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되게 하신 것 (고전11:23-29)
본문
1. 고린도 교회에는 주의 만찬(성만찬)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심각한 분열과 성만찬의 신성함을 모독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습니다. 당시 헬라 사회에서는 친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 식사를 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를 '에바노스(Evanos)라고 불렀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성도 의 교제를 위하여 '아가페 밀'(Agape meal)이라는 이름의 애찬(愛餐)을 즐겼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각자의 형편에 따라 먹을 것을 가져왔고 그것 들을 전부 한데 모아 놓고 다시 나누어 먹으면서 함께 교제를 즐겼습니다. 이와같은 애찬은 성도의 참된 친교를 도모할 뿐만 아니라 신앙 성장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애찬의 본래 의도가 상실되고 왜곡되어 성도간에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부한 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었습니다. 음식을 잔뜩 가져올 수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거의 아무 것도 가져 올 수 없는 노예들도 있었습니다. 실제 많은 노예들에게 있어서는 애찬을 통해 한 주간에 한 번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식사였습니다. 그러나 부자 들은 각자 가져온 음식을 자기들만 먹었습니다. 부자들끼리 재빨리 먹어 치웠으며,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들 은 거의 먹을 것도 없이 고픈 배를 쥐고 있던 형편이었고, 부자들은 그 식사 시간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자랑함으로써 가난한 형제에게 치욕 적인 상처까지 입혔던 것입니다. 그 결과 교인들간의 사회적인 격차를 없 애려던 애찬이 오히려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별과 계급을 형성하는 심 각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가난한 자와 부자로 패가 갈 라지게 되었고 두 계층간에 갈등과 긴장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29절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고전11: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성만찬에 참석할 때에 그들이 하나로 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 하고,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교회 안에 분 열과 당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신성모독 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 분열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식탁이 주님의 식탁이지 결코 어떤 교회의 식탁이나 사사로운 개인의 파티가 아니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초대 교회는 세계를 갈라 놓았던 장벽, 인종과 계급, 성의 장벽 등을 타파한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고대 세계는 자유인과 노예, 헬라인과 야만 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과 여 등등의 차별이 철저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모든 인간이 자유로왔던 유일한 장소였습니다.(고전 12:12-13, 갈 3:27,28, 골 3:9-11) 사회적인, 계급적인 차별이 존재하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참 된 교회란 그리스도와 결합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다 하 나여야 합니다.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 초대 교회는 애찬을 통해 참된 교제를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가진 것을 서로 나누어 주는 참다운 교회였습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어주는 사랑으로 하나된 교회의 참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행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2:47)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물건을 혼자 독점하거나 자기들의 모임만이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크리스챤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참다운 크리스챤은 다른 사람이 빈곤 에 처했을 때 자기만 가지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특권은 단지 간수하는데서가 아니라 오히려 나누어 주는 데 있습니다. 성만찬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예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아낌없이 인류에게 모든 것을 베푸셨습니다. 피로 세운 새 언약을 기념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해가며 이웃에게 베풀며 살라는 것입니다. 합당치 않게 성만찬에 참예하는 사람이란 떡과 잔이 나타내주는 사랑 과 그 사랑의 의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고전11: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합당치 않게 성만찬에 참예하는 자는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 을 깨닫지 못하며, 형제와 싸우며, 그를 경멸하며, 그 이유야 어떻든 형제 들과 마음이 하나 될 수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형제에 대하여 증오나 원한이나 경멸하는 마음을 가진 채 주님의 식탁에 임하는 자는 합당치 않게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시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 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형제와 불화하면서 성만찬을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3. 성만찬이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의 죄가 사하여졌음 을 믿고 회개하며, 항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 하는 의식(儀式)입니다. 1천 년 동안 불리운 11세기의 라틴 찬송이 우리 찬송에 들어 있습니다.(85장)성 버나드의 시입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내 마음이 좋거든 주 얼굴 뵈을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예수의 넘은 사랑을 어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이 찬송은 성 버나드가 62세로 죽기 며칠 전에 지었습니다. 