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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질서 (고전11:1-19)

본문

1. 기독교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과, 노예들에게 자유와 희망을 가져 다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족과 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다 평등하다고, 또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가르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 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당시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서 종족, 사회적 신분, 성(性) 및 경제적 지위 등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동등한 입장에서 교제를 나누던 곳은 교회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진 교회에서 모든 사람은 평 등해야 합니다.
2. 한국에서의 남녀 차별에 대해 이어령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조시대 한국 남성들은 세 여인상 속에서 그들의 이상(理想)을 찾 으려 했는지 모른다. 즉 심청과 같은 딸, 춘향과 같은 여인, 그리고 사 씨와 같은 아내-'심청전'과 '춘향전' 그리고 '사씨남정기(謝氏南 征記)'를 합치면 이조의 '여자의 일생'이 될 것이다. 특히 '사씨남정 기'는 외롭고 험준한 아내의 일생으로서 이조의 여성적 특성을 나타낸 가장 전형적 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조 때의 소설을 보면 대체로 남자보다는 여자 쪽이 활동적이고 생활능력이 있고, 경제적이며 지능면에서도 매우 우월하다. 그에 비해서 남자들은 무책임하고 무계획적이며 의지력도 약하다. '심청전'의 심봉 사는 눈먼 소경이라고는 하나 남자이면서도 등덩굴처럼 연약한 여성에 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봉사라고 해서 모두가 심봉사와 같은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자활하는 판수들이 얼마든지 있다. 마땅히 한 가족을 부양해야 할 가장이면서도 심봉사는 아내의 덕과, 그리고 나중에는 딸 이 구걸해 온 음식을 먹으며 기생해 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절 간에 공양미 삼백 석을 내면 눈을 뜰 수 있다고 했을 때 조석끼니도 없는 처지이면서도 선뜻 권선록에 자기 이름을 적었던 것을 보아도 심 봉사의 무계획성과 무책임한 행동을 엿볼 수 있다. 다른 것은 다 그만 두고라고 심청의 몸값으로 받은 이웃들의 동정금을 뺑덕어미에게 모두 털리게 된다든지, 소경잔치에 오라는 여비마저 제대로 꾸리지 못한 심 봉사의 행동은 무능의 전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심청은 매사 에 계획성 있고 신의가 있으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끗끗한 기품을 보인다.
적어도 심봉사보다도 냉정하고 분별이 있다. 이러한 소설 속에 나타난 남자와 여자를 보면, 유교의 영향은 한국의 남성을 여성화해 버렸고, 거꾸로 여성들을 남성적으로 만들어 끗끗한 기상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남자가 유교의 엄격한 윤리를 따르자 면 전투적이고 야성적인 기질을 거세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뿐만 아니 라 노장사상(老莊思想)과 같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나 청빈낙도를 추구 하고 자연에의 은둔을 인생의 멋으로 삼았던 시대에서는 경제능력마저 도 상실하게 되는 것이 바로 남성들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여성에겐 수 절이나 부덕(婦德)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그 여성적인 나약한 기 품은 의지력에 의해 단련될 수밖에 없었다. 절개를 지키다 보면 춘향처 럼 억세어질 수밖에 없고 음풍명월만 하고 있는 남편들의 곁에서는 자 연히 먹기 위해 옷소매를 걷어올릴 수밖에 없다. 자녀를 길러야 한다는 생의 본능이 남성들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여자가 그만큼 경제적이고 활동적이었다는 것은 남성들이 그만큼 생활의 무능력자였다는 반증이다. 굶으면서도 책을 읽고 반대로 호탕하다 싶으면 주색 잡기나 하고 다녔던 당대의 남성들 때문에 여성들까지 방안의 화초처럼 있을 수는 없었다. 남성들은 눈을 떴어도 생활에 관한한 심봉사와 같은 소경들이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내로부터 여자는 불평등한 대접을 받는다.-계집아이들의 이름은 섭섭하다고 해서 '섭섭이', 그만 낳으라고 '구만 이', 그리고 '말숙이' '필순이'가 된다. 그러다가 다음에는 남자아이 를 낳으라고 갑작스레 용감한 남자이름을 붙여주기도 한다. 남자아이들 에겐 어엿한 돌림자를 붙이고 그 이름도 다양하지만 여자는 그저 곱고 어질고 착하고 밝으라고 연(姸), 인(仁), 선(善), 명(明)자를 붙여준다. 여 자에겐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여학교에서는 '이 명숙A' '이명숙B'라는 식으로 출석부가 되어 있다. 이름은 있어도 한 개성을 나타낸 고유명사의 구실을 제대로 못한다. 고유명사라기보다 보 통명사에 가까운 여자이름 하나를 봐도 그들에겐 독립된 개성이라는 것이 인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 한국 사회에서 남녀의 차별은 상당히 개선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남녀의 위치가 서로 바뀌어 가고 있는 실정이라해 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부권(父權)과 부권(婦權)이 서로 자리 바꿈을 하는 '성(性)의 질서 파괴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3. 유대인의 눈으로 본 여자의 지위는 이렇습니다. 유대 율법에 의하 면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낮은 존재였습니다. 여자는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졌으며, 남자를 돕는 배필로서 지음받았습니다. 랍비의 주석에 다음과 같은 기묘한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머리로 만들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녀가 교만해져 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 눈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정욕이 강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며, 귀로 만들지 않은 것은 호기심을 억제하기 위해서이 며, 입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질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며, 손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욕심쟁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며, 발로 만들지 않은 것은 이리 저리 다니며 말참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여자를 갈빗대로 만드셨다. 