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합주의와 영적인 전쟁을 선포해야 돼요 (호3:1-5)
본문
혼합주의와 영적인 전쟁을 선포해야 돼요 = 호세아3;1-5
PW : 믿음 BIW : 돌아오라 AG : 고멜
TS : 믿음이란 날마다 영적인 전쟁을 선포하며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엽기 시골약국
외딴 시골마을에 약국이 있었습니다.
워낙 깊은 산골이라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았습니다.
어느 날 환자가 감기약을 달라고 하자, 약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기약은 없어요. 그냥 푹 쉬면서 나을 때까지 기다리세요.”
환자가 “하지만 너무 괴로워요. 약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럼, 얼음물로 목욕을 하고 속옷만 입은 채로 밖에 나가 돌아다니세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약사의 말에 환자는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폐렴이라도 걸리면 어떡하죠?”
그러자 약사가 자신 있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희 약국에 폐렴 약은 있거든요.”
어쩌면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지 않을까요?
자신이 약을 팔기 위해서 사람들이 병에 걸려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세상에 아픈 사람이 전혀 없다면 굶어죽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게 됩니다.
병원에 근무하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약국에 근무하는 사람들, 의료기계와 약을 만들어내는 회사직원들, 상품을 판매하고 배달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들까지도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들을 비난하려면 우리들 자신을 먼저 비난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러니 우리들은 어느 누구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 사랑의 사람은 어느 누구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인정해 줄 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용납하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들도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P4.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에게 때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시키실 때도 있다.
어떻게 믿음의 사람이 이럴 수 있나? 싶은 일을 시키실 때가 종종 있다.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일정한 상식선이라는 기준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 상식선을 깨어버리시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사람과 혼인하는 것이다.
믿음의 남성은 믿음의 여성을 아내로 맞아서 믿음의 가정을 세워가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일꾼인 호세아 선지자에게 찾아오셔서,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고 말씀하신다.
분명히 오직 예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인데, 불신자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보통 불신의 여인이 아니라 온갖 세상의 음란한 것들도 가득 채워진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진짜일까? 의심스럽다.
그런데도 오직 믿음으로 사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된다.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기 때문에 디블라임의 딸 고멜과 혼인하게 된다.
고멜은 음란한 여인이다.
고멜은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을 찾아다니며 음욕으로 생을 즐기면서 사는 여인이다.
이런 고멜이라는 여인은 호세아 선지자와 혼인하여 2남1녀를 낳는다.
고멜은 첫째 아들을 낳고는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을 주신다.
‘내가 이스르엘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겠다.’는 의미로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신다.
딸을 낳고는 로루하마라는 이름을 주신다.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겠다.’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증오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이름이다.
둘째 아들을 낳고는 로암미라는 이름을 주신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싶지 않다고 하신다.
고멜은 본래부터 음란한 여인이다.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에서 온갖 음란한 삶을 살아가던 여인이다.
어느 한 남자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다른 남자의 품을 찾아 떠나는 여인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강권적인 의지에 의해서 음란한 남자도 아닌 아주 거룩하고 경건한 남자, 매우 정결한 남자,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남자.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는 상남자와 같은 남자, 이런 호세아 선지자와 혼인하여 2남1녀의 자녀까지 낳은 여인이다.
이렇게 혼인했으면 당연히 호세아 선지자와 아름답고 복된 가정을 꾸리면서 믿음의 여인으로, 자녀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해 나가는 여인, 현숙한 여인으로 세워지면 얼마나 좋을까?
고멜은 그런 바램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여인이다.
본래 음란한 여인이기 때문에 잠시 동안 호세아 선지자와 혼인하여 2남1녀를 낳으면서 안정된 가정을 꾸려나가는가 싶더니, 본래 음란한 여인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
3아이의 엄마인데도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돌보지도 않으면서 다시 음란의 세계로 달려가서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을 찾아 떠나버리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다시 호세아 선지자를 보내서 고멜을 찾아오라고 하신다.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음란의 세계로 돌아가 버린 고멜을 찾아가서 다시 돌아오라고 권면한다.
강권적으로 데려오려고 한다. 그렇지만 고멜 여인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
① 내 삶이다.
내 인생 내가 살아가는 것이지 누가 내 삶에 주인이 되어 이래라 저래라 한단 말인가?
내가 살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살고 싶다.
