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새 계명 (고전13:1-13)
본문
이 세상에서 사랑이란 말보다 더 많이, 흔하게, 그러면서도 고귀하게, 매력있게 쓰여지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문학 세계나 예술 세계에 있어서나 인간의 생활 전반에 걸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 전반에 걸쳐서도 이 사랑은 큰 주제들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우리 인간들을 사랑해서이며, 또한 더 큰 사랑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으로 놀랍고 위대한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를 이 세상에 세우시고 2천년동안 자기의 사랑을 이 세상에 구현하셨습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종말적인 사상으로 이 세상이 끝나고 하늘 나라에 가서도 끊어지지 않는 사랑으로 우리가 영생하는 소망 가운데, 우리를 인도해 주신 이런 주제들과 함께 사랑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사랑이란 말이 똑같은 단어로 나와 있지만, 헬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랑이란 말을 4가지 종류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로스’란, 애정의 사랑으로 남년간의 사랑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스토르게’는 혈연의 사랑으로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들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 형제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필리아’(필로스)는 우정의 사랑을 말합니다. 친구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 신적인 사랑, 하나님의 높고 귀한 사랑은 ‘아가페’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사랑이란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그 모든 말은 아가페란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가지고 우선 아가페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을 말씀드리고, 두번째는 그 사랑을 공동체 속에서, 사회 생활 속에서 실현하는데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I.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주시는 그 사랑을 통해서 인류가 다 구원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구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채 멸망하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는데, 그것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다음으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다음으로 요한일서 3장 16절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자기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구현해 주셨습니다. 세번째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님이 우리 몸을 성전으로 삼고 우리 몸안에 거하게 하셨으니, 성령님이 우리 몸에 거하시는 사랑 또한 크신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 성령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거함을 생각할 때, 복된 세 구절의 3장 16절로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16).
하나님은 그 자체 근본이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그 사랑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고 덧붙여 말씀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3,14). 사랑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엄위하신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자비와 용서의 지극한 사랑을 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요,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세상에 나타내셨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화목제물로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를 예지, 예정, 선택, 칭의 영화롭게 하셨습니다(롬8:29,30). 이와같은 영화의 5대 교리 가운데 갈보리 십자가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결정으로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갈보리 동산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은 죄인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 모범입니다.
우리가 갈보리의 사랑을 두고 사랑할 때, 우리는 자신의 권리들, 이익들, 상처들, 불행들에 대해서 다 잊고 간과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적인 희생의 사랑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너무나 널리 퍼져있는 자아중심적(ego-centric)이고, 이기적인 낭만같은 개념을 덮고도 남습니다. 예를들면 X세대가 무엇이며, 신세대가 무엇입니까 X세대란 알지 못하는 세대라는 뜻으로 이기적인 세대를 말합니다. 이것은 핵가족 중심이며, 상하 윤리가 없어 부모에 대한 공경이나 또한 연장자와의 관계도 의식치 않고 마구잡이로 행동하는 세대를 말한다고 합니다. 이런 패역무도의 윤리부재의 세대가 우리 앞에 왔는데, 오늘 우리는 이런 말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겠습니까 예수님의 계명 곧 사랑을,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게 나타냄으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기 전 이것을 우리에게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사랑은 계명을 지키는데 있다고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요이1:6上).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요일4:7,8).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고 더 두려운 말씀을 우리에게 해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II.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 개인적으로나 가정과 교회, 직장과 지역 사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실천은 어떤 것으로 구현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부모 자식간에도 사랑이 식어져 가고, 갈등하는 세대입니다. 형제지간에도 사랑이 없는 세대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직장 동료 사이에도 경쟁심리가 있어 사랑이 없으며, 예전에는 이웃끼리 음식도 나눠먹고 나그네도 잘 대접했는데, 오늘날 이 세상은 옛날의 그 따뜻함이 식어져 가고 있습니다. 더우기 교회의 공동체에서는 그 사랑이 더욱 필요한 데 그 사랑이 점점 식어져 가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끔식 미국에서 오신 목사님을 통해 미국에 이민가서 사는 교포끼리 교회에 나와서도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오늘 봉독한 이 말씀은 ‘사랑의 찬가’로 불리고 있지만, 그 내용을 다시 한번 조명해서 우리가 어떻게 사랑의 속성을 깨닫고 실천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겠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의 사랑의 실천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메시지는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보낸 것이 아니고 믿는 성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인 신앙이나 그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의식과 예절이 아닌 전통에 대한 맹목적인 관행을 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이 교회에 요청됩니다.
