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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신앙의 수치를 모르는 자는 (습3:12-17)

본문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청하시는 초청장이라 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 한두 군데가 아니고 성경 전체에서 우리를 이유 없이, 조건 없이 청하는 것이 바로 성서입니다. 이제 그 청함을 수락하느냐, 수락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따라 좌우가 달라집니다. 수락하고 수락하지 못하는 일 중에, 악한 자라도 청함을 받아서 나아가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또 아무리 선한 자라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얻는 일에 있어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분별이 없습니다. 아무리 선해도 그 선이 부르심을 받고 나아가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서, 우리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선.악입니다. 선을 이루지 못하는 우리지만 그래도 선에 대해서 좀처럼 자리를 옮기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실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무 감각이 없는 사람, 무관심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안나오는 사람들은 칭호 자체가 불신자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아무리 성도라고 이름한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내 마음 속에서 아무 감각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은 시비를 알지 못합니다. 아픈 것도 모르고 슬픈 것도 모르고 좋은 것도 모릅니다. 산 사람이 희로애락을 압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심령은 희로애락을 압니다. 전혀 무관심한 사람, 죽은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시비를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내게 큰 짐이 있는데 힘이 없어서 이것을 옮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옮겨야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옮겨야 되겠는데 옮길 힘이 없는 사람의 짐을 옮겨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주님의 일이고 복음의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관심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본문이나 성경 말씀 전체가 자기에게는 아직까지 이루어지 않고 미래사로 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도 참 귀합니다. 내게는 아직까지 그런 사실이 없지만 분명히 신자라면 ‘이 길로 나아가야 한다. 반드시 이것을 얻어야 한다’ 하고 앞으로 내게 올 것을 알고 구하고 부르짖고 나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래 우리는 다 외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감각을 가지고 시비를 알고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죽은 자들입니다.
외인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을 때에 말씀을 들으면서 내 마음 속에 옳고 그른 것을 찾습니다. ‘이것을 얻어야 된다. 가져야 된다’고 하는 욕망이 우리에게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미래사로 남아 있다 해도 분명히 하나님 앞에 이런 요구를 가지고 계속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물리치지 않습니다. 만일 물리친다고 하면 근본적으로 달리 생각해야 됩니다. ‘구하라’ 주기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찾으라’ 만나 주기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문을 두드리라’ 열어 주기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다 약속이 되어 있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찾는 자에게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이미 문을 열어 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내 자신에게 미래사로 남아 있다 해도, 그것으로 만족할 것은 아니지만 한편 행복합니다. 그가 낙심하지 않고 그 반열에 서서 계속해서 나아가면 약속된 것을 그에게 다 선물로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 하나는 미래사로 있을 때에 많이 구하고 기도하고 간구한 후에 현재사로 이루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숫자가 많든지, 적든지 불문하고 현재사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서간 성도들은 미래사로 끝마친 것이 아니고 미래사에서 현재사로 다 이루어진 사람들입니다. 수치를 모르고 사는 사람, 자기 신앙의 수치됨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숫자로 보면 아마 신자 중에 자기 신앙의 수치를 모르고 사는 사람의 숫자가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몇백배가 되려는지 몇천배가 되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수치를 모르는 너희들아!’ 