중에 또 하나는 더운 날씨에 시원한 물을 먹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집에서 냉동시킨 음료수를 가져가도 차안에 두기 때문에 금방 미지근한 물이 되고 현지인들은 냉장고가 없기 때문에 시원한 물을 얻는 다는 것은 어렵고 얻는다해도 현지인이 주는 물을 그대로 마시면 설사가 날 염려가 많아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콜라나 음료수를 사 마셔야 하는데 역시 냉장된 음료를 사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차안에 두었던 미지근한 음료수를 마시면서 인도인들의 신앙이 그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미지근한 신앙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혹시 차지도 덥지도 않는 미지근한 막은 아닌지요?
한국교회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한국교회를 진단하면서 가장 크게 염려하고 염려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교회가 열정이 식어져서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는 미지근한 교회로 변질되고 타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고 진단을 합니다.
1)물질문명의 발달로 성도들의 생활 수준 향상되었기 때문이고.
2)돈이면 무엇이든지 해결된다는 황금 만능주의 사상이 성도들을 휘 잡고 있고
3)육체적 쾌락추구의 삶이 발전하여 영적인 삶에 무관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등 따시고 배부르니 염려할 것 없고, 아쉬운 것 없다는 의식이 생기다 보니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매달릴 것도 없고 점잔케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자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을 보면 현대 많은 교회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지적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신앙 때문에 밧모 섬에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하나님께 받은 계시가 요한 계시록입니다. 그 중에 2장, 3장은 현존하는 교회들을 보여주는 7교회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특징은 한마디로 미지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교회 중 가장 무서운 책망을 받은 교회이기도 합니다.
왜 라오디기아 교회가 이토록 무서운 책망을 받고 있는 것일까요?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부족했던 것입니다.
차든지, 덥든지 하라는 것은 주님을 향해 일을 할 때의 자세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열심히 하든지, 때려 치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런 모습은 싫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일에 열심을 내라는 경고입니다. 19절에 그런 언급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 생활도 그런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참석하는 것도 적당히 하지 말고 열심을 내어 참여하고 기도하는 것도 형편이 되면 하고 안되면 못하는 미지근한 자세를 버리고 죽기 살기로 열심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맡은 일에 대한 봉사의 자세도 그렇습니다. 구역을 맡았든지, 각 기관의 일을 맡았을 때 그 일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나아니어도 그럭저럭 일이 되겠지 하면 그것이 공동체를 무너트리는 무서운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 기도 담당도 그렇습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예배 기도는 형식이 아닙니다. 예배의 소중한 부분입니다. 그 일을 아무렇게나 한다든지, 못한다고 빠져버리면 단순히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야 할 예배를 손상시키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손상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도 그렇고, 그런 예배를 드리는 목사나 성도들의 마음은 얼마나 타겠습니까?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 한사람의 구원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사람을 붙여 주시기도 하고 천군 천사를 동원하시기도 하고 갖은 방법으로 은혜를 베푸시며 일을 하십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주를 섬기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 홀로 짝사랑을 하도록 방치하고 있지는 않는 것인지요?
2. 자신의 형편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라오디게아 교회가 책망을 받았나요?
자신의 형편을 올바로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겉모습만으로 자신이 건정하고 완벽한 존재인줄 알고 있었습니다.
17절을 보세요.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그렇습니다. 자신은 부자이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실제의 모양을 올바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곤고한 것, 가련한 것, 눈먼 것, 그리고 벌거벗은 모습이 실제의 모습인데 그런 부분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경제적으로 풍부하다구요? 그래서 부족한 것이 없다구요? 아닙니다. 겉은 그럴듯하나 실상은 형편없는 영적 고갈 상태임을 알아야 합니다. 껍데기만 보지 마세요.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의 영적 안목이 열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로 자신의 실체를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평안하십니까? 염려가 없으십니까? 그러나 영적 실상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겉은로는 평안한 듯하나 실상은 외롭고 두렵고 아무런 염려가 없다고는 하나 미래가 불확실하고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터질지 몰라 긴장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이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3. 적당주의와 현실 타협주의가 팽배해졌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점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핍박을 두려워하여 적당히 피합니다. 고난이 두려워 현실적으로 타협합니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적당하게 예수를 믿습니다. 결국 그 신앙이 미지근한 신앙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 적당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는 무섭게 우리를 향해 밀려들고 있습니다. 주일성수가 대표적인 예이고, 십일조 생활, 저녁예배, 수요예배등 예배 적당주의, 헌금적당주의, 봉사 적당주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형편이라는 것을 앞세워 타협주의가 대두되어 있습니다. 1부 예배 적당이 드리고 놀러가고, 낮 예배만 드리면 주일 성수한 줄로 알고 있고 가족간의 일이 생기면 어쩔 수 없다고 핑계 대고 빠지힌는 타협주의. 이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안의 4無 라는 현대병 때문입니다.
