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행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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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사도행전 3장 11-26절
작년 어느 주일 아침에 벌어진 실화입니다.
제가 목양실 문 앞에 있었는데, 차마 이름을 밝힐 수는 없는 어느 여 집사님이 한없이 순진무구한(?) 미소를 띠며 제게 다가오더니 “목사님, 손을 펴 보세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언가 미심쩍어서 잠시 주저했지만 다시 한 번 재촉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손을 펴 보였더니, 그 집사님이 자기의 주먹 쥔 손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서 무언가를 떨어뜨리고는 즉시 돌아섰습니다.
저는 제 손바닥 위에 올려진 물체를 보는 순간 비명을 지르면서 떨쳐 내었는데, 그것은 ‘죽은 바퀴벌레’였습니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진짜가 아니고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뻗쳐서’ 뒤도 안 돌아보면서 유유히 사라지는 그 여 집사님의 뒤통수를 향해 “니, 진짜로 죽었다!”라는 경상도식 저주(?)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잘 아시다시피 제가 ‘트리플 에이형’ 아닙니까?
더구나 경향교회 담임목사의 간을 떨어지게 만든 그런 중범죄(?)는 절대로 그냥 묵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지라, 그 뒤로 계속 ‘되로 받은 것을 말로 되갚아 줄’ 날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 달 후쯤인가 로뎀카페에 들렀다가 드디어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그 괘씸한 범인(?)이 카운터 앞에 서서 음료를 주문하느라 저의 접근을 전혀 눈치 챌 수 없는 무방비 상태에 있는 것을 포착했던 것입니다.
제가 마치 ‘먹이를 노리를 맹수’처럼 살그머니 뒤로 다가가서 ‘왁!’ 하고 소리를 질렀더니, 아니다 다를까 그 여 집사님(?)은 깜짝 놀라 혼비백산하면서 거의 까무러칠 뻔했습니다.
그런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제 쪽으로 얼굴을 돌린 그 여 집사님은 제가 생각했던 그 범인(?)이 아니라 그저 뒷모습만 정말 똑같이 생긴 엉뚱한 사람이었습니다.
아, 정말이지 미안하고 무안하고 난감하고 창피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그것도 목사라는 사람한테서 얻어맞은 그 교인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으셨을 텐데, 혹시 그 일이 시험(?)이 되어 우리 교회를 떠나신 것은 아닌지 염려됩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것은 당하는 사람의 정신건강에 아주 좋지 않고 설상가상의 후유증까지 유발시키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놀라게 하시는 일은 실로 선하고도 위대합니다.
본문 앞 부분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일으켜 주는 유명한 사건이 나옵니다.
그에 이어지는 11절과 12절에 기록하기를 “11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앉은뱅이를 걷게 해 준 장면은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발동시켰고, 당시 성전 건물의 일부였던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장소에 큰 군중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막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기적을 보여 주고는 ‘왜 이 정도를 가지고 이렇게 놀라느냐?’라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사람이 진짜 놀라야 할 일은 따로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전 인류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부단히 행하고 계시는 정말 놀라운 일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즉시 따라오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능력’에 놀라야 합니다.
13절부터 16절에 “13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6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앉은뱅이가 걷게 된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모여든 군중을 향해 베드로는 그것이 자기네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된 것이 결코 아님을 먼저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 기적은 어디까지나 “그 이름을 믿으므로” 즉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의 하나님”께서 “그 종 예수”를 어떻게 구세주로 세우셨는지를 일련의 극적 대조들을 통하여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셨음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영화롭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예수님을 “살인한 사람”보다 못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지극히 “거룩하고 의로운” 분이셨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예수님을 제멋대로 “넘겨주고” 십자가에서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생명의 주”로 세우시고 결국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을 거부하고 방해하고 아예 죽여 없애버리려고까지 했지만, 결국 그 모든 시도는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악의 극한까지 도달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의로우신 본성에는 결코 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단 한 명도 회개하지 않고 모두 다 죽음의 길로 치닫는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주요 부활의 주가 되신다는 이 사실에는 아무 영향조차 끼칠 수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 불신자가 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인정해 주어서, 사람들이 믿어 주어서, 사람들이 받들어 주어서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신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세우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셨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그 종 예수’를 높이 들어 우리의 구세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실로 위대하신 능력,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세우신 이 하나님의 능력을 사람이 자기의 의심으로 대항하거나 자기의 불신으로 감히 도전할 길이 결코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최고의 능력을 친히 발휘하여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음’을 얻어야 할 따름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능력은 갈보리 십자가 밑에 있던 사람에게만 적용될 정도로 약하지 않습니다.