하고 분명히 수치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오라, 나아오라.’고 했습니다. 나아오면 이 수치되는 사실을 그가 고칩니다. 중생하게 하고 거듭나게 하는 것이 그가 하는 일입니다. 누구에게 나아오는 사람에게. 거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아오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 잔치에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성결도 거룩도 의도 예복도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누구 주려고 나아오는 사람에게 주려고 예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수락하고 있느냐 수락하지 않고 있느냐 무관심한 가운데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무관심하고 있다면 다시 반성해야 될 것이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됩니다. 무관심한 사람은 무관심한 대로 있습니다. 이 수치를 모르는 사람에게, 오되 오늘 못오면 내일 오라, 내일 못오면 모레 오라. 하고 한없이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가기 전에 문 닫기 전에 오라, 신랑이 와서 문 닫은 후에는 아무라도 그 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신랑이 오기 전까지는 준비할 수 있습니다.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랑이 와서 문을 닫으면 준비할 때도 끝납니다. 기다릴 때도 끝납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찌어다 모일찌어다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찌어다 (스바냐 2:1) 이 말씀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광음이 겨 같이 날아가기 전에.’ 다시 말하면 세월이 겨 같이 다 날아가기 전에 오라! 우리로 말하면 젊었을 때에 오라! 그 말입니다. 늙으면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자꾸 바보가 되어 갑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땅의 것도 그렇고 위의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때가 오기 전에 오라! 오라!’고 하십니다. 그보다 더한 것은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기 전에 오너라!’ 누구에게 오라 하는고 하면 수치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라도 이런 때가 오기 전에 오라고 하십니다. 오면 준비한 그대로 주십니다. 여호와의 큰 날! 여호와의 큰 날을 나같은 죄인을 위해서 준비하셨다 하는 것을 말로만이 아니고, 나를 향하여 준비하신 여호와의 큰 날을 여러분 하나하나의 생명같이 여겨야 합니다. 주님이 성육신 하신 날! 누구를 위해서 하나님이 왜 사람이 되셨습니까 사람된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권속으로, 주님의 신부로 영원히 영접하기 위해서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12월 25일이 성탄일인데 그것도 추측입니다. 그 날짜가 맞느냐 틀리느냐 하는 것은 별 관심이 없습니다만, 참으로 주님이 성육신하신 일과 나의 신앙과 바른 관계를 갖는 사람이 참 귀합니다. 그 사람이 신자입니다. 또 주님이 십자가 지시고 다 이루신 날, 나를 위해서가 아니면 주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이런 고함을 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이 죽으신 날이나 부활하신 날, 또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다 신자를 위한 날입니다. 불신자를 위한 것이 아니요, 불신자를 멸망시키는 날입니다. 이 심판은 알곡을 위해서 있습니다. 쭉정이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등과 기름을 가지고 있는 신부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큰 날을 통해서 우리가 알곡으로 주님의 신부로 주님의 권속으로 성장되고 아름답게 진행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동시에 나의 큰 날이 있어야 합니다. 내게 큰 날, 주에게 붙어서 큰 날이지만 내게 큰 날입니다.
스바냐 3장 13절부터 있는 말씀은 무감각하고 관심 없던 자들이 나아와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님과 접촉되면서 참 신앙생활을 하게 된 사람들에 한해서 하는 말입니다. 아무에게나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생각하십니까 이 악이 무엇인데 어떤 악인데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스바냐 3:13) 그 밑에 무슨 말씀입니까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느니라 먹으며 누우나,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누우나, 자기 마음대로 하나, 아무도 그를 해하지 못합니다. 자, 먹으며 누워도 해하거나 비방하지 못할 사람이 우리가 생각한 사람 중에 누구입니까 먼저, 므비보셋입니다. 므비보셋이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눕고 마음대로 활동해도 므비보셋을 탓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참 복음입니다. 