A. 먼저 바울 사도께서 부정적인 속성을 비교했는데, 첫번째로 하신 말씀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1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 세계를 바라보니 그들이 무속 신앙 가운데 제물을 드릴 때, 꽹과리를 치면서 소리를 내며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모습에서 이 말씀이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소리나는 구리나 울리는 꽹과리가 되어서는 안되고, 문학적이거나 예술적인 말을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B. 두번째로 예언과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은 성령님의 은사인데,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이런 것을 사랑으로 조율해서 나타내지 아니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C. 세번째로 산을 옮길 많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태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훌륭한 믿음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D. 네번째로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라고 했는데, 우리가 사랑하면 먼저 남을 돕는 일을 생각합니다 교회나 어느 기관에서 조금이나마 돕는 것을 사랑의 대명사로 생각하는데, 사실 모든 것으로 구제할지라도 사랑보다 낫지 않습니다. E. 다섯번째로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교도들 중 특히 인도에서는 불 속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자기 몸을 타는 불에 던져 숭앙을 받기도 하는 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III.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실천하는 것이 사랑입니까 앞에서 말한 내용보다 더 나은 사랑을 교회 안에서, 가정, 직장, 사회생활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바울 사도는 사랑의 속성과 실천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A. 사랑은 “오래참고”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의 열매 중에도 인내가 있습니다. 첫번째로 나온 내용은 뒤에 나오는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주석가들도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오래 참고 인내합니까 인내하고 오래 참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사랑이 많은 가를 잴 수 있는 척도입니다. 고난과 환난을 당해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참는 것을 의미하며 또 하나는 시간과 관련된 농부가 씨앗의 열매를 기다리는 느긋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출34:6)의 성품을 본받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는 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B. 다음으로 사랑은 온유하다고 했습니다. 온유는 겸손과 같은 유형의 단어로, 따뜻할 온(溫)자와 부드러울 유(柔)의 한자로 씁니다. 온유라는 말은 자기 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4:6,7)라는 말씀이 온유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온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떳떳하고 당당한 세상적 지위나 권한이 있더라도 주님의 영광과 교회 공동체의 건덕을 위해 그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
C.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질투라고도 하는 투기는 타인의 소유, 지위, 형통을 부러워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좋으나 타락된 인간의 본성은 남을 헐뜯고 원망하고 불평하여 인격을 좌초시키는 것입니다.
D. 네번째로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E. 다섯번째로 교만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자랑이나 교만은 똑같이 강한 자의식에서 유출되는 자기 표현입니다. 그러나 자랑은 자기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것이고 교만은 주위 사람을 실족시키고 다툼과 분열을 조장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9). F. 다음으로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고집이나 무례한 언행을 내보이지 않는 인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무례히 행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무례히 행하는 것은 사랑의 발로가 아닙니다.
G. 일곱번째로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4).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H. 여덟번째로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사람 중에는 다혈질이라 성질을 내는 사람도 있고 내성적이어서 참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을 안낼 수는 없기에 아마 “성내기를 더미하며”라는 말씀과 연관이 있는듯 싶습니다.
I. 그리고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아가 악행자의 비난을 묵묵히 참을뿐 아니라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으로 망각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J. 또한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오히려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진리를 기뻐하는 사람은 불의를 기뻐할 수 없습니다.
IV. 마지막 4가지는 모는 것이란 단어가 붙어 나옵니다.
A.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했습니다. 원래 “덮음으로 숨긴다”란 의미로 타인의 과오를 누설하지 않고 폭로하지 않는 것입니다.
