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된 공동체 (고전12:12-27)
본문
사랑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세우는 것보다 무너트리는 것이, 격려하는 것보다는 비판하는 것이,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보다 몰아 세우는 것이, 칭찬하기 보다는 나무라는 것이 휠씬 쉽다. 그래서 우리는 그같이 쉽게 한다. 또 모이는 것보다는 모이지 않는 것이 쉽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22절-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자, 23절-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모이지 않고 사랑이 되는가 한번 만나보고 사랑이 되는가)
1. 서로 지체됨(12-14절) 서로를 물고 먹으며 사랑하지 않으려는 일은 대개 그 동기가 주님의 말씀을 모르거나 알아도 행치 않으려는데에 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금 확인할 필요가 있다.
1. 몸은 하나이다(12-13절). 교회의 하나됨을 깊이있게 말해주는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무엇이 하나인가를 많이 말한다. 바울은 특히 4장에서 몸, 성령님, 부르심의 소망, 주, 믿음, 세례, 하나님의 하나됨을 강조한다. 그것이 교리적인 진술 표현을 빌고는 있지만 사실상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 대하여 어떻게 하나됨을 사랑으로 이루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자 하는 목적에 다름 아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바울은 동일한 논리로서 몸이 하나인 것을, 또 그리스도도 하나인 것을 말한다(12절). 우리도 여기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아무리 외모와 생각이 다르고 신앙의 칼라가 다르며 심지어 사회적인 신분과 능력이 달라도 우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로 항상 돌아와야 한다. 말씀은 또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그가 잘났던, 못난던)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의 한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한 몸이 되었다고 과거형 동사를 사용한다(13절). 그렇다. 우린 하나다. 하나가 되어있다. 또 바울은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여 우리 모두가 현재 한 성령님을 마시고(공유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시는 성령님은 우리를 모아 하나됨을 이루고 계신다. 그래서 우린 서로를 성령님 안에서 하나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우린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엡2:21-2, 4:16). 이 말씀은 우리를 감격스럽게 한다. 형제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바꾼다.
2. 지체는 여럿임(14절). 말씀이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하나됨은 동시에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이나, 서로가 다른 존재이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린 서로를 결코 이해하거나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을 강조하는데에 지나쳐서 마땅이 서로 같아야 할 부분을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무엇이 같아야 하고 무엇이 다를 수가 있는 것인가를 잘 분별해야 한다. 그러나, 그건 그다지 어려운 문제일 순 없다. 말씀속에 잘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대부분의 문제는 서로가 같아야 할 것이 다른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다를 수 있는 부분을 용납하지 못하고 서로를 거절하는데에 있다. 우리는 여럿이다. 각기 은사와 역할과 능력이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해야 하며, 서로의 모습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서로는 서로를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 결코 우리는 서로의 역할과 존재를 대신할 수 없다. 다만 격려하고 세워 줄 뿐이다.
2. 지체됨을 해치는 의식
I-열등 의식(15-20절) 내가 남보다 못하므로 나는 다르다, 아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서로 하나됨, 지체됨을 부인하게 하는 이 생각은 심각할 정도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듯 싶다. 서로 분당해가며 잘났다고 싸우고 자신이 받은 은사가 가장 큰 것이라고 자부하며 상대방을 깍아내리고 헐뜯고 하는 교회 풍토에선 조금이라도 자신이 부족하다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자리할 곳이 없게 된다. 자기 잘남을 자랑하며 남의 부족을 비판하길 즐겨하는 사람들 앞에 선 사람들은 의례 자신을 도피의 길로 몰아넣게 된다. 발은 손의 역할을 부러워한 듯하다.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야”하고 말해 버린다. 귀도 눈이 하는 일들이 무척이나 부럽고 그에 비해 자신의 역할이 촌스럽게 느껴진 듯하다. 비교의식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상대방으로부터 패배감을 느끼고 말 때, 우리는 만사를 회피하거나 도피의 길을 선택하고 만다. 발이 손보다 덜 소중한 것이 아니며, 눈이 귀보다 더 소중한 것이 아니라는 평범한 말씀이 실천되고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 곳에는 항상 좌절과 아픔이 뿌리밖는다. 자신이 비록 부족함이 많은 것 같으나, 결코 다른 이들보다 더 가치있거나 덜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는 고백은 자신을 솔직히 받아들이고 믿음대로 살아가게끔 한다. (
그런데, 대개는 발이 눈을 비교하려 하진 않는다. 또 귀가 손과 자신을 비교하려 하진 않는다. 대개 비슷비슷한 역할과 자리한 이들이 서로를 비교한다. 그래서 연령이 엇비슷하고 서로 유사한 부서나 사람들기리 이런 비교의식으로 인한 아픔이 많다. 서로 비교하여 시샘하고 서로 견제하고 서로 비판하려 든다. 여기에 몰이해가 깃든다.) 바울이 이같이 말한다.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19절) 서로가 비교함으로 열등감(Inferior Complex)에 빠져 서로가 다른 역할을 위해 하나님이 각각 몸에 지체로 두신 것이라는 말씀을 잊지말라는 것이다.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남과 자신을 비교하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좀더 다른 사람들을 청결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다. 오늘도 우리는 말씀을 새기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귀요, 그대는 눈이요.”, “나는 -이요, 그대는 -이요.”, “우리는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린 서로가 하나이며 다른 역할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하고 말해보자.
