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만찬과 자기 만찬 (고전11:17)
본문
주의 만찬과 자기의 만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여기서 만찬의 문제가 다시 나오고 있는가 우리는 지난번에 말씀 드린 대로 10장까지는 일반적인 생활에 관계된 문제 였습니다. 11장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의 행정(行政)'에 관계된 그런 문제인데, 하나님의 행정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입니다. 머리가 있어야 행 정이 되니까. 대통령이 있어야 정부가 조직되고 정부가 조직되야 행정이 펼쳐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그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가 나왔 습니다. 이 우주는 하나님의 한 행정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절대적인 머리의 지배아래서 그 행정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담은 스스로 그 머리를 버 린 사람이기 때문에 거역하는 자가 되고 우리가 아담의 세계 어디에 가서 봐도 그 근본적인 문제는 전부 그 머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종교를 가봐도 그렇고, 세상을 가봐도 그렇고 전부 공통된 가장 근본적인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는 문제입니다. 전부 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서 참 하나님없는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모두 노력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바벨 탑은 계속 쌓아지고 있고 그래서 계속해서 혼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머리되심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를 다 루게 되었습니다. 머리되심아래, 수건을 쓰는 아래 하나님의 행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행정을 볼때 우리가 머리되심을 인정하고 보면 모든일이 합 당하고 당연하고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머리되심을 거부하고 나서 우리 인생과, 세상과, 우주를 보면 모든 것이 다 의문이고 부정적이고 합 당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여기서 부터 시작하느냐 아니면 '저절로 생겼다.' 로 시작하느냐 간단한 문제 같은데 이것 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렇 게 시작한 것은 우리는 머리 되심아래 있다는 뜻이고 '저절로 되었다. 이것은 머리되심 아래 있지 않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말이 좋은 말도 많고 훌륭 한 말도 많지만 그것이 근원적으로 어디서 나왔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 하나님의 머리되심을 인정한데서 나온 것이냐 아니면 그것을 부인한데서 나왔느 냐 말은 두가지 뿐입니다. 여러 가지 교훈이 있고, 말이 있고, 종교가 있지만 근원적으로 두가지 뿐 입니다. 하나님의 머리되심 안에서 하나님의 행정을 받아들이게 되고 긍정적으로 받아드리게 되고, 운명적으로 받아 드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렇게 말할때 우리의 운명은 벌써 정해진 것입니다. 내가 낳기 전 에, 내가 있기 전에, 하늘과 땅이 있기 전에 계신 이가 벌써 있었구나. 이것은 우리의 운명이, 확실히 모르지만 이미 운명이 있다. 그것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정해진 것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이 무언가 그것을 찾는 것이고 '저절로 생겼다.' 이렇게 되며는 그 머 리되심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정해진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무엇을 정 해가는 것입니다. 인생 자체가 그렇게 틀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는 이미 정해진 세계를 찾는 것이고, 정해진 것을 가지고 사용하는 것이고, 정해 주신 것을 우리가 행하는 세계이다. 또 하나는 자기 스스로가 정하고, 자기 스스로가 행하고, 자기 스스로가 모든 것을 하는 세계입니다. 완전히 두 세계가 다릅니다. 우리는 이제 귀신의 상과 주님의 상, 이 문제를 얘기 했는데 귀신의 상과 주 님의 상도 마찬가지로 잔치이니까 한쪽 잔치는 머리되심 아래 있는 잔치이고, 하나는 저절로 있다는 데서 생긴 잔치이니까 그 잔치 자체가 완전히 틀리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이 다르면 제물도 달라진다. 그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번에 10장에서 말씀드린 '상(床)' 그것은 잔치이고 마당이니까 구약으 로 말하면 제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 위에 모든 것이 드려지기 때문에 이것은 신약에 오면 십자가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십자가라는 단위에 놓여 지는 것이니까. 이것이 비유적으로 말하면 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땅에서는 모 든 소산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밥상을 보며는 많은 반찬이 있고 음식이 놓여 지듯이, 잔치집에 가면 잔치가 있듯이, 땅에서는 하늘의 어떠함에 따라서 무엇 이 나올 것인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참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상에 참여한다. 그것은 그 땅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것은 궁극적으 로 우리가 십자가에 참여하는 그런 삶을 말합니다. 그러나 만찬이라는 것은 제 물에 속한 것이죠. 음식에 속한 것이니까 이 제물은 바로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누림이 되는 것입니다. 땅에서 곡식이 나면 우리는 그 곡식은 먹고 또 활동하여 건강하게 됩니다. 이것은 누림입니다. 그래서 제물은 바로 우리의 누림이 되신 그리스도입니다. 단은 우리의 참여가 되는 십자가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땅에서 그 소산물' 이 납니다. 우상의 상에는 우상의 제물이 놓여지게 되고, 주님의 상에는 주의 제물이 놓여지게 되고. 