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신앙생활 (마7:13-14)
본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신앙생활
마태복음 7:13-14
차를 타고 갈 때 어느 지역이든 도로가 아주 번듯하게 잘 뚫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차가 많이 왕래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왕복 4차선으로 잘 나 있는 도로를 보면서 한 마디씩 합니다.
‘우리나라는 도로 하나는 잘 뚫어 놨다.’ 정말 그렇습니다.
새로 신설되는 도로도 많고 예전에 굽어진 도로는 반듯하게 고쳐놓고 좁은 도로는 넓게 확장해 놓았습니다.
전국 어디를 가든 도로하나는 정말 잘 뚫려있습니다.
예전에는 도로를 잘 뚫어놓으면 적들이 침략하기 쉽다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오늘날에는 도로의 중요성을 알기에 많은 돈을 들여 도로를 잘 뚫어놓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문과 길의 비유를 통하여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면서 그 좁은 문과 반대되는 큰 문을 언급하고 있고요,
좁은 길을 말씀하시면서 좁은 길과 반대되는 큰 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한 마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크고 넓은 문이 있고 길이 있지만 그곳으로 가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걸어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진리를 잘 보여주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걸어가는 수고가 있을 때 좋은 열매가 있고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같이 무덥고 불쾌지수가 높을 때는 모든 일이 힘들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이 여름을 나는 일이 쉽지 않을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힘들고 짜증나는 그것을 참고 이겨내고 열심히 공부해야 원하는 성적을 얻을 수 있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힘들다고 놀고 쉬고 잠만 자고 티비만 보는 넓은 문으로 넓은 길로 가서는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런 일반적인 진리를 언급한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한 마디로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예수님 당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정말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좁은 길로 걸어가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8:20)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번듯한 집하나 없는 가난한 주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생활적으로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좁은 길이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반대했고 특별히 집권자들이 예수님을 반대했습니다.
그런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언제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는 모험을 감행하는 좁은 길이었습니다.
결국 많은 기대를 가지고 따랐던 예수님은 사람들이 볼 때는 십자가에 처형당하면서 실패한 개혁자로 실패한 인생으로 그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정말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나를 믿고 따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실까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생명으로 인도하기 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도로가 잘 뚫렸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도로에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는 서울에서 부산 지역으로, 부산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도로입니다.
호남고속도로는 서울에서 호남지역으로, 호남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도로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경부고속도로를 타야하고 호남으로 가기 위해서는 호남고속도로를 타야 합니다.
전라도 광주를 가려고 하는데 경부고속도를 타면 목적지까지 갈 수 없습니다.
도로가 뚫려있는 방향을 알아서 올바른 도로를 선택해야 목적지까지 잘 갈 수 있습니다.
도로를 잘 이용하기 위해서는 좋은 도로를 찾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도로가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를 알고 목적지에 맞는 도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좁은 문,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은 그 주님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믿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주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며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십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은 바로 주님을 믿고 섬기며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이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우리가 들어가는 문이 생명으로 인도하느냐? 멸망으로 인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은 그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큰 문과 넓은 도로로 가서는 안 될 이유는 그 길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이 크냐? 문이 작으냐?, 도로가 넓으냐? 좁으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문과 그 길이 어디를 목적하고 있는지를 알아서 선택하는 것이 진정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함을 받기 위해서는 비록 문이 작고 길이 협착하여도 그리로 가야하고,
반대로 아무리 문이 크고 길이 좋아도 그래서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 길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이라면 그리로 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경북 문경에 가면 문경새재가 있습니다.
다시 오고 싶은 곳 1위로 선정될 만큼 경치가 좋고 주변 경관이 수려한 곳입니다.
지금은 잘 정돈이 되었고 길도 넓고 좋습니다만 예전에는 길이 좋지 않았고 험한 산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상도에서 한성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사람들은 그 힘든 고갯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로 가야 서울로 가서 과거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길이 어떤 길이냐 하는 것보다 그 길이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자기가 목적하는 곳으로 인도하는 길은 당연히 힘들어도 가야하고 좁고 협착하여도 가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목적하는 곳으로 인도함을 받지 못한다면 아무리 쉬워도 가서는 안 되고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찾아도 가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 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을 따르는 좁은 문,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먼저는, 신앙생활이 진정 좁은 문, 좁은 길임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말씀하시면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좁은 길로 좁은 문으로 비유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서울에 사는 제 친구가 늦게 60이 넘어서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 친구가 얼마나 열심히 믿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지 모릅니다.
한번은 전화를 해서 ‘이렇게 좋은 예수님을 왜 이렇게 늦게 알았는지 모르겠다.’며 아쉬워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면을 했습니다만,
여러분, 신앙생활을 할 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대부분 새신자입니다.
새 신자 때는 이런 고백을 하고 이런 기쁨 속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항상 이렇게 기쁘고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참 좁은 길이다 좁은 문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미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16장에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가 삶의 주인공이고 자기 생각과 자기 뜻과 자기 목적을 가지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것을 부인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인정하고, 자기 뜻을 포기하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이 내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어렵고 힘든 과정이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평생 애쓰고 힘써야 할 일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왜 좁은 길인가 하면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십자가를 자기희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을 위해서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희생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고 좁은 길로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군가가 쉽고 편하고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길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그것을 절대 믿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거짓이요 유혹이라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사실을 늘 기억하실 때 우리는 실족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좁은 문을 통과할 뿐 아니라 좁은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은 거의 같은 의미이지만 문을 시작으로 볼 때 길은 계속가야 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을 통과할 때는 말할 수 없는 희열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을 통과하면 넓은 길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이 나타나는데 그 좁은 길이 끝없이 계속되어집니다.
그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그 길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처럼 넓고 편한 길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돌밭에 떨어진 씨는 처음에는 기쁨으로 받지만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넘어지는 자들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빠져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그런 씨와 같은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많은 유혹과 시험에 빠지게 되고 좁은 길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좁은 문만 통과하지 마시고 계속해서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끝나지 마시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생명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힘들다고 어렵다고 길이 좁다고 중간에 포기하고 넓은 길로 나아가면 생명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로, 그 길에 주님이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고 인도하여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바로 좁은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여러분, 좁은 길은 결코 힘든 길만은 아닙니다. 외로운 길만도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를 크게 힘입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에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인 리빙스턴이 그 어려운 좁은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었던 것도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끝까지 순교하면서까지 믿음을 지켰던 것도 주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한 원주민의 안내를 따라 밀림 속을 향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안내자가 길은 없고 이상한 곳으로만 인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초조해진 이 사람이 원주민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길은 보이지 않고 이상한 곳으로만 인도하는 것 같습니다. 길은 언제 나옵니까?”
그러자 안내자가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이런 밀림 속에 무슨 길이 있겠습니까? 길은 없습니다.
내가 곧 길입니다. 나를 믿고 따라 오시면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걷는 이 길이 좁고 험한 길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길을 안내하시고 우리의 길을 닦아 주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주님을 믿고 따라갈 때 우리는 이 좁은 길을 잘 이기며 나아갈 수 있고 생명의 문에 도달하게 될 줄 믿습니다.
(2021.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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