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의 보상이 아니라 은혜의 보상인 바울 (고전15:5-10)
본문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 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 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본문 중에서 우리가 함께 생각할 것은 '생활과 행위의 보상이 아니고 은혜의 보상인 바울이라' 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살아 나가는 것이 우리 의 생활이나 행위의 대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내는 것이나 홍해를 건너는 것이나 광야 에서 만나를 먹으면서 지내는 것이나 요단을 건너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힘 있는 자는 먼저 건너가고 힘 없는 자는 못 건너가는 것이 아닙니다. 노인과 어린 아이가 처져서 멸망 당하는 일이 없이 다 건넜습니다. 그것이 왜 그런가 하면 자기의 힘을 의지해서 건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건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힘이나 재 간으로 잘 살고 잘 지내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하나님의 은 혜로 지탱하는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기독교의 진리는 성경의 진리는 생활과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율법을 기준으로 행위를 판가름해서, 좋은 사람은 상을 주고 나쁜 사람은 멸망시키는 그런 도리가 아닙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유교나 불교 사상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유 교나 불교 사상의 내용은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것으로 하 늘의 뜻을 따르는 자 선하게 사는 자는 흥하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자 천륜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무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서 죽게 하신 섭리는 그 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논리가 아닙니다. 만일 우리의 행위로써 승패가 정해지고 상벌이 정해진다면 남보다 더 능력 있고 강한 사람들은 자랑하고 교만할 수 있습니다. 또 남보다 타고나 기를 약하고 힘없게 태어나 늘 실패만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낙오의 마음 을 마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 선생이 말씀하는 이 신앙 안에는 결코 교만도 있을 수 없 고 낭패와 절망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힘으로 결과를 얻어 내는 것이라면 교만할 수도 있고 또 남들이 나서 사는 세상에 나도 똑같 이 나서 사는데 나는 왜 이런가 하며 탄식하고 낙망할 수도 있지만 오늘 바울 선생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 로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행위나 생활의 보상이 아 니고 은혜의 보상인 것을 확실히 알고 생활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이 신앙과 이 소리는 바울뿐만이 아닙니다. 성경 중에 있는 앞서 간 성도들이나 오늘 살고 있는 귀한 신자들의 간증을 들어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자기의 노력의 보상이 아니고 은혜의 보상인 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이 신앙의 사람이요, 주님의 사람이요. 성령님의 사람이요, 신령한 반열 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방 여인 룻 같은 사람에게 물어 보십시오. '당신의 구원과 삶이 당신 의 생활과 행위로 인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 까' 하고 물어보면 바울과 동일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기생 라합에게 그의 구원과 삶이 생활과 양심에 의한 것이었느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느냐 하고 물어 보면 역시 동일한 대답일 것입니다. 고멜이나 다섯 남편을 둔 여인이나 다말이나 또 밧세바 같은 사람들도 모두 동일한 대답일 것입니다. 포도원에 맨 마지막에 들어가서 한 데나리 온을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생활이나 행위의 보 상이 아니고 은혜의 보상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사실을 우리 마음에 품어야 됩니다. 이 사실 그 대로 신앙 생활을 해야 됩니다. 신앙 생활은 노력에 있지 않습니다. 남에 게 드러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자기 입으 로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 바울에게 묻는다면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주님의 죽으심과 사심 외에는 자기를 세울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할 것 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말로만 '바울, 바울' 하지 말 고 그 신앙을 그의 신앙의 걸음을 내 자신이 걷고 가지고 누려야 바울과 동일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기 자신을 말할 때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라 고 했습니다. 어린 아기는 만삭이 되어 나와도 형편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이지만 형편 없습니다. 부모나 다른 사람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보존되 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더구나 만삭되지 못해서 나온 아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 자신을 만삭되지 못해서 난 자, 어딘 가 온전치 못한 존재로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내려간 그 자리, 바울이 있었던 그 위치에 일생에 한두 번이라도 내려 가야 합니다. 거기서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동시 에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위치에 내려간 일이 없기 때문에 성경을 읽어도, 듣기는 들어도, 말은 해도 바울이 어떠한 심령에서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표현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디 모데전서 1:15) 생활과 행위는 차이가 많습니다. 생활과 행위로 보상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생활과 행위는 열이면 열이 각각 다릅니다. 동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은 동일합니다. 아브라함을 부른 부름이나 바울을 부른 부름이나 나를 부른 부름이 동일합니다. 성경의 누 구를 부른 부름이라도 다 동일합니다. 불러서 은혜를 입히십니다. 불러 낸 다 하는 것은 참 귀합니다. 불러 낸 후에 은혜를 입히시는데, 입히시는 은혜가 동일합니다. 불러 내 심을 받는 사람, 은혜를 입는 사람은 각각 다르지만 불러 내시는 하나님과 입히시는 은혜는 누구든지 동일합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말입니다. 