상에 따라서 제물이 달라진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상은 우리에게 '정해진 운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상을 발견할 때 우리 가 거기에 참여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발견할 때 그것은 우리의 운명으로 발견 되기 때문에 우리가 참여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운명으로 발견되지 않 으면 우리는 참여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만 그것이 운명으로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참여가 되지않고 단지 십자가 의 어떤 면이, 순교적으로 자기가 감당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될 뿐이고, 상 자 체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제물은 어떤 성질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상은 우리의 참여를 위한 것이고 제물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상 위에 드려진 것은 모두 다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 데, 그 성질의 것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이 그런 성질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성질의 제물을 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송아지나 양이나 비둘기 나 곡식이나 이런 것들은 어떤 성분인데 그 성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바로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성분을 가져야만 당신의 행 정을 집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울을 가려면 버스나 기차나 비행기나 이런 수단을 이용하게 됩니다. 그래야만 서울에 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도 자기의 행정을 집행하는데 있어서는 어떠한 성질이 필요합니다. 그 행정을 집행하는데 필요한 성질이 송아지나 양이나 비둘기나 빻아진 곡식가루나 비틀 어 짜진 기름이나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행정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그런 본질 이고 체질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왜 그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그것 이 하나닙의 행정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잔치를 하기 위해서 돼지고기가 필요 한가 쇠고기가 필요한가 이런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집의 짓기 위해서 벽돌 이 필요하나 목재가 필요하나 이런 것과 같습니다. 벽돌집을 지으려면 벽돌이 라는 체질 본질이 필요하고 목조 건물을 지으려면 나무라는 그런 체질 그런 본 질이 필요하므로 그런 재질이 필요하게 됩니다. 나무를 가지고 벽돌집을 지을 수 없고 벽돌을 가지고 목조 건물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집을 건 축하는 문제는 행정의 문제 입니다. 행정의 문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 행정에 맞는 재질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제물입니다. 이 제물은 우리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송아지냐, 양이냐, 또는 비둘기냐 하는 문제는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나를 사용해서 당신의 우주적인 행정을 집행함에 있어서 필요하신 하나님의 필요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왜 송아지여야 하는가. 그것은 내 필 요가 아니고 하나님의 필요라는 것입니다. 내가 왜 양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내 필요가 아니고 하나님의 필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양을 가져야만 당신 의 행정을 이룰 수가 있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상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상이 있어야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상이 아니면 참여가 불가능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없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 상이 없다면 온 인류가 한자리에 참여할 자리가 없습니다. 그 상 때문에 온 인류가 한 자리에 참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두 인종이 다르고 사람의 생각 이 다르고 소유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신앙이 다르고, 모든게 다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상을 갖고 있는 셈이지요. 세상에서 그런 상들은 각자가 생각할 때 다 자기 상으로 모여 와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장로교라는 상으로, 감 리교라는 상으로, 천주교라는 상으로, 불교라는 상으로 다 모여 와야 한다. 모두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도 모든 인류를 한 상으로 모을 수 있는 상이 없습니다. 상들이 여러개가 되어 버렸기 때문 입니다. 상들이 여러개 가 되어 버리면 한 상이라야만 한 하나님이 있게 되는데 상이 여러개이기 때문에 한 하나님에게 제사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 좋은데 무엇이 문제가 되는 가 하면 하나님의 행정을 집행하게 하는데 필요한 것이 아니고 방해가 됩니다. 한 상만 있어야 하는데 여러 상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 상에 아무리 좋은 제물 이 놓여져 있었다 하더라도 상이 여러개 되어 버렸기 때문에 온 인류가 참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장로교라는 상이 참 좋은 상이지만 그 상에 온 인류가 다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천주교라는 상도 좋지만 그 상에 온 인류가 다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불 교라는 상도 좋은 점이 많은 상이지만 온 인류가 그상에 다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온 인류를 한 상에 참여 하게 하기 위해서 오직 하나 의 상을 내놓았는데 그 상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가 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상이 다 따로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없이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싫은것 같아도 꼭 있어야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고 우리 생각으로는 그것이 필요없는 것 같고 없 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안에서는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다 멸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행정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의 운명이죠.