그는 병들 어 온 몸이 쇠약하고 죽을 시간을 카운트 다운하는 처지였으나 그의 마음은 기쁨에 차 있었습니다. "예수를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이 기쁘다."는 이 믿음의 표현은 예수와 하나가 된 자의 생생한 체험입니다. 서로 뜨겁 게 사랑하는 연인이나 부부가 그 이가 눈앞에 없으나 생각만 해도 기쁨 과 희망에 넘치듯이 예수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랑의 극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만찬에 참가하는 것은 예수와 하나가 되는 체 험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처럼, 예수의 피는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새 언약입니다. 예수의 피가 없이는 새로운 계약, 인간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절대로 실현될 수 없 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 성만찬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는 새 언약의 상징입니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였던 관 계가 화목한 관계로 새롭게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다시말해 피로 맺은 관계, 혈맹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로부터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도의 강한 유대를 형성하였습니다. 어떤 점에서 교인끼리는 가족보다 너 강하게 유착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의 만찬에 참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께서 축복하신 한 떡을 나누고 같은 잔에 참가함으로 한 분이신 그리스도의 피와 살에 참여한다는 주의 만찬은 마치 세상에 혈맹이라는 말 이 있듯이 영적인 혈맹 관계로 맺어지는 강한 유착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강한 부착력을 가진 것은 굴 등 조개삿갓(barnacles)이라 고 합니다. 바위나 배 밑바닥에 붙은 조개삿갓들을 도저히 멜 수 없습니다. 강한 파도에 부딪히면서도 요동하지 않는 조개삿갓은 마치 인간이 시 속 3백 마일의 폭풍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서있는 것과 맞먹는 압력이라 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아직 그 엄청난 부착력의 비결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와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조개삿갓처럼 강한 가 족을 이룹니다. 부모도 뗄 수 없고, 남편도 뗄 수 없고, 고문과 어떤 핍박 으로도 그리스도인을 그들 성도의 교제, 거룩한 가족에서 뗄 수 없다는 것이 2천 년을 두고 수없이 증명되어 왔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앞두 고 기도하신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간 절히 기도하십니다.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의 소원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사랑으로 굳게 맺어지는 한 가족 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소원은 모든 인류가 예수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님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 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 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여기의 만유라는 한자는 쉽게 전세계의 인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전 세계 인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인류 위에 계시고, 인류를 통일하실 분 이요, 인류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니키타 후르시초프와 존 F. 케네디와 골다 마이어가 천국에서 하나님 을 모시고 정상회담을 했을거라는 재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 사람에 게 질문 한 가지씩만 허용했습니다. 먼저 후르시초프 전 소련 수상이 질 문했습니다. "하나님, 소련과 미국의 사이가 좋아질 날이 올까요네가 살아 있는 세월에는 안될 것이다." 다음은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질문했습니다. "미국과 세계에서 흑인과 백인이 화목하게 살아갈 날이 올까요네가 살아 있는 세월에는 그런 날이 안 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이어 전 이스라엘 수상이 질문했습니다. "유태인과 아랍인이 정답게 살아갈 날이 올까요" 이번에는 대답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내가 살아 있는 세월 동안에는 그런 날이 안 올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니까 유태인과 아랍인의 평화는 영원히 안올 것이라는 재담입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쇠잔하였으나 우리는 아직 분단된 땅 에서 살고 있습니다. 만일 미국에 폭동이 생긴다면 인종 문제일 것이며, 만일 제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진다면 종교 전쟁일 것입니다. 북아일랜드의 오랜 싸움은 개신교와 천주교인의 전쟁이고,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간의 전쟁도 종교적 대립이며, 인도와 파키스탄이 그렇고, 얼마전 이란과 이라 크는 미국에 대한 "거룩한 전쟁"(Holy War)을 선포했었습니다. 중세기 십자군 때부터 종교를 앞세운 전쟁을 거룩한 전쟁으로 부른 나라들이 많 았으나 그것은 국민을 전쟁터로 몰아대는 수단이며, 이 세상에 거룩한 전 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떡을 나누는 것은 예수의 몸, 곧 인류를 하나로 묶으신 그 사랑을 나 누는 것이며, 잔을 나누는 것은 예수의 피, 곧 인류를 구원하신 그 사랑 을 이어받는 것입니다. 예수는 인종간의 막혔던 담을 허시는 자로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 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 게 하시고" 성찬이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고 하면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하나 가 되고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져 모든 막힌 담을 헐고 사랑으로 손을 잡아야 합니다. 주님은 전세계가 예수 이름으로 성찬을 받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인종과 문화, 언어와 정치 체제, 피부의 색깔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 예수의 피로 맺어지는 형제와 자매입니다. 예수의 간절한 소원은 자기와 자기를 따르는 자가 하나가 되는 것이었 습니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예수가 계시는 생활, 예수와 내가 서로 얽혀 하나의 새로운 삶을 이룩하는 것이 예수의 소원이요, 그 사역의 목 적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육체로 체험해 보는 것이 주의 만찬(성만 찬)입니다. 