잘난 사람이나 많이 배운 사람도 받 아야 됩니다. 많이 가진 사람도 받아야 됩니다. 또 못난 사람도 배우지 못 한 사람도 받아야 됩니다. 안 배운 사람은 받고 배운 사람은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자는 받고 선한 자는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 닙니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말입니다. 성경이 외치고 있는 말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씀을 받는 이가 신자입니다. 바로 그가 은혜의 보상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주님은 의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 신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했지만 기도 중에서 단 한 번이라도 죄인의 괴수 의 자리에 들어가 봤는지가 문제입니다. 만일 죄인 중에 괴수라 하는 자리 에 들어가 봤다면 그때의 내 심정이 어땠는지 내 눈물이 어땠는지 내 감 정이 어땠는지 자기 자신은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바울의 신앙과 심령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파든지 어떤 백성이든지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다 받아야 될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하는 말씀입니다.
'죄 인 중에 내가 괴수라.' 바울은 이 말씀을 할 때나 기도할 때만 죄인 중에 괴수로 산 것이 아니고 늘 죄인 중에 괴수로 살았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 성되이 여기사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디모데전서 1:12) 이 말씀을 잘 기억하세요. '나를 충성되이 여기사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 라.' 주님은 언제 바울을 충성되이 여기셨는가, 바울은 언제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직분을 맡긴 후에 바울이 충성했습니까, 아니면 직분을 맡기기 전에 바울이 충성했기 때문에 그 충성의 보상으로 직분을 맡겼습니까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도 바울처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 나가는 것이 합당합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디모데전서 1:13) 전에는 자기가 훼방하던 사람이요, 핍박하던 사람이요, 폭행하던 사람이 었다는 말입니다. 왜 이 말을 합니까 훼방했던 자기, 핍박했던 자기, 폭행 했던 자기를 왜 들추어 냅니까 맡긴 후와 맡기기 전을 생각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내가 믿지 않을 때에'-믿지 않던 때는 언제이고, 믿은 때는 언제입니 까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은 알지도 못하고 믿 지도 못했습니다. 그때에, 바울이 알지 못했을 때에 바울이 믿지도 못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알기 이전에 믿기 이전에 하나님의 은 혜가 임한 것입니다. 행위의 보상이 아니고 은혜의 보상이라는 말의 깊은 의미가 거기에 있습니다. 물론 바울이 이 말씀을 한 것은 신앙의 초기가 아니고 신앙의 말 기입니다. 아무라도 자기를 소개하려면 그렇게 밖에 못할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말씀하는 이 모든 말씀의 열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 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름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 로 하심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 말씀은 확실히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 하는 자리에서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따라서 우리를 취급하신다고 하면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렇고 우리는 사망뿐입니다. 이 말씀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오직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확실 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행위와 생활의 보상이 아니라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확실히 알면 여러분의 신앙에는 다른 힘, 다른 길, 다른 찬양이 시작됩니다. 생활에는 죽기 까지 굴곡이 있지만 신앙은 죽기까지 굴곡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일, 주님을 아는 일은 죽기까지 굴곡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과 행위의 보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상인 사실을 알고 내 가 그 안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것이 참 귀합니다. 포도원에 맨 마지막에 들어 간 사람은 자기 행위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은혜의 보상일 뿐입니다. 늘 말씀하지만 그가 그 다음날 포도원에 갔다고 하면 시 간이 되는 대로 가서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행위의 보상이 아니고 은혜의 보상인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내 발걸음을 그대로 걷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세상 없어도 생활과 행위의 보상이 아니고 은혜의 보상이라고 하는 말이 여러분 안에서 나오게 된다면 주님은 여러분에게 나타나셔서 어떠한 주님 인 것을 알게 하십니다. 또 믿게 하십니다. 또 우리는 주님을 끌어안고 감사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이르든지 이르지 못하든지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입니다. 내 마음에 맞으면 교회와 운명을 같이하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돌아서는 그 런 것이 아니고 마음에 맞아도 안 맞아도 주님과 교회와 운명을 같이하는 관계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먼저 주님이 하실 일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많은 백성들에게 당신을 보이시고 또 보이신 바 된 주님을 믿게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자신을 먼저 게바(베드로)에게 보이셨습니다. 또 열 두 제자에게 보이셨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 도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그들에게 알게 하십니다. 그 다음에 오백여 형제 에게 일시에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말씀대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기에게 보이셨다는 말씀인데, 주가 그에게 보이시는 것이 없 으면 안됩니다. 먼저 보이십니다. 그 다음에 오순절을 통해서 오순절이 그 마음 속에 오면서 주님과 그의 관계가 다시 새롭게 생명화되고 주님을 믿는 일, 또 교회와 운명을 같이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주님과의 참다운 관계, 교회와의 참다운 관계, 우리 신앙의 참다운 내용입니다. 