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능력 (고전1:18-25)
본문
교회력으로 오늘이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마무리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예루살렘 거민들이 종려나무를 꺾어 길 위에 펴고 손에 들고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이렇게 종려나무로 예수님을 환영했다해서 종려주일이라 부릅니다. 마 21:1-11에 이 장면이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 62장의 예언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문을 향해 올라오셨습니다. 예루살렘 거민들이 그 소식을 듣고 몰려 나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길 위에 폈습니다. 마치 왕이 행차할 때 카페트를 길에 깔았던 것처럼 예수님을 왕으로 대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펴고 또 자기 손에 들고 환대했습니다. 모여든 무리들이 다함께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순식간에 예수님의 행렬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마 21:10은 예루살렘 성 전체에 큰 소동이 일었다고 당시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 거민 전체가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금은 이렇게 예수를 환대했지만 며칠이 못 가서 이들이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 주님의 능력으로 자기들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고, 로마로부터 정치적인 독립을 얻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 목적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던 대로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산산조각 나버리고, 허탈감과 절망감을 맛봐야 했습니다. 이제 예수께 대한 배신감이 싹트게 되었고 분노되어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급기야 호산나를 외쳤던 무리들이 다시 소리쳤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결국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를 환대했던 무리들이 돌변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만 것입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그 십자가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 십자가는 페르시아에서 전래된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와 수치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에 예수를 매달면 그것으로 예수는 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자 그 십자가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게 됐습니다. 용서와 화해와 생명이 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이 십자가 위에서 진정한 영광을 누리게 되셨습니다. 결국 이들은 배신감과 분노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지만 오히려 예수께 영광의 길을 예비한 꼴이 되었고,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에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 어떤 십자가에서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봉독해 주신 본문 말씀이 예수의 십자가의 능력을 말씀해 줍니다.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이 십자가의 능력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우선 십자가의 능력이란 어떤 능력입니까 18절에 보면 한 마디로 구원의 능력이라 했습니다. 롬 5:10은 그 구원의 능력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그러니까 십자가의 능력은 위대한 죽음의 능력입니다. 죽음으로써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죽음으로써 죄에서 구원해 내는 능력입니다. 요12:24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며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밀 알 한 알이 땅에 묻혀 생명을 잃게 됨으로써 셀 수 없이 많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죽음의 능력입니다. 시인 윤동주는 "십자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했던 사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나에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가장 행복한 죽음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괴롭고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예수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마치 한 알의 밀이 죽어 수많은 밀 알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윤동주는 바로 이런 죽음을 행복한 죽음이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죽음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바로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능력입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인생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하고, 새로운 생명 즉 영생을 얻게 해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능력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의 능력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초대교회 시절에 십자가가 구원의 길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닌 사형도구요 죽음의 상징이 구원의 상징이요, 생명의 상징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지혜 있다는 사람들, 인간 구원에 관한 많은 것을 연구했다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주장은 미련한 것이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십자가의 능력을 받아들이지 못한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는 유대인입니다. 22절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표적이란 초자연적인 기적을 말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모세 시대부터 늘 표적을 경험해왔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 위에서 물이 나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보호해주고, 듣도 보도 못한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표적으로 시작됐고, 표적으로 이어져 온 민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메시야가 도래하는 그 날에도 놀라운 표적이 나타날 것으로 믿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예언되기도 했습니다. 사35:5-6절에 보면 메시야가 도래하는 때에 일어날 일들을 이렇게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처음에 예수님께서 이런 예언에 부합되는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마 11:5에 보면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만해도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마음에서 종려나무를 꺾어들고 호산나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최후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아무런 표적도 보이지 못한 채 다른 여느 사형수처럼 십자가에서 그 모진 고통을 온 몸으로 겪으며 죽어갔습니다. 답답한 유대인들은 십자가 밑에서 예수께 소리쳤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 내려 오라",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예수님께서 목이 타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소리치시자 유대인들이 말했습니다. "엘리야를 부른다.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한 보자." 유대인들은 끝까지 표적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대꾸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표적을 기다리던 유대인들을 외면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기억하던 유대인들은 신21:23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표적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따라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고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표적을 구합니다. 불치병이 고쳐지기를 기대합니다. 