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특성 1 (고전13:4-7)
본문
지난 주에 우리는 사랑은 무엇보다 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은 은혜로운 말씀보다 귀하여 마치 그 말씀이 천사가 하는 것 같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또한 사랑은 믿음으로 행하는 놀라운 능력보다 귀하고, 또 사랑은 어떠한 헌신과 순교보다도 귀하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오늘 우리는 지난 주에 이어서 고전 13장을 통해 사랑의 특성에 대하여 살펴보자. 모든 사물에는 그 사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나누어야 할 사랑에도 여러 독특한 특성이 있다. 본문에서는 사랑의 특성 15가지를 소개한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는 5가지를 소개받게 될 것이다.
첫째, 사랑은 오래 참는다(4). 헬라어에서 "오래 참는다"는 말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좋지 못한 환경에서 참는 것이 있다. 역경과 시련이 있을 때, 참는 것을 말한다. 가난의 역경을 이기려면 오래 참아야 한다. 실패의 역경을 이기려면 역시 오래 참아야 한다. 이런 좋지 못한 환경에서도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참는 것이 있다. 본문이 말하는 오래 참음은 후자의 경우다. 사람과 사람간에는 땅위에 사는 한 끝없는 시비가 일어난다. 이런 시비는 심지어 남편과 아내간에 혹은 부모와 자녀간에도 일어난다. 사람간의 치졸한 경쟁으로 인한 시비도 많고 기득권을 지키고 주도권을 쥐기 위해 서로를 의심하며 서로 시기한다. 화를 치밀어 오르게 하는 야비한 비판도 있다. 역겨움을 주는 거만함도 있고, 비위를 상하는 불필요한 자랑도 있다. 이런 모든 일들은 우리를 사랑보다는 미움과 증오심과 울화와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이럴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진 사람은 오래 참는다. '오래 참는다'는 말씀은 화를 멀리한다는 말이다. 미운 감정을 그대로 두고 이를 표현하지 않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니다. 미운 감정이 오랫동안 그대로 있으면 이는 한이 되고 신경 증세를 보이다가 이 한이 일시에 표출될 기회가 주어지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극한의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이것은 참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차라리 이렇게 참는 것보다는 그때 그때마다 참지 말고 싸우고 미워해 버리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지 모른다. 여기서의 '오래 참음'은 사랑의 감정을 갖고 오래 참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래 참음'은 사실은 오래 동안 계속 용서하고 이해하고 잊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다. 참 그리스도인은 반대로 처신해야 한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리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사람의 인위적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위적 사랑은 일대일의 사랑이다. 사랑의 조건이 채워져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는 이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조건없는 사랑, 그가 내게 해 주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조건없는 사랑이다. 베드로 사도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니"(벧전 2:19) 라고 말씀하였다. 이 애매히 받는 고난이 교회의 유익을 위한 일이라면, 이 애매히 받는 고난이 여기 곁에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유익을 위한 일이라면, 그래서 주어지는 아픔과 슬픔을 참는다면 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둘째, 사랑은 온유하다(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온유한 태도를 갖는다. '온유'란 태도에서 부드러움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음에 인자함이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온유란 이런 소극적인 면만 말하는 게 아니다. 온유란 보다 더 적극적인 사랑의 자세이다. 온유는 미워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을 친구로 만드는 가장 적극적인 자세이다. 링컨을 가장 악평한 사람이 있다면 이는 스탠튼(stanton)이었을 것이다. 그는 링컨을 '수준 낮은 교활한 시골뜨기', '고릴라의 조상' 등으로 악평하였다. 남북 전쟁이 일자 링컨은 전쟁을 수행하는 장관으로 그를 임명하였다. 링컨은 그를 적임자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를 정중하고 온유하게 대하며 신임하였다. 링컨이 극장에서 암살된 후 그의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방으로 스탠튼은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세상에서 일찌기 보지 못했던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여기 누워 있습니다." 온유는 모든 사람을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이는 성령님이 사랑을 가진 사람 속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온유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는 힘이 있다. 온유는 다른 사람의 염려나 두려움을 삭여 준다. 온유는 미움이나 적대적인 감정을 누그러지게 한다. 그리고 온유는 다른 사람으로 용기와 자신감을 갖게 하고 행동하게 한다.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셨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아 적이 있는 주님의 제자라면 온유한 사랑을 행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을까