마음 가는 대로, 몸 가는대로 몸도 주고, 마음도 주고, 영혼도 주고, 내 가진 모든 것들을 주면서 살고 싶다.
어느 누구에게든지 간섭을 받는 것이 싫다.
신랑도 신랑의 삶이 있게 마련이고, 자식들도 자식들의 인생이 있지 않겠나?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아갈테니 남편은 남편의 인생을 살아가고, 자식들도 자식들의 인생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아내이기 때문에, 엄마이기 때문에 나에게 얽매여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평생 동안 한 남자에게 목숨 걸고 사는 것보다는 이 남자, 저 남자와 살면서 날마다 즐기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좋고 행복한지 모른다.
이렇게 사는 것이 뭐가 나쁜가?
이래 살아도 한 평생, 저래 살아도 한 평생 아니던가?
사람이 한 번 살다가 가는 게 인생인데 즐기면서 살아가다가 가야 하지 않겠나?
② 난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잘만 살고 있다.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에게 정말 하나님이란 분이 필요할까?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여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잘 살아 왔는데 이제 와서 뭐하러 귀찮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야 된단 말인가?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받는 것이 싫다.
남편이든, 자식이든, 하나님이든 나는 누구에게도 구속 받는 것이 싫다.
난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다.
D4.
① 다시 사 주시는 하나님
고멜은 호세아와 결혼하여 2남1녀의 자녀를 낳았지만, 신랑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다른 남자의 품을 찾아 떠난다.
아내의 자리도, 엄마의 자리도 헌신짝처럼 버리고 떠난다.
그러면서 다른 남자의 품을 찾아서 거리를 헤메면서 떠돌아다닌다.
길거리에서 만난 남자와 뜨거운 음행의 시간을 보내고, 다음 날에는 또 다른 남자를 만나서 뜨거운 음행의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살아가는 고멜을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주시기로 작정하신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찾아오셔서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고멜이 아닌 다른 여인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는다.
이미 신랑과 자식들을 팽개치고 다른 남자의 품안에 안긴 바로 그 여자, 고멜 여인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15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바로 그 여자를 사오는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고멜 여인에게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하면서 다시 고멜 여인을 사랑하기로 결단한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애타게 찾고 계시는 지를 직접 보여주고 싶어서 믿음의 사람, 의롭고 정결한 사람인 호세아 선지자에게 음란으로 찌들어진 삶을 살고 있는 고멜이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가정을 세우도록 하신다.
다시 떠나가 버린 고멜 여인을 많은 돈을 주고 다시 사오게 하신다.
고멜이라는 여인은 남편의 지긋한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될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남편을 버려두고 다른 남자를 찾아다니는 음란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여인이다.
신랑 되시는 하나님의 지긋한 사랑을 마음껏 받고 먹고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서 온갖 잡다한 이방신들을 연애하듯 음란하게 섬기는 모습이 바로 고멜이라는 여인의 모습이다.
여전히 신랑을 떠나서 다른 남자의 품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고멜이라는 여인을 여호와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다시 찾아오라고 하시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제든지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오라고 애타게 부르고 계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올 때까지 찾고 찾고 찾고 여전히 찾으시면서 돌아오기를 갈망하고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품안으로 돌아오는 길만이 유일하게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선포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우리들을 위하여 하늘나라의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값을 주고 사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해 주시기 위해서 피값으로 대신 사 주신다.
② 영적인 싸움, 영전을 선포하여 오직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고 선포하시는 하나님.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북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매우 부강했던 시절이다.
경제적으로 매우 부강하게 되니까 영적으로 타락과 부패하여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된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시절, 6.25전쟁을 치루고, 60년대, 70년대, 80년대는 비록 경제적으로는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중요했던 시절이다.
교회마다 모이기에 힘쓰고,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부흥회하고, 교회를 개척하면 금방금방 부흥하던 시절이다.
배가 고프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격려와 사랑의 힘을 배고픔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데 90년대, 2000년에 들어오면서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서 점점 교회는 타락하게 되고, 영적으로 둔감해지는 시기가 되고 말았다.
배고픔이 사라지니까 교회마다 분쟁이 일어나고, 온갖 추악한 행태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도 배고플 때에는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백성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배고프지 않으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버리는 것이다.