멀리 가면 갈수록 약해지는 자력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의 능력은 성지순례를 하고 성자의 유물에 입을 맞추어야만 전달될 수 있는, 공간적인 제약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대속은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를 받아야만, 혹은 최소한 십자가 장식을 목에 걸든지 성호를 그어야만 효력이 발생되는 유치한 것도 결코 아닙니다.
십자가를 보지도 못했던 앉은뱅이가 오직 ‘그 이름을 믿음’으로써 당장 나음을 얻었던 것처럼, 그 언제 어디서나, 그 어느 누구에게나 오직 ‘믿기만 하면’ 즉시 효력을 100% 발휘하는 불변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어떤 목사가 신유의 능력을 행한다더라.”, “어떤 권사가 기도만 해 주면 당장 낫는다더라.”는 따위의 소문에 놀라고 그 앞에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이 지상교회 안에조차 너무 많습니다.
그처럼 ‘개인의 경건과 능력’에만 놀라는 ‘종교적 공연장 인파’가 되지 말고,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 어디서나 세상의 그 어떤 사람에게나 베풀어 주시는 이 위대한 구원의 능력에 놀라고 감탄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그 어떤 죄까지도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놀라야 합니다.
17절부터 21절에 기록하기를 “17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18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19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고 했습니다.
조금 전에 사도 베드로는 그 청중들 자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주고 거부하고 죽게 만들었던’ 장본인이었음을 지적하고 고발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들을 정죄만 하고 끝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가리켜 처음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아”라고 공식적인 명칭으로 불렀었지만 이 장면에 와서는 “형제들아”라고 더욱 친근히 부르면서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다”라고 어루만져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셨던 그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 주권적 성취였다고 밝힌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아무 책임감이나 죄의식을 느낄 필요 없이 그냥 넘어가도 되는 일은 또한 아니었습니다.
이제 와서라도 그들이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곧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크게 볼 때에는 하나님의 섭리였지만 개인적으로 지은 죄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일단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기만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새롭게 되다’라는 것은 그 심령이 말할 수 없이 시원하고 즐겁고 평안하고 행복하게 되는, 즉 최상의 기분으로 재생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처럼 최고로 좋은 사죄의 은총을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주시겠다고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은총 받을 수 있는 기회까지 충분히 주어졌습니다.
바로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고” 있는 즉 하늘의 보좌가 예수님을 모시고 “만유를 회복하실 때” 즉 재림 때까지 기다려 주고 있는 지금 현재야말로 그 시간, 실로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복음, ‘좋고도 기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조금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들었던 그 장본인들에게 그런 최악의 죄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약속이 이제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구세주로 이 땅에 보내셨던 ‘그 종’ 예수님을 욕하고 고발하고 죽게 했던 죄까지도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목’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 죄까지도 일단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심령을 ‘새롭게’, 기쁨과 평안으로 충만하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죽인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사랑은 정말이지 한량없이 높고 깊고 넓은 것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까닭에 바로 그런 예수 그리스도조차 믿지 않는 것만이 오직 유일한 ‘사함 없는 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용서받는 것도 아주 후련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사함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도록 행복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스로 판단해도 정말 못난 놈이고 더러운 존재이고 ‘죄인 중에 괴수’임이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아무도 나를 정죄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이지 하늘을 날을 듯이 가볍고 상쾌한 일인 것입니다.
바로 이 ‘새롭게 되는 기분’을 맛볼 수 있어야 진짜 기독신자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부귀나 행복도 이것보다 더 좋고 기쁜 복을 우리에게 줄 수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이 위대한 사랑의 풍성함에 필적할 만한 복을 우리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죄라 할지라도 용서해 주시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입술의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가장 위대한 언약인 것입니다.
이런 진짜 사랑을 제쳐놓고 ‘사람의 사랑’을 더 높이고 강조하는 종교인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교인끼리 좀 웃어 주고 좀 친절히 해주고 좀 도와주고 하는 것을 두고 기독교 정신의 궁극적인 실천인 것처럼 떠벌이는 교인들, 사람 사이에 서로 베풀어 주는 희생 봉사에만 감격하는 교회들도 부지기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제쳐놓고 그런 사람의 사랑만 요란한 것이 어떻게 구원 받은 성도들이 모인 신앙공동체의 진면모가 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에게까지도 똑같이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는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이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정말 놀라고 감격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구속사를 그 계획대로 성취해 가고 있는 ‘하나님의 완벽한 예정과 오묘한 섭리’에 놀라야 합니다.