갈빗대는 몸 안에 숨겨져서 밖에서는 보이 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정숙함이야말로 여자의 제일의 덕성이 되지 않 으면 안 된다." 불행하게도 유대 율법에서 여자는 단순한 물건에 불과하며 남편의 재산의 일부였습니다. 따라서 그 절대적인 처분권이 남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복음적인 관점에서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 안 에서 결코 차등(差等)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전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 었고 또 다 한 성령님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골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 고 (골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 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골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 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 사회적으로 비하되고 억압받던 여자들 에게 그야말로 복음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적 배경에서 볼 때 획기 적인 변화였습니다. 모든 다툼과 분리와 차별이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 을 통하여 극복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창조 질서에 있어서 여성 의 종속을 언급하고 있지만 "(고전11: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고전11:12) 여자 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고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지배하는 새 시대에는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동역자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4.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 여자들이 너울('야쉬막'이라는 수건)을 써 야 되느냐, 벗어야 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울 당시 헬라와 근동 지방의 여인들은 공적인 모임에서 뿐만 아니 라 평상시에도 이 '야쉬막'을 쓰고 다녔습니다. 이는 남자에 대한 복종 을 나타내며 자신은 남자의 권위와 보호 아래 놓인 존재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이 너울을 쓰지 않은 여인은 창기밖에 없었고, 정숙하고 존경받는 여인들은 머리를 가리지 않고 공중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 통상적인 관습이었습니다. 이같이 머리에 쓰는 수건(야쉬막)은 여자의 낮은 지위를 나타낼 뿐 아니라 그녀의 정숙과 순결을 지켜주는 강한 방패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여인이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은 자기의 남편을 업신여기거나 다른 남자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으로 간 주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일부 여자들은 사회의 통상적인 관습에서 벗어나 교회에 나와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은 한 마디로 너울을 쓰라는 것입니다. 여자가 머리에 너울을 쓰는 것은 당시 사회적 관습이요 전통인데 이 관습과 전통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지 않는 한 그 시대의 관습과 전 통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복음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복음의 진리마저 포기하고 자신의 문화에 동화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진리 안에서 이웃에 대해 덕을 세우며 복음 전파를 위해 그 시대의 문화와 사회적 관습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 관습(문화) 때문에 복음 자체가 손상받거나 거부되는 일이 생긴다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문화 속에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적절하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린도 교회 안에 여성 해방과 자유를 부르짖는 자들은 왜 더운 지 방에서 여자만 너울을 써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점을 제기했었습니다. 또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 창기였기 때문에 옛 습관대로 너울을 쓰지 않고 예배에 참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 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었습니다. 유대주의 전통을 고집하는 자들은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했고, 당시 불신자들 역 시 교회를 향하여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문화와 전통 을 무시하는 몰상식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전통과 문화를 무시하는 기독교인의 자유란 결코 이웃에게 덕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인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질서와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시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서는 여자가 머리에 너울 을 쓰고 예배드리는 것이 합당한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 성도들은 공동체의 질서와 화평을 위하여 그 시대적 문화의 요 구에 따라 적절히 대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 의 분명한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전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9:21) 율법 없는 자 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 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전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교회가 화평하려면 반드시 어떠한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필요한 질서를 위해서는 서열(序列) 개념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서열이 있다고 해서 교인들간에 불평등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지 휘관은 사병보다 서열이 높습니다. 