귀신이 쫓겨 나가는 현상을 기대합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표적이 나타난다는 곳으로 구름 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암 환자를 고친다는 무슨 무슨 기도원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귀신이 쫓겨간다는 무슨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손을 머리에 얹으면 사람이 쓰러진다는 무슨 목사의 집회는 인산인해가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표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표적 보다 심오한 차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는 표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표적들은 일시적이요 현상적인 문제를 해결할 뿐입니다. 이런 표적들이 우리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지는 못합니다. 이런 표적들이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만이 가능합니다. 다른 하나는 헬라인입니다. 22절에 보면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혜란 철학적 지혜를 말하는데, 인간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헬라 철학은 하나의 기본적인 전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분명한 이분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세계는 선하고 완벽한데 비해서, 지상의 세계는 악하고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는 철저하게 차단되어있고 이 지상 세계에는 다만 천상세계의 그림자만 비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도들은 하나님이 이 지상 세계에 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어리석기 짝이 없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십자가를 미련한 것이라 치부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헬라 지혜가 인간 구원의 길을 열었습니까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실제로 헬라인들은 인간의 지혜로 만물의 근원을 캐며, 인생 문제의 본질을 해결해 보려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들이 만물의 근원이 불이라고, 또 어떤 철학자는 물이라고, 또 어떤 철학자들은 로고스라고 설파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인생의 문제의 본질이 자기 자신을 모르는 데에 있다고 파악하고 자기 자신을 알라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 지혜는 만물의 근원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인간 지혜는 인생의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발견해 내지 못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이런 헬라 철학자들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늪의 개구리처럼 개굴개굴 떠들며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다. 자기들의 무지를 알지 못하고 지혜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헬라 철학 이래로 서양철학에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수없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저마다 보통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심오한 철학적 진리를 설파했습니다. 오늘날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현대철학자들이 난해한 철학적 진리를 수 없이 많이 토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철학적 진리들은 도서관 서고에서 먼지와 벗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을 구원할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여기에 인간 지혜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헬라 철학자들이 미련하게 보았지만 오늘도 십자가의 능력은 거리에서, 세상 한 복판에서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십자가의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십자가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누구에게나 그 능력이 나타나 그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는 자들에게 십자가의 능력이 발휘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귀한 구슬이라도 꿰어서 목거리나 팔찌와 같은 하나의 보화가 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자린고비 이야기에서 보듯이 아무리 좋은 음식이 있다고 해도 먹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음식은 먹으라고 있는 것이지 감상하라고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고 십자가의 능력은 나타나나지 않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표적을 찾아서는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로 따져서도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다만 믿음으로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십자가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금은 이렇게 예수를 환대했지만 며칠이 못 가서 이들이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 주님의 능력으로 자기들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고, 로마로부터 정치적인 독립을 얻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 목적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던 대로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산산조각 나버리고, 허탈감과 절망감을 맛봐야 했습니다. 이제 예수께 대한 배신감이 싹트게 되었고 분노되어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급기야 호산나를 외쳤던 무리들이 다시 소리쳤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결국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를 환대했던 무리들이 돌변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만 것입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그 십자가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 십자가는 페르시아에서 전래된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와 수치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에 예수를 매달면 그것으로 예수는 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자 그 십자가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게 됐습니다. 용서와 화해와 생명이 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이 십자가 위에서 진정한 영광을 누리게 되셨습니다. 결국 이들은 배신감과 분노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지만 오히려 예수께 영광의 길을 예비한 꼴이 되었고,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에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 어떤 십자가에서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봉독해 주신 본문 말씀이 예수의 십자가의 능력을 말씀해 줍니다.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이 십자가의 능력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우선 십자가의 능력이란 어떤 능력입니까 18절에 보면 한 마디로 구원의 능력이라 했습니다. 롬 5:10은 그 구원의 능력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그러니까 십자가의 능력은 위대한 죽음의 능력입니다. 죽음으로써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죽음으로써 죄에서 구원해 내는 능력입니다. 요12:24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며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밀 알 한 알이 땅에 묻혀 생명을 잃게 됨으로써 셀 수 없이 많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죽음의 능력입니다. 