셋째,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다(4). 투기란 본래 열심이라는 의미이다. 누구라도 열심을 나무랄 사람은 없다. 그러나 흔히 무슨 일에나 적극적인 열심으로 살아보려는 사람이 갖는 단점이 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만 있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성공을 싫어하고 낮추려 한다. 다른 사람의 우월이나 행복이나 성공을 보고 매우 못마땅해하고 마음 상해한다. 이게 다 투기이다. 자신은 비참한데 남은 행복하면 누구나 괴롭다. 자신은 병들어 있는데 남은 건강하면 참 괴롭다. 자신은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데 남은 특별한 대접을 받으면 불쾌하다. 자신은 못생겼는데 남은 성공을 거두었으면 참 슬프다. 자신은 못생겼는데 남이 잘 생겼으면 공연히 화가 안다. 이게 인간의 투기이다.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지나간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간에는 깊은 투기가 일어난다. 자연히 경쟁이 되고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끼리 서로 투기할 수 있다. 흔히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나 자기보다는 못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이런 인간의 그릇된 마음이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잘되면 속상해 하는 투기로 변한다. 사랑을 나누어줄 수 있을 때, 상대방보다 모든 면에서 한 수 위일 때, 온유를 베푸는 것이 가능하다. 아무리 온유한 사람이라도 자기보다 한 수 위인 사람을 만날 때는 투기의 마음이 생긴다. 참 사랑의 사람은 모든 면에서 동등한 선의의 경쟁자에게도 온유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한 수 위의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도 온유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투기하는 자에게는 감사가 없다. 그러나 트기가 없이 온유함을 갖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는 이에게는 넘치는 감사가 있다. 투기 없이 온유함을 갖는 이는 배나 더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이는 그 자신이 받고 있는 은혜 때문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기 때문이요, 같은 복을 누리는 형제들이나 혹은 그 이상의 복을 누리는 형제들을 보고 기뻐하며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투기 없이 온유함을 갖는 사랑은 배의 은혜를 받게 된다.
넷째,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4). 자기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랑해야 할 사람 앞에서 자랑한다. 상대방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으로 자랑한다고 좋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쁘게 말하면 나는 너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위압감을 주어 사랑보다는 복종을 강요하려는 거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은 동정이 아니다. 어떤 경우든지 자랑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진정으로 사랑은 자기가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가 말하지 않는 모든 면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가서 그를 자랑해 주는 것이다. 참 사랑은 자신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면이 앞서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 앞에서라도 이런 귀한 자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런 자녀들을 자신은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가장 깊은 사랑을 가진 부모이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참 사랑은 사랑을 주면서도 실은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우월감을 내세우며 자존심을 높이지 않는다. 자존심이란 사랑으로 하나 된 마음을 다시 나누어 본래의 둘로 갈라놓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적인 것으로 자랑하지 않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갈 6:14). 이 자랑은 주님을 내세워 자기의 다른 모습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은 감추어 저리고 주님만이 드러나기를 원하는 자랑이다. 이런 자랑은 다른 사람의 영혼으로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랑이다.
다섯째,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다(4). 자신의 우월감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자랑이다. 이와 반대로 자신의 우월감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교만이다. 교만은 남의 모든 것을 무시하는 악행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자랑 이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다. 모든 영광을 자신만이 받아야 할 줄로 아는 일종의 착각을 한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다. 자기라고 하는 자존심이 최고로 고양되어 있는 사람이다. 살무사는 건들면 당장 공격해 오듯이 항상 독기를 뿜고 언제라도 공격형의 자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 교만이다. 교만은 다른 사람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태도이다. 교만은 자신의 부패한 옛 사람이 그대로 살아 있음을 표하는 대표적인 악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약4:6). 교만한 사람을 사람들도 일반적으로 싫어한다. 버나드 (Bernard)는 말하기를, "인간이 하나님의 뜻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 그 벌로 자기의 노예가 된다" 고 했다. 교만은 인간이 자신의 노예가 되어 버린 상태이다. 누구나 사람이 자신의 노예가 되어 버릴 때, 사실은 가장 부자유스럽고 불행한 사람이 된다. 교만은 자기 자신에게만 열중하는 그릇된 자세이다. 자신의 의로움을 믿는 마음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영광만을 찾는 마음이다. 자기 자신에게서 기쁨을 찾으려는 자세이다. 자기 고집에 가득찬 자세이다. 항상 자기 주장과 변명으로만 가득하여 쉽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세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버리므로 시작한다. 그는 자기를 단순히 길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것이다. 누구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힘을 확인할 때, 진정한 자유함을 느낀다. 성도는 교만을 버리고 온유한 겸손함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려고 한다. 성도의 희생은 자기의 자유함이요, 곧 자기의 행복이다. 우리는 이기주의도 아니고, 무아 주의도 아니다. 성도는 하나님 중심의 신본 주의이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이웃을 사랑한다.
