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온유하다 (고전13:4)
본문
한국 사람들은 머리 좋은 것을 높게 평가합니다. 학자를 숭앙하는 유교 전통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능 지수가 높은 것보다는 사랑 지수가 높은 것을 원하십니다. 이번 과(科)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 가운데 "사랑은 온유하다"는 측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 온유의 진정한 의미 = 온유(溫柔)는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뜻의 말인데, 성경에서는 "친절하다", "참는다", "차분하다", "조용한 가운데 꾸 준히 선(善)을 추구하다" 등 여러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른 성구(聖句)들에서는 온유가 "자신의 격정이나 분노를 통제할 줄 아는 것, 자기 자신의 격정과 분노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분노와 격정도 수용해 줄 힘이 있는 것"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온유란 무기력하거나 늘 굴종하고 항복하고 그저 부드럽게만 처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 닙니다. 약한 사람은 온유할 수가 없습니다. 강하고 용기가 있고 통제력이 있는 사람만이 온유할 수 있습니다. 비겁한 것과 온유 한 것은 다릅니다. 온유한 자는 강한 사람이요, 힘 있는 사람이 요,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자기 자신을 통제하며 인내하며 부드러움으로 타인을 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온유에는 "겸손하고 점잖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영어로 "gentle"에 해당합니다. 여기에서 "신사"라는 뜻의 "gentleman"이 나왔다면 진정한 남자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우락부락하고 강하고 억센 남자가 아닐 것입니다. 부드러 운 남자야말로 정말 멋있는 남자입니다. 강하고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어디 가서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 속에 따뜻함이 있어서 부드럽게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진정한 남자다움이며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의 멋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50%의 아내들이 남편에게 구타를 당한 다고 합니다. 주먹을 휘두르려면 남자끼리 휘둘러야지, 자기보다 연약한 여자에게 휘둘러서 이기는 남자는 비겁한 남자입니다. 남자 답지 않은 남자가 여자를 때립니다. 여자하고 싸워서 이기는 남자 가 무슨 남자입니까 어떤 남편은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를 때린다 고 둘러대기도 합니다.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참 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부드럽습니다. 점잖습니다. 따뜻하고 겸손합니다. 힘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감 정을 통제하여 그것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반응하는 데 사용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며 이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사랑 의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 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8,29).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을 창조한 능력자이며, 죽음을 박차고 일 어나는 무한한 힘을 가진 예수께서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도 온유하고 겸손할 것을 가르쳐 주고자 하십니다. 사납고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신앙의 힘을 가지고 부드럽고 따뜻한 모습으로 꾸준히 이웃과 가족을 사랑으로 돌볼 수 있는 사랑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은 바라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온유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께 나아와 그분에게 배울 때 우리는 온유한 신 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도 온유한 사람 중에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모세는 2백만 대 군을 이끈 사람이요,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건진 사람이요, 40년 동안 자기 민족을 이끈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그 모든 임무들을 하나님과 동포에 대한 사랑을 안고 온유한 자세로 감당해 나갔습니다. 당신은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줍니까 사람들이 당신더러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합니까 아니면 비판적이고 위협적이고 공격적인 사람이라고 합니까 당신의 모습에서 참사랑의 부드러움 과 따뜻함을 주위 사람들이 경험합니까 아니면 당신이 나타나기만 하면 아이들이 슬금슬금 자기 방으로 피해 버립니까 대체로 남 자들에게는 부드러운 모습이 적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강해야 한 다", "싸울 때는 이겨야 한다"는 식의 말들을 많이 들으며 자 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남자들도 온유한 모습을 회복해 야만 합니다. 남자들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온유한 성품을 계발할 때 훨씬 더 그 사내다움이라는 것이 돋보인다는 사실을 알 아야 합니다. '' 온유한 사람이 받는 복 = 성경에는 온유한 사람이 받는 복이 여섯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첫째/땅을 기업으로 받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억세고 공격적이고 위협적이고 마구 밀어붙이는 사람들은 땅을 정복 할 수는 있으나 그 정복한 땅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들은 정복한 땅을 오래도록 자신의 것으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드럽고 친절하며 그 친절함 속에 강인함이 있어서 선(善)을 힘 있게 추구해 가는 조용한 사람들과 싸우려 드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주로, 난폭하고 사나운 사람들끼리 싸움을 벌입니다. 온유하게 땅을 정복하고 온유하게 땅을 유지하 려는 사람들은 그 땅을 유업으로 받는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둘째/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높여 주심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시 147: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 느니라"(벧전 5:5).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사랑을 계발한 사람들을 반드시 그 삶 속에서 높이 들어 이 땅에서 훌륭하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세워 주실 것 입니다.
셋째/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심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 나신 때에로다"(시 76:9). 온유한 자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구원의 손 길을 펴 주십니다.