그때만 그렇게 했고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들에게 보이시는 보임도 믿게 하시는 성령님의 세례도 오늘날 종교 자체가, 교단 자체가, 모든 제도 자체가 가 로막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다'는 말은 감탄사입니다. 아주 귀한 말입니다. '나에게도 보이셨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열두 제자에 게 보이시고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시고 맨 나중에 바울에게 보이셨습니다. 먼저 보고 나중 보는 것은 차이가 없습니다. 먼저 보는 사람은 낫고 나 중 보는 사람은 못하고 먼저 보는 사람은 전체를 다 보고 나중 보는 사람 은 부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보는 것이나 나중 에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육의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으로 보는 것은 다릅니다. 그들은 먼저 육신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다음에 오순절 아침이 되면서 오순절의 세례로 인하여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믿고 마음으로 교회를 알고 섬기 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 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고린도전서 15:9)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으므로 사도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세례가 아니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사는 일은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교회를 위해서 살 수도 없습니다. 전부 다 자기라고 하는 무서운 존재가 교회 위에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참 귀합니다. 보통으로 봐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사는 것 같지만 거기에는 자기라고 하는 무서운 존재가 교회 위에 앉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도 주님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자기가 왕좌에 앉 아서 교회를 위해서 산다고 말은 하지만 교회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교회를 핍박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교회와 말씀과 멍에를 같이하지 못하고 운명을 같이하 지 못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주님을 아는 일 주님을 믿는 일 하나님 의 교회를 아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서 살았느냐, 나 를 위해서 살았느냐를 생각해 볼 때 두 말 할 것도 없이 나 자신을 위해 서 살았습니다. 잘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사람이라, 사 도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고린도전서 15:10) 자신의 수고를 인정합니다. 많이 수고했다는 말 가운데 바울이 교회를 위해서 매 맞는 것 굶주린 것 천대와 멸시를 받은 것 등이 다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도보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많이 수고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고 인정합니다.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수고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행위의 보상이 아니고 은혜의 보상인 바울이라 하는 내용이 이 말씀 안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행위의 보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상 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 그릇 안에도 이 사실이 있을 것뿐입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바울을 위시해서 신앙의 사람들은 교회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자기 없는 삶입니다. 자기 없는 봉사입니다. 교회가 가는 길에 그들이 같이 갔습니다. 매를 맞아도 같이 맞고 영광을 얻어도 같이 얻었습니다. '내가 아니요.' 바울이 걸어 가는 길에 손으로 하는 일에 말하는 말에 바울이 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가 다 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아니 라,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말입니다. 참 귀합니다. (잘 보세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말 안에 바울이 앉아도 누워도 걸어도 일을 해도 쉬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 와 동참합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의 사상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 혜라, 사사건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고백을 할 수 있 다면 참 귀합니다. 귀한 일에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같이하지 않으면 귀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덮지 않으면 그 일은 바리새교인이나 종교인들의 귀한 것에 불과하지 바울의 귀한 일은 아닙니다. 또 천한 일에도, 내가 실수하는 일이나 넘어지는 일에도 하나님의 은혜 가 동참합니다. 나쁜 일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지 않거나 나 를 등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일에도 나쁜 일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생활의 보상이 아니요, 은혜의 보상이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의 내용과 그 결과입니다. 이렇게 외치는 바울이나 오늘의 신자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신앙은 단독입니다. 내 단독입니다. 남의 수고가 나를 보태 주는 것도 아니고 내 수고가 남에게 빼앗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편으로 신 앙은 자기 단독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는 주님과 바울의 관계입니다. 교회와 바울의 관계입니다. 바울의 삶과 주님의 관계요, 바울의 삶과 교회의 관계입니다. 아무리 나에게 하늘을 쓰고 도리를 흔들 수 있는 능력 이 있다 해도 주님과 내가, 교회와 내가 밀접한 관계로 맺어지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모릅니다. 그가 주님과의 관계 때문에 교회와 끊을 수 없는 관계 때문에 그렇게 사는지 교회와 운명을 같이하고 있는지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압니다 주님은 압니다. 물론 이 교회를 떠나서 저 교회로 떠나는 것이 상관은 없습니다. 그러나 왜 가느냐, 왜 떠나느냐 하는 것을 잘 생각해야 됩니다. 