우리가 그 한 운명안에서 만날 때만 우리가 참여가 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공동묘지에 가면 다 한 자리에 참여가 됩니다. 불교인이나, 기독교인이든지, 요즘은 비석에다 따로 새겨 놨지만, 기독교인은 십자가를 새겨 놓고, 불교인들은 꼬부라진 마크 표시를 해놓곤하지만 그것은 산 사람들이 갈라 놓은 것이지 죽은 사람들이야 다 똑같이 않습니까 죽어서 썩어가지고 뼈가 되면 그것이 거기라도 십자가가 박혀 있겠습니까,아니면 꼬부라진 십자가가 박혀 있 겠습니까 다 똑같은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지니라.'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속으로 모두 다 하나로 돌아가게 됩니다. 결국은 우리는 한 운명안에서 만나지는 것인데 십자가 밖에는 우리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의 참여를 위한 것이고 제물은 하나님의 행정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자기의 만찬과 주의 만찬이라는 그런 문제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자, 자기의 만찬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저녁에 먹는 정찬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아침 식사가 중요한 식사이지만 아마 서양 사람들은 저녁 식사가 정찬인가 봅니다. 그래서 두시간씩, 세시간씩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은 저녁 식사 (dinner)를 먹는 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바깥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얘기해 가 면서, 놀아 가면서 두 세시간씩 먹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정찬입니다. 우리나라는 저녁에는 잠잘것이니까 조금만 먹자. 쌀도 귀한데 잠잘것이니까 저녁에는 조 금만 먹자. 우리는 일하기 위해서 밥을 먹는 것이니까 아침에 잘 먹어야됩니다. 하루종일 일해야 되기 때문에 아침 굶고는 일을 못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서는 아침 식사가 제일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저녁 식사가 가장 호화로운 식사였습니다. 자기의 만찬 이것은 애찬(愛餐)이라고도 교회에서 불리 우는 것인데 왜 애찬이라고 하는가 하면 '사랑의 회식'이라는 뜻입니다. 자, 형 제들이 모두 모여서 사랑의 형제들이 모여서 회식을 한다. 그것입니다. 요즘은 군대에 가면 회식이 많지요. 계모임 같은것 그런 회식이 많습니다. 갑자기 군사 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회식(會食) 문화가 굉장히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식당이 모두 잘되는 이유가 다 회식때문입니다. 얼핏하면 회식하자 합니다. 처음에 나는 회식이 뭔지 몰랐습니다. 돌아 가면서 먹는다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바로 모일 '회(會)'였습니다. 모여 먹는다.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 후로 모여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헬라인들의 풍습가운데 사교적인 모임, 교제를 하는 사교적인 모임에 각자 저녁 식사를 자기가 준비해 가지고 와서 먹으면서 교제를 하는 그 런 사교적 풍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래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 의 식사를 각자가 준비해 가지고서 각자의 음식을 자기가 먹으면서 서로가 교 통을 하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자, 이것이 교회안에도 도입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먼저는 유대인들도 이런 습관이 있기 때문에 모여지게 된 것인데 이 것 때문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하면 어떤 사람은 쇠고기를 싸가지고 오고, 어떤 사람은 돼지고기를 싸가져와서 쇠고기파와 돼지고기파가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쌀밥 가져온 사람과 보리밥 가져온 사람이 갈라지게 되었다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부요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갈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풍성하게 싸가지고 와서 먹고 술까지 취하게 되었고 어떤 사람들 은 가져올게 없어서 배를 골고 있는 그런 현상이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빈부간에 구별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결 국 교회의 분당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원망도 생기고 시비도 생 기고 또 여러가지 문제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먼저 먹어 버린 사람, 많이 먹 고 술까지 취해 버린 사람, 아니면 아직도 못 먹은 사람. 이렇게 되었죠. 원래는 이것을 먹고난 후에 주의 상-성찬(聖餐)-이라는 것을 떼도록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 님께서 저녁을 잡수신 후에 잔을 가지고 축사하사라고 했듯이 저녁은, 정찬은 먹고 그 다음에 축사하는 떡을 뗐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계실때도 그랬습니다.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 이렇게 말씀하실때 정찬후에 이루어진 일 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정찬은 정찬대로 자기들이 가져온 것 을 먹고 그 다음에 주의 만찬이라는 것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만 찬을 시행하기 전에 자기들이 가져온 것을 각자 먹다 보니까 이런 분당이 생기 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면 치사하다. 이런 문제 가지고 성경에서 논란이 될까 고린도 교회는 참 치사하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것이 다 문제가 되었을까 도시락때문에 분열이 생기다니. 우리가 1장에서 분열 을 볼때는 나는 게바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바울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해서 그래도 그것은 분열이 되는 것이 명분이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는 순전히 먹는것 때문에 분열이 생겼다면 너무 치사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것이 없는가 내가 생각해보니 우리 교회는 없는데 왜 고린도 교회는 있는가 그러면 우리하고는 소용이 없는게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만일 고린도 교회만 있고 다른 교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 아마 이 성경이 쓰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교회에도 있으니까 바울이 미리 알고 써놓았다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아시니까 써놓았지요. 그래서 자기의 만찬이 라고 하는 것이 결국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구나. 실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 구나. 그러니까 '자기의 자랑, 자기의 열등감' 그런 것에 속한 것입니다. 많이 가 져온 사람은 자기의 자랑에 속하고, 못가지고 온 사람은 자기의 열등감에 속한 거지요. 물론 우리 교회 문제입니다. 다른 교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 교회로 보면 자랑과 열등감으로 분열될 수 있습니다. 