십자가의 피를 상징하는 잔을 들면서 그 액체가 내 몸 속으로 흘러 들어갈 때,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예수 안에 있는,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내 몸 속에 넣 으므로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런던, 시티 템풀이란 교회에 70세가 가까와오는 에밀 메틀러(Emil Mettler)씨가 있습니다. 그는 알버트 슈바이쳐헙회(의료 구호사업)의 간부 입니다. 그는 작은 식당을 40년 동안 경영해 왔습니다. 손님들은 요금을 지불할 때 메틀러 씨의 캐셔(현금 보관함) 속에 들어있는 이상한 물건을 보고 놀랬습니다. 6인치의 큰 못이 들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오는 손 님은 질문을 합니다. "캐셔 속에 못은 왜 넣어 두었습니까" 메틀러 씨는 심각한 얼굴로 해명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생각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못을 집의 책상 서랍 속에 둘 수도 있으나 캐셔 속에 둔 것은 내 직업과 내 생활 속에 예수님이 자주 계심을 상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메틀러 씨는 예수 안에 ,예수는 메틀러 씨 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미국 벙어리들의 신호문자로 예수를 뜻할 때 오른손 새끼 손가락을 왼 손 손바닥에 찍어 못박힌 것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예수의 대표적 이미지는 못박힌 손입니다. 거기에서 흐르는 피입니다. 그 피는 나를 용서하고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의 생수입니다. 주의 만찬에서 우리는 잔을 받 아 구주의 보혈, 이 능력의 피를 통하여 주님을 내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랄프 턴불 목사는 <하나뿐인 설교>라는 그의 저서에서 이런 경험담 을 말합니다. 심한 신경통으로 오래 누워있는 할머니 교우를 널싱 홈(양 노원)으로 심방했습니다. "얼마나 고생하십니까"하고 문안하자 노인은 손을 보이며 말했습니다. "이 손에 못이 박힌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은 평안합니다." 노인은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머리에 가시가 박 히지도 않았습니다.(예수의 가시면류관을 두고 하는 말) 예수님을 생각하 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시 노인은 옆구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옆 구리에 창이 찔리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목사님 염 려하지 마셔요." 심방갔던 턴불 목사가 오히려 큰 은혜를 받고 돌아왔다 고 합니다. 이 노인에게 예수의 수난은 실질적으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되 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이 노인 안에 계셨고, 노인은 예수 안에 있었습니다.
4. 그런데 교회는 죄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죄인을 얼마든지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성만찬은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 죄가 비록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희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자에게 성찬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성만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사랑의 애찬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은사를 받았느냐, 얼마나 축복을 받았느냐, 누가 믿음이 좋으냐 등으로 성도를 구별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이 약해도 성도는 성도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도 있고 믿음이 강한 성도도 있을 수 있는 것이지 성도의 우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 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 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무슨 일을 할 때 의견 차이가 생기면 옳고 그른 것보다 하나 됨이 깨 지지 않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아무것도 못하더라도 싸 우지 않고 화목해야만 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저 사람이 천국에 간다면 천국에 가지 않고 차라리 지옥에 가겠습니다." 이는 자기 신앙이 잘났다고 뽐내는 교만의 꼭대기 올라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 사람 의 죄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서로 화목하여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을 욕되게 하는 것이요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거짓말하는 자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없는 자입니다. "(요일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일2: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 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 되 (요일2: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2: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 니라.(엡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 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 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흘리신 몸과 피로 말미암아 화목 제물이 되신 것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고전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 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고전 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 함이라." 제아무리 열심과 충성을 다 한다해도, 제아무리 능력과 은사가 많다고 해도, 제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해도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되기 위해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내함으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이웃을 기쁘게 하며 덕을 세우는 것이 주의 몸과 피, 성만찬에 바르 게 참여하는 것입니다. "(롬15: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 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롬15: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15: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오늘 성찬을 통해 분열되었던 우리 마음이 치유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항상 열려 있는 이 성찬을 통해 우리 모두가 하나 될 수 있도록 겸손과 온유함, 그리고 사랑으로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온 인류가 하나되는 길을 여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십자가일지라도 달게 질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님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애찬의 본래 의도가 상실되고 왜곡되어 성도간에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부한 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었습니다. 