첫째, 사랑은 오래 참는다(4). 헬라어에서 "오래 참는다"는 말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좋지 못한 환경에서 참는 것이 있다. 역경과 시련이 있을 때, 참는 것을 말한다. 가난의 역경을 이기려면 오래 참아야 한다. 실패의 역경을 이기려면 역시 오래 참아야 한다. 이런 좋지 못한 환경에서도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참는 것이 있다. 본문이 말하는 오래 참음은 후자의 경우다. 사람과 사람간에는 땅위에 사는 한 끝없는 시비가 일어난다. 이런 시비는 심지어 남편과 아내간에 혹은 부모와 자녀간에도 일어난다. 사람간의 치졸한 경쟁으로 인한 시비도 많고 기득권을 지키고 주도권을 쥐기 위해 서로를 의심하며 서로 시기한다. 화를 치밀어 오르게 하는 야비한 비판도 있다. 역겨움을 주는 거만함도 있고, 비위를 상하는 불필요한 자랑도 있다. 이런 모든 일들은 우리를 사랑보다는 미움과 증오심과 울화와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이럴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진 사람은 오래 참는다. '오래 참는다'는 말씀은 화를 멀리한다는 말이다. 미운 감정을 그대로 두고 이를 표현하지 않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니다. 미운 감정이 오랫동안 그대로 있으면 이는 한이 되고 신경 증세를 보이다가 이 한이 일시에 표출될 기회가 주어지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극한의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이것은 참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차라리 이렇게 참는 것보다는 그때 그때마다 참지 말고 싸우고 미워해 버리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지 모른다. 여기서의 '오래 참음'은 사랑의 감정을 갖고 오래 참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래 참음'은 사실은 오래 동안 계속 용서하고 이해하고 잊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다. 참 그리스도인은 반대로 처신해야 한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리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사람의 인위적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위적 사랑은 일대일의 사랑이다. 사랑의 조건이 채워져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는 이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조건없는 사랑, 그가 내게 해 주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조건없는 사랑이다. 베드로 사도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니"(벧전 2:19) 라고 말씀하였다. 이 애매히 받는 고난이 교회의 유익을 위한 일이라면, 이 애매히 받는 고난이 여기 곁에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유익을 위한 일이라면, 그래서 주어지는 아픔과 슬픔을 참는다면 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둘째, 사랑은 온유하다(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온유한 태도를 갖는다. '온유'란 태도에서 부드러움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음에 인자함이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온유란 이런 소극적인 면만 말하는 게 아니다. 온유란 보다 더 적극적인 사랑의 자세이다. 온유는 미워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을 친구로 만드는 가장 적극적인 자세이다. 링컨을 가장 악평한 사람이 있다면 이는 스탠튼(stanton)이었을 것이다. 그는 링컨을 '수준 낮은 교활한 시골뜨기', '고릴라의 조상' 등으로 악평하였다. 남북 전쟁이 일자 링컨은 전쟁을 수행하는 장관으로 그를 임명하였다. 링컨은 그를 적임자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를 정중하고 온유하게 대하며 신임하였다. 링컨이 극장에서 암살된 후 그의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방으로 스탠튼은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세상에서 일찌기 보지 못했던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여기 누워 있습니다." 온유는 모든 사람을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이는 성령님이 사랑을 가진 사람 속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온유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는 힘이 있다. 온유는 다른 사람의 염려나 두려움을 삭여 준다. 온유는 미움이나 적대적인 감정을 누그러지게 한다. 그리고 온유는 다른 사람으로 용기와 자신감을 갖게 하고 행동하게 한다.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셨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아 적이 있는 주님의 제자라면 온유한 사랑을 행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을까
셋째,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다(4). 투기란 본래 열심이라는 의미이다. 누구라도 열심을 나무랄 사람은 없다. 그러나 흔히 무슨 일에나 적극적인 열심으로 살아보려는 사람이 갖는 단점이 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만 있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성공을 싫어하고 낮추려 한다. 다른 사람의 우월이나 행복이나 성공을 보고 매우 못마땅해하고 마음 상해한다. 이게 다 투기이다. 자신은 비참한데 남은 행복하면 누구나 괴롭다. 자신은 병들어 있는데 남은 건강하면 참 괴롭다. 자신은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데 남은 특별한 대접을 받으면 불쾌하다. 자신은 못생겼는데 남은 성공을 거두었으면 참 슬프다. 자신은 못생겼는데 남이 잘 생겼으면 공연히 화가 안다. 이게 인간의 투기이다.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지나간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간에는 깊은 투기가 일어난다. 자연히 경쟁이 되고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끼리 서로 투기할 수 있다. 