넷째/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들어 주심 "여호와께서는…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 49:4). 온유한 성품이 점점 더 강화될수록 그 사람의 모습은 점차 아름답 게 변화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반면 온유함이 없고 날카롭고 늘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의 얼굴은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미워집니다. 다섯째/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음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시 149:4). 여기에서 "자기 백성"은 4절 뒷부분에서 말하는 "겸손한 자", 곧 "온유한 자"입니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바로 온유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늘 다른 사람과 충돌하고 상대방을 공격하고 기분 나쁘게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삶에 기쁨이 없습니다.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들은 그 삶 속에 여호와께서 기쁨을 점점 더 많이 허락해 주시기 때문에 늘 즐겁게 살아갑니다. 만약 사는 것이 재미 없고,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배척한다면 온유한 사랑이 삶 가운데 계발되고 있는지 한번 검토해 보기 바랍니다. 만약 형제들이 당신을 별로 좋아하지 아니하고 자꾸 피하면 한번 삶을 검토해 보기 바랍니다. 당신이 직장에서 돌아왔을 때 자녀들이 기쁘게 맞아 주지 않고 얼른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면 왜 그런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온유함이 부족 해서일 것입니다. 온유할 때 기쁨이 증폭됩니다. 여섯째/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음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갈 6:1). 온유한 자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 실수한 사람들을 회복시켜 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남을 돕고 싶어도 당신이 온유한 사람이 아니면 도움받을 사람이 당신을 원치 않습니다. 만나면 위협적이고 공격적이고 얼굴 모습도 사나운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이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라면 당신은 많은 사람에 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 땅에는 고통받는 사람도 많고 슬 픔에 싸여 있는 사람도 많고 실수한 사람들도 많고 범죄한 사람들 도 많고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도 와줄 수 있으려면 온유한 성품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義)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딤전 6:11).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 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2).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친절하고 조용한 가운데 강력한 힘을 가지고 꾸준히 선(善)을 추구해 감으로써 모든 사람 에게 온유를 보여 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온유함을 회복시켜 주셔서 당신의 눈길과 목 소리와 태도와 행동 속에 언제나 온유함이 나타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온유의 모습이 삶 속에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고마우신 아버지 하나님, 사랑은 온유하다는 귀한 말씀을 들려주 신 것 감사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위협적이고 사납고 공격적인 요소를 제거하여 주옵소서. 차분한 가운데 침착하게 하시고, 조용 한 가운데 겸손하게 하시고, 부드럽게 하시고, 따뜻한 친절함이 우리 속에 풍성케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인내와 온유와 사랑을 추구하며 이것을 따라 온유한 성품을 지속적으로 계발할 수 있도록 주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가정에, 우리 직장에 평화를 주시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높임을 받게 하시고, 아름답게 되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시며, 이 땅을 유업으로 차지할 수 있는 축복을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 사랑은 질투가 없다.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4절). 만약 당신이 질투를 느낀다면 그것은 사랑이 부족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는 질투가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질투를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 습니다.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어른이 된 다음에도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나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보면 질투를 느낍니다. 그 사람에 대해 험담하기도 하고 불평하 기도 하고 공격과 비난을 하기도 하고 때로 질투심이 극도에 달하 면 심지어 살인도 저지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다른 여자 혹은 남자와 웃으며 얘기하는 모습을 볼 때 "저 사람 왜 저러지", "날 사랑하지 않는가봐"라고 하면서 질투를 느낀 적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투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어떤 사람은 "질투라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내가 남편을 사랑하니까 질투하지, 사랑하지 않으면 왜 질투하겠나" 라고 합니다. 즉, 사랑은 질투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한다는 것은 성경적인 개념에서는 맞지 않 습니다. 오히려 사랑이 없어서 질투하지 사랑 때문에 질투하는 것은 아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질투가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질투란 사랑의 동생이라고 말합니다. 즉, 사랑에 서부터 질투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질투가 사랑의 동생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마귀가 천 사의 동생이라고 하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말이 앞뒤가 맞지 않 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질투란 사랑이 없는 데서 나오 지 사랑의 또다른 일면이 결코 아닙니다. 질투는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질투는 무서운 병입니다. 질투의 병에 걸린 사람은 자기가 걸린 병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걸릴 수 있는 병 가운데 질투라는 병이 제 일 추잡한 병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다 보면 자연히 자기 자신을 치켜세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고 무시합니다. 성경에도 가인이 아벨을 질투해서 죽인 사건과 사울이 다윗을 질투해서 몇 차례씩 죽이려고 들었던 사건이 나와 있습니다. 질투의 병에 걸린 사울은 결국 정신 이상을 일으켜 시달리다 가 마침내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질투는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 질투의 근원 질투는 어디서부터 생기는 것일까요 사실 어릴 때는 누구나 질투 를 경험합니다. 동생이 생기면 곧 질투라는 병이 나타납니다. 동 생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어머니와 아버지, 삼촌과 할머니, 할아버 지가 전부 다 나를 돌봐 주고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모든 관심을 집중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동생이 생겨서 그 모든 사랑과 관 심을 다 가로채어 가 버립니다. 어머니는 지금까지는
첫째 아이를 집중적으로 돌볼 수 있었지만 갑자기
둘째 아이가 생기면서 그 아이를 돌보느라 너무 힘들어서
첫째 아이를 돌볼 시간적인 여유도 정신적인 여유도 건강도 힘도 없어집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첫아이는 좀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고 거기서 질투가 생깁니다. 엄마가 돌봐 줄 겨를이 없다면 아버지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 봐 줘서 계속적인 사랑을 받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물론 그런 일은 우리가 어릴 때 누구나 한 번씩은 경험하게 되는 일입니다. 이제 질투의 근원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합시다.
첫째/지나친 경쟁심이 있을 때 학교 성적, 용모, 예체능 등에서 특출한 아이들에게 부모는 기대 를 크게 걸고 그 아이들에게 경쟁 심리를 불어넣습니다. 남과 경 쟁하는 과정에서 질투심은 크게 촉발되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 어 딜 가도 우리보다 좀더 잘하는 사람, 좀더 잘생긴 사람, 좀더 능력 있는 사람, 좀더 부잣집에서 난 사람, 좀더 지위가 높은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사랑이 부족하면 질 투병에 걸리기 십상입니다. 질투병에 걸리면 평생 불안과 초조감, 긴장에 시달리고 짜증을 잘 내고 늘 불안정한 상태에 살게 됩니다. 그렇게 불안정한 상태로 살아가니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또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니까 늘 불안정한 삶을 사는 악순환을 겪습니다.