크고 영광스럽고 복된 소식입니다. 나 자신을 비롯해서 우리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먹으며 누워도 아무도 나를 해할 사람이 없다 하는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 위치가 어디입니까 그 위치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겁니까 먼저는 내 마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다음에는 이 육신을 다 벗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탕자같은 사람이나 대제사장 여호수아같은 사람이나 바울같은 사람이나 앞서간 성도들이 다 그렇습니다. 마음 놓고 주의 상에서 먹습니다. 주의 상에서 눕습니다. 그러나 그를 탓할 사람이 없습니다. 참 귀합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찌어다! (스바냐 3:14) 시온의 딸은 구속 받은 사람들입니까 구속 받기 전의 사람들입니까 그 사람이 박사든지 학사든지 장군이든지 제왕이든지 상관 없습니다. 시온의 딸! 여러분이 시온의 딸이라고 하면 반드시 주님의 피로 사신 신분입니다. 주님이 흘리신 보혈로 사신 신분이 시온의 딸들입니다. 여기는 아들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남자, 여자를 말하는 것이 많지만 대체로 여성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들입니다. 말만 시온의 딸이 아니고 말만 성도가 아니고 시온의 딸이라고 하는 단어 안에 있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교파의 교인이라 하는 말은 없습니다. 교인과 신자가 다릅니다. 교인은 웬만하면 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입적하면 교인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온의 딸들입니다. 시온의 딸이라 하는 말 안에는 반드시 주님이 당신의 피로 구속해 낸 사람들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세요. “주께서 사람들 가운데서 당신의 피로 구속해 내시고 그들을 제사장 되게 하신다.” 제사장! 흰 돌같이 대제사장같이 말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고 실질적인 이 사실을 부여해 주십니다. 내가 남집사님 집에 갔습니다. 남집사님이 말로는 ‘목사님,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쉬고 마음대로 쓰세요’ 라고 하면서 내가 먹으려고 할 때에 제재하고 입으려고 할 때에 제재하고 누우려고 할 때에 제재를 한다면 되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주님에게 맡기면 맡긴 것을 내가 다시 찾지 말아야 됩니다. 다시 찾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맡겨야 됩니다. 망해도 맡겨야 됩니다. 그래야 맡긴다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의 본의가 그것입니다. 망하는데 어떻게 맡기느냐고 하는 것은 아직도 자기 자신을 맡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얼마 전에 집에서도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딸들의 핸들을 잡는 게 아니다. 또 딸들이 아버지의 핸들을 잡는 것도 아니다. 각각 자기의 핸들을 자기가 잡는 것이다’ 아버지가 딸들의 핸들을 잡으려고 하면 편안합니까, 편안하지 않습니까 안됩니다. 자기의 핸들은 자기가 잡아야 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잡고 계시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로 볼 때 내 핸들은 내가 잡고 내 운명을 내가 같이 해야 합니다. 남이 같이 하는 게 아닙니다. 남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저렇게 되었다 하는 것은 다 핑계입니다. 이 시온의 딸이라 하는 말이 엄청나게 복스러운 소리입니다. 죽은 개같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시온의 딸 중에 들어갑니까 또 시온의 딸이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을 어떻게 누립니까 바울이 시온의 딸입니까, 아닙니까 누구에게는 이렇게 하고 누구에게는 저렇게 합니까 바울에게는 이렇게 하고 남기백한테는 저렇게 합니까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 법이 아닙니다. 시온의 딸은 동일합니다. 바울이 시온의 딸이고 나도 시온의 딸이라고 하면 바울이 누리는 것을 내 마음도 누리게 됩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시온의 딸이 되었다고 하면 시온의 딸의 인격과 자격을 가지고 시온의 딸이 누리는 것을 같이 누리게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지, 안 그러면 바울이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따로 있고 또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따로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성경에는 동일합니다. 왜 동일합니까 바울과 내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크게 다릅니다. 그러나 시온의 딸이 되는 핵심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은혜요, 나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와 바울은 차이가 나지만, 은혜는 동일합니다. 주시는 은혜는 동일합니다. 이 은혜를 여러분들이 바라 봐야 됩니다. 나는 바울같지 못하다, 깨끗하지 못하다, 옳지 못하다 하고 자탄하지 마십시오. 바울에게 입히신 은혜도 은혜요, 내게 입히실 은혜도 은혜입니다.
