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신앙의 지조 (계3:7-13)

본문

신앙의 지조(계3:7-13)








 


세상은 점점 좋은 세상에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신앙적으로 볼 때는 전혀 그렇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옛 부터 그리스도인이 인구의 1/4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불신자들이 많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회에 대한 영향력 기여도로 본다면, 수적인 것보다 훨씬 저조합니다. 이 사회 속에서 기독교적 문화를 찾아보는 것은 어렵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수보다 기독교적인 양심, 도덕성을 찾기란 더 어렵습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말로만, 형식적으로만 기독교인이지 실제 삶에 있어서는 기독교적 정신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풍토와 문화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다가 교회밖에 나가면 어쩔 수 없이 하나님과 동떨어진 신앙적인 지표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는 것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 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말세의 현상중 하나는 신앙의 사람들이 신앙에서 떠나는 행위입니다.


디모데후서3장4절에 “배반하여 팔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상대방과의 신의도 저버리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우정이니 동료의식이니 하는 말들이 아득한 옛 낱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시대가 지금 이 시대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동고동락했지만 결국은 돈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사도 바울 주위에도 데마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좋은 신앙이란 바로 신앙의 지조를 굳게 지키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치를 봐서 지조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 핍박을 받을까봐 잔머리 굴려가며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 자기의 이해득실을 계산하며 이렇게 변하고 저렇게 변하는 사람은 결코 참다운 신앙의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의 시대는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어려운 시대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즉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과 박해에 맞서서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항상 평화롭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신앙의 위기도 닥치고 환경의 위기속에 들어가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삶 인 것입니다.


세상은 온통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성적인 유혹도 있고, 도덕적인 유혹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유혹도 있고, 정신적인 유혹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위기가 닥친다 해도, 그 어떤 유혹이 온다해도 우리의 신앙에는 변함이 없어야 하며 신앙의 지조를 꼭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 왕의 금 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함으로 풀무 불에 들어가게 된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들어갈 때는 분명 세 사람이었는데, 풀무불안에는 세 사람이 아닌,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바로 주님이셨습니다. 즉 주님이 다니엘 세 친구와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에서 구출 받았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난관과 고통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에 들어간 것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다니엘서 3장 17절과 18절에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자신들이 풀무 불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출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극렬히 타오르는 풀무 불로부터 건져 내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풀무 불에 타 죽는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성도님들의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하고 있던 당시 소아시아에 대표적인 일곱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오직 두 곳만 책망을 받지 않고 칭찬만 받았습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빌라델비아’라는 말의 뜻은 “형제사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버가모의 왕 아탈루스 2세(Attalus II, B.C. 159∼138)가 자신에게 왕위를 양보해준 형 ‘유메네스’ 에게 감사한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이 도시를 건설하고 도시의 이름을 헬라어로 ‘필라 델포스’ 즉 “형제를 사랑하는 자” 라고 명명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빌라델비아는 포도 농사를 많이 지었고 포도주가 유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시의 수호신으로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Dionysus)를 섬겼고 그 외 수많은 각종 우상과 귀신을 섬기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언제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어 빌라델비아 교회가 세워졌는지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지만 성도들의 신앙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1.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는 것(8)






 


“볼지어다 네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교회였지만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책망할 것이 없고 칭찬거리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복음이 마음 밭에 떨어지면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았으며 힘을 다해 그 말씀을 지켜 살려고 하였습니다. 힘이 약하다 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쉽게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지금으로 말하면 교인 숫자도 많지 않고 세상에서 유명하거나 돈이 많은 부자들도 없는 동네 작은 교회 중의 하나였습니다.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않다보니 예배당 건물도 작고 시설도 변변치 않은 평범한 교회입니다.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거나 큰 집회나 행사를 여는 것은 마음 뿐이지 실행에 옮길만한 능력이 없는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 교인들은 주의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남들처럼 부유하지 못하고 세상이 알아주는 뛰어난 인물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히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은 용납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교인들이 많아져 재정이 넉넉해지면 더 큰 건물을 짓게 되고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교회가 점점 커지면 작았을 때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런 점에서는 큰 교회가 작은 교회들이 할 수 없는 큰 일을 할 수 있으니 장점입니다. 그렇다고 능력이 없는 작은 교회는 실패하였고 능력이 많은 큰 교회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시는 관점은 사람의 관점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가진 건물의 크기나 교인의 숫자와 재정적 능력 등은 교회가 교회다움을 드러내는데 결정적인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보시는 기준은 그런 외형적인 조건이 아니라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거짓 없는 믿음과 삶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들에게 ‘내가 너의 사정과 형편을 알고 너의 행위를 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능력은 학력이나 재력이나 권력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없어도 얼마든지 사랑의 능력과 믿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은 그 능력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본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한" 교회였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교회에 계속적으로 역사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말씀을 지킨다 함은 바로 복음진리를 전해진 그대로 받고 이단의 도전으로부터 사수해내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했다는 말은 그 어떤 자리에서도, 특히 예수님 이름으로 인하여 핍박을 당하는 자리에서도 그 신앙을 변절치 않았다는 뜻입니다.