둘째/비교 의식이 있을 때 심한 경쟁심 뿐만 아니라 비교 의식 또한 질투의 원인이 됩니다. 동생과 형을 비교할 때 여기에서 질투가 생깁니다. 우리도 무의 식 중에
둘째 아이에게 "애, 너는 어째서 형처럼 말을 똑똑히 못 하니", "너는 어째서 형처럼 빨리빨리 일어나지 못하니", "어째서 네 형처럼 공부를 잘하지 못하냐"고 추궁합니다. 이때 동생이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가만히 보면, 질투는 비슷한 사람 사이에 나타납니다. 여자가 남 자를 질투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여자들끼리 질투합니다. 조 금 좋은 옷 입은 사람을 보고 "저 옷 참 이쁘지"라고 하면 여자들은 대개 저거 싸구려야라고 대꾸합니다. 다른 여자가 더 돋보이는 것이 공연히 싫기 때문입니다. 또 남자도 마찬가집니다. 직장에서도 비슷한 사람끼리 질투합니다. 의사가 운동 선수를 질투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운동 선수끼리 질투하는 일은 비일비 재합니다. 특히 서로 질투가 심한 직업인은 음악가들입니다. 조금 만 자기보다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도 질투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교회마다음악하는 사람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합니다. 질투는 동료들 사이에 생기는 것입니다. 목사가 사업가를 질투하는 법은 별로 없습니다. 목사는 목사끼리 질투합니다.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대상에게는 질투를 느끼지 않습니다. 비슷 한 사람들끼리 서로서로 비교를 하다가 질투를 느끼는 것입니다.
셋째/누군가가 편애할 때 목사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목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교우는 더 좋고 어떤 교우는 좀 덜 좋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해서 다른 교우들 앞에서 좋아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면 반드시 질투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저는 교인들을 함부로 우리 집에 초청하지 않습니다. 초청하여 그 분이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가면, 당장 그 구역에 가서 " 내가 어저께 우리 목사님 집에서 사모님이 초밥해 준 것 먹었어"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당장 어째서 그 목사님은 당신만 초 청했냐는 질문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전통적으로 부모들은 장남, 장녀, 곧 첫아이를 좋아합니다. 첫아 이가 웃으면 이 세상에서 그 아이가 모든 아이들 가운데서 제일 처음 웃는 것 같습니다. 또 첫아이가 "가나다라"만 해도 이 아 이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가나다라" 하는 아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그렇게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이 아이가 똑바로 드러누웠다가 조 금만 배쪽으로 드러누워도 참 신통합니다. "엄마"의 "엄"자만 발음해도 "엄마"라고 분명히 말한 것같이 들립니다.
그런데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이미 첫아이 때 다 경험했 던 일들이기 때문에
둘째 아이가 재롱 부리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자연히
둘째 아이는 질투심에서 부모님에게 잘 보이려 고 애쓰게 되고 그러다 보면 후에
첫째 아이보다 더 잘되는 경우 도 있습니다. 이것을 미국 사람들은 "
둘째 증후군"(세컨드 신드 롬)이라고 합니다. 야곱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가슴에 질투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또한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그럴 때에 부모들은 그 아이에게 따로 시간을 내주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에 자녀들 가운데 질투 때문에 늘 불안정하고 울기 잘하 고 불안해 하고 초조해 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깊은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으니 그 아 이에게 특별히 맛있는 것을 사 주거나 그 아이와만 시간을 몇 번 보내는 것이 좋습니다. "너도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아이는 불안감과 열등감과 초조 감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꾸만 비교하고 계속 경쟁을 시키고 또 편애하면 정신적으로 또 영적으로도 그 아이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할 능력이 없어집니다. 질투는 열등감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열등감은 다른 사람이 내가 이루지 못하고 원하던 바로 그것을 가지고 있을 때 느끼는 감정 입니다.