음식을 잔뜩 가져올 수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거의 아무 것도 가져 올 수 없는 노예들도 있었습니다. 실제 많은 노예들에게 있어서는 애찬을 통해 한 주간에 한 번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식사였습니다. 그러나 부자 들은 각자 가져온 음식을 자기들만 먹었습니다. 부자들끼리 재빨리 먹어 치웠으며,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들 은 거의 먹을 것도 없이 고픈 배를 쥐고 있던 형편이었고, 부자들은 그 식사 시간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자랑함으로써 가난한 형제에게 치욕 적인 상처까지 입혔던 것입니다. 그 결과 교인들간의 사회적인 격차를 없 애려던 애찬이 오히려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별과 계급을 형성하는 심 각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가난한 자와 부자로 패가 갈 라지게 되었고 두 계층간에 갈등과 긴장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29절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고전11: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성만찬에 참석할 때에 그들이 하나로 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 하고,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교회 안에 분 열과 당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신성모독 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 분열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식탁이 주님의 식탁이지 결코 어떤 교회의 식탁이나 사사로운 개인의 파티가 아니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초대 교회는 세계를 갈라 놓았던 장벽, 인종과 계급, 성의 장벽 등을 타파한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고대 세계는 자유인과 노예, 헬라인과 야만 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과 여 등등의 차별이 철저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모든 인간이 자유로왔던 유일한 장소였습니다.(고전 12:12-13, 갈 3:27,28, 골 3:9-11) 사회적인, 계급적인 차별이 존재하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참 된 교회란 그리스도와 결합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다 하 나여야 합니다.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 초대 교회는 애찬을 통해 참된 교제를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가진 것을 서로 나누어 주는 참다운 교회였습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어주는 사랑으로 하나된 교회의 참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행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2:47)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물건을 혼자 독점하거나 자기들의 모임만이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크리스챤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참다운 크리스챤은 다른 사람이 빈곤 에 처했을 때 자기만 가지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특권은 단지 간수하는데서가 아니라 오히려 나누어 주는 데 있습니다. 성만찬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예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아낌없이 인류에게 모든 것을 베푸셨습니다. 피로 세운 새 언약을 기념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해가며 이웃에게 베풀며 살라는 것입니다. 합당치 않게 성만찬에 참예하는 사람이란 떡과 잔이 나타내주는 사랑 과 그 사랑의 의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고전11: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합당치 않게 성만찬에 참예하는 자는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 을 깨닫지 못하며, 형제와 싸우며, 그를 경멸하며, 그 이유야 어떻든 형제 들과 마음이 하나 될 수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형제에 대하여 증오나 원한이나 경멸하는 마음을 가진 채 주님의 식탁에 임하는 자는 합당치 않게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시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 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형제와 불화하면서 성만찬을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3. 성만찬이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의 죄가 사하여졌음 을 믿고 회개하며, 항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 하는 의식(儀式)입니다. 1천 년 동안 불리운 11세기의 라틴 찬송이 우리 찬송에 들어 있습니다.(85장)성 버나드의 시입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내 마음이 좋거든 주 얼굴 뵈을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예수의 넘은 사랑을 어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이 찬송은 성 버나드가 62세로 죽기 며칠 전에 지었습니다. 그는 병들 어 온 몸이 쇠약하고 죽을 시간을 카운트 다운하는 처지였으나 그의 마음은 기쁨에 차 있었습니다. "예수를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이 기쁘다."는 이 믿음의 표현은 예수와 하나가 된 자의 생생한 체험입니다. 서로 뜨겁 게 사랑하는 연인이나 부부가 그 이가 눈앞에 없으나 생각만 해도 기쁨 과 희망에 넘치듯이 예수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랑의 극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만찬에 참가하는 것은 예수와 하나가 되는 체 험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처럼, 예수의 피는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새 언약입니다. 