바울이 주님을 알고 영접하고 주님을 위해 살 때에 무서운 유대인들과 율법이 바울의 뒤를 쫓고 있었습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결사대가 조직되 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긴긴 세월 가운데 혼자 산 것이 아닙니다. 주님 은 말할 것도 없지만 많은 형제, 많은 자매, 많은 신앙의 동역자들이 있었 습니다. 교회 없이, 형제와 자매 없이 외따로 혼자 살다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우는 일에 같이 울고 웃는 일에 같이 웃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참 귀합니다. 바울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까지 내 버리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 자신이 말씀했듯이 그들이 할 수 있었더라면 (할 수 없어서 그렇지) 눈 이라도 빼서 바울에게 주었을 정도로 바울을 아낀 신앙의 사람들도 있었 습니다. 이 사람들이 연합해서 지체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 나왔습니다.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 위험 속에서 바울을 광주리 에 태워서 성 밖으로 내리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이름은 성경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눈이라도 빼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누구였는지 바울을 광주리에 태워서 성 밑으로 내려준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동역자들입니다. 운명을 같이하고 있는 사람들 입니다. 이렇듯 바울이 생활의 보상이 아니요, 은혜의 보상이라 하는 말을 하게 된 데는 많은 사람의 동역이 있었습니다. 잘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 말을 여러분에게 하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난 주간 에도 혼자 가만히 누워서 옛 생활을 생각해 봤습니다. 은혜 받는 시간이 많이 있었지만 정식으로 교회를 시무하기는 40여년인데 그 동안에 귀한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잘 주나 못 주나 잘 먹으나 못 먹으나 잘 입었거나 못 입었거나 40년 동안에 나의 생활을 교회가 감당했습니다.
형제자매들의 수고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눈물 흘려서 기도하는 기도로 동역한 잊을 수 없는 형제와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 형제와 자매들이 없이 나 혼자 단독으로 신앙 생활 하다가 죽는다고 하면 결론이 어떻게 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내용 가운데서 같은 삶 가운데서 베푼 그들의 간곡한 기도, 격에 넘치는 봉사, 사랑을 알 고 있습니다. 나는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랑, 격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가 되었든 지 물질적인 봉사가 되었든지 나로서는 잊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바울 자 신도 그랬을 것입니다. 나는 존경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 자체가. 그러나 때때로 참 귀한 존 경을 받아 온 것이 사실입니다. 또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나가는 말로 하는 말이 아니고 내 생활 가운데 젖어 있습니다. 늘 하는 말은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너무 죄송하다. 부족하다.' 하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이 말한다고 하면 생활과 행실의 보상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의 보상이라고 하는 말은 너무너무 당연한 말씀이 되겠습니다. 하나 느끼는 것은 바울이라는 이름 하나를 세우려고 많은 시간과 많은 경제와 죽음을 무릅쓰고 나왔던 많은 만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 이름은 없지만 바울의 사랑하는 형제, 사랑하는 자매, 바울의 아들들, 바울의 어머니들, 예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들에게 은혜 주신 것이 아주 귀합니다. 그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대우하셨는지 성경 가운데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대우하실 것 입니다. 나 자신의 생활 가운데서도 일평생 잊지 못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서는 지금 돈으로 치면 만원 한 장을 변변히 쓰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또 신앙 생활 가운데서 그 들을 잊는다고 하면 그것은 말도 안됩니다. 어떻게 주께서 취급하시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후히 대우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 안에서 각자 혼자 살다 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주님과 나의 관계요, 다음에는 교회와 나, 형제와 나의 관계입니다. 우리 각자가 생활의 보상이 아니라 은혜의 보상이라고 하는 사실 안에 참석 해서 그 사실, 그 내용이 영광과 존귀를 받는 모임을 이룰 때에 이것이 후 에 하나님 앞에 나가서도 아름다운 사람과 아름다운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 나온 모든 일 중에서는 내가 잘한 것이 하나도 없 습니다. 부지런히 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보 상이라는 말을 잊어버리지 않고 사는 신자, 그 생활, 그 가정이 귀할 것입니다. 말씀대로 주를 영접하면 주와 같은 대우를 받습니다. 어린아이에게 냉 수 한 그릇을 주어도 결단코 잊지 않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수고한 수고를 하나님께서 잊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여기 가서 기웃, 저기 가서 기웃거리고 이 교회에 가서 기웃, 저 교회에 가서 기웃거리다가 일평생을 보낸다고 하 면 생활의 보상이 아니고 은혜의 보상이라고 하는 말은 못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고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이런 것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생활과 행위의 보상이 아니고 은혜의 보상이라 하는 이 사실을 잊지 마 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떠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배역하면 안됩니다. (기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성령님으로 주를 알게 하시고 성령님으 로 주를 믿게 하시고 성령님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알고 봉사할 수 있는 내 용을 우리 마음 속에 옮겨 주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이는 하나님만 아시 지 세상이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땅 위에 사는 날 동안에 복음과 함께 고락을 같이하는 분들과 교회가 가는 길에 함께 걷고 있는 성도들의 걸음을 흠모하게 하시기를 바 라고 원합니다. 