B. 또한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입니다. 이것은 의심하지 않고 믿어주며 신뢰하는 것으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C. 또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소망을 가져옵니다. 사랑은 근본으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D. 마지막으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이것은 군사 용어로 적의 공격이 아무리 심해도 끄떡하지 않고, 자기의 소임을 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에는 인내에 관한 내용이 3번이나 나오는 것을 볼 때, 견디는 마음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내용과 실천을 정리해 봤습니다
V. 결론 결론적으로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장을 마치면서 마지막 31절에서 더 큰 은사가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 다음 13장에서는 사랑의 속성과 구현을 말씀하고 결론되는 내용이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에서 율법사와 대화를 나눌때, 계명 중에서 어떤 계명이 가장 크냐고 물었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3714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이와같은 사랑의 계명들을 몸소 실천하고 보임으로 사랑의 궁극적인 의미를 교회 안에서와 이 세상에서 구현해야 될 것입니다.
I.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주시는 그 사랑을 통해서 인류가 다 구원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구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채 멸망하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는데, 그것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다음으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다음으로 요한일서 3장 16절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자기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구현해 주셨습니다. 세번째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님이 우리 몸을 성전으로 삼고 우리 몸안에 거하게 하셨으니, 성령님이 우리 몸에 거하시는 사랑 또한 크신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 성령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거함을 생각할 때, 복된 세 구절의 3장 16절로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16).
하나님은 그 자체 근본이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그 사랑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고 덧붙여 말씀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3,14). 사랑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엄위하신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자비와 용서의 지극한 사랑을 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요,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세상에 나타내셨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화목제물로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를 예지, 예정, 선택, 칭의 영화롭게 하셨습니다(롬8:29,30). 이와같은 영화의 5대 교리 가운데 갈보리 십자가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결정으로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갈보리 동산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은 죄인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 모범입니다.
우리가 갈보리의 사랑을 두고 사랑할 때, 우리는 자신의 권리들, 이익들, 상처들, 불행들에 대해서 다 잊고 간과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적인 희생의 사랑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너무나 널리 퍼져있는 자아중심적(ego-centric)이고, 이기적인 낭만같은 개념을 덮고도 남습니다. 예를들면 X세대가 무엇이며, 신세대가 무엇입니까 X세대란 알지 못하는 세대라는 뜻으로 이기적인 세대를 말합니다. 이것은 핵가족 중심이며, 상하 윤리가 없어 부모에 대한 공경이나 또한 연장자와의 관계도 의식치 않고 마구잡이로 행동하는 세대를 말한다고 합니다. 이런 패역무도의 윤리부재의 세대가 우리 앞에 왔는데, 오늘 우리는 이런 말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겠습니까 예수님의 계명 곧 사랑을,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게 나타냄으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기 전 이것을 우리에게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사랑은 계명을 지키는데 있다고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요이1:6上).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요일4:7,8).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고 더 두려운 말씀을 우리에게 해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II.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 개인적으로나 가정과 교회, 직장과 지역 사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실천은 어떤 것으로 구현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부모 자식간에도 사랑이 식어져 가고, 갈등하는 세대입니다. 형제지간에도 사랑이 없는 세대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직장 동료 사이에도 경쟁심리가 있어 사랑이 없으며, 예전에는 이웃끼리 음식도 나눠먹고 나그네도 잘 대접했는데, 오늘날 이 세상은 옛날의 그 따뜻함이 식어져 가고 있습니다. 더우기 교회의 공동체에서는 그 사랑이 더욱 필요한 데 그 사랑이 점점 식어져 가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끔식 미국에서 오신 목사님을 통해 미국에 이민가서 사는 교포끼리 교회에 나와서도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오늘 봉독한 이 말씀은 ‘사랑의 찬가’로 불리고 있지만, 그 내용을 다시 한번 조명해서 우리가 어떻게 사랑의 속성을 깨닫고 실천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겠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의 사랑의 실천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메시지는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보낸 것이 아니고 믿는 성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인 신앙이나 그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의식과 예절이 아닌 전통에 대한 맹목적인 관행을 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이 교회에 요청됩니다.
