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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큰 날과 신자들의 큰 날들 (습1:7-9)

본문

본문을 읽으면서 주의 큰 날들과 신자들의 귀하고 큰 날을 생각함이 좋을 줄 압니다. 주의 날 중에 큰 날, 작은 날을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만 특별히 스바냐서에서 주의 날, 큰 날, 환란의 날, 심판의 날이라는 말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큰 날이 어떻게 신자에게 존귀한 날이 되느냐 하는 것인데 주의 큰 날을 신자가 자신의 존귀한 날로 접붙임을 받지 않으면 신자에게는 큰 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의 큰 날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주님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신자된 나 자신을 위해서 있습니다. 내 심령 깊은 곳에서, 내 생활에서 주의 큰 날이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고 주님을 위한 것도 아니고 나를 위한 주님의 큰 날임을 인정해야 됩니다. 내 생활이 내 영혼이 내 심령이 내 삶이 이 사실을 인정할 때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열조들의 신앙의 자취를 생각했습니다. 이 열조들의 신앙의 자취나 우리들의 신앙의 자취는 필연적입니다. 마치 실물이 있으면 그림자가 따르는 것과 같이 아름다운 신앙에는 반드시 그 자취가 있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신자의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이 주님에게 속한 양을 이끌고 나가실 때에, 하나는 양을 위한 목자의 자취가 있고 또 하나는 그 양이 목자로부터 얻는 신앙의 자취가 반드시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선한 목자가 없다고 하면 신앙의 자취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자취가 없거나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그것은 자신의 사정일 뿐이지, 실지로 주님과 양의 사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 자취가 없고 내가 주님과 함께 하는 자취가 없다면 도대체 나의 신앙은 무엇을 근거해서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점을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은 주 안에서 시작되고 주 안에서 진행됩니다. 또 신앙은 주 안에서 성숙하고 주 안에서 결실합니다. 이러한 모든 사실에 선한 목자가 개입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양자의 관계를 앞서간 성도들의 신앙의 자취를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를 지키겠다. 또 내가 너를 이 땅으로 다시 돌아 오게 하겠다 (창세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너를 지키겠다고 약속하신 그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야곱과 함께 계시면서 그 약속을 진행해 가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친히 나와 함께 하신 자취들입니다. 일일이 말씀하지 못하지만 이런 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그 때의 아름다운 상황도 우리가 생각해 봅니다. 야곱의 신앙의 자취-그는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입히시고 계속해서 그와 동행하셨습니다. 만일 야곱에게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신 자취를 아느냐’고 물으면 야곱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 자취를 부인하면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없으면 그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자취를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의 분명한 관계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무엇을 주셨고 그들은 무엇을 받았을까요 주님의 것! 야곱의 것이 아닌 주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내 것으로 시작해서 일생을 마친다고 하면 신앙의 사람은 아닙니다. 내 것은 다 끝나고, 헌 옷같이 썩은 옷같이 다 쇠퇴하고, 선한 목자되신 주님이 친히 주신 주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들의 삶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아 왔느냐, 그를 향한 신앙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떠어떠한 일을 통해서 장성하고 결실했느냐 하는 것을 주님도 알고 신자 자신도 아는 것이 합당한 일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의 큰 날들’입니다. 이 큰 날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삶은 주님 자신의 삶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삶이요, 그 삶 자체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한 삶입니다. 이렇게 인정하는 것,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 이렇게 믿는 것이 금보다 더 귀한 믿음입니다. 주의 큰 날 중에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주님이 ‘성육신’ 하신 날입니다. 주님이 사람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있다고 하면 육울 가지고 있는 우리 안에 육을 가지고 들어 오시기 위함입니다. 오직 나를 위해서입니다. ‘성육신 하셨다’ 하는 것은 사람이 고의적으로 짐승의 몸을 입는 것보다 더한 일입니다. 아무리 불가피한 일이라 해도 과연 여러분 자신이 짐승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짐승이 되지 않으면 짐승을 모릅니다.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나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신 일은 사람이 어떤 짐승을 위해서 그 짐승이 되는 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입니다.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으로만, 신으로만, 신의 사회에서만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육을 가진 내가 그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 모습을 볼 수 있고 그가 지신 십자가를 보고 깨닫고 믿을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오신 것이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오신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 들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안에 오신 주님을 아는 것은 바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것이 주님의 사명과 생활의 전부였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되 우리를 위해서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성육신 하신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육신 안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권속으로 삼으려고 하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일입니다. 나를 위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주님이 나를 위해서 오셨다,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나를 위해서 오신 주님 앞에서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주님 앞에서 내 마음이 변하지를 않습니다. 내 죄도 내 사망도 내 심판도 주님에게 옮겨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입으로 수백번 수천번 시인한다 해도 신앙과 함께 연합하지 않으면 그 말로 시인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나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분명히 아십시오. 주님의 성육신 하신 날이 자기를 위한 큰 날이 되지 못하면 다른 큰 날이 있는데 곧 심판의 날입니다. 멸망의 날입니다. 그 심판의 날, 멸망의 날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심판의 날, 멸망의 날을 면하려면 주께서 나와 똑같은 사람이 되신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면합니다. 주의 큰 날 중에 또 하나는 십자가를 지신 일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십자가를 지십니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위해서 십자가를 진다고 하면 수긍이 갑니다. 