많이 가지고 못가진것 때문에 갈등이 있을 수 있고, 잘나고 못난것 때문에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됨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말입니다. 이래서 모두 자기의 만찬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준비할 수 있는 것,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것. 내가 지금 저녁을 싸오는데 내 형편 만큼 준비하게 된다. 부자는 부자만큼,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만큼 준비할 것이니까. 이것은 자기가 준비할 수 있는 분량입니다. 그러 니까 자기 것이죠. 자기에게 속한것. 어떤 사람은 자랑거리가 있고, 어떤사람은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 있게 되겠지요. 그래서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 교회 도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구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됨을 방해하는것. 어떤 형제는 예를 들어서 저 사람은 부자니까하는 인식이 딱 박혀서 같이 교제 를 잘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를 들어서 그 사람은 성질이 고 약하니까 나는 상대하기가 싫다.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좌우지간 하나됨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는 전부 자기에게 속한 것입니다. 자기의 만찬에 속한 것입니다. 자기는 재미있다고 먹을 수 있는데 그것이 남에게 걸림이 되니까 결국 자 기의 만찬에 속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에서도 우스운 일이 있긴 있었 습니다. 옛날에 성찬식을 하자고 해서 떡을 뗀적이 있었습니다.물론 그럴 줄 알 았다면 몇 박스 빵을 갖다 놓았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텐데 저는 옛날 교회에서 하는 방식대로 쟁반에다 카스테라 잘라가지고 내면 장로님들이 하나씩 나눠 주 니까 그런 문제가 없는데 우리는 앞에서부터 먹고 뒤로 돌려라. 했더니 1/3도 다 못먹고 끝나버렸습니다. 포도주도 앞에서 부터 조금씩 먹고 돌려라 했더니 1/3도 못먹고 다 끝나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앞에 사람은 술에 취해서 있는 그런 일이 우리 교회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성찬식이라는 것을 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때는 배고픈 시절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주님을 따르다가 보 니까 너무 피곤해서 그랬는지 그 내용을 잘 모르겠어요. 이번에 이것을 보면서 생각이 났습니다. 옛날에 우리 교회에서 어떤 사람은 많이 먹어버리고 어떤 사람은 못먹게 되었구나.그리고 어떤 사람은 취했다는데 그때도 얼굴이 벌겋게 되 기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했던 그것은 그렇다고 자기의 만찬은 아니었어요. 자기 자랑이 되거나, 자기 열등감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좀 교양이 없는 것이 될 뿐이지 그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고 린도 교회문제는 자기 자랑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니까 자랑이 있으면 한쪽에는 열등감이 또 있거든요. 우리 교회안에서 열등감으로 시달리는 형제나 자매가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우월감때문에 공연히 우쭐되는 경우도 있고 이런 것들 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러가지 면에서 하나됨을 방해하는, 어떤 벽을 만들어 내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행정을 방해하는 것들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행정의 촛점은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되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생각할 때 참 좋은 것이 라고 여겨질지라도 하나됨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행정을 위반하기 때문에,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근원, 원천을 찾아 올라가보면 사탄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선악과도 마찬가지가 아니닙까 우리가 선악을 판단한다. 이것은 나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옳은 것이 무언지. 그른 것이 무언지. 나쁜 것이 뭐고, 좋은 것이 뭔지 판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뿐만 아니라 너무 너무 필요 한 일이 아니겠어요 우리가 현실적인 필요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것인데 어째 서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이 먹지말라고 했는가 그 선악을 판단하는 지식을 겉 으로보면 좋고 필요한데 그것을 가지고 살다 보면 우리는 분열이 생기고 말아 버립니다. 참 이상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데 왜 분열을 가져 오는가 하고 그 근원을 추적해서 올라 가면 그것이 바로 사탄에게서 나왔다 말입니다. 그러 니까 우리가 세상의 어떤 것을 보더라도 그것이 하나됨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 인지, 아니면 분열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인지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하나님의 행정을 아는 사람이 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르냐, 옳으냐. 여호와증인 사람들 만나면 옳고 그른 것을 따지자는 것입니다. 옳다, 그르다만 따지자면, 성경을 누가 옳게 보는가 그르게 보는가 이것만 생각하게 되면 이말도 맞고 그 말도 맞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뒤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렇게 되면 분열이 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근원을 추적해 올라가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행정을 방해하고 있다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별할 수 없으면 우리는 사탄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옳고 그른 것으로 또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끈질기게 자기들 이 연구한 성경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만난 사람들마다 그 렇게 얘기했습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하는 결과가 무엇인가 그렇게 되면은 분 열밖에 되지 않는가 그렇게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이다.