흔히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나 자기보다는 못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이런 인간의 그릇된 마음이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잘되면 속상해 하는 투기로 변한다. 사랑을 나누어줄 수 있을 때, 상대방보다 모든 면에서 한 수 위일 때, 온유를 베푸는 것이 가능하다. 아무리 온유한 사람이라도 자기보다 한 수 위인 사람을 만날 때는 투기의 마음이 생긴다. 참 사랑의 사람은 모든 면에서 동등한 선의의 경쟁자에게도 온유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한 수 위의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도 온유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투기하는 자에게는 감사가 없다. 그러나 트기가 없이 온유함을 갖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는 이에게는 넘치는 감사가 있다. 투기 없이 온유함을 갖는 이는 배나 더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이는 그 자신이 받고 있는 은혜 때문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기 때문이요, 같은 복을 누리는 형제들이나 혹은 그 이상의 복을 누리는 형제들을 보고 기뻐하며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투기 없이 온유함을 갖는 사랑은 배의 은혜를 받게 된다.
넷째,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4). 자기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랑해야 할 사람 앞에서 자랑한다. 상대방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으로 자랑한다고 좋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쁘게 말하면 나는 너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위압감을 주어 사랑보다는 복종을 강요하려는 거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은 동정이 아니다. 어떤 경우든지 자랑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진정으로 사랑은 자기가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가 말하지 않는 모든 면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가서 그를 자랑해 주는 것이다. 참 사랑은 자신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면이 앞서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 앞에서라도 이런 귀한 자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런 자녀들을 자신은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가장 깊은 사랑을 가진 부모이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참 사랑은 사랑을 주면서도 실은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우월감을 내세우며 자존심을 높이지 않는다. 자존심이란 사랑으로 하나 된 마음을 다시 나누어 본래의 둘로 갈라놓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적인 것으로 자랑하지 않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갈 6:14). 이 자랑은 주님을 내세워 자기의 다른 모습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은 감추어 저리고 주님만이 드러나기를 원하는 자랑이다. 이런 자랑은 다른 사람의 영혼으로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랑이다.
다섯째,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다(4). 자신의 우월감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자랑이다. 이와 반대로 자신의 우월감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교만이다. 교만은 남의 모든 것을 무시하는 악행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자랑 이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다. 모든 영광을 자신만이 받아야 할 줄로 아는 일종의 착각을 한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다. 자기라고 하는 자존심이 최고로 고양되어 있는 사람이다. 살무사는 건들면 당장 공격해 오듯이 항상 독기를 뿜고 언제라도 공격형의 자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 교만이다. 교만은 다른 사람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태도이다. 교만은 자신의 부패한 옛 사람이 그대로 살아 있음을 표하는 대표적인 악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약4:6). 교만한 사람을 사람들도 일반적으로 싫어한다. 버나드 (Bernard)는 말하기를, "인간이 하나님의 뜻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 그 벌로 자기의 노예가 된다" 고 했다. 교만은 인간이 자신의 노예가 되어 버린 상태이다. 누구나 사람이 자신의 노예가 되어 버릴 때, 사실은 가장 부자유스럽고 불행한 사람이 된다. 교만은 자기 자신에게만 열중하는 그릇된 자세이다. 자신의 의로움을 믿는 마음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영광만을 찾는 마음이다. 자기 자신에게서 기쁨을 찾으려는 자세이다. 자기 고집에 가득찬 자세이다. 항상 자기 주장과 변명으로만 가득하여 쉽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세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버리므로 시작한다. 그는 자기를 단순히 길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것이다. 누구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힘을 확인할 때, 진정한 자유함을 느낀다. 성도는 교만을 버리고 온유한 겸손함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려고 한다. 성도의 희생은 자기의 자유함이요, 곧 자기의 행복이다. 우리는 이기주의도 아니고, 무아 주의도 아니다. 성도는 하나님 중심의 신본 주의이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이웃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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