3. 지체됨을 해치는 의식
II-우월 의식(21-24절) 비교 의식의 두번째 증상은 우월의식(Superior Complex)이다. 우월감은 사실상 열등감의 뒤집기 증상으로 알려져 있다. 열등감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외적으로는 우월감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것 모두가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사랑이 없고 서로에 대해선 지체됨의 의식이 없는데서 비롯된다. 자신이 하는 일이 탁월한 일이고 남다른 일이며, 자신은 다른 사람에 비해 특별한 능력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는 오류를 범한다. 또 불필요한 자만심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서 보곤 그 사람의 가치를 절하시키고 만다. 그리곤 배타적이 되기 쉽다. 눈은 스스로 가치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사실 가치있다. 그러나, 눈이 손보다 자신이 더 가치있다고 생각한다거나 그래서 손에게 “너는 쓸데없어”한다면, 그 눈은 그리스도의 몸을 파괴하는 기능을 가질 뿐이다. 또 머리가 아무리 큰 일을 한다고 해서 지저분해 보인다고 발에게 함부로 말할 순 없다(21절). 바울은 외견상 연약해 보인다 할지라도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일 수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이 고루게 하셨다. 만일 누가 비교하여 이 사람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 하거나 저 형제보다야 내가 더 중요한 인물이 아니냐 하고 주장하면 그건 하나님이 고루게 하셨다는 말씀을 이해 못한데서 일어난다고 봐야 한다. 형제는 어떤가 다른 형제와 자매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직도 자신이 가장 중요하고 저 사람은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형제, 자매의 가치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높이고 있는가 다시금 기억하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서로 지체되었다.
4. 지체됨의 목적(25-27절) 지체의 원리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우리를 통하여 몸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하나님이 하셨다. 우리를 서로 지체삼으신 것이다. 24절에서도 하나님의 역할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주님의 몸을 세우시려고 베푸시는 세밀한 역사를 우린 볼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신다. 25절 이하에 나타난 지체됨의 목적은 이런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의 원하심이 그대로 드러난다. “몸 가운데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몇가지 강조점을 새겨보자.
1. 분쟁이 없게 하라(25a절). 그것이 믿음의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며 서로가 주를 신실히 섬길 때에 갖게 될 수 있는 차이점이라면 그건 분쟁의 소지여서는 안된다. 분쟁은 대개 시기심과 자랑하는 마음과 정욕때분에 일어난다(약3:14-15).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말씀하는 분쟁은 고린도 교인들이 나는 게바파, 나는 바울파, 나는 아볼로파 하면서 분당하여 서로 대적하는 것을 뜻한다(1:12). 어떻게 서로 싸우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나눌 수 있는가 (교회에 각 기관이 있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서로 경쟁하며 잘난 체하며 또는 다투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지체됨의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서로를 격려하고 세우지 못하고 한다면 주님의 교회는 상처를 입는다.