비록 숫자는 적었을지라도 빌라델비아교회 교인들은 이처럼 복음과 신앙에 투철한 진짜 신자들로 채워져 있었고, 그러니 그들을 통해 전도 받고 감화 받고 중생 받아 결국 구원의 문에 들어서게 되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약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그것은 교인 숫자가 적은 교회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지킬 줄 모르는 교회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등록교인의 수는 많다 할지라도 그 신앙에 절개가 없고 파선하고 배반하는 일이 교인들 가운데 계속 생기는 교회가 정말로 약한 교회입니다.


어느 교회 교인들을 주위의 불신자들이 볼 때 바로 그 교인들의 사는 모습 때문에 시험을 받아서 교회 한 번 나가보고 싶은 생각이 싹 가시게 될 정도라면 그런 교회야말로 정말로 약한 교회인 것입니다.


정말 힘 있는 교회가 되고자 한다면 다른 것 모두 제쳐놓고 우선 지금 있는 성도들이 모두가 바른 복음, 바른 신앙생활 가운데 사는 성도가 되어야만 합니다.


불신자를 전도하고 구원의 문으로 인도하는 이 일에 능력을 발휘할 줄 아는 교회가 될 때에는 비록 크기는 작다할지라도 이미 약한 교회는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천국구원의 복음이 없고 사람의 생명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참된 구령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교회는 약한 교회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있으나마나 한 교회, 아니 없는 것이 차라리 나은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으로써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힘' - 이것은 모든 구원의 권위와 능력을 한 손에 쥐고 계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지상교회에만 부여해주신 최고의 특권이며, 교회는 그 무엇보다도 바로 이 구령의 힘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생명의 구원을 위해 사용되어질 수 있는 교회 - 우리 교회가 이처럼 진정 능력 있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더욱 참된 복음으로써 전도하는 사명에 각자의 정성과 힘을 다하는 성도들 되어 죽음 직전까지 적은 능력으로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것(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빌라델비아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지키는 교회였습니다. 선지자 아모스가 말하기를 "이 시대의 기갈은 양식이 없어서 기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기갈이라고(암8:11)에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역시 그 때와 같은 시대임을 느끼게 됩니다.


물질적으로는 무척 풍요로워졌습니다. 세상의 학벌수준도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영적 지식은 기갈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세상의 풍부함과 편리함들이 더욱 영적인 상태를 고갈시키고 있다고 표현해야할 것입니다.