그러나 사병이 지휘관보다 인격적으 로 훌륭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됨"의 지위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이시고,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이며, 남자는 여자의 머리 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지만, 구속 사역에 있어 성자는 성부에게 복종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어있는 것입니다. "(고전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전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 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고전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엡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여자가 교회에서 기도하거나 예언하려면 반드시 긴머리를 지녀야 하 며, 그 위에 무엇을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긴머리를 하거나 머 리에 무엇을 써서는 안 되었습니다. 남자들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 음으로써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존중함을 나타내었습니다. 반면 여자는 머리에 무엇을 씀으로써 머리된 남편에 대한 존중을 나타냈습니다. 그 렇게 함으로써 여자는 하나님과 남편 모두에게 대한 존경과 복종을 나 타냈습니다. 창조 질서는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으며, 여자는 남자를 위해 창조되 었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창조되고 나중에 창조된 것이 남자와 여자의 우열(愚劣)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 속에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될뿐만 아니라 둘 사이의 동 등한 협력 관계의 특성도 있습니다. "(고전11: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 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고전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는 주 안에서 영적으로 하나입니다. 남자없이 여자만 있을 수 없으며 여자없이 남자만 있을 수도 없습니다. 창조 당 시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왔지만, 그 후 오늘날까지 모든 남자는 다 여 자에게서 나옵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으며 서로 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5. 여성은 여성다워야 하고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령한 일이라도 여성은 여성다웁고 남성은 남성다움을 잃지 않아야 되는 것이 신앙적으로 지켜야 할 첫 번째 책 임입니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에게 끌려 다니지 않고 신령한 일에 본보 기와 지도자가 될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못해서 아내에게 괄시를 받는 것은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없습니다. 그 문제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유한 특권으로, 영광으로 준 그 일을 본인이 놓친 것은 부끄러운 일인 줄 알고 남자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도록 열심히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남자는 남자로 지음받은 책임을, 여자는 여자로 지음받은 책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 책임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창조질서가 영광스럽게 회복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령한 문제에 앞선 어떤 여성들이 그 성경지식이나, 믿음이나, 신앙이나, 행위에 있어 서 앞선 어떤 것들로 인하여 창조질서를 깨는 것이 고린도 교회의 모 습이었습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광인데 그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광된 모습을 가지려면 누가 있어야 하겠습니까 여자가 있 어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자없이 남자는 영광을 갖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여자의 역할이 바로 남자를 돕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자 혼자 예수믿었다고 다 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자신 이 믿는 예수를 남편도 똑 같은 수준으로 믿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남편과 함께 하나님 앞에 들어오지 않고서는 혼자 신앙을 가진 것으로 잘난 척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아무리 아내가 잘 한다고 해도 남편이 예수 믿는 것을 끝까지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여성들 위주로 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남편들이 나이가 들어서 아내에게 지기 때문에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끌려 나왔지, 남편들이 신앙의 가장으로 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가정은 사실상 많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 장로들은 아내의 지도력 밑에서 주눅이 들어가지고 당회 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회에 분명히 A라는 결론을 내렸는 데 다음 주일날 오면 다 B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집에 돌아가서 결제를 받았는데 싹 바뀌어서 왔다는 것입니다. 여성은 남편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와 신앙생활할 수 있도록 전심 전력을 다해 돕는 자가 되어 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서 남편을 소흘히 해서는 안됩니다. 그 것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가장 중요한 사명에서 빗나가는 것이 기 때문입니다. 특히 목사한테 너무 잘하지 마십시오. 우리 나라 교회 마다 여자 성도들이 목사한테 하는 정성은 지극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면 먼저 목사에게 가져다 드리는 것이 목사를 섬기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남편을 섬기고, 가장 중요 하고 가장 심각한 문제일수록 남편에게 먼저 알려 주어 남편으로 하여 금 가장의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창조질서를 지키는 신앙생활입니다.