넷째/비판이나 비웃음을 살 때 자기의 단점이나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비웃음을 살 때, 비판 을 많이 받고 심한 벌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많은 실망을 주었다 고 생각할 때, 거기에서도 질투가 생길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잘 키우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가끔 아이들이 실망을 시킵니다. 도둑질과 같이 상상도 못 했던 일을 아이들이 할 때 실망합니다. 그랬을 때 그 아이에게 "나는 너한테 정말 실망했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내가 교회에서 너를 위해 얼 마나 기도하고 너를 신앙적으로 키우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글 쎄 네가 어떻하다가 남의 것을 훔쳤냐 너무너무 실망했다"라고 하면서 그 실망감을 표현합니다. 자기 실수에 대해서 부모가 실망 했다는 사실을 느낄 때 그 아이는 "나는 우리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해 줬고 우리 아버지를 실망시킨 자식이다"라고 생각하면서 , 부모에게 실망감을 주지 않은 다른 형제들을 보고 질투를 느낍니다. 다섯째/영적으로 자기 자신을 계발하지 못했을 때 우리 모든 인간의 가슴 속에는 죄된 성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 사람 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어느 한 사람도 죄성(罪性)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 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로 영접하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그 선한 성품을 우리 가슴에 넣어 주십니다. 그 성품을 받으면, 그때부터 우리는 사랑을 계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속에 죄의 성품 , 인간적인 성품, 세속적인 성품만이 있고 하나님의 성품이 없으 면, 얼마든지 질투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질투 뿐만 아니라 성 급함, 교만과 같은 많은 악한 성품들도 드러납니다. 영적인 계발 이 되어 있을 때, 곧 우리의 성품과 생각을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통제하게 하고, 성령님께서 내 마음과 내 생각과 내 감정을 순간순간 통제하게 하는 훈련이 되어 있을 때, 우리는 질투를 제 거할 수 있고 사랑으로 질투를 정복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이 세상을 사랑할 때 이 세상을 사랑해도 질투가 생깁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좋은 집이나 좋은 옷, 지위나 명예 같은 것들을 삶에서 중심된 것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런 것들이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성화(聖化)되어 인내와 겸손과 온유와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하여 인식할 때, 우리들은 질투하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남들이 잘될 때 그것을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 질투에 대한 해결책 질투를 극복하는 데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 자기 자신에 대해 건전한 자아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나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나 나보다 좋은 환경에 태어난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다음 말에 귀기울여 보십시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 5:10). 건전한 자아상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겸손하려고 지나치게 자기를 비하시키기도 합니다. "목사님, 저는 절대 그런 일은 못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형편없 고 연약해서 못합니다. 벌레 같은 내가 어떻게 그런 걸 다…." 지나친 겸손은 옳지 못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나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생각하지 않 고, 하나님이 주신 용모와 목소리와 지능과 재능을 그저 그대로 수용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자 하나님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지 아니하고 바로 지금의 나 로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아이들에게도 이 렇게 기도를 시키십시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저처럼 만들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사울은 질투가 많았습니다. 다윗을 질투하여 일곱 번이나 죽이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 사울은 정신병에 걸렸고 마침내 자살이라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질투였 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을 질투한 적이 없습니다. 다윗은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 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4)라고 고 백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의 동료나 친구, 형이나 동생 에게 질투를 느낍니까 당신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으로 만 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럴 때 질투가 없어지고 오히 려 사랑이 나타납니다.
둘째로, 자기 자신의 제한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여러 가지 능력이 있는 동시에 또한 한계들도 있습니다. 저도 공부하면서 A학점을 받아 보려고 많이 애를 썼습니다. 어떤 때는 "이번에는 전부 다 A를 받겠다"며 이를 악물고 밤새워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잘되지 않았습니다. 실망스럽게도 꼭 B가 하나씩 섞여서 나오는 때가 많았습니다. 국 민학교부터 대학까지 늘 A만 받던 사람이 의과 대학에 들어갔는데 , B학점을 하나 받자 자살한 경우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조사한 것에 따르면, 전부 A학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의과 대학을 다니다 집어치우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다 목 표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를 너무 높이 세워 계속 실패하는 경 험을 하다 보면 성격이 비뚤어지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잃어버 립니다. 목표를 세울 때는 성취할 수 있는 만큼의 목표를 세워서 일단 성 취한 다음에 그것보다 한 단계 높은 목표를 세우도록 하십시오. 그런 식으로 한 발짝씩 차근차근 나아가야지 처음부터 너무 높은 목표를 세워서 계속 실패만 하다 보면 마음에 병이 들어서, 나보 다 잘하고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는 사람들에게 질투를 느낍니다. 우리의 제한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맡은 일이 참 많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가만히 생각하면 이 모든 일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무 엇 하나 제대로 못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학교도, 선교원도 제대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있는데 이래 가지고 어떻게 되겠냐 싶 어서 크게 낙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다 한계가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면 위로가 됩니다. 그저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충성을 다한다면 이 다음에 우리 주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내가 너에게 준 능력과 시간과 건강을 가지고 네가 최선을 다했구나" 하는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너무 높은 목표를 세워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쓰라린 경험이 없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질투에서 벗어나 마음 의 평안과 사랑을 체험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장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하나를 잘 한다고 해서 또다른 어느 하나도 반드시 잘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 습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입니다. 