이 모든 사실이 우리 마음 밖에 멀리 있지 않게 하시고 우리 마음 안에서 거론되게 하시며 내 안에 있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생활의 보상이 아니요, 은혜의 보상된 것을 말하면서 간증 중에 간증으 로 남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우리 중에 뒤로 물러가는 생명들 이 없게 하시고 다 동일한 복음의 전선에 하나가 되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먼저 주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교회와의 관계, 형제자매와의 관계를 바 로 맺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이는 우리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 며 우리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의 일입니다. 영광과 존귀와 거룩함 을 주님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입을 열을 때마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주 의 향기와 주의 향취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일 가운데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어떻게 보면 나무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서 죽게 하신 섭리는 그 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논리가 아닙니다. 만일 우리의 행위로써 승패가 정해지고 상벌이 정해진다면 남보다 더 능력 있고 강한 사람들은 자랑하고 교만할 수 있습니다. 또 남보다 타고나 기를 약하고 힘없게 태어나 늘 실패만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낙오의 마음 을 마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 선생이 말씀하는 이 신앙 안에는 결코 교만도 있을 수 없 고 낭패와 절망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힘으로 결과를 얻어 내는 것이라면 교만할 수도 있고 또 남들이 나서 사는 세상에 나도 똑같 이 나서 사는데 나는 왜 이런가 하며 탄식하고 낙망할 수도 있지만 오늘 바울 선생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 로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행위나 생활의 보상이 아 니고 은혜의 보상인 것을 확실히 알고 생활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이 신앙과 이 소리는 바울뿐만이 아닙니다. 성경 중에 있는 앞서 간 성도들이나 오늘 살고 있는 귀한 신자들의 간증을 들어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자기의 노력의 보상이 아니고 은혜의 보상인 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이 신앙의 사람이요, 주님의 사람이요. 성령님의 사람이요, 신령한 반열 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방 여인 룻 같은 사람에게 물어 보십시오. '당신의 구원과 삶이 당신 의 생활과 행위로 인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 까' 하고 물어보면 바울과 동일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기생 라합에게 그의 구원과 삶이 생활과 양심에 의한 것이었느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느냐 하고 물어 보면 역시 동일한 대답일 것입니다. 고멜이나 다섯 남편을 둔 여인이나 다말이나 또 밧세바 같은 사람들도 모두 동일한 대답일 것입니다. 포도원에 맨 마지막에 들어가서 한 데나리 온을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생활이나 행위의 보 상이 아니고 은혜의 보상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사실을 우리 마음에 품어야 됩니다. 이 사실 그 대로 신앙 생활을 해야 됩니다. 신앙 생활은 노력에 있지 않습니다. 남에 게 드러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자기 입으 로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 바울에게 묻는다면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주님의 죽으심과 사심 외에는 자기를 세울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할 것 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말로만 '바울, 바울' 하지 말 고 그 신앙을 그의 신앙의 걸음을 내 자신이 걷고 가지고 누려야 바울과 동일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기 자신을 말할 때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라 고 했습니다. 어린 아기는 만삭이 되어 나와도 형편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이지만 형편 없습니다. 부모나 다른 사람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보존되 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더구나 만삭되지 못해서 나온 아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 자신을 만삭되지 못해서 난 자, 어딘 가 온전치 못한 존재로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내려간 그 자리, 바울이 있었던 그 위치에 일생에 한두 번이라도 내려 가야 합니다. 거기서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동시 에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위치에 내려간 일이 없기 때문에 성경을 읽어도, 듣기는 들어도, 말은 해도 바울이 어떠한 심령에서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표현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디 모데전서 1:15) 생활과 행위는 차이가 많습니다. 생활과 행위로 보상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생활과 행위는 열이면 열이 각각 다릅니다. 동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은 동일합니다. 아브라함을 부른 부름이나 바울을 부른 부름이나 나를 부른 부름이 동일합니다. 성경의 누 구를 부른 부름이라도 다 동일합니다. 불러서 은혜를 입히십니다. 불러 낸 다 하는 것은 참 귀합니다. 불러 낸 후에 은혜를 입히시는데, 입히시는 은혜가 동일합니다. 불러 내 심을 받는 사람, 은혜를 입는 사람은 각각 다르지만 불러 내시는 하나님과 입히시는 은혜는 누구든지 동일합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말입니다. 잘난 사람이나 많이 배운 사람도 받 아야 됩니다. 많이 가진 사람도 받아야 됩니다. 또 못난 사람도 배우지 못 한 사람도 받아야 됩니다. 안 배운 사람은 받고 배운 사람은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자는 받고 선한 자는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 닙니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말입니다. 성경이 외치고 있는 말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씀을 받는 이가 신자입니다. 바로 그가 은혜의 보상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주님은 의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 신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했지만 기도 중에서 단 한 번이라도 죄인의 괴수 의 자리에 들어가 봤는지가 문제입니다. 만일 죄인 중에 괴수라 하는 자리 에 들어가 봤다면 그때의 내 심정이 어땠는지 내 눈물이 어땠는지 내 감 정이 어땠는지 자기 자신은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바울의 신앙과 심령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파든지 어떤 백성이든지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다 받아야 될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하는 말씀입니다.