은혜가 시온의 딸이 되게 하십니다. 그 은혜가 시온의 딸들이 누리는 누림을 누리게 하십니다. 참 귀한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찌어다! 신자들의 노래는 언제 되는 줄 아십니까 우리가 지금 찬양하기는 하지만 진정한 찬양이 안되고, 땅 위에서 생기는 일의 여파로 찬양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온의 딸의 노래는 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단, 구속으로 성결로 의로운 것으로 부르는 찬양입니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찌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스바냐 3:14)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제도 죽은 개요, 오늘도 죽은 개요, 내일도 죽은 개인 내 신분입니다. 그러나 ‘시온의 딸이 되어.’ ‘므비보셋이 왕의 은혜를 입어서.’ 라는 말과 같이 시온의 딸이 되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우리 신앙 가운데 이 말씀대로 전심으로 즐거워하는 이런 때, 이런 날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 있습니다. 이것이 과거사냐 현재사냐 미래사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래사라도 좋습니다. 확실히 미래사라도 이것을 여러분의 변할 수 없는 사실로 붙드는 것이 참 귀합니다. 미래사라 해도 귀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은 다 현재사입니다. 예루살렘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없던 아들을 낳게 되어서 없던 돈을 갖게 되어서 기뻐합니까 피치 못할 질병에서 나를 건지셔서 즐거워합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셨고. 누가 여러분의 죄를 누가 어떻게 했습니까 내 허물과 죄와 멸망 자체를 누가 어떻게 했어요 여호와께서 하나님께서 주님 자신이 옮기셨습니다. 앞으로 제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을 여러분의 미래사로 가져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미래사가 아니고 과거사입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신자는 누가 신자입니까 주님으로부터 형벌의 제함을 받은 사람이 신자입니다. 너의 원수를 쫓아 내었으며. 주님이 우리의 원수를 쫓아 내셨는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신 것은 신자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완성된 것입니다. 죄도 사망도 사탄도 불의의 권세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남겨둔 것이 없습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남겨두면 다 이루었다 하는 말이 안됩니다. 다 이루었다. 참 귀합니다.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가 7:18,19) 미가서에서도 책장 넘기시듯 다 넘기셨다, 제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부터 보면 생명록과 행위록이 있습니다. 행위록에는 우리의 행위가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행위까지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행위록은 책들입니다. 책들!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거기에 생명책이 있습니다. 생명책이 행위록을 대신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생명록에 기록이 되었느냐, 안되었느냐에 따른 것이지, 행위록에 이렇고 저렇고 하는 것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모든 허물을 제하셨습니다. 넘기셨습니다.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 하지 말라. (스바냐 3:15)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신앙이 장성한다, 성숙된다 하는 것은 다 우리 마음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앞에 왔을 때에 무슨 마음이 있었습니까 아버지 집에 와서 하는 말이 ‘아버지가 참으로 나를 용서하실까 정말로 용서하실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마음의 그늘을 나타낸 말이 무엇인고 하면 ‘나를 품꾼의 하나로 여겨 주시옵소서’ 라는 말입니다. 그런 탕자에게 아버지에 대한 믿음, 의지하는 의지가 어디에서 생기는가 하면 자기가 아버지의 목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자기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어 주시는 것을 알 때에 생깁니다. 가슴과 가슴을 대고. 그럴 때에 탕자의 마음 속에 무슨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 변함이 없는 사랑을 압니다. 받아 들입니다. 흡수하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향해서 주님의 사랑을 흡수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입을 맞출 때와 옷을 입혀 줄 때와 신을 신겨 줄 때와 가락지를 끼워 줄 때와 잔치를 배설할 때가 다릅니다. 처음에는 부분적으로 압니다. 이 부분적인 것이 완전한 데로 또 더 완전한 데로 갑니다. 거기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변경할 수 없는 확고한 믿음이 탕자에게 이루어집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못 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서 기도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자꾸 알게 됩니다. ‘이제 알겠다,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이제 알겠다. 한번도 죄를 범하지 않은 자처럼 대해 주시는 주님을 내가 알겠다.’ 하는 말을 수없이 하게 됩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또 믿음의 성장, 성숙, 결실하는 것도 이런 데에 있습니다. 이런 것이 있어야 결실이 됩니다. 마음의 결실이지, 신앙의 결실이지, 교회 생활의 결실이 아닙니다. 교회 생활에 익숙해진다고 신앙이 장성하거나 결실되는 게 아니고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신다. (스바냐 3:17) 여러분과 주님과 별개입니까 하나입니까 별개라고 생각하면 빨리 성서 말씀으로 돌아 가야 합니다. 별개가 아닙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한 6:56)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 28:20) 주님과 함께 있는 자에게 심판이 없습니다. 저주가 없습니다. 그 저주는 이미 주님이 받으셨습니다. 내가 주님 안에 있는데 나를 어떻게 저주합니까 나를 저주하기 전에 주님을 먼저 저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모든 천사들도 이 사실을 간과하지 못합니다. 수치를 모르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고 믿어야 할 것을 믿지 못하는 수치스러운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먼저 주님의 큰 날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내 큰 날이 거기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주님의 큰 날을 알고 흡수하게 되면 바로 시온의 딸이 됩니다. 그러면 다시는 그에게 저주가 없습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노래하게 되는 것이 성서의 내용입니다. 이 성서 자체를 여러분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의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이 이상으로 설명을 잘 한다 해도 여러분이 이것을 수락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신앙은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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