영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하여 하나님의 대적의 편에 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되고 만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서 이방신상들을 음란하게 섬기는 것은 이방신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을 파멸의 길로 이끌고 가는 악한 세력들, 더럽고 악하고 추한 세력들, 사탄의 세력들, 마귀의 세력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넘어트리고 패망의 길로 이끌고 가는 악한 영적인 세력들을 대적하여 영전을 선포하고 오직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고 선포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영적인 싸움에서 무참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들을 무너트리려고 잦은 계략과 모략과 술수를 동원하는 악한 세력들이 어떤 세력들인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악한 세력들이 파놓은 올무와 함정에 무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들을 무너트리려고 하는 악한 세력들은 하나님의 백성들, 자녀들에게 사회문화를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믿음생활도 하고, 사회생활도 적당하게 하면서 즐기면서 사는 것이 좋지 않냐? 하면서 타협하도록 미혹한다.
세상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 사탄은 신앙인들에게 신앙생활과 전통문화를 적당하게 혼합하여 신앙생활하라고 미혹하는 것이다.
L4 & B4.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가야 되는 신앙인들은 날마다 영적인 전쟁을 선포하며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곧 혼합주의를 맞서서 철저하게 배격하고 싸움에서 이겨야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지금 사탄이 신앙인들에게 가장 미혹하는 수단은 바로 혼합주의에 의한 혼탁한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다.
① 카토릭교회(천주교), 이단들을 비롯한 혼합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
로마카토릭교회는 기독교가 아니다.
로마카토릭교회는 기독교를 빙자한 이단종교에 불과하다.
로마카토릭교회로 인해서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에 들어온 이방종교의 흔적들로 넘쳐난다.
ⓐ 우리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성탄절에도 이방종교의 흔적으로 나타난다.
12월 25일이라는 날짜에 이방종교의 흔적이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연도는 A.D1년이 아니라 B.C4년이다.
본래는 B.C.는 Before Christ로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 곧 ‘기원전’을 말한다.
A.D는 Anno Domino(그리스도의 해)로서 곧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해, 곧 ‘기원후’를 말한다.
로마교회가 예수님의 탄생한 해를 A.D1년으로 정하였는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은 알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을 정하여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고 기념해야 되는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짜를 알 수 없었다.
그럴 때에 유대인들은 12월25일이 수전절로 지키는 날이고, 로마인들은 오래전부터 12월25일을 태양신의 탄생 혹은 소생을 기념하는 날로 지키고 있었다.
12월 25일은 그레고리역(Gregory)이 사용되기 전에는 동지(冬至)에 해당하는 날이었다.
동지란 한 해 중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이다.
태양의 관점에서 보면, 약해졌던 태양의 기운이 다시금 힘을 얻는 날, 곧 낮의 길이가 길어지는 시점이 바로 동지가 된다.
그래서 태양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동지는 태양신의 탄생일로 여기는 날이다.
로마 카토릭교회에서는 유대교에서 수전절로 지키는 날인 동시에, 로마인들이 태양신의 탄생일로 여겨지던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정하게 되었다.
그런가하면 아기 예수님께서 나귀구유가 아니라 말구유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눅2;7에서는 구체적인 동물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단순하게 ‘구유’라고 표현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단어 하나에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여 셑트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유대인들은 근본적으로 나귀는 좋아하지만, 말은 근본적으로 싫어하는 민족이다.
나귀는 나약한 동물이다. 주인에게 복종, 순종할 줄만 알았지, 전쟁을 위해서는 전혀 쓸모없는 동물로 취급되었다.
말은 전쟁을 의미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세계정복을 위해서 혈안이 되었던 로마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다. 말은 Power, 권력, 능력을 의미하는 동물이다.
로마인들은 전쟁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전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거짓 평화를 외치는 민족이다.
전쟁하기 위해서 말을 좋아하고, 개선장군들이 개선할 때도 군마들을 타고 당당하게 개선한다.
유대인들은 전재용으로 사용하는 말을 좋아하지 않고, 전쟁을 싫어하는 나귀를 좋아하는 민족이다.
그런 관계로 유대인의 메시야로 태어나는 메시야는 유대인의 정서를 따라서 나귀와 연결되어 태어나신다. 말과 연결되어 태어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 분명히 유대인의 정서를 따라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나귀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그런데도 로마 카토릭교회에서 로마인들이 강력한 파워를 지닌 말을 좋아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구유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로마 카토릭교회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구유는 힘없는 나귀가 먹는 구유가 아니라 권세와 파워를 가진 말이 먹는 구유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함으로서 교회가 세상의 권세를 능가한다고 주장하게 되었고, 교황 제도를 만들어냈다.