'죄 인 중에 내가 괴수라.' 바울은 이 말씀을 할 때나 기도할 때만 죄인 중에 괴수로 산 것이 아니고 늘 죄인 중에 괴수로 살았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 성되이 여기사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디모데전서 1:12) 이 말씀을 잘 기억하세요. '나를 충성되이 여기사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 라.' 주님은 언제 바울을 충성되이 여기셨는가, 바울은 언제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직분을 맡긴 후에 바울이 충성했습니까, 아니면 직분을 맡기기 전에 바울이 충성했기 때문에 그 충성의 보상으로 직분을 맡겼습니까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도 바울처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 나가는 것이 합당합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디모데전서 1:13) 전에는 자기가 훼방하던 사람이요, 핍박하던 사람이요, 폭행하던 사람이 었다는 말입니다. 왜 이 말을 합니까 훼방했던 자기, 핍박했던 자기, 폭행 했던 자기를 왜 들추어 냅니까 맡긴 후와 맡기기 전을 생각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내가 믿지 않을 때에'-믿지 않던 때는 언제이고, 믿은 때는 언제입니 까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은 알지도 못하고 믿 지도 못했습니다. 그때에, 바울이 알지 못했을 때에 바울이 믿지도 못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알기 이전에 믿기 이전에 하나님의 은 혜가 임한 것입니다. 행위의 보상이 아니고 은혜의 보상이라는 말의 깊은 의미가 거기에 있습니다. 물론 바울이 이 말씀을 한 것은 신앙의 초기가 아니고 신앙의 말 기입니다. 아무라도 자기를 소개하려면 그렇게 밖에 못할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말씀하는 이 모든 말씀의 열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 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름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 로 하심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 말씀은 확실히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 하는 자리에서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따라서 우리를 취급하신다고 하면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렇고 우리는 사망뿐입니다. 이 말씀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오직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확실 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행위와 생활의 보상이 아니라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확실히 알면 여러분의 신앙에는 다른 힘, 다른 길, 다른 찬양이 시작됩니다. 생활에는 죽기 까지 굴곡이 있지만 신앙은 죽기까지 굴곡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일, 주님을 아는 일은 죽기까지 굴곡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과 행위의 보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상인 사실을 알고 내 가 그 안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것이 참 귀합니다. 포도원에 맨 마지막에 들어 간 사람은 자기 행위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은혜의 보상일 뿐입니다. 늘 말씀하지만 그가 그 다음날 포도원에 갔다고 하면 시 간이 되는 대로 가서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행위의 보상이 아니고 은혜의 보상인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내 발걸음을 그대로 걷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세상 없어도 생활과 행위의 보상이 아니고 은혜의 보상이라고 하는 말이 여러분 안에서 나오게 된다면 주님은 여러분에게 나타나셔서 어떠한 주님 인 것을 알게 하십니다. 또 믿게 하십니다. 또 우리는 주님을 끌어안고 감사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이르든지 이르지 못하든지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입니다. 내 마음에 맞으면 교회와 운명을 같이하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돌아서는 그 런 것이 아니고 마음에 맞아도 안 맞아도 주님과 교회와 운명을 같이하는 관계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먼저 주님이 하실 일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많은 백성들에게 당신을 보이시고 또 보이신 바 된 주님을 믿게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자신을 먼저 게바(베드로)에게 보이셨습니다. 또 열 두 제자에게 보이셨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 도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그들에게 알게 하십니다. 그 다음에 오백여 형제 에게 일시에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말씀대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기에게 보이셨다는 말씀인데, 주가 그에게 보이시는 것이 없 으면 안됩니다. 먼저 보이십니다. 그 다음에 오순절을 통해서 오순절이 그 마음 속에 오면서 주님과 그의 관계가 다시 새롭게 생명화되고 주님을 믿는 일, 또 교회와 운명을 같이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주님과의 참다운 관계, 교회와의 참다운 관계, 우리 신앙의 참다운 내용입니다. 그때만 그렇게 했고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들에게 보이시는 보임도 믿게 하시는 성령님의 세례도 오늘날 종교 자체가, 교단 자체가, 모든 제도 자체가 가 로막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다'는 말은 감탄사입니다. 아주 귀한 말입니다. '나에게도 보이셨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열두 제자에 게 보이시고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시고 맨 나중에 바울에게 보이셨습니다. 먼저 보고 나중 보는 것은 차이가 없습니다. 먼저 보는 사람은 낫고 나 중 보는 사람은 못하고 먼저 보는 사람은 전체를 다 보고 나중 보는 사람 은 부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보는 것이나 나중 에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육의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으로 보는 것은 다릅니다. 