2. 서로 돌아보라(25b-26절). 서로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서로 연결된 지체는 서로 돌아보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는다. 돌아본다는 것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며, 힘들어 할 때 격려해 주며, 항상 사랑의 눈으로 보살펴 준다는 것을 뜻한다. 돌아봄의 목표는 세움(Edification)이다. 대로 잘못이 있어 고쳐주려 할 때도 돌아봄의 원리 적용은 우리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적하며 일으켜 주는 것을 말한다. 26절은 우리에게 지체로서 고통과 영광을 함께 나누라고 말해준다. 형제의 아픔을 나누는 일이 있는 모임은 참으로 아름다운 주님의 모임이다. 서로 돌아보는 노력이 있게 되고, 그 노력에 진실한 사랑이 움틀 때 우린 서로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짐을 같이 질 수 있게 된다. 이런 것들이 진심에서 나온 사랑에서가 아닐, 부득이함과 체면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그 교회는 삭막하기 이를 때 없다.
그런데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영광을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일일 것이다. 어려워하는 사람의 어려움을 돕게 되는 것은 그래도 쉬운 일이고 잘된 사람의 그 잘됨을 함께 기뻐하는 일은 좀은 어려운 일이다(롬12:15). 나는 낮아지고 상대방이 높아져야 한다는 말씀의 원리가 나를 사로잡지 못할 때, 우리는 그 때 시샘하게 되고 판단할 거리만 찾거나 또는 무관심해진다.
5. 나가며(27절) 27절에서 바울은 “너희는”이라는 단어를 특별히 사용하여 그 대상을 크게 강조시켰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의 각 부분이라는 것이다. 바울의 강조는 일차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명하는 것이지만 오늘 주님의 뜻을 구하는 우리들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몸이며 서로 지체되었다는 의식은 우리를 더 이상 잘못된 편견으로 상처를 주는 일을 금지시킨다. 몸으로서의 통일성(Unity)과 지체로서의 다양성(Diversity)은 우리 모두가 감사하며 돌이켜 보고 소망하여야 할 부분이다. 우리 각자는 한 부분에 불과하다. 결코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모여서 몸을 세우며 흩어져 하나되게 하시는 주님을 전파한다. 어느 누가 교회의 전부인양 그리고 교회의 부분이 아닌양 행동해선 아니된다. 형제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눈 것이 결코 자기 우월감이나 교만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참된 관심과 사랑 때문에 있어지는 것이고, 자매의 영광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돌아보는 것이 더 이상 어떤 자기 이득을 구하는 것이나 역겨운 아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진실한 섬김과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이길 우리는 소망한다. 주님은 사랑의 피를 뿌리셨다. 우리의 진정한 하나됨을 위하여!
1. 서로 지체됨(12-14절) 서로를 물고 먹으며 사랑하지 않으려는 일은 대개 그 동기가 주님의 말씀을 모르거나 알아도 행치 않으려는데에 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금 확인할 필요가 있다.
1. 몸은 하나이다(12-13절). 교회의 하나됨을 깊이있게 말해주는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무엇이 하나인가를 많이 말한다. 바울은 특히 4장에서 몸, 성령님, 부르심의 소망, 주, 믿음, 세례, 하나님의 하나됨을 강조한다. 그것이 교리적인 진술 표현을 빌고는 있지만 사실상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 대하여 어떻게 하나됨을 사랑으로 이루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자 하는 목적에 다름 아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바울은 동일한 논리로서 몸이 하나인 것을, 또 그리스도도 하나인 것을 말한다(12절). 우리도 여기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아무리 외모와 생각이 다르고 신앙의 칼라가 다르며 심지어 사회적인 신분과 능력이 달라도 우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로 항상 돌아와야 한다. 말씀은 또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그가 잘났던, 못난던)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의 한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한 몸이 되었다고 과거형 동사를 사용한다(13절). 그렇다. 우린 하나다. 하나가 되어있다. 또 바울은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여 우리 모두가 현재 한 성령님을 마시고(공유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시는 성령님은 우리를 모아 하나됨을 이루고 계신다. 그래서 우린 서로를 성령님 안에서 하나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우린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엡2:21-2, 4:16). 이 말씀은 우리를 감격스럽게 한다. 형제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바꾼다.