6.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잠31: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유명한 유대 랍비 메이르는 그런 값비싼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어느 안식일 내내 공립학교에 앉아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집 을 비웠을 때 비범하게 잘 생기고 율법에 밝았던 그의 두 아들이 죽어 버렸습니다. 그의 아내는 죽은 아들들을 침실로 옮기고 부부가 사용하는 침대 위에 눕혔습니다. 그러고는 하얀 천을 그 시체 위에 덮어놓았 습니다. 저녁이 되어 랍비 메이르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물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이들이 어디에 있소 내가 그들에게 축복해 주어야 겠소." 이에 부인은 "그 애들은 학교에 갔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학교를 거듭 둘러 보았지만 그곳에서 아이들을 발견할 수 없 었소." 라고 그가 말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잔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바깥에 갔다 온 것에 대해 주님을 찬양하고는 잔을 비 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내 아들이 어디 있소 내가 그 애들에게 축복의 잔을 주어야겠소." 라고 했습니다. "멀리 가지 않았을거예요." 라고 부인이 대답하고 그가 먹을 음식을 내놓았습니다. 그가 좋은 기분으로 식후 기도를 마쳤을 때 그녀가 말했 습니다. "랍비여, 허락하시면 제가 한 가지 물어보려고 합니다.여보, 물어 보시오." 라고 그가 대답했습니다.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이 저에게 보석 몇 개를 보관하도록 맡겼어요.
그런데 이제 달라고 하네요. 제가 그것을 돌려 주어야 합니까그걸 질문이라고 하시오 그것은 물을 필요조차 없는 질문이 아니 오 도대체 남의 소유물을 돌려주는 데 왜 머뭇거리며 망설인단 말이 오그게 아니랍니다. 저는 단지 당신에게 알려드리지 않고는 돌려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을 따름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남편을 데리고 침실로 들어가 아들들의 시신을 덮은 하얀 천을 벗겼습니다. "아! 내 아이들아!"라고 아버지는 큰 소리로 울부지었습니다. "내 아이들아! 너희들은 내 눈의 빛이요 내 이해력의 빛이 아니더냐 나는 네 아버지이건만 너희들은 나의 율법 교사가 아니었더냐" 그의 부인은 돌아서서 슬피 울었습니다. 한참 뒤에 그녀는 남편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랍비여, 당신께서는 우리가 맡은 물건을 돌려 주는데 주저하지 말아 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보세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이 들을 주셨어요. 그리고 도로 가져 가셨어요. 주님의 이름이 찬양받으실 지어다." 랍비 메이르도 화답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찬양받으실지어다. 당신 때문에도 주님의 성호를 찬 양해야겠소.
왜냐하면 성경에는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 혀로 인애의 법 을 말하느니라'(잠 31:10,26)고 쓰여 있기 때문이오."
7. 마크 트웨인의 작품에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엮은 것이 있습니다. 하와가 걸아가는 모습을 보고 아담이 읊조립니다. "그녀가 있는 곳 에 에덴이 있도다. 낙원! 그것은 바로 하와가 있는 곳이로다." 아내와 파라다이스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은, 아내는 신의 귀중한 선물이며 그 녀에게서 낙원의 조건, 즉 좋은 점을 관찰하는 사랑의 시야가 있기 때 문입니다. 여성의 지위나 권리는 여성 자신보다는 남성쪽에서 지켜 주 어야하는데, 그것은 창조의 동등성의 인식과 사랑의 이념에서만 출발될 수 있는 것이라고 작가는 외칩니다. 한국의 여권 운동가가 영국의 유명한 여성 지도자에게 "여권 운동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영국의 여성 지도자는 여자는 먼저 세 가지 바른 질서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는데
첫째는 '교회'와 의 바른 관계를 맺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부엌'의 질서가 잡혀야 된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로는 '어린이'라고 했습니다. 성의 차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행복의 수단이고, 성의 동등,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요 참된 인간회복을 위한 진리요 이상인 것 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 남녀의 성차(性差)를 분명하고 바르게 할 때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 남녀의 평등이 이루어질 때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가 진정한 행복과 건전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부터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바르게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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