장점이 한 가지 라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자신을 한번 검토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께서 주신 그 장점에 초점을 맞추기 바랍니다. "난 그래도 이것 하나는 잘하지 않는가"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할 때, 질투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평안이 찾아듭니다. 건전한 자아상이 확립되면 대인관계 또한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넷째로, 영적인 면에서 계발을 해야 합니다. 영적(靈的)인 것을 육적(肉的)인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 겸손한 것, 온유하고 인내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자질을 이 세상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계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세상 것 때문에 질투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다섯째로,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주께서도 그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 1979년 미국의 루 브락이라는 야구 선수는 다음 날 자신의 도 루 신기록을 깨게 될 리키 핸더슨 선수를 공개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칭찬했던 사실로 유명합니다. "나는 그간 리키 핸더슨이 도루하는 것을 잘 지켜보았다. 이제 드디어 그는 내일 시합에서 내 기록을 깨게 될 것이다. 나는 절 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광경을 볼 것이다. 나는 19년이 나 걸려서 기록을 세웠지만, 리키 핸더슨이라는 사람은 12년 만 에, 즉 나보다 7년이나 먼저 나의 기록을 깼으니 이 사람이야말 로 얼마나 훌륭한 선수인가!" 당신의 가슴에 아직도 질투의 씨가 남아 있습니까 친구 때문에, 동창생 때문에, 언니 때문에, 동생 때문에, 직장 동료 때문에 질투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질투하지 않으려고 해서 질투심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 속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면 질투는 저절로 없어집니다. 질투는 마치 어 두움과 같습니다. 어두움을 어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불을 켜면 됩니다. 즉, 사랑의 불을 켜면 질투라는 어두움은 사라집니다. 초조와 불안과 열등감과 경쟁 의식과 비교 의식 속에 헤매게 만 들던 질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을 당신의 가슴 속에, 풍족히 심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는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함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불안과 질투와 시기와 곤혹을 당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높은 지위와 권력과 큰 재산과 명예보다도 사랑을 더하여 주옵소 서. 그리하여 사랑으로 세상을 밝힐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고 우리들의 가정에 평화와 행복이 있게 하시고 직장 동 료간에 사랑의 풍성함이 배나 더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 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주변에는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50%의 아내들이 남편에게 구타를 당한 다고 합니다. 주먹을 휘두르려면 남자끼리 휘둘러야지, 자기보다 연약한 여자에게 휘둘러서 이기는 남자는 비겁한 남자입니다. 남자 답지 않은 남자가 여자를 때립니다. 여자하고 싸워서 이기는 남자 가 무슨 남자입니까 어떤 남편은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를 때린다 고 둘러대기도 합니다.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참 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부드럽습니다. 점잖습니다. 따뜻하고 겸손합니다. 힘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감 정을 통제하여 그것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반응하는 데 사용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며 이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사랑 의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 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8,29).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을 창조한 능력자이며, 죽음을 박차고 일 어나는 무한한 힘을 가진 예수께서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도 온유하고 겸손할 것을 가르쳐 주고자 하십니다. 사납고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신앙의 힘을 가지고 부드럽고 따뜻한 모습으로 꾸준히 이웃과 가족을 사랑으로 돌볼 수 있는 사랑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은 바라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온유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께 나아와 그분에게 배울 때 우리는 온유한 신 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도 온유한 사람 중에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모세는 2백만 대 군을 이끈 사람이요,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건진 사람이요, 40년 동안 자기 민족을 이끈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그 모든 임무들을 하나님과 동포에 대한 사랑을 안고 온유한 자세로 감당해 나갔습니다. 당신은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줍니까 사람들이 당신더러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합니까 아니면 비판적이고 위협적이고 공격적인 사람이라고 합니까 당신의 모습에서 참사랑의 부드러움 과 따뜻함을 주위 사람들이 경험합니까 아니면 당신이 나타나기만 하면 아이들이 슬금슬금 자기 방으로 피해 버립니까 대체로 남 자들에게는 부드러운 모습이 적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강해야 한 다", "싸울 때는 이겨야 한다"는 식의 말들을 많이 들으며 자 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남자들도 온유한 모습을 회복해 야만 합니다. 남자들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온유한 성품을 계발할 때 훨씬 더 그 사내다움이라는 것이 돋보인다는 사실을 알 아야 합니다. '' 온유한 사람이 받는 복 = 성경에는 온유한 사람이 받는 복이 여섯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첫째/땅을 기업으로 받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억세고 공격적이고 위협적이고 마구 밀어붙이는 사람들은 땅을 정복 할 수는 있으나 그 정복한 땅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들은 정복한 땅을 오래도록 자신의 것으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드럽고 친절하며 그 친절함 속에 강인함이 있어서 선(善)을 힘 있게 추구해 가는 조용한 사람들과 싸우려 드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주로, 난폭하고 사나운 사람들끼리 싸움을 벌입니다. 온유하게 땅을 정복하고 온유하게 땅을 유지하 려는 사람들은 그 땅을 유업으로 받는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둘째/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높여 주심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시 147: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 느니라"(벧전 5:5).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사랑을 계발한 사람들을 반드시 그 삶 속에서 높이 들어 이 땅에서 훌륭하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세워 주실 것 입니다.
셋째/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심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 나신 때에로다"(시 76:9). 온유한 자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구원의 손 길을 펴 주십니다.