22절 이하 26절에 “22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23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24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25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26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세우시고 그 이름을 믿음으로써 죄 사함과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사역은 결코 주먹구구식으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바로 이 점을 여기서 명확하게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은 구약 성경 곳곳에서 누누이 예언된 사실이었습니다.
아까 1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그 종’이라고 밝힌 것도 바로 그런 맥락입니다.
이 특이한 표현은 사도 베드로가 구약 이사야서에 예언된 메시아의 타이틀을 여기서 그대로 인용하여 쓰고 있는 것입니다.
또 더 거슬러 올라가서 모세를 통해서도 이 메시아는 벌써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모세가 신명기 18장 15절부터 19절에서 예언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란 단순히 구약의 일반적인 선지자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선지자는 모세처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한 특별한 선지자가 될 것이라고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모세의 사역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사역의 표상이 되어 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로 그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가까이 알고’ 그 어떤 선지자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선포해’ 주시는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모세나 이사야 뿐 아니라 사무엘과 그 뒤를 이어 나온 모든 선지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이 때” 즉 장차 도래할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가리켜 예언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장차 보내실 메시아를 미리 다 계획해 두셨고 구약의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예고까지 해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우연히 태어나서 어쩌다가 성인이 된 분이 결코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우리와 같은 범인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자기 성찰이나 고행이나 수도 따위로 도를 통하고 비로소 뭔가 좀 비범한 도인이 된 분이 절대로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은 오직 하나님의 영원하고 위대하신 경륜으로 시작되었고 또한 앞으로 완전히 성취될, 하나님의 완벽한 구속 사역의 알파요 오메가인 것입니다.
그 같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는 비단 오실 메시아에게만 해당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 택한 백성에게까지도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언약의 자손”이라고 사도 베드로가 그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예언으로 미리 일러주셨고 일찍부터 약속까지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처럼 이미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으로 예정된 자들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고” “복을 받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종을 세워” 십자가의 구원 사역을 성취하고야 마셨던 것입니다.
미리 택하시고 약속해 주시고 불러 주셨으며 결국 그 언약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일에 이르기까지, 전 구속사의 모든 사건은 실로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과 실행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예언된 구세주’로 이 땅에 오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만 눈 뜨고 살펴보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공자나 석가나 마호메트는 결코 그 탄생이 예언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셔서 보낸 구세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비단 구세주뿐 아니라 그 구원받을 성도까지도 미리 택하시고 때가 되매 부르시고 믿게 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 자신의 의지나 공로가 있을 때 그 조건에 부응해서 구원해 주어야 하는 무력한 신이 아니신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종교도, 그 어떤 신도 이런 구원을 사람에게 베풀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런 완벽한 구원을 결코 베풀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능력한 신이요, 죽은 신이며, 실제로는 없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절대자인 신이시라면, 이런 중요한 일은 완전무결하게 착착 진행시켜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인간의 구원을 우연의 법칙에 맡긴다든지 각 개인의 판단과 양심에 맡겨 버릴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약한 신입니다.
그런 신은 사람이 자신의 영생 구원이라는 이 중차대한 문제를 두고서 믿고 의지하기에는 너무나 무력하기 짝이 없는 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참된 신자에게 있어서는 의심이나 비판의 대상이 결코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에 대한 감탄과 찬미를 절로 불러일으키는 오묘한 진리이며 개인 구원에 대한 확신을 굳게 세워주며 뜨겁고도 진정한 감사의 이유를 제공해 주는, 너무나도 귀중한 교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를 모태에서 조성하시기 전부터 택정하셨다.’ ‘나를 만세 전부터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때가 되매 불러 주셨다.’ -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롬 11:33-34) 하고 그저 찬탄할 뿐인 것입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5), ‘이처럼 택자를 스스로 예정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감히 어떤 인간이 자기의 선행이나 공로를 먼저 드려서 그 구원을 상급으로 받을 재주가 있겠느냐?’ - 이것이야말로 진짜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난, 그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오묘하신 섭리로 구원받게 되었음을 깨달은 성도가 외칠 수밖에 없는 진짜 신앙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정진이라는 것을 구원의 길로 여기고 사람의 득도라는 것에 감탄하는 종교는 끝까지 사람 수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물 안 개구리’ 종교일 뿐입니다.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그 구세주를 약속하시고 보내시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택자를 불러 회개시켜 영생의 복을 얻게 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완벽하고도 오묘하고도 위대함을 인하여 진정 놀라고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앉은뱅이가 일어선 기적에 놀라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사도 베드로는 계속 2탄, 3탄의 신유 기적으로써 그들을 예루살렘교회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훨씬 더 위대한 사실, 사람들이 정말 놀라야 할 하나님의 역사를 그들 앞에 똑똑히 선포했을 따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 - 이것이야말로 이 땅에 일어난 그 어떤 기사나 이적도 필적은커녕 비교의 상대조차 될 수 없는, 가장 놀랍고도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귀히 여기지 아니하고 거부했던 ‘그 종’을 거룩하고 의로우신 생명의 구세주로 세우셨습니다.