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결국은 다 자기의 만찬에 속한 것입니다. 다 하나님을 빙 자하고, 성경을 빙자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다 자기의 만찬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헬라 사회에서도 이런 문제로 문제가 되어 소크라테스도 어디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애찬, 다시 말하면 회식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고 합니다. 그만큼 그 당시 헬라 사회는 회식문화가 유행했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만나서 먹으면서 교제하는, 초대교회에도 만나서 먹으면서 교제하는 그런 풍 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그렇게 먹고 싶고 배가 고프거든 각자 자기 집 에서 먹어라. 이런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모인 이유는 하나님앞에서 교 제하기 위해서 모였는데 너희가 음식을 가지고 잘 가져왔느니, 못가져왔느니, 먼저 먹느니, 나중에 먹느니 할려면 차라리 각자 집에서 먹어라. 이런 얘기를 하게 되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기다려라. 다른 사람과 함께 먹도록 기다려라. 만 일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렇게 하면 세상이 너희를 판단할 것이 아니냐 저 사람들은 모여서 회식연을 한다더니, 애찬을 한다고 하더니, 아가페를 한다고 하더니 보니까 엉 망진창이구나.
이렇게 판단할게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자랑이나 우월감이나 열등감이나 소유를 통해서도 우리가 서로 갈등을 느끼고 있다면 세상이 우리를 볼때 저 사람들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됨을 지킨다고 하더니, 교제 를 한다고 하더니 뭐 열등감이나 교제하고 있네. 우월감 교제하고 있네. 이렇게 비난하지 않겠습니까. 열등감있는 사람은 열등감있는 사람끼리 은혜가 된다고하 고 우월감있는 사람은 우월감있는 사람끼리 은혜가 된다고 하는데 은혜가 되긴 뭐가 은혜가 됩니까 자기가 공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 까 열등감있는 사람끼리 만나서 서로 편하고 좋은 것은 자기가 거기서 위로가 된다는 것이지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행정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딴 사람과는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정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물론 서로 편하기야 하겠지요. 자기가 열등감에 시달리던 사람이 자기 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면 불편하단말입니다. 근데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편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하다고 하나님의 행정을 돕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행정은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것인데 열등감도 하나되게 하지 못하고, 우월감도 하나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쇠고기도시락도 하나되게 하지 못 하고 채소도시락도 하나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때 부한 사람들도 채소 도시락을 좀 싸가지고 오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지만 그렇게 한다고 하나되지 못합니다. 공산주의는 다 가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 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또 다 부자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가 되어도 하나가 안되고, 가난 하다고 해서 하나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가 결국은 하나님의 행정을 방해하는 것은 우월감이나 열등감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큰 자나 적은 자나 마찬가지 입니다. 자기 열등감을 위로 받기 위해서 또 열등감을 찾아가서는 안됩니다. 그래서는 해답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계속 그런데만 찾아 다니게되고 다른 데는 못가게 됩니다. 교회안에서 그런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열등감 있는 사람은 열등감 있는 사람만 찾아 다니게 되고 다른 데는 찾지 않게 됩니다. 또 우월감 있는 사람은 우월감 있는 사람만 찾아 다니게 되지요. 그러니까 이것도 저것도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머리되심을 거부하고 나서 우리 인생과, 세상과, 우주를 보면 모든 것이 다 의문이고 부정적이고 합 당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여기서 부터 시작하느냐 아니면 '저절로 생겼다.' 로 시작하느냐 간단한 문제 같은데 이것 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렇 게 시작한 것은 우리는 머리 되심아래 있다는 뜻이고 '저절로 되었다. 이것은 머리되심 아래 있지 않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말이 좋은 말도 많고 훌륭 한 말도 많지만 그것이 근원적으로 어디서 나왔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 하나님의 머리되심을 인정한데서 나온 것이냐 아니면 그것을 부인한데서 나왔느 냐 말은 두가지 뿐입니다. 여러 가지 교훈이 있고, 말이 있고, 종교가 있지만 근원적으로 두가지 뿐 입니다. 하나님의 머리되심 안에서 하나님의 행정을 받아들이게 되고 긍정적으로 받아드리게 되고, 운명적으로 받아 드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렇게 말할때 우리의 운명은 벌써 정해진 것입니다. 내가 낳기 전 에, 내가 있기 전에, 하늘과 땅이 있기 전에 계신 이가 벌써 있었구나. 이것은 우리의 운명이, 확실히 모르지만 이미 운명이 있다. 그것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정해진 것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이 무언가 그것을 찾는 것이고 '저절로 생겼다.' 이렇게 되며는 그 머 리되심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정해진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무엇을 정 해가는 것입니다. 인생 자체가 그렇게 틀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는 이미 정해진 세계를 찾는 것이고, 정해진 것을 가지고 사용하는 것이고, 정해 주신 것을 우리가 행하는 세계이다. 또 하나는 자기 스스로가 정하고, 자기 스스로가 행하고, 자기 스스로가 모든 것을 하는 세계입니다. 완전히 두 세계가 다릅니다. 우리는 이제 귀신의 상과 주님의 상, 이 문제를 얘기 했는데 귀신의 상과 주 님의 상도 마찬가지로 잔치이니까 한쪽 잔치는 머리되심 아래 있는 잔치이고, 하나는 저절로 있다는 데서 생긴 잔치이니까 그 잔치 자체가 완전히 틀리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이 다르면 제물도 달라진다. 