넷째/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들어 주심 "여호와께서는…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 49:4). 온유한 성품이 점점 더 강화될수록 그 사람의 모습은 점차 아름답 게 변화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반면 온유함이 없고 날카롭고 늘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의 얼굴은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미워집니다. 다섯째/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음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시 149:4). 여기에서 "자기 백성"은 4절 뒷부분에서 말하는 "겸손한 자", 곧 "온유한 자"입니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바로 온유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늘 다른 사람과 충돌하고 상대방을 공격하고 기분 나쁘게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삶에 기쁨이 없습니다.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들은 그 삶 속에 여호와께서 기쁨을 점점 더 많이 허락해 주시기 때문에 늘 즐겁게 살아갑니다. 만약 사는 것이 재미 없고,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배척한다면 온유한 사랑이 삶 가운데 계발되고 있는지 한번 검토해 보기 바랍니다. 만약 형제들이 당신을 별로 좋아하지 아니하고 자꾸 피하면 한번 삶을 검토해 보기 바랍니다. 당신이 직장에서 돌아왔을 때 자녀들이 기쁘게 맞아 주지 않고 얼른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면 왜 그런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온유함이 부족 해서일 것입니다. 온유할 때 기쁨이 증폭됩니다. 여섯째/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음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갈 6:1). 온유한 자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 실수한 사람들을 회복시켜 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남을 돕고 싶어도 당신이 온유한 사람이 아니면 도움받을 사람이 당신을 원치 않습니다. 만나면 위협적이고 공격적이고 얼굴 모습도 사나운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이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라면 당신은 많은 사람에 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 땅에는 고통받는 사람도 많고 슬 픔에 싸여 있는 사람도 많고 실수한 사람들도 많고 범죄한 사람들 도 많고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도 와줄 수 있으려면 온유한 성품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義)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딤전 6:11).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 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2).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친절하고 조용한 가운데 강력한 힘을 가지고 꾸준히 선(善)을 추구해 감으로써 모든 사람 에게 온유를 보여 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온유함을 회복시켜 주셔서 당신의 눈길과 목 소리와 태도와 행동 속에 언제나 온유함이 나타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온유의 모습이 삶 속에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고마우신 아버지 하나님, 사랑은 온유하다는 귀한 말씀을 들려주 신 것 감사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위협적이고 사납고 공격적인 요소를 제거하여 주옵소서. 차분한 가운데 침착하게 하시고, 조용 한 가운데 겸손하게 하시고, 부드럽게 하시고, 따뜻한 친절함이 우리 속에 풍성케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인내와 온유와 사랑을 추구하며 이것을 따라 온유한 성품을 지속적으로 계발할 수 있도록 주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가정에, 우리 직장에 평화를 주시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높임을 받게 하시고, 아름답게 되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시며, 이 땅을 유업으로 차지할 수 있는 축복을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 사랑은 질투가 없다.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4절). 만약 당신이 질투를 느낀다면 그것은 사랑이 부족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는 질투가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질투를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 습니다.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어른이 된 다음에도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나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보면 질투를 느낍니다. 그 사람에 대해 험담하기도 하고 불평하 기도 하고 공격과 비난을 하기도 하고 때로 질투심이 극도에 달하 면 심지어 살인도 저지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다른 여자 혹은 남자와 웃으며 얘기하는 모습을 볼 때 "저 사람 왜 저러지", "날 사랑하지 않는가봐"라고 하면서 질투를 느낀 적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투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어떤 사람은 "질투라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내가 남편을 사랑하니까 질투하지, 사랑하지 않으면 왜 질투하겠나" 라고 합니다. 즉, 사랑은 질투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한다는 것은 성경적인 개념에서는 맞지 않 습니다. 오히려 사랑이 없어서 질투하지 사랑 때문에 질투하는 것은 아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질투가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질투란 사랑의 동생이라고 말합니다. 즉, 사랑에 서부터 질투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질투가 사랑의 동생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마귀가 천 사의 동생이라고 하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말이 앞뒤가 맞지 않 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질투란 사랑이 없는 데서 나오 지 사랑의 또다른 일면이 결코 아닙니다. 질투는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질투는 무서운 병입니다. 질투의 병에 걸린 사람은 자기가 걸린 병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걸릴 수 있는 병 가운데 질투라는 병이 제 일 추잡한 병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다 보면 자연히 자기 자신을 치켜세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고 무시합니다. 성경에도 가인이 아벨을 질투해서 죽인 사건과 사울이 다윗을 질투해서 몇 차례씩 죽이려고 들었던 사건이 나와 있습니다. 질투의 병에 걸린 사울은 결국 정신 이상을 일으켜 시달리다 가 마침내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질투는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 질투의 근원 질투는 어디서부터 생기는 것일까요 사실 어릴 때는 누구나 질투 를 경험합니다. 동생이 생기면 곧 질투라는 병이 나타납니다. 동 생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어머니와 아버지, 삼촌과 할머니, 할아버 지가 전부 다 나를 돌봐 주고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모든 관심을 집중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동생이 생겨서 그 모든 사랑과 관 심을 다 가로채어 가 버립니다. 어머니는 지금까지는
첫째 아이를 집중적으로 돌볼 수 있었지만 갑자기
둘째 아이가 생기면서 그 아이를 돌보느라 너무 힘들어서
첫째 아이를 돌볼 시간적인 여유도 정신적인 여유도 건강도 힘도 없어집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첫아이는 좀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고 거기서 질투가 생깁니다. 엄마가 돌봐 줄 겨를이 없다면 아버지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 봐 줘서 계속적인 사랑을 받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물론 그런 일은 우리가 어릴 때 누구나 한 번씩은 경험하게 되는 일입니다. 이제 질투의 근원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합시다.
첫째/지나친 경쟁심이 있을 때 학교 성적, 용모, 예체능 등에서 특출한 아이들에게 부모는 기대 를 크게 걸고 그 아이들에게 경쟁 심리를 불어넣습니다. 남과 경 쟁하는 과정에서 질투심은 크게 촉발되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 어 딜 가도 우리보다 좀더 잘하는 사람, 좀더 잘생긴 사람, 좀더 능력 있는 사람, 좀더 부잣집에서 난 사람, 좀더 지위가 높은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사랑이 부족하면 질 투병에 걸리기 십상입니다. 질투병에 걸리면 평생 불안과 초조감, 긴장에 시달리고 짜증을 잘 내고 늘 불안정한 상태에 살게 됩니다. 그렇게 불안정한 상태로 살아가니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또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니까 늘 불안정한 삶을 사는 악순환을 겪습니다.