예수의 피가 없이는 새로운 계약, 인간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절대로 실현될 수 없 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 성만찬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는 새 언약의 상징입니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였던 관 계가 화목한 관계로 새롭게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다시말해 피로 맺은 관계, 혈맹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로부터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도의 강한 유대를 형성하였습니다. 어떤 점에서 교인끼리는 가족보다 너 강하게 유착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의 만찬에 참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께서 축복하신 한 떡을 나누고 같은 잔에 참가함으로 한 분이신 그리스도의 피와 살에 참여한다는 주의 만찬은 마치 세상에 혈맹이라는 말 이 있듯이 영적인 혈맹 관계로 맺어지는 강한 유착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강한 부착력을 가진 것은 굴 등 조개삿갓(barnacles)이라 고 합니다. 바위나 배 밑바닥에 붙은 조개삿갓들을 도저히 멜 수 없습니다. 강한 파도에 부딪히면서도 요동하지 않는 조개삿갓은 마치 인간이 시 속 3백 마일의 폭풍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서있는 것과 맞먹는 압력이라 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아직 그 엄청난 부착력의 비결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와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조개삿갓처럼 강한 가 족을 이룹니다. 부모도 뗄 수 없고, 남편도 뗄 수 없고, 고문과 어떤 핍박 으로도 그리스도인을 그들 성도의 교제, 거룩한 가족에서 뗄 수 없다는 것이 2천 년을 두고 수없이 증명되어 왔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앞두 고 기도하신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간 절히 기도하십니다.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의 소원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사랑으로 굳게 맺어지는 한 가족 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소원은 모든 인류가 예수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님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 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 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여기의 만유라는 한자는 쉽게 전세계의 인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전 세계 인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인류 위에 계시고, 인류를 통일하실 분 이요, 인류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니키타 후르시초프와 존 F. 케네디와 골다 마이어가 천국에서 하나님 을 모시고 정상회담을 했을거라는 재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 사람에 게 질문 한 가지씩만 허용했습니다. 먼저 후르시초프 전 소련 수상이 질 문했습니다. "하나님, 소련과 미국의 사이가 좋아질 날이 올까요네가 살아 있는 세월에는 안될 것이다." 다음은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질문했습니다. "미국과 세계에서 흑인과 백인이 화목하게 살아갈 날이 올까요네가 살아 있는 세월에는 그런 날이 안 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이어 전 이스라엘 수상이 질문했습니다. "유태인과 아랍인이 정답게 살아갈 날이 올까요" 이번에는 대답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내가 살아 있는 세월 동안에는 그런 날이 안 올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니까 유태인과 아랍인의 평화는 영원히 안올 것이라는 재담입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쇠잔하였으나 우리는 아직 분단된 땅 에서 살고 있습니다. 만일 미국에 폭동이 생긴다면 인종 문제일 것이며, 만일 제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진다면 종교 전쟁일 것입니다. 북아일랜드의 오랜 싸움은 개신교와 천주교인의 전쟁이고,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간의 전쟁도 종교적 대립이며, 인도와 파키스탄이 그렇고, 얼마전 이란과 이라 크는 미국에 대한 "거룩한 전쟁"(Holy War)을 선포했었습니다. 중세기 십자군 때부터 종교를 앞세운 전쟁을 거룩한 전쟁으로 부른 나라들이 많 았으나 그것은 국민을 전쟁터로 몰아대는 수단이며, 이 세상에 거룩한 전 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떡을 나누는 것은 예수의 몸, 곧 인류를 하나로 묶으신 그 사랑을 나 누는 것이며, 잔을 나누는 것은 예수의 피, 곧 인류를 구원하신 그 사랑 을 이어받는 것입니다. 예수는 인종간의 막혔던 담을 허시는 자로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 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 게 하시고" 성찬이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고 하면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하나 가 되고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져 모든 막힌 담을 헐고 사랑으로 손을 잡아야 합니다. 주님은 전세계가 예수 이름으로 성찬을 받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인종과 문화, 언어와 정치 체제, 피부의 색깔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 예수의 피로 맺어지는 형제와 자매입니다. 예수의 간절한 소원은 자기와 자기를 따르는 자가 하나가 되는 것이었 습니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예수가 계시는 생활, 예수와 내가 서로 얽혀 하나의 새로운 삶을 이룩하는 것이 예수의 소원이요, 그 사역의 목 적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육체로 체험해 보는 것이 주의 만찬(성만 찬)입니다. 십자가의 피를 상징하는 잔을 들면서 그 액체가 내 몸 속으로 흘러 들어갈 때,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예수 안에 있는,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내 몸 속에 넣 으므로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런던, 시티 템풀이란 교회에 70세가 가까와오는 에밀 메틀러(Emil Mettler)씨가 있습니다. 그는 알버트 슈바이쳐헙회(의료 구호사업)의 간부 입니다. 그는 작은 식당을 40년 동안 경영해 왔습니다. 손님들은 요금을 지불할 때 메틀러 씨의 캐셔(현금 보관함) 속에 들어있는 이상한 물건을 보고 놀랬습니다. 