그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번에 10장에서 말씀드린 '상(床)' 그것은 잔치이고 마당이니까 구약으 로 말하면 제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 위에 모든 것이 드려지기 때문에 이것은 신약에 오면 십자가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십자가라는 단위에 놓여 지는 것이니까. 이것이 비유적으로 말하면 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땅에서는 모 든 소산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밥상을 보며는 많은 반찬이 있고 음식이 놓여 지듯이, 잔치집에 가면 잔치가 있듯이, 땅에서는 하늘의 어떠함에 따라서 무엇 이 나올 것인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참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상에 참여한다. 그것은 그 땅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것은 궁극적으 로 우리가 십자가에 참여하는 그런 삶을 말합니다. 그러나 만찬이라는 것은 제 물에 속한 것이죠. 음식에 속한 것이니까 이 제물은 바로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누림이 되는 것입니다. 땅에서 곡식이 나면 우리는 그 곡식은 먹고 또 활동하여 건강하게 됩니다. 이것은 누림입니다. 그래서 제물은 바로 우리의 누림이 되신 그리스도입니다. 단은 우리의 참여가 되는 십자가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땅에서 그 소산물' 이 납니다. 우상의 상에는 우상의 제물이 놓여지게 되고, 주님의 상에는 주의 제물이 놓여지게 되고. 상에 따라서 제물이 달라진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상은 우리에게 '정해진 운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상을 발견할 때 우리 가 거기에 참여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발견할 때 그것은 우리의 운명으로 발견 되기 때문에 우리가 참여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운명으로 발견되지 않 으면 우리는 참여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만 그것이 운명으로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참여가 되지않고 단지 십자가 의 어떤 면이, 순교적으로 자기가 감당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될 뿐이고, 상 자 체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제물은 어떤 성질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상은 우리의 참여를 위한 것이고 제물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상 위에 드려진 것은 모두 다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 데, 그 성질의 것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이 그런 성질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성질의 제물을 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송아지나 양이나 비둘기 나 곡식이나 이런 것들은 어떤 성분인데 그 성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바로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성분을 가져야만 당신의 행 정을 집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울을 가려면 버스나 기차나 비행기나 이런 수단을 이용하게 됩니다. 그래야만 서울에 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도 자기의 행정을 집행하는데 있어서는 어떠한 성질이 필요합니다. 그 행정을 집행하는데 필요한 성질이 송아지나 양이나 비둘기나 빻아진 곡식가루나 비틀 어 짜진 기름이나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행정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그런 본질 이고 체질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왜 그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그것 이 하나닙의 행정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잔치를 하기 위해서 돼지고기가 필요 한가 쇠고기가 필요한가 이런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집의 짓기 위해서 벽돌 이 필요하나 목재가 필요하나 이런 것과 같습니다. 벽돌집을 지으려면 벽돌이 라는 체질 본질이 필요하고 목조 건물을 지으려면 나무라는 그런 체질 그런 본 질이 필요하므로 그런 재질이 필요하게 됩니다. 나무를 가지고 벽돌집을 지을 수 없고 벽돌을 가지고 목조 건물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집을 건 축하는 문제는 행정의 문제 입니다. 행정의 문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 행정에 맞는 재질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제물입니다. 이 제물은 우리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송아지냐, 양이냐, 또는 비둘기냐 하는 문제는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나를 사용해서 당신의 우주적인 행정을 집행함에 있어서 필요하신 하나님의 필요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왜 송아지여야 하는가. 그것은 내 필 요가 아니고 하나님의 필요라는 것입니다. 내가 왜 양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내 필요가 아니고 하나님의 필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양을 가져야만 당신 의 행정을 이룰 수가 있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상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상이 있어야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상이 아니면 참여가 불가능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없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 상이 없다면 온 인류가 한자리에 참여할 자리가 없습니다. 그 상 때문에 온 인류가 한 자리에 참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두 인종이 다르고 사람의 생각 이 다르고 소유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신앙이 다르고, 모든게 다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상을 갖고 있는 셈이지요. 세상에서 그런 상들은 각자가 생각할 때 다 자기 상으로 모여 와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장로교라는 상으로, 감 리교라는 상으로, 천주교라는 상으로, 불교라는 상으로 다 모여 와야 한다. 모두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도 모든 인류를 한 상으로 모을 수 있는 상이 없습니다. 상들이 여러개가 되어 버렸기 때문 입니다. 