에스라7장10절을 보면 에스라가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백성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한바가 있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배운 말씀에 겸손히 순종할 때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말씀으로 반복해서 칭찬하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황제숭배와 각가지 신전들 앞에서 그 도시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 할 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복음의 진리 가운데서 말씀을 지켰습니다. 100명의 이교도 앞에서 혼자 기독교인이라면 얼마나 힘들고 고독했겠습니까?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그런 환경과 상황에서 말씀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기독교교인의 삶은 언제나 말씀이 빛이 되고 등불이 되고, 안내서가 되어야 하고, 말씀이 신앙과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일반 불신자들은 자신의 신념, 강한 의지, 사회적 문화적 가치에 따라 움직이거나 그가 속한 가정이나 가문의 집단적 사고를 따릅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은 어떤 상황에서 오직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환경이 좋아서 칭찬받은 것이 아닙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도 핍박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이런 이들이 사탄의 회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계시록 3:9). 그들의 특징은 남을 모함하고 음해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위협하고 주관하려는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속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으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만 우리가 살아가야 할 참된 진리가 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지조를 지켰습니다. 주님의 말씀 을 지키는 것은 힘들고 외로웠습니다. 소규모였기 때문에 때로는 버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회를 향해 반복해서 칭찬하십니다. “네가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뒤따르고 지켰구나. 내가 너를 인정할테니 다른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을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위로해주시고 격려해주십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진실로 원하시는 사람은 능력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전지전능하신 무한한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이 출중한 사람을 찾지 않으시고, 비록 능력은 적을지라도 주의 말씀에 ‘아멘’하며 순종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명품 인생으로 인정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자들과 다르게 살아야 명품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아무 구별 없이 살아간다면 결코 명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시록 1장 3절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어떻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까?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 자가 주님께 인정받고 예수님으로부터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한 마디로 ‘말씀을 지키는 교회’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몇 가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첫째로, 닫힌 문을 열어주십니다.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문을 열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닫힌 문을 열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7절에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열쇠를 가진 모습으로 등장하셨습니다. 열쇠를 가지신 주님께서는 그 열쇠로 문을 열 수도 있고, 문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열면 어느 누구도 닫을 수가 없고, 반대로 주님께서 닫으면 어느 누구도 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John Sttot)는 ‘다윗의 열쇠’는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의 권세’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절대 권위와 통치권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모든 문제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께서 지금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8절)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께서는 말씀을 지키며 변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던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을 위해 문을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이제 그들 앞에는 선교의 문이 열렸습니다. 세상과 대적하여 이길 수 있는 능력의 문이 활짝 열려 그들은 이제 세상과 당당히 맞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축복의 문이 활짝 열려 그들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빌라델비아 성도들처럼 닫혀있는 개인의 문이 열리고, 가정의 문이 열리고, 교회의 문이 활짝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시험을 면하게 하십니다.


10절에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시험의 때’란 예수께서 재림 하실 때 임할 대 환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할 때 때로는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바보 소리를 듣고 왕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믿음으로 나가면 반드시 시험을 이기게 하십니다.


 


셋째로, 기둥 같은 인물로 써주십니다.


12절에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기둥은 집을 받치는 중심입니다. 기둥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기둥이 되게 해주겠다는 것은 기둥처럼 필요한 사람, 중요한 사람, 든든한 사람이 되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성전 기둥은 성전을 지탱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지키며 변하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를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둥과 같은 인물로 써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 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이름을 결코 잊지 않고 영원토록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국가에 충성한 사람의 이름을 그들이 섬기는 신전의 기둥에 새겨 그 사람을 존귀케 하였는데, 주님께서는 변치 않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존귀하게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영광을 누릴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하는 증표를 남기겠다는 것입니다. 인(印)쳐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보장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어 여러분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처럼 꼭 필요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기둥 같은 인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는 것(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여기서 빌라델비아 교회가 가진것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3가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열린 문(7)과 말씀(8,10)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8)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는 것도 힘들 일이지만 가진것을 지킨다는 것은 더욱 힘이 드는 일입니다.


살펴 보건데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바뀌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변화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큰 변화는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이전에 좋던 것이 이제는 값이 없게 여겨집니다. 또한 죄에 대해 민감해집니다. 의에 대한 사모함이 생깁니다. 선에 대한 열망이 강렬해집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싹틉니다.


또 다른 변화는 교제권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같이 어울려 즐길 수 있는 세상 친구가 편합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돌아와 진리의 눈이 뜨이고 거듭나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지면 이전에 즐기던 것들이 죄악의 나날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교제하는 대상,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죄 가운데 어울리던 이전의 친구가 여전히 좋고 교회 오는 것이 별로 재미가 없다면 이는 신앙이 건강하지 않은 증거입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되면 예배가 기다려지고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기쁩니다. 늘 만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예수 잘 믿는 사람,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괜히 반갑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지조를 잃어버리는 성도는 이와 같은 현상과 반대가 되고 맙니다.


성도된 우리는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하여는 우리의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빼앗지 못하도록 꼭 잡아야 합니다. 결코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만일 이것을 빼앗기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노력한 것이 모두 헛것이 되고 맙니다. 이것을 빼앗기면 하나님께 받는 모든 상급 즉 면류관을 다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굳게 잡아야 할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굳게 잡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장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고 하였고


요한복음1장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 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은 곧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붙드는 것은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붙든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라고 하면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는 것이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말씀이 가라 하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않는 것이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말씀이 드리라고 하면 드리고, 드리지 말라고 하면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적은 능력 즉 적은 무리와 미미한 성도들이지만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처럼 평안할 때나 아무일이 없을 때라도 그리고 어려운 일과 신앙의 핍박이 온다할지라도 신앙의 지조를 끝까지 지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4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