6인치의 큰 못이 들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오는 손 님은 질문을 합니다. "캐셔 속에 못은 왜 넣어 두었습니까" 메틀러 씨는 심각한 얼굴로 해명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생각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못을 집의 책상 서랍 속에 둘 수도 있으나 캐셔 속에 둔 것은 내 직업과 내 생활 속에 예수님이 자주 계심을 상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메틀러 씨는 예수 안에 ,예수는 메틀러 씨 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미국 벙어리들의 신호문자로 예수를 뜻할 때 오른손 새끼 손가락을 왼 손 손바닥에 찍어 못박힌 것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예수의 대표적 이미지는 못박힌 손입니다. 거기에서 흐르는 피입니다. 그 피는 나를 용서하고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의 생수입니다. 주의 만찬에서 우리는 잔을 받 아 구주의 보혈, 이 능력의 피를 통하여 주님을 내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랄프 턴불 목사는 <하나뿐인 설교>라는 그의 저서에서 이런 경험담 을 말합니다. 심한 신경통으로 오래 누워있는 할머니 교우를 널싱 홈(양 노원)으로 심방했습니다. "얼마나 고생하십니까"하고 문안하자 노인은 손을 보이며 말했습니다. "이 손에 못이 박힌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은 평안합니다." 노인은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머리에 가시가 박 히지도 않았습니다.(예수의 가시면류관을 두고 하는 말) 예수님을 생각하 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시 노인은 옆구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옆 구리에 창이 찔리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목사님 염 려하지 마셔요." 심방갔던 턴불 목사가 오히려 큰 은혜를 받고 돌아왔다 고 합니다. 이 노인에게 예수의 수난은 실질적으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되 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이 노인 안에 계셨고, 노인은 예수 안에 있었습니다.
4. 그런데 교회는 죄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죄인을 얼마든지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성만찬은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 죄가 비록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희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자에게 성찬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성만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사랑의 애찬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은사를 받았느냐, 얼마나 축복을 받았느냐, 누가 믿음이 좋으냐 등으로 성도를 구별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이 약해도 성도는 성도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도 있고 믿음이 강한 성도도 있을 수 있는 것이지 성도의 우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 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 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무슨 일을 할 때 의견 차이가 생기면 옳고 그른 것보다 하나 됨이 깨 지지 않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아무것도 못하더라도 싸 우지 않고 화목해야만 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저 사람이 천국에 간다면 천국에 가지 않고 차라리 지옥에 가겠습니다." 이는 자기 신앙이 잘났다고 뽐내는 교만의 꼭대기 올라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 사람 의 죄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서로 화목하여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을 욕되게 하는 것이요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거짓말하는 자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없는 자입니다. "(요일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일2: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 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 되 (요일2: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2: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 니라.(엡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 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 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흘리신 몸과 피로 말미암아 화목 제물이 되신 것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고전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 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고전 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 함이라." 제아무리 열심과 충성을 다 한다해도, 제아무리 능력과 은사가 많다고 해도, 제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해도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되기 위해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내함으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이웃을 기쁘게 하며 덕을 세우는 것이 주의 몸과 피, 성만찬에 바르 게 참여하는 것입니다. "(롬15: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 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롬15: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15: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오늘 성찬을 통해 분열되었던 우리 마음이 치유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항상 열려 있는 이 성찬을 통해 우리 모두가 하나 될 수 있도록 겸손과 온유함, 그리고 사랑으로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온 인류가 하나되는 길을 여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십자가일지라도 달게 질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님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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