사람의 가장 악한 죄까지도 용서해 주시는 놀라운 사랑을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주 역사 가운데 가장 크고 위대한 이 구속 사업을 그 구세주를 보내시는 일부터 시작하여 택한 자를 부르시고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하시기까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성취하셨습니다.
실로 유일하신 절대자답게, 실로 높고 위대하신 주권자답게 행하시는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목사가 사람 이마를 손바닥으로 치면 뒤로 발랑 나자빠지고 귀신이 떠나 버렸다고 하는 그런 따위의 장면을 신기하게 여기고 놀라는 곳이 아닙니다.
목사가 무슨 강신술사나 무당입니까?
교회는 오직 당신의 독생자를 화육강세시켜서 구세주로 세워 주심으로써 죄인들이 그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고 고백하고 따라가게 되는 이 신기한 구령의 사건에 깜짝 깜짝 놀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누가 무슨 훌륭한 사회사업만 평생토록 하고 살았다고 해서 성자니 성녀니 어쩌고 하면서 추앙하는 종교가 결코 아닙니다.
교회가 무슨 인기 연예인을 보고서 환호하며 열광하는 공연장입니까?
사람이 제아무리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푼다 해도, 당신의 독생자를 죄인을 위해 거저 주신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놀랄 사랑, 아니 거기에 감히 비교나 할 수 있는 선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크신 사랑에 가슴이 터질듯이 감격하면서 절로 떨고, 무릎을 꿇고, 눈물이 넘쳐흐르게 되는 ‘은혜의 놀라움’만 끝없이 충만한 것이 진짜 기독교입니다.
기독신자들은 누구처럼 어떤 중의 시체를 화장시켰더니 사리가 몇 개나 나왔다고 흥분하고, 고승의 무덤을 천 일이 지난 후에 파내어보니 하나도 썩지 않고 미이라가 되어 있다고 놀라는 자들같이 저질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이 무슨 삼류 잡지에 나오는 스캔들 기사입니까?
영생 구원이 무슨 박물관에 갖다 놓을 박제입니까?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속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하여 바로 내 삶 속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충격적인 현실에 놀라고, 나 같은 죄인을 이처럼 높이 들어 크게 써 주시는 오묘한 섭리에 저와 여러분은 놀라고 또 놀라고 매일 새롭게 놀랄 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예수님께서 ‘기묘자’(사 9:6)라고 불리게 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헨델의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아’ 중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나셨다’(For unto us a child is born)라는 합창은 ‘기묘라, 모사라, 전능의 주, 영존의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라는 가사에서 그 절정에 도달합니다.
이 부분의 가사가 바로 이사야 9장 6절을 인용한 것인데, 여기서 ‘기묘자’라는 말이 영어로는 그냥 ‘Wonderful’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분이시면 그 이름조차 ‘기묘자’이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놀라운 구세주’를 따른다는 기독신자의 신앙이 병자가 고침 받는 것을 보고 놀라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복 받았다고 흥청거리고 무슨 요란한 소문을 듣고 이리저리 우르르 몰려다니는 저질 종교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진짜 놀라운 일’은 결코 무슨 신유 은사나 기복이나 표적 따위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진짜 기묘한 일’은 어디까지나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 놀랍고도 깊고도 완벽한 구원 역사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택자 구원’ -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 중의 기적임을 깨닫고 이 놀라운 복음 중의 복음을 자신의 가장 귀한 보배로 간직하며 온 세상을 향해 크게 외쳐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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