그들은 먼저 육신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다음에 오순절 아침이 되면서 오순절의 세례로 인하여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믿고 마음으로 교회를 알고 섬기 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 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고린도전서 15:9)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으므로 사도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세례가 아니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사는 일은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교회를 위해서 살 수도 없습니다. 전부 다 자기라고 하는 무서운 존재가 교회 위에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참 귀합니다. 보통으로 봐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사는 것 같지만 거기에는 자기라고 하는 무서운 존재가 교회 위에 앉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도 주님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자기가 왕좌에 앉 아서 교회를 위해서 산다고 말은 하지만 교회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교회를 핍박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교회와 말씀과 멍에를 같이하지 못하고 운명을 같이하 지 못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주님을 아는 일 주님을 믿는 일 하나님 의 교회를 아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서 살았느냐, 나 를 위해서 살았느냐를 생각해 볼 때 두 말 할 것도 없이 나 자신을 위해 서 살았습니다. 잘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사람이라, 사 도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고린도전서 15:10) 자신의 수고를 인정합니다. 많이 수고했다는 말 가운데 바울이 교회를 위해서 매 맞는 것 굶주린 것 천대와 멸시를 받은 것 등이 다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도보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많이 수고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고 인정합니다.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수고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행위의 보상이 아니고 은혜의 보상인 바울이라 하는 내용이 이 말씀 안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행위의 보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상 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 그릇 안에도 이 사실이 있을 것뿐입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바울을 위시해서 신앙의 사람들은 교회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자기 없는 삶입니다. 자기 없는 봉사입니다. 교회가 가는 길에 그들이 같이 갔습니다. 매를 맞아도 같이 맞고 영광을 얻어도 같이 얻었습니다. '내가 아니요.' 바울이 걸어 가는 길에 손으로 하는 일에 말하는 말에 바울이 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가 다 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아니 라,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말입니다. 참 귀합니다. (잘 보세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말 안에 바울이 앉아도 누워도 걸어도 일을 해도 쉬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 와 동참합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의 사상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 혜라, 사사건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고백을 할 수 있 다면 참 귀합니다. 귀한 일에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같이하지 않으면 귀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덮지 않으면 그 일은 바리새교인이나 종교인들의 귀한 것에 불과하지 바울의 귀한 일은 아닙니다. 또 천한 일에도, 내가 실수하는 일이나 넘어지는 일에도 하나님의 은혜 가 동참합니다. 나쁜 일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지 않거나 나 를 등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일에도 나쁜 일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생활의 보상이 아니요, 은혜의 보상이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의 내용과 그 결과입니다. 이렇게 외치는 바울이나 오늘의 신자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신앙은 단독입니다. 내 단독입니다. 남의 수고가 나를 보태 주는 것도 아니고 내 수고가 남에게 빼앗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편으로 신 앙은 자기 단독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는 주님과 바울의 관계입니다. 교회와 바울의 관계입니다. 바울의 삶과 주님의 관계요, 바울의 삶과 교회의 관계입니다. 아무리 나에게 하늘을 쓰고 도리를 흔들 수 있는 능력 이 있다 해도 주님과 내가, 교회와 내가 밀접한 관계로 맺어지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모릅니다. 그가 주님과의 관계 때문에 교회와 끊을 수 없는 관계 때문에 그렇게 사는지 교회와 운명을 같이하고 있는지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압니다 주님은 압니다. 물론 이 교회를 떠나서 저 교회로 떠나는 것이 상관은 없습니다. 그러나 왜 가느냐, 왜 떠나느냐 하는 것을 잘 생각해야 됩니다. 바울이 주님을 알고 영접하고 주님을 위해 살 때에 무서운 유대인들과 율법이 바울의 뒤를 쫓고 있었습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결사대가 조직되 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긴긴 세월 가운데 혼자 산 것이 아닙니다. 주님 은 말할 것도 없지만 많은 형제, 많은 자매, 많은 신앙의 동역자들이 있었 습니다. 교회 없이, 형제와 자매 없이 외따로 혼자 살다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우는 일에 같이 울고 웃는 일에 같이 웃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참 귀합니다. 바울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까지 내 버리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 자신이 말씀했듯이 그들이 할 수 있었더라면 (할 수 없어서 그렇지) 눈 이라도 빼서 바울에게 주었을 정도로 바울을 아낀 신앙의 사람들도 있었 습니다. 이 사람들이 연합해서 지체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 나왔습니다.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 위험 속에서 바울을 광주리 에 태워서 성 밖으로 내리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이름은 성경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눈이라도 빼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누구였는지 바울을 광주리에 태워서 성 밑으로 내려준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동역자들입니다. 운명을 같이하고 있는 사람들 입니다. 이렇듯 바울이 생활의 보상이 아니요, 은혜의 보상이라 하는 말을 하게 된 데는 많은 사람의 동역이 있었습니다. 잘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 말을 여러분에게 하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난 주간 에도 혼자 가만히 누워서 옛 생활을 생각해 봤습니다. 은혜 받는 시간이 많이 있었지만 정식으로 교회를 시무하기는 40여년인데 그 동안에 귀한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잘 주나 못 주나 잘 먹으나 못 먹으나 잘 입었거나 못 입었거나 40년 동안에 나의 생활을 교회가 감당했습니다.