세상의 정권에서는 황제가 가장 강력한 권세자이듯이, 교회에서는 교황이 가장 강력한 권세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로마 카토릭교회는 세상의 정권에서 황제보다도 더 강력한 하나님의 권세를 지닌 교황이 다스리고 통치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런 주장이 오늘날까지 아무런 의심없이 예수님께서 말구유에 태어나셨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 예수님의 부활에도 이방종교의 흔적이 그대로 나타난다.
부활절의 공식적인 명칭을 Easter가 아닌 the Resurrection Day이라야 옳다.
하지만 부활절(the Resurrection day)을 의미하는 공식적인 영어단어가 Easter이다.
Easter라는 단어는 바벨탑을 건설한 니므롯(창세기10;8-9절)의 아내 세미라미스의 또 다른 이름인 Ishtar에서 기원한다.
니므롯이 훗날 태양신으로 숭배되고 그의 탄생일로 여겨지던 12월25일이 성탄절로 둔갑한 것처럼, 부활절로 여겨지는 Easter는 여신 Ishtar(세미라미스)의 탄생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바벨론에는 Ishtar의 탄생 신화가 전해져 온다.
만물이 소생하는 춘분이 지나고 보름달(full moon)이 떠서 유프라테스 강을 비출 때, 하늘로부터 달의 형상을 한 알(egg)이 내려와서 여기서 세미라미스(Ishtar)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로마카토릭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부활절은 Ishtar의 탄생을 기념하는 절기인 ‘춘분 후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로 정해지게 되었다.
달을 기준으로 날짜를 정하는 유대력이 무시되고, 태양을 기준으로 날짜를 정하던 로마력을 따라서 Ishtar의 탄생을 기념하던 절기가 부활절로 그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활절계란이 나타난다.
세미라미스가 알에서 태어난 Ishtar를 기념하기 위해 Ishtar의 제단에 알(계란)을 바치던 풍습이 있었다.
이 풍습이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풍습으로 포장되어진 것이다.
이러한 이방풍습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부활절 계란(Easter’s egg)으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부활절 계란(Easter’s egg)이 바로 여신 Ishtar의 탄생을 기념하는 계란(Ishtar’s egg)이었던 것이다.
로마 카토릭교회에서 부활절 계란에 붉은 칠로 장식을 하는 것은 Ishtar의 제단에 알을 바칠 때, 어린아이를 죽여 피를 받은 뒤 알을 그 피에 담가 제단에 올리던 풍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활절 토끼가 등장한다.
부활절 토끼라고 하면 한국 교회에서는 낯선 풍습이지만, 서양에서는 색칠한 부활절 계란과 함께 초콜릿으로 만든 토끼를 바구니에 넣어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
여기서 사용되는 토끼를 부활절 토끼(Easter’s bunny)라고 부른다.
토끼는 봄이 되면 짝짓기를 시작하여 풍요(fertility)와 다산 혹은 Sex의 상징이었다.
풍요와 다산의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던 Ishtar를 상징하는 동물이 바로 토끼(bunny)이다.
일루미나티가 발간하는 외국의 유명한 성인잡지가 bunny girl을 마스코트로 쓰는 이유도 여기 있다.
ⓒ 사순절(Lent)
흔히 예수님의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사순절을 지키는 교단과 교회들이 많다.
사순절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잘못된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40일 후에 부활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예수님은 죽은 지 3일 후에 다시 살아서 부활하신다고 하셨을 뿐이다.
그런데도 교회들이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40일, 사순절을 지킨다.
이 사순절은 바로 바벨론 종교의 세 인물 가운데 하나인 세미라미스의 아들 담무스와 연결되어 나타난 절기이다.
바벨론 신화에 의하면 세미라미스의 남편 니므롯이 바벨탑을 쌓은 죄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은 뒤에, 세미라미스가 태양신(바알)이 된 니므롯의 기운을 받아 유복자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담무스였다.
이렇게 어렵게 얻은 아들 담무스가 사냥하러 나갔다가 멧돼지의 공격을 받고 죽게 된다.