그 첫째가 1)무관심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설교를 준비해서 설교해도, 아무리 기도하고 계획을 세우고 전교인의 동참을 호소해도 교인들은 목석처럼 관심이 없습니다. 당장 눈앞에 떨어져야 겨우 움직일 뿐, 자신에게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면 관심을 꺼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이기주의가 교회의 여러가지 일을 해 나가는데 큰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큰 교회의 군중 속에 숨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편하게 믿고싶다는 교인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그래서 무슨 행사를 하든지 열심히 하는 몇 몇사람만 실컷 고생을 합니다.
그 둘째는 2)무반응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호소해도 교인들이 무반응일 때 목회자의 갈등은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설교를 잘 해도 들을 때는 `아멘' 하지만 그뿐입니다. 도무지 변화가 없습니다. 설교를 듣고 교회문을 나서면 다 잊어버립니다. 오늘날처럼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한 시대에서 무반응은 참으로 설교자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세번째로 3)무의식입니다.
현대인들이 될 수 있으면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고 단순한 것을 찾으려 하는 것이 체질화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의식있는 설교나 권면을 해도 단순히 들어 넘겨 버립니다. 역사는 의식 없는 민족이나 종교는 자멸했음을 보여주는데 참으로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무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제직들은 교회봉사에 무책임합니다. 기도 순서나 안내위원을 맡겨도 빠지기 일쑤요 모임을 참석하기를 아무리 강조해도 빠져야 위신이 서는 양 안나옵니다. 자기 일이 우선이요 하나님의 일은 차선입니다.
무관심, 무반응, 무의식, 무책임. 이것은 사단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사탄의 고도의 전략에 넘어 간 것입니다. 옛날의 사단의 전략은 죽이고 가두고 핍박하는 것이었답니다. 그런데 최근에 전략은 수정되었답니다. 봉사하고 예배 드리라는 것입니다. 헌금하고 선교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열심히 말고 적당히 하고 내일하고 지혜롭게 눈치 봐가며 하라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었답니다. 결국 사단은 대 성공을 이루고 있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모습입니까? 어떻게 해야 뜨겁게 주님을 섬기게 될까요?
봉독한 말씀에서 주님은 3가지를 처방합니다.
1.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불로 연단한 금이란 훈련과 고난을 겪은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부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돈으로 부자 되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속는 것입니다. 세상의 돈 부자는 부족한 것이 없어 보여 행복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더 고통스럽고 외롭고 힘든 삶를 살아갑니다.
수원 경희대 옆에는 "노불 카운티"라는 양로원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전세 보증금 2억~4억의 아파트로 독신 월 190여만원 부부 300여만원의 생활비를 내는 최신판 양로원이 있습니다. 그들은 돈은 많아 그곳에 왔으나 그들의 대부분이 외롭고 힘든 삶을 살고 있답니다.
참된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부자입니다. 그런 부자는 영육간의 행복을 누리며 부족함이 없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시편 23편의 고백처럼 여호와를 목자로 따르는 양은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부자가 진짜 부자인 것은 현세에서도 많은 복을 누리고 하나님 나라에서도 누릴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믿음을 어떻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듣고 배우면서 얻어지는 것이며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나 또한 훈련과 연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합니다. 그냥 생기는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보혈과 십자가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2.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합니다.
라오디게아 지방은 양을 목축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흰색 양모로 옷을 지어 입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흰옷을 입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아 자신의 부끄러운 죄악과 수치를 가리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신앙이 거룩하고 성별된 삶이 되며 또한 깨끗하고 온전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사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라는 말은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까요? "나"라는 것을 포기해야하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려면 자신의 죄악을 볼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3. 안약을 사서 눈을 바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영적 통찰력을 갖으라는 것입니다. 역시 라오디게아 지방은 안과 질병에 특효약이 생산되는 지방인데 그런 육신의 눈의 약만 바르지 말고 영안을 치료할 안약을 사서 바르라는 것입니다. 즉, 영적 통찰력을 갖고 자신의 모습과 현실의 모습, 그리고 사단의 간교한 모습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안약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는 영이요, 어두움의 세상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분별력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올바로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사단의 간교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겠다고 경고합니다. 회개만이 살길이라고 경고합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과의 온전한 영적 교제가 이루어지고 결국 하늘보좌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대로는 안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신앙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차든지 덥든지 하라는 주님의 경고를 가슴깊이 새겨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미지근한 신앙 생활을 계속할 것입니까?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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