2. 지체는 여럿임(14절). 말씀이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하나됨은 동시에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이나, 서로가 다른 존재이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린 서로를 결코 이해하거나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을 강조하는데에 지나쳐서 마땅이 서로 같아야 할 부분을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무엇이 같아야 하고 무엇이 다를 수가 있는 것인가를 잘 분별해야 한다. 그러나, 그건 그다지 어려운 문제일 순 없다. 말씀속에 잘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대부분의 문제는 서로가 같아야 할 것이 다른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다를 수 있는 부분을 용납하지 못하고 서로를 거절하는데에 있다. 우리는 여럿이다. 각기 은사와 역할과 능력이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해야 하며, 서로의 모습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서로는 서로를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 결코 우리는 서로의 역할과 존재를 대신할 수 없다. 다만 격려하고 세워 줄 뿐이다.
2. 지체됨을 해치는 의식
I-열등 의식(15-20절) 내가 남보다 못하므로 나는 다르다, 아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서로 하나됨, 지체됨을 부인하게 하는 이 생각은 심각할 정도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듯 싶다. 서로 분당해가며 잘났다고 싸우고 자신이 받은 은사가 가장 큰 것이라고 자부하며 상대방을 깍아내리고 헐뜯고 하는 교회 풍토에선 조금이라도 자신이 부족하다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자리할 곳이 없게 된다. 자기 잘남을 자랑하며 남의 부족을 비판하길 즐겨하는 사람들 앞에 선 사람들은 의례 자신을 도피의 길로 몰아넣게 된다. 발은 손의 역할을 부러워한 듯하다.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야”하고 말해 버린다. 귀도 눈이 하는 일들이 무척이나 부럽고 그에 비해 자신의 역할이 촌스럽게 느껴진 듯하다. 비교의식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상대방으로부터 패배감을 느끼고 말 때, 우리는 만사를 회피하거나 도피의 길을 선택하고 만다. 발이 손보다 덜 소중한 것이 아니며, 눈이 귀보다 더 소중한 것이 아니라는 평범한 말씀이 실천되고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 곳에는 항상 좌절과 아픔이 뿌리밖는다. 자신이 비록 부족함이 많은 것 같으나, 결코 다른 이들보다 더 가치있거나 덜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는 고백은 자신을 솔직히 받아들이고 믿음대로 살아가게끔 한다. (
그런데, 대개는 발이 눈을 비교하려 하진 않는다. 또 귀가 손과 자신을 비교하려 하진 않는다. 대개 비슷비슷한 역할과 자리한 이들이 서로를 비교한다. 그래서 연령이 엇비슷하고 서로 유사한 부서나 사람들기리 이런 비교의식으로 인한 아픔이 많다. 서로 비교하여 시샘하고 서로 견제하고 서로 비판하려 든다. 여기에 몰이해가 깃든다.) 바울이 이같이 말한다.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19절) 서로가 비교함으로 열등감(Inferior Complex)에 빠져 서로가 다른 역할을 위해 하나님이 각각 몸에 지체로 두신 것이라는 말씀을 잊지말라는 것이다.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남과 자신을 비교하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좀더 다른 사람들을 청결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다. 오늘도 우리는 말씀을 새기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귀요, 그대는 눈이요.”, “나는 -이요, 그대는 -이요.”, “우리는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린 서로가 하나이며 다른 역할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하고 말해보자.
3. 지체됨을 해치는 의식
II-우월 의식(21-24절) 비교 의식의 두번째 증상은 우월의식(Superior Complex)이다. 우월감은 사실상 열등감의 뒤집기 증상으로 알려져 있다. 열등감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외적으로는 우월감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것 모두가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사랑이 없고 서로에 대해선 지체됨의 의식이 없는데서 비롯된다. 자신이 하는 일이 탁월한 일이고 남다른 일이며, 자신은 다른 사람에 비해 특별한 능력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는 오류를 범한다. 또 불필요한 자만심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서 보곤 그 사람의 가치를 절하시키고 만다. 그리곤 배타적이 되기 쉽다. 눈은 스스로 가치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사실 가치있다. 그러나, 눈이 손보다 자신이 더 가치있다고 생각한다거나 그래서 손에게 “너는 쓸데없어”한다면, 그 눈은 그리스도의 몸을 파괴하는 기능을 가질 뿐이다. 또 머리가 아무리 큰 일을 한다고 해서 지저분해 보인다고 발에게 함부로 말할 순 없다(21절). 바울은 외견상 연약해 보인다 할지라도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일 수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이 고루게 하셨다. 만일 누가 비교하여 이 사람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 하거나 저 형제보다야 내가 더 중요한 인물이 아니냐 하고 주장하면 그건 하나님이 고루게 하셨다는 말씀을 이해 못한데서 일어난다고 봐야 한다. 형제는 어떤가 다른 형제와 자매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직도 자신이 가장 중요하고 저 사람은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형제, 자매의 가치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높이고 있는가 다시금 기억하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서로 지체되었다.