A. 먼저 바울 사도께서 부정적인 속성을 비교했는데, 첫번째로 하신 말씀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1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 세계를 바라보니 그들이 무속 신앙 가운데 제물을 드릴 때, 꽹과리를 치면서 소리를 내며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모습에서 이 말씀이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소리나는 구리나 울리는 꽹과리가 되어서는 안되고, 문학적이거나 예술적인 말을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B. 두번째로 예언과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은 성령님의 은사인데,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이런 것을 사랑으로 조율해서 나타내지 아니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C. 세번째로 산을 옮길 많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태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훌륭한 믿음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D. 네번째로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라고 했는데, 우리가 사랑하면 먼저 남을 돕는 일을 생각합니다 교회나 어느 기관에서 조금이나마 돕는 것을 사랑의 대명사로 생각하는데, 사실 모든 것으로 구제할지라도 사랑보다 낫지 않습니다. E. 다섯번째로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교도들 중 특히 인도에서는 불 속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자기 몸을 타는 불에 던져 숭앙을 받기도 하는 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III.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실천하는 것이 사랑입니까 앞에서 말한 내용보다 더 나은 사랑을 교회 안에서, 가정, 직장, 사회생활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바울 사도는 사랑의 속성과 실천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A. 사랑은 “오래참고”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의 열매 중에도 인내가 있습니다. 첫번째로 나온 내용은 뒤에 나오는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주석가들도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오래 참고 인내합니까 인내하고 오래 참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사랑이 많은 가를 잴 수 있는 척도입니다. 고난과 환난을 당해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참는 것을 의미하며 또 하나는 시간과 관련된 농부가 씨앗의 열매를 기다리는 느긋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출34:6)의 성품을 본받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는 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B. 다음으로 사랑은 온유하다고 했습니다. 온유는 겸손과 같은 유형의 단어로, 따뜻할 온(溫)자와 부드러울 유(柔)의 한자로 씁니다. 온유라는 말은 자기 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4:6,7)라는 말씀이 온유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온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떳떳하고 당당한 세상적 지위나 권한이 있더라도 주님의 영광과 교회 공동체의 건덕을 위해 그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
C.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질투라고도 하는 투기는 타인의 소유, 지위, 형통을 부러워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좋으나 타락된 인간의 본성은 남을 헐뜯고 원망하고 불평하여 인격을 좌초시키는 것입니다.
D. 네번째로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E. 다섯번째로 교만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자랑이나 교만은 똑같이 강한 자의식에서 유출되는 자기 표현입니다. 그러나 자랑은 자기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것이고 교만은 주위 사람을 실족시키고 다툼과 분열을 조장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9). F. 다음으로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고집이나 무례한 언행을 내보이지 않는 인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무례히 행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무례히 행하는 것은 사랑의 발로가 아닙니다.
G. 일곱번째로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4).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H. 여덟번째로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사람 중에는 다혈질이라 성질을 내는 사람도 있고 내성적이어서 참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을 안낼 수는 없기에 아마 “성내기를 더미하며”라는 말씀과 연관이 있는듯 싶습니다.
I. 그리고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아가 악행자의 비난을 묵묵히 참을뿐 아니라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으로 망각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J. 또한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오히려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진리를 기뻐하는 사람은 불의를 기뻐할 수 없습니다.
IV. 마지막 4가지는 모는 것이란 단어가 붙어 나옵니다.
A.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했습니다. 원래 “덮음으로 숨긴다”란 의미로 타인의 과오를 누설하지 않고 폭로하지 않는 것입니다.
B. 또한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입니다. 이것은 의심하지 않고 믿어주며 신뢰하는 것으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C. 또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소망을 가져옵니다. 사랑은 근본으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D. 마지막으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이것은 군사 용어로 적의 공격이 아무리 심해도 끄떡하지 않고, 자기의 소임을 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에는 인내에 관한 내용이 3번이나 나오는 것을 볼 때, 견디는 마음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내용과 실천을 정리해 봤습니다
V. 결론 결론적으로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장을 마치면서 마지막 31절에서 더 큰 은사가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 다음 13장에서는 사랑의 속성과 구현을 말씀하고 결론되는 내용이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에서 율법사와 대화를 나눌때, 계명 중에서 어떤 계명이 가장 크냐고 물었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3714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이와같은 사랑의 계명들을 몸소 실천하고 보임으로 사랑의 궁극적인 의미를 교회 안에서와 이 세상에서 구현해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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