둘째/비교 의식이 있을 때 심한 경쟁심 뿐만 아니라 비교 의식 또한 질투의 원인이 됩니다. 동생과 형을 비교할 때 여기에서 질투가 생깁니다. 우리도 무의 식 중에
둘째 아이에게 "애, 너는 어째서 형처럼 말을 똑똑히 못 하니", "너는 어째서 형처럼 빨리빨리 일어나지 못하니", "어째서 네 형처럼 공부를 잘하지 못하냐"고 추궁합니다. 이때 동생이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가만히 보면, 질투는 비슷한 사람 사이에 나타납니다. 여자가 남 자를 질투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여자들끼리 질투합니다. 조 금 좋은 옷 입은 사람을 보고 "저 옷 참 이쁘지"라고 하면 여자들은 대개 저거 싸구려야라고 대꾸합니다. 다른 여자가 더 돋보이는 것이 공연히 싫기 때문입니다. 또 남자도 마찬가집니다. 직장에서도 비슷한 사람끼리 질투합니다. 의사가 운동 선수를 질투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운동 선수끼리 질투하는 일은 비일비 재합니다. 특히 서로 질투가 심한 직업인은 음악가들입니다. 조금 만 자기보다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도 질투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교회마다음악하는 사람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합니다. 질투는 동료들 사이에 생기는 것입니다. 목사가 사업가를 질투하는 법은 별로 없습니다. 목사는 목사끼리 질투합니다.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대상에게는 질투를 느끼지 않습니다. 비슷 한 사람들끼리 서로서로 비교를 하다가 질투를 느끼는 것입니다.
셋째/누군가가 편애할 때 목사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목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교우는 더 좋고 어떤 교우는 좀 덜 좋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해서 다른 교우들 앞에서 좋아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면 반드시 질투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저는 교인들을 함부로 우리 집에 초청하지 않습니다. 초청하여 그 분이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가면, 당장 그 구역에 가서 " 내가 어저께 우리 목사님 집에서 사모님이 초밥해 준 것 먹었어"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당장 어째서 그 목사님은 당신만 초 청했냐는 질문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전통적으로 부모들은 장남, 장녀, 곧 첫아이를 좋아합니다. 첫아 이가 웃으면 이 세상에서 그 아이가 모든 아이들 가운데서 제일 처음 웃는 것 같습니다. 또 첫아이가 "가나다라"만 해도 이 아 이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가나다라" 하는 아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그렇게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이 아이가 똑바로 드러누웠다가 조 금만 배쪽으로 드러누워도 참 신통합니다. "엄마"의 "엄"자만 발음해도 "엄마"라고 분명히 말한 것같이 들립니다.
그런데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이미 첫아이 때 다 경험했 던 일들이기 때문에
둘째 아이가 재롱 부리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자연히
둘째 아이는 질투심에서 부모님에게 잘 보이려 고 애쓰게 되고 그러다 보면 후에
첫째 아이보다 더 잘되는 경우 도 있습니다. 이것을 미국 사람들은 "
둘째 증후군"(세컨드 신드 롬)이라고 합니다. 야곱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가슴에 질투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또한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그럴 때에 부모들은 그 아이에게 따로 시간을 내주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에 자녀들 가운데 질투 때문에 늘 불안정하고 울기 잘하 고 불안해 하고 초조해 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깊은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으니 그 아 이에게 특별히 맛있는 것을 사 주거나 그 아이와만 시간을 몇 번 보내는 것이 좋습니다. "너도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아이는 불안감과 열등감과 초조 감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꾸만 비교하고 계속 경쟁을 시키고 또 편애하면 정신적으로 또 영적으로도 그 아이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할 능력이 없어집니다. 질투는 열등감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열등감은 다른 사람이 내가 이루지 못하고 원하던 바로 그것을 가지고 있을 때 느끼는 감정 입니다.
넷째/비판이나 비웃음을 살 때 자기의 단점이나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비웃음을 살 때, 비판 을 많이 받고 심한 벌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많은 실망을 주었다 고 생각할 때, 거기에서도 질투가 생길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잘 키우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가끔 아이들이 실망을 시킵니다. 도둑질과 같이 상상도 못 했던 일을 아이들이 할 때 실망합니다. 그랬을 때 그 아이에게 "나는 너한테 정말 실망했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내가 교회에서 너를 위해 얼 마나 기도하고 너를 신앙적으로 키우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글 쎄 네가 어떻하다가 남의 것을 훔쳤냐 너무너무 실망했다"라고 하면서 그 실망감을 표현합니다. 자기 실수에 대해서 부모가 실망 했다는 사실을 느낄 때 그 아이는 "나는 우리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해 줬고 우리 아버지를 실망시킨 자식이다"라고 생각하면서 , 부모에게 실망감을 주지 않은 다른 형제들을 보고 질투를 느낍니다. 다섯째/영적으로 자기 자신을 계발하지 못했을 때 우리 모든 인간의 가슴 속에는 죄된 성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 사람 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어느 한 사람도 죄성(罪性)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 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로 영접하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그 선한 성품을 우리 가슴에 넣어 주십니다. 그 성품을 받으면, 그때부터 우리는 사랑을 계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속에 죄의 성품 , 인간적인 성품, 세속적인 성품만이 있고 하나님의 성품이 없으 면, 얼마든지 질투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질투 뿐만 아니라 성 급함, 교만과 같은 많은 악한 성품들도 드러납니다. 영적인 계발 이 되어 있을 때, 곧 우리의 성품과 생각을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통제하게 하고, 성령님께서 내 마음과 내 생각과 내 감정을 순간순간 통제하게 하는 훈련이 되어 있을 때, 우리는 질투를 제 거할 수 있고 사랑으로 질투를 정복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이 세상을 사랑할 때 이 세상을 사랑해도 질투가 생깁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좋은 집이나 좋은 옷, 지위나 명예 같은 것들을 삶에서 중심된 것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런 것들이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성화(聖化)되어 인내와 겸손과 온유와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하여 인식할 때, 우리들은 질투하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남들이 잘될 때 그것을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 질투에 대한 해결책 질투를 극복하는 데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 자기 자신에 대해 건전한 자아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나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나 나보다 좋은 환경에 태어난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다음 말에 귀기울여 보십시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 5:10). 건전한 자아상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겸손하려고 지나치게 자기를 비하시키기도 합니다. "목사님, 저는 절대 그런 일은 못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형편없 고 연약해서 못합니다. 벌레 같은 내가 어떻게 그런 걸 다…." 지나친 겸손은 옳지 못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나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생각하지 않 고, 하나님이 주신 용모와 목소리와 지능과 재능을 그저 그대로 수용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자 하나님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지 아니하고 바로 지금의 나 로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아이들에게도 이 렇게 기도를 시키십시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저처럼 만들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사울은 질투가 많았습니다. 다윗을 질투하여 일곱 번이나 죽이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 사울은 정신병에 걸렸고 마침내 자살이라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질투였 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을 질투한 적이 없습니다. 다윗은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 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4)라고 고 백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의 동료나 친구, 형이나 동생 에게 질투를 느낍니까 당신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으로 만 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럴 때 질투가 없어지고 오히 려 사랑이 나타납니다.