4. 지체됨의 목적(25-27절) 지체의 원리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우리를 통하여 몸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하나님이 하셨다. 우리를 서로 지체삼으신 것이다. 24절에서도 하나님의 역할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주님의 몸을 세우시려고 베푸시는 세밀한 역사를 우린 볼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신다. 25절 이하에 나타난 지체됨의 목적은 이런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의 원하심이 그대로 드러난다. “몸 가운데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몇가지 강조점을 새겨보자.
1. 분쟁이 없게 하라(25a절). 그것이 믿음의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며 서로가 주를 신실히 섬길 때에 갖게 될 수 있는 차이점이라면 그건 분쟁의 소지여서는 안된다. 분쟁은 대개 시기심과 자랑하는 마음과 정욕때분에 일어난다(약3:14-15).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말씀하는 분쟁은 고린도 교인들이 나는 게바파, 나는 바울파, 나는 아볼로파 하면서 분당하여 서로 대적하는 것을 뜻한다(1:12). 어떻게 서로 싸우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나눌 수 있는가 (교회에 각 기관이 있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서로 경쟁하며 잘난 체하며 또는 다투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지체됨의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서로를 격려하고 세우지 못하고 한다면 주님의 교회는 상처를 입는다.
2. 서로 돌아보라(25b-26절). 서로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서로 연결된 지체는 서로 돌아보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는다. 돌아본다는 것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며, 힘들어 할 때 격려해 주며, 항상 사랑의 눈으로 보살펴 준다는 것을 뜻한다. 돌아봄의 목표는 세움(Edification)이다. 대로 잘못이 있어 고쳐주려 할 때도 돌아봄의 원리 적용은 우리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적하며 일으켜 주는 것을 말한다. 26절은 우리에게 지체로서 고통과 영광을 함께 나누라고 말해준다. 형제의 아픔을 나누는 일이 있는 모임은 참으로 아름다운 주님의 모임이다. 서로 돌아보는 노력이 있게 되고, 그 노력에 진실한 사랑이 움틀 때 우린 서로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짐을 같이 질 수 있게 된다. 이런 것들이 진심에서 나온 사랑에서가 아닐, 부득이함과 체면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그 교회는 삭막하기 이를 때 없다.
그런데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영광을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일일 것이다. 어려워하는 사람의 어려움을 돕게 되는 것은 그래도 쉬운 일이고 잘된 사람의 그 잘됨을 함께 기뻐하는 일은 좀은 어려운 일이다(롬12:15). 나는 낮아지고 상대방이 높아져야 한다는 말씀의 원리가 나를 사로잡지 못할 때, 우리는 그 때 시샘하게 되고 판단할 거리만 찾거나 또는 무관심해진다.
5. 나가며(27절) 27절에서 바울은 “너희는”이라는 단어를 특별히 사용하여 그 대상을 크게 강조시켰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의 각 부분이라는 것이다. 바울의 강조는 일차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명하는 것이지만 오늘 주님의 뜻을 구하는 우리들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몸이며 서로 지체되었다는 의식은 우리를 더 이상 잘못된 편견으로 상처를 주는 일을 금지시킨다. 몸으로서의 통일성(Unity)과 지체로서의 다양성(Diversity)은 우리 모두가 감사하며 돌이켜 보고 소망하여야 할 부분이다. 우리 각자는 한 부분에 불과하다. 결코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모여서 몸을 세우며 흩어져 하나되게 하시는 주님을 전파한다. 어느 누가 교회의 전부인양 그리고 교회의 부분이 아닌양 행동해선 아니된다. 형제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눈 것이 결코 자기 우월감이나 교만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참된 관심과 사랑 때문에 있어지는 것이고, 자매의 영광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돌아보는 것이 더 이상 어떤 자기 이득을 구하는 것이나 역겨운 아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진실한 섬김과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이길 우리는 소망한다. 주님은 사랑의 피를 뿌리셨다. 우리의 진정한 하나됨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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