시인 윤동주는 "십자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했던 사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나에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가장 행복한 죽음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괴롭고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예수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마치 한 알의 밀이 죽어 수많은 밀 알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윤동주는 바로 이런 죽음을 행복한 죽음이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죽음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바로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능력입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인생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하고, 새로운 생명 즉 영생을 얻게 해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능력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의 능력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초대교회 시절에 십자가가 구원의 길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닌 사형도구요 죽음의 상징이 구원의 상징이요, 생명의 상징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지혜 있다는 사람들, 인간 구원에 관한 많은 것을 연구했다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주장은 미련한 것이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십자가의 능력을 받아들이지 못한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는 유대인입니다. 22절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표적이란 초자연적인 기적을 말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모세 시대부터 늘 표적을 경험해왔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 위에서 물이 나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보호해주고, 듣도 보도 못한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표적으로 시작됐고, 표적으로 이어져 온 민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메시야가 도래하는 그 날에도 놀라운 표적이 나타날 것으로 믿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예언되기도 했습니다. 사35:5-6절에 보면 메시야가 도래하는 때에 일어날 일들을 이렇게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처음에 예수님께서 이런 예언에 부합되는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마 11:5에 보면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만해도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마음에서 종려나무를 꺾어들고 호산나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최후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아무런 표적도 보이지 못한 채 다른 여느 사형수처럼 십자가에서 그 모진 고통을 온 몸으로 겪으며 죽어갔습니다. 답답한 유대인들은 십자가 밑에서 예수께 소리쳤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 내려 오라",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예수님께서 목이 타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소리치시자 유대인들이 말했습니다. "엘리야를 부른다.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한 보자." 유대인들은 끝까지 표적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대꾸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표적을 기다리던 유대인들을 외면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기억하던 유대인들은 신21:23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표적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따라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고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표적을 구합니다. 불치병이 고쳐지기를 기대합니다. 귀신이 쫓겨 나가는 현상을 기대합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표적이 나타난다는 곳으로 구름 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암 환자를 고친다는 무슨 무슨 기도원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귀신이 쫓겨간다는 무슨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손을 머리에 얹으면 사람이 쓰러진다는 무슨 목사의 집회는 인산인해가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표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표적 보다 심오한 차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는 표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표적들은 일시적이요 현상적인 문제를 해결할 뿐입니다. 이런 표적들이 우리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지는 못합니다. 이런 표적들이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만이 가능합니다. 다른 하나는 헬라인입니다. 22절에 보면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혜란 철학적 지혜를 말하는데, 인간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헬라 철학은 하나의 기본적인 전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분명한 이분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세계는 선하고 완벽한데 비해서, 지상의 세계는 악하고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는 철저하게 차단되어있고 이 지상 세계에는 다만 천상세계의 그림자만 비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도들은 하나님이 이 지상 세계에 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어리석기 짝이 없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십자가를 미련한 것이라 치부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헬라 지혜가 인간 구원의 길을 열었습니까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실제로 헬라인들은 인간의 지혜로 만물의 근원을 캐며, 인생 문제의 본질을 해결해 보려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들이 만물의 근원이 불이라고, 또 어떤 철학자는 물이라고, 또 어떤 철학자들은 로고스라고 설파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인생의 문제의 본질이 자기 자신을 모르는 데에 있다고 파악하고 자기 자신을 알라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 지혜는 만물의 근원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인간 지혜는 인생의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발견해 내지 못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이런 헬라 철학자들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늪의 개구리처럼 개굴개굴 떠들며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다. 자기들의 무지를 알지 못하고 지혜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헬라 철학 이래로 서양철학에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수없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저마다 보통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심오한 철학적 진리를 설파했습니다. 오늘날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현대철학자들이 난해한 철학적 진리를 수 없이 많이 토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철학적 진리들은 도서관 서고에서 먼지와 벗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을 구원할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여기에 인간 지혜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헬라 철학자들이 미련하게 보았지만 오늘도 십자가의 능력은 거리에서, 세상 한 복판에서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십자가의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십자가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누구에게나 그 능력이 나타나 그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는 자들에게 십자가의 능력이 발휘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귀한 구슬이라도 꿰어서 목거리나 팔찌와 같은 하나의 보화가 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자린고비 이야기에서 보듯이 아무리 좋은 음식이 있다고 해도 먹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음식은 먹으라고 있는 것이지 감상하라고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고 십자가의 능력은 나타나나지 않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표적을 찾아서는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로 따져서도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다만 믿음으로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십자가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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