상들이 여러개 가 되어 버리면 한 상이라야만 한 하나님이 있게 되는데 상이 여러개이기 때문에 한 하나님에게 제사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 좋은데 무엇이 문제가 되는 가 하면 하나님의 행정을 집행하게 하는데 필요한 것이 아니고 방해가 됩니다. 한 상만 있어야 하는데 여러 상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 상에 아무리 좋은 제물 이 놓여져 있었다 하더라도 상이 여러개 되어 버렸기 때문에 온 인류가 참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장로교라는 상이 참 좋은 상이지만 그 상에 온 인류가 다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천주교라는 상도 좋지만 그 상에 온 인류가 다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불 교라는 상도 좋은 점이 많은 상이지만 온 인류가 그상에 다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온 인류를 한 상에 참여 하게 하기 위해서 오직 하나 의 상을 내놓았는데 그 상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가 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상이 다 따로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없이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싫은것 같아도 꼭 있어야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고 우리 생각으로는 그것이 필요없는 것 같고 없 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안에서는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다 멸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행정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의 운명이죠.
우리가 그 한 운명안에서 만날 때만 우리가 참여가 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공동묘지에 가면 다 한 자리에 참여가 됩니다. 불교인이나, 기독교인이든지, 요즘은 비석에다 따로 새겨 놨지만, 기독교인은 십자가를 새겨 놓고, 불교인들은 꼬부라진 마크 표시를 해놓곤하지만 그것은 산 사람들이 갈라 놓은 것이지 죽은 사람들이야 다 똑같이 않습니까 죽어서 썩어가지고 뼈가 되면 그것이 거기라도 십자가가 박혀 있겠습니까,아니면 꼬부라진 십자가가 박혀 있 겠습니까 다 똑같은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지니라.'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속으로 모두 다 하나로 돌아가게 됩니다. 결국은 우리는 한 운명안에서 만나지는 것인데 십자가 밖에는 우리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의 참여를 위한 것이고 제물은 하나님의 행정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자기의 만찬과 주의 만찬이라는 그런 문제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자, 자기의 만찬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저녁에 먹는 정찬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아침 식사가 중요한 식사이지만 아마 서양 사람들은 저녁 식사가 정찬인가 봅니다. 그래서 두시간씩, 세시간씩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은 저녁 식사 (dinner)를 먹는 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바깥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얘기해 가 면서, 놀아 가면서 두 세시간씩 먹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정찬입니다. 우리나라는 저녁에는 잠잘것이니까 조금만 먹자. 쌀도 귀한데 잠잘것이니까 저녁에는 조 금만 먹자. 우리는 일하기 위해서 밥을 먹는 것이니까 아침에 잘 먹어야됩니다. 하루종일 일해야 되기 때문에 아침 굶고는 일을 못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서는 아침 식사가 제일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저녁 식사가 가장 호화로운 식사였습니다. 자기의 만찬 이것은 애찬(愛餐)이라고도 교회에서 불리 우는 것인데 왜 애찬이라고 하는가 하면 '사랑의 회식'이라는 뜻입니다. 자, 형 제들이 모두 모여서 사랑의 형제들이 모여서 회식을 한다. 그것입니다. 요즘은 군대에 가면 회식이 많지요. 계모임 같은것 그런 회식이 많습니다. 갑자기 군사 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회식(會食) 문화가 굉장히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식당이 모두 잘되는 이유가 다 회식때문입니다. 얼핏하면 회식하자 합니다. 처음에 나는 회식이 뭔지 몰랐습니다. 돌아 가면서 먹는다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바로 모일 '회(會)'였습니다. 모여 먹는다.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 후로 모여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헬라인들의 풍습가운데 사교적인 모임, 교제를 하는 사교적인 모임에 각자 저녁 식사를 자기가 준비해 가지고 와서 먹으면서 교제를 하는 그 런 사교적 풍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래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 의 식사를 각자가 준비해 가지고서 각자의 음식을 자기가 먹으면서 서로가 교 통을 하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자, 이것이 교회안에도 도입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먼저는 유대인들도 이런 습관이 있기 때문에 모여지게 된 것인데 이 것 때문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하면 어떤 사람은 쇠고기를 싸가지고 오고, 어떤 사람은 돼지고기를 싸가져와서 쇠고기파와 돼지고기파가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쌀밥 가져온 사람과 보리밥 가져온 사람이 갈라지게 되었다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부요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갈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풍성하게 싸가지고 와서 먹고 술까지 취하게 되었고 어떤 사람들 은 가져올게 없어서 배를 골고 있는 그런 현상이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빈부간에 구별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결 국 교회의 분당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원망도 생기고 시비도 생 기고 또 여러가지 문제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먼저 먹어 버린 사람, 많이 먹 고 술까지 취해 버린 사람, 아니면 아직도 못 먹은 사람. 이렇게 되었죠. 원래는 이것을 먹고난 후에 주의 상-성찬(聖餐)-이라는 것을 떼도록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 님께서 저녁을 잡수신 후에 잔을 가지고 축사하사라고 했듯이 저녁은, 정찬은 먹고 그 다음에 축사하는 떡을 뗐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계실때도 그랬습니다.