형제자매들의 수고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눈물 흘려서 기도하는 기도로 동역한 잊을 수 없는 형제와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 형제와 자매들이 없이 나 혼자 단독으로 신앙 생활 하다가 죽는다고 하면 결론이 어떻게 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내용 가운데서 같은 삶 가운데서 베푼 그들의 간곡한 기도, 격에 넘치는 봉사, 사랑을 알 고 있습니다. 나는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랑, 격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가 되었든 지 물질적인 봉사가 되었든지 나로서는 잊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바울 자 신도 그랬을 것입니다. 나는 존경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 자체가. 그러나 때때로 참 귀한 존 경을 받아 온 것이 사실입니다. 또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나가는 말로 하는 말이 아니고 내 생활 가운데 젖어 있습니다. 늘 하는 말은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너무 죄송하다. 부족하다.' 하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이 말한다고 하면 생활과 행실의 보상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의 보상이라고 하는 말은 너무너무 당연한 말씀이 되겠습니다. 하나 느끼는 것은 바울이라는 이름 하나를 세우려고 많은 시간과 많은 경제와 죽음을 무릅쓰고 나왔던 많은 만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 이름은 없지만 바울의 사랑하는 형제, 사랑하는 자매, 바울의 아들들, 바울의 어머니들, 예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들에게 은혜 주신 것이 아주 귀합니다. 그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대우하셨는지 성경 가운데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대우하실 것 입니다. 나 자신의 생활 가운데서도 일평생 잊지 못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서는 지금 돈으로 치면 만원 한 장을 변변히 쓰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또 신앙 생활 가운데서 그 들을 잊는다고 하면 그것은 말도 안됩니다. 어떻게 주께서 취급하시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후히 대우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 안에서 각자 혼자 살다 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주님과 나의 관계요, 다음에는 교회와 나, 형제와 나의 관계입니다. 우리 각자가 생활의 보상이 아니라 은혜의 보상이라고 하는 사실 안에 참석 해서 그 사실, 그 내용이 영광과 존귀를 받는 모임을 이룰 때에 이것이 후 에 하나님 앞에 나가서도 아름다운 사람과 아름다운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 나온 모든 일 중에서는 내가 잘한 것이 하나도 없 습니다. 부지런히 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보 상이라는 말을 잊어버리지 않고 사는 신자, 그 생활, 그 가정이 귀할 것입니다. 말씀대로 주를 영접하면 주와 같은 대우를 받습니다. 어린아이에게 냉 수 한 그릇을 주어도 결단코 잊지 않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수고한 수고를 하나님께서 잊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여기 가서 기웃, 저기 가서 기웃거리고 이 교회에 가서 기웃, 저 교회에 가서 기웃거리다가 일평생을 보낸다고 하 면 생활의 보상이 아니고 은혜의 보상이라고 하는 말은 못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고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이런 것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생활과 행위의 보상이 아니고 은혜의 보상이라 하는 이 사실을 잊지 마 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떠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배역하면 안됩니다. (기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성령님으로 주를 알게 하시고 성령님으 로 주를 믿게 하시고 성령님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알고 봉사할 수 있는 내 용을 우리 마음 속에 옮겨 주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이는 하나님만 아시 지 세상이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땅 위에 사는 날 동안에 복음과 함께 고락을 같이하는 분들과 교회가 가는 길에 함께 걷고 있는 성도들의 걸음을 흠모하게 하시기를 바 라고 원합니다. 이 모든 사실이 우리 마음 밖에 멀리 있지 않게 하시고 우리 마음 안에서 거론되게 하시며 내 안에 있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생활의 보상이 아니요, 은혜의 보상된 것을 말하면서 간증 중에 간증으 로 남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우리 중에 뒤로 물러가는 생명들 이 없게 하시고 다 동일한 복음의 전선에 하나가 되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먼저 주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교회와의 관계, 형제자매와의 관계를 바 로 맺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이는 우리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 며 우리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의 일입니다. 영광과 존귀와 거룩함 을 주님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입을 열을 때마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주 의 향기와 주의 향취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일 가운데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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