그러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위해서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이치에는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 봉수라는 분은 교회에서 제일 듣기 싫은 말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소리였답니다. 자기같이 못생기고 형편 없는 사람이라도 남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같은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소리가 아니꼬왔답니다. 그래서 ‘웃기지 말아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답니다. 그러다가 그 후에 그는 참으로 십자가의 도리를 깨달아 알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제가 잊을 수 없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주님은 버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이 아버지 앞에서 버림을 받으실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일입니까 내가 버림 받아야 할 것을 주님이 대신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믿어야, 시인해야 여러분의 죄짐이 물러갑니다. 이것을 시인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죄짐은 물러가지 않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주님이 마지막으로 외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천지 만물을 부족하게 지어서 십자가 상에서 다시 지으셨습니까 삼라만상-광물질, 식물질, 동물질, 우주가 뭐가 부족해서 다시 십자가에서 이루셨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이루셔야만 했던 일, 십자가에서 이루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일이 무엇입니까 만무 중에 옷을 벗고 매를 맞으신 주님, 죄인처럼 홍포를 입고 매를 맞으시면서까지 주님이 마지막으로 이루어야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만일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 앞에 우리 마음이 다소라도 열려지면 그 열려진 마음은 다릅니다. 신앙과 생활이 다릅니다. 어떤 말로, 어떤 설명으로 이 말씀을 채울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까 주님이 왜 오셨습니까 주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여러분의 구원 때문입니다. 죄인된 여러분을 죄인 아닌 사람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흠이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두시기 위한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에 여러분의 죄를 개입시키지 않으면 다 이루었다 하신 그 말씀이 헛말이 됩니다. 확실히 이 말씀이 문서를 젖히는 것 같이 시행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진행이 되어야 합니다. 아는 것 이상입니다. 이 사실을 전폭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원만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의 성결도 이루어졌습니다. 깨끗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사람이 어떻게 흠이 없을 수 있으며 어떻게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되겠습니까 주께서 다 이루셨다 하는 그 이루심을 내가 가질 때에, 영접하는 사람이 될 때에 그 사람에게는 다 이룬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안됩니다. 믿음과 구원과 성결과 의와 영광입니다. 주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그 안에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주의 큰 날입니다. 우리를 위한 큰 날입니다. 이 날이 우리에게 귀하고 큰 날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과 성결과 영화뿐만 아니고 만일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주시지 않았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권속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속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보좌에 앉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보좌! 하나님의 보좌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보좌에 마음 놓고 들어갑니다. 그러나 종은 아무리 똑똑하고 지식이 있어도 아버지의 보좌에 앉지 못합니다. 분명히 아십시오. 왜 여러분들은 아버지의 보좌에 못나갑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데도 못나갑니까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아들이라고 하면 어려도, 오줌 똥을 싸면서도 아버지의 보좌에 그대로 갑니다. 아버지도 허물치 않습니다. 아들이 아무리 미숙해도, 말에 미숙하고 생활에 미숙해도, 아들이라는 조건 안에서 모든 미숙한 점이 다 묵인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죄에 대한 보장을 해 주십니다. 죄에 대한 보장이 곧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서 의에 대한 보장도 해 주십니다. 따라 하세요. “신자는 주님의 보장으로 사는 것이다.” 신자는 뭘로 살아요 자기 생활의 선악을 가려서 그것으로 만족하고 삽니까 못삽니다. 만일 선악을 가려서 그것으로 사는 것이 신자의 생활이라고 하면 그것이 신앙이라고 하면 나는 벌써 신앙 생활을 그만 두었을 것입니다. 백날 해 봐야 헛일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보장하신 죄와 사망, 십자가에서 보장하신 의, 이것이 나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에 잘하나 못하나 지금까지 여러분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사실을 가져야 합니다. 이 사실을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보장뿐만 아니라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를 멀리 멀리 옮기셨습니다.
그런데 안 믿습니다. 여러분의 심령이 믿으면 여러분의 죄가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멀리 옮겨지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믿게 되는 것입니다. 안 믿으니까 이 죄가 어찌나 무거운지 나에게서 떠나질 못합니다. 다른 것은 다 떠납니다. 아내도 아들도 친구도 살림도 떠납니다. 그러나 죄는 안 떠납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멀리 옮기시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우리 마음 속에서 죄와 허물을 옮기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끗하고 온전하고 영원토록 보증하기 위한 것이 ‘십자가로 인을 치신 것’입니다. 계약서에 이 약속을 다 열거했습니다. 성경에 전부 열거했습니다. 다 열거한 후에 무엇으로 인을 치셨어요 십자가로 인을 치셨습니다. 부인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인치신 사실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십자가 지신 것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부인하지 못합니다.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로 인을 치시고 다 이루셨다. 다 이루셨다’ 이것이 여러분의 노래요, 여러분의 간증의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 더 말씀드리는 것은 주님이 죽으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죄와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입니다. 늘 말씀하지만 만일 주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의 전하는 것이 거짓입니다. 설교 자체가 거짓이요, 우리는 여전히 죄 아래 있습니다. 바울은 이김을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이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 (로마 4:25) 이것이 바울의 심령 속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호소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도 이 사실이 있어야 합니다. 믿는 자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주의 큰 날이 있습니다. 앞으로 이 큰 날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다 이루신 큰 날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입니다. 자꾸 다른 데 정신을 쏟지 마세요. 바쁜데 교회 나오는 일, 없는데 교회 섬기는 일을 무엇 때문에 합니까 이 큰 날을 받아 들이는 일과 이 큰 날에 대해서 감사와 감격과 찬양 때문에 합니다. 신앙 생활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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