둘째로, 자기 자신의 제한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여러 가지 능력이 있는 동시에 또한 한계들도 있습니다. 저도 공부하면서 A학점을 받아 보려고 많이 애를 썼습니다. 어떤 때는 "이번에는 전부 다 A를 받겠다"며 이를 악물고 밤새워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잘되지 않았습니다. 실망스럽게도 꼭 B가 하나씩 섞여서 나오는 때가 많았습니다. 국 민학교부터 대학까지 늘 A만 받던 사람이 의과 대학에 들어갔는데 , B학점을 하나 받자 자살한 경우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조사한 것에 따르면, 전부 A학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의과 대학을 다니다 집어치우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다 목 표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를 너무 높이 세워 계속 실패하는 경 험을 하다 보면 성격이 비뚤어지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잃어버 립니다. 목표를 세울 때는 성취할 수 있는 만큼의 목표를 세워서 일단 성 취한 다음에 그것보다 한 단계 높은 목표를 세우도록 하십시오. 그런 식으로 한 발짝씩 차근차근 나아가야지 처음부터 너무 높은 목표를 세워서 계속 실패만 하다 보면 마음에 병이 들어서, 나보 다 잘하고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는 사람들에게 질투를 느낍니다. 우리의 제한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맡은 일이 참 많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가만히 생각하면 이 모든 일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무 엇 하나 제대로 못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학교도, 선교원도 제대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있는데 이래 가지고 어떻게 되겠냐 싶 어서 크게 낙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다 한계가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면 위로가 됩니다. 그저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충성을 다한다면 이 다음에 우리 주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내가 너에게 준 능력과 시간과 건강을 가지고 네가 최선을 다했구나" 하는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너무 높은 목표를 세워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쓰라린 경험이 없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질투에서 벗어나 마음 의 평안과 사랑을 체험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장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하나를 잘 한다고 해서 또다른 어느 하나도 반드시 잘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 습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입니다. 장점이 한 가지 라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자신을 한번 검토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께서 주신 그 장점에 초점을 맞추기 바랍니다. "난 그래도 이것 하나는 잘하지 않는가"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할 때, 질투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평안이 찾아듭니다. 건전한 자아상이 확립되면 대인관계 또한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넷째로, 영적인 면에서 계발을 해야 합니다. 영적(靈的)인 것을 육적(肉的)인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 겸손한 것, 온유하고 인내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자질을 이 세상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계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세상 것 때문에 질투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다섯째로,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주께서도 그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 1979년 미국의 루 브락이라는 야구 선수는 다음 날 자신의 도 루 신기록을 깨게 될 리키 핸더슨 선수를 공개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칭찬했던 사실로 유명합니다. "나는 그간 리키 핸더슨이 도루하는 것을 잘 지켜보았다. 이제 드디어 그는 내일 시합에서 내 기록을 깨게 될 것이다. 나는 절 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광경을 볼 것이다. 나는 19년이 나 걸려서 기록을 세웠지만, 리키 핸더슨이라는 사람은 12년 만 에, 즉 나보다 7년이나 먼저 나의 기록을 깼으니 이 사람이야말 로 얼마나 훌륭한 선수인가!" 당신의 가슴에 아직도 질투의 씨가 남아 있습니까 친구 때문에, 동창생 때문에, 언니 때문에, 동생 때문에, 직장 동료 때문에 질투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질투하지 않으려고 해서 질투심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 속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면 질투는 저절로 없어집니다. 질투는 마치 어 두움과 같습니다. 어두움을 어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불을 켜면 됩니다. 즉, 사랑의 불을 켜면 질투라는 어두움은 사라집니다. 초조와 불안과 열등감과 경쟁 의식과 비교 의식 속에 헤매게 만 들던 질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을 당신의 가슴 속에, 풍족히 심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는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함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불안과 질투와 시기와 곤혹을 당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높은 지위와 권력과 큰 재산과 명예보다도 사랑을 더하여 주옵소 서. 그리하여 사랑으로 세상을 밝힐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고 우리들의 가정에 평화와 행복이 있게 하시고 직장 동 료간에 사랑의 풍성함이 배나 더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 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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