세미라미스는 백성들에게 죽은 아들 담무스를 위해서 앞으로 40일 동안 고기를 먹지 말고 금욕하면서 애곡할 것을 명령하게 되었다.
그 결과 40일이 끝나는 마지막 날 담무스가 다시금 부활했다는 것이다.
바벨론 종교에서 Easter는 실상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Ishtar의 탄생과 담무스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가 된 것이다.
Easter’s pig라고 해서 서양에서는 부활절에 꼬치에 구운 돼지고기를 먹는 풍습이 있다.
이것은 담무스를 죽인 멧돼지에 대한 보복으로 돼지를 잡아 구워먹던 바벨론 종교에서 전래된 것이다.
이런 것들이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에 고스란히 들어와서 주인공 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 안에 고스란히 들어와 있는 로마 카토릭교회의 잔재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행위들을 끊어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는 어디까지나 주님의 말씀으로 세워져야 합당한 원리이다.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들이 온전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영적인 전쟁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발버등치면서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떠난 로마 카토릭교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이단들을 향하여 영적인 전쟁을 선포하고 오직 예수님만이 오직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② 우리나라 전통문화라는 혼합주의와 영적인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가나안족속들을 쫓아내고, 그들이 섬기던 가나안의 종교들을 파괴, 파멸시키라고 선포하신다.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면 도리어 그들이 올무와 가시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고, 이방 신상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될 것이고,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경고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드시 내쫓아낼 가나안의 7족속들과 그들이 섬기던 신상들은 우리 한민족에게는 무엇으로 적용시킬 수 있을까?
곧 우리들에게는 전통문화라는 미명 아래 펼쳐진 온갖 미신행위들, 샤마니즘, 무속신앙들이다.
교회안에서도 이미 각종 전통문화라는 미명 아래 미신들이 들어와 자기 자리를 틀어잡고 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새해가 될 때마다 세상에서 떠드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의 입에서 어떠어떠한 짐승의 해라든지, 무슨무슨 띠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라는 미명아래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이야기한다.
우리 한민족은 샤마니즘이라는 무속신앙에 뿌리 깊게 영향을 받고 있는 민족이다.
샤마니즘 중에서 토템이즘이라는 동물숭상신앙이 있다.
동물을 숭상하는 것이 12지신으로 나타난다.
12지신은 12가지 동물의 신들이다.
우리 한민족은 12지신에 의해서 ‘무슨무슨 짐승의 해, 무순무슨 띠’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쩌면 족보이야기나 60갑자이야기, 띠 이야기를 잘 아는 사람이 유식한 사람이고, 믿음이 좋은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전통문화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들이 묵인되고 용인되어지는 상황이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장례문화, 혼인문화를 비롯해서 각종 전통문화라는 미명으로 무속신앙들이 교회안으로 속속 들어와 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가면서 가나안의 7족속과 그들이 섬기는 신들을 안전하게 쫓아내고 그들을 따라가지 말라고 경고하신 말씀은 우리 민족에게는 무속신앙의 하나인 토템이즘에 의해서 생겨난 12지신과 온갖 전통문화를 쫓아내라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우리나라에 전해진지 150여년이 지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2지신과 온갖 미신적인 전통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는 것과 똑 같은 우상숭배행위이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시기까지 하시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고, 돌아오지 않으면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에 의해서 우리 한국교회는 우상숭배의 죄악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전통문화라는 미명으로 꽈리를 틀고 앉아 있는 각종 미신행위들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오직 예수님만이 드러나고 높여질 수 있어야 한다.
WCC(World council of churshes ; 세계교회협의회)에 소속되어서 활동하는 교회들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종교혼합주의에 빠져서 사탄의 종교로 전락시키는 교회들이다.
이런 것들과 영적인 전쟁을 선포하고 이겨나가야만 한다.
③ 혼합주의와의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을 우리의 유일한 여호와 하나님으로,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으로, 우리의 성령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높여드리면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는 것을 기독교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요 행음이요 간통하는 행위요 우상숭배의 죄악이다.
우리교회에서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만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다른 교회에서, 다른 교단에서, 다른 종파에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가져와서 이것이 마치 기독교의 모든 것인 것처럼 가르친다 해도 과감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오는 길만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이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오는 길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아가는 길이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오는 길만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아가는 길이다.
하나님은 호세아6;1-3의 말씀을 통해서 이제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알면서 살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계신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처음부터 세세히 배우고 익히면서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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