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 이렇게 말씀하실때 정찬후에 이루어진 일 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정찬은 정찬대로 자기들이 가져온 것 을 먹고 그 다음에 주의 만찬이라는 것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만 찬을 시행하기 전에 자기들이 가져온 것을 각자 먹다 보니까 이런 분당이 생기 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면 치사하다. 이런 문제 가지고 성경에서 논란이 될까 고린도 교회는 참 치사하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것이 다 문제가 되었을까 도시락때문에 분열이 생기다니. 우리가 1장에서 분열 을 볼때는 나는 게바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바울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해서 그래도 그것은 분열이 되는 것이 명분이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는 순전히 먹는것 때문에 분열이 생겼다면 너무 치사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것이 없는가 내가 생각해보니 우리 교회는 없는데 왜 고린도 교회는 있는가 그러면 우리하고는 소용이 없는게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만일 고린도 교회만 있고 다른 교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 아마 이 성경이 쓰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교회에도 있으니까 바울이 미리 알고 써놓았다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아시니까 써놓았지요. 그래서 자기의 만찬이 라고 하는 것이 결국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구나. 실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 구나. 그러니까 '자기의 자랑, 자기의 열등감' 그런 것에 속한 것입니다. 많이 가 져온 사람은 자기의 자랑에 속하고, 못가지고 온 사람은 자기의 열등감에 속한 거지요. 물론 우리 교회 문제입니다. 다른 교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 교회로 보면 자랑과 열등감으로 분열될 수 있습니다. 많이 가지고 못가진것 때문에 갈등이 있을 수 있고, 잘나고 못난것 때문에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됨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말입니다. 이래서 모두 자기의 만찬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준비할 수 있는 것,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것. 내가 지금 저녁을 싸오는데 내 형편 만큼 준비하게 된다. 부자는 부자만큼,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만큼 준비할 것이니까. 이것은 자기가 준비할 수 있는 분량입니다. 그러 니까 자기 것이죠. 자기에게 속한것. 어떤 사람은 자랑거리가 있고, 어떤사람은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 있게 되겠지요. 그래서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 교회 도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구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됨을 방해하는것. 어떤 형제는 예를 들어서 저 사람은 부자니까하는 인식이 딱 박혀서 같이 교제 를 잘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를 들어서 그 사람은 성질이 고 약하니까 나는 상대하기가 싫다.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좌우지간 하나됨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는 전부 자기에게 속한 것입니다. 자기의 만찬에 속한 것입니다. 자기는 재미있다고 먹을 수 있는데 그것이 남에게 걸림이 되니까 결국 자 기의 만찬에 속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에서도 우스운 일이 있긴 있었 습니다. 옛날에 성찬식을 하자고 해서 떡을 뗀적이 있었습니다.물론 그럴 줄 알 았다면 몇 박스 빵을 갖다 놓았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텐데 저는 옛날 교회에서 하는 방식대로 쟁반에다 카스테라 잘라가지고 내면 장로님들이 하나씩 나눠 주 니까 그런 문제가 없는데 우리는 앞에서부터 먹고 뒤로 돌려라. 했더니 1/3도 다 못먹고 끝나버렸습니다. 포도주도 앞에서 부터 조금씩 먹고 돌려라 했더니 1/3도 못먹고 다 끝나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앞에 사람은 술에 취해서 있는 그런 일이 우리 교회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성찬식이라는 것을 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때는 배고픈 시절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주님을 따르다가 보 니까 너무 피곤해서 그랬는지 그 내용을 잘 모르겠어요. 이번에 이것을 보면서 생각이 났습니다. 옛날에 우리 교회에서 어떤 사람은 많이 먹어버리고 어떤 사람은 못먹게 되었구나.그리고 어떤 사람은 취했다는데 그때도 얼굴이 벌겋게 되 기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했던 그것은 그렇다고 자기의 만찬은 아니었어요. 자기 자랑이 되거나, 자기 열등감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좀 교양이 없는 것이 될 뿐이지 그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고 린도 교회문제는 자기 자랑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니까 자랑이 있으면 한쪽에는 열등감이 또 있거든요. 우리 교회안에서 열등감으로 시달리는 형제나 자매가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우월감때문에 공연히 우쭐되는 경우도 있고 이런 것들 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러가지 면에서 하나됨을 방해하는, 어떤 벽을 만들어 내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행정을 방해하는 것들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행정의 촛점은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되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생각할 때 참 좋은 것이 라고 여겨질지라도 하나됨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행정을 위반하기 때문에,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근원, 원천을 찾아 올라가보면 사탄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선악과도 마찬가지가 아니닙까 우리가 선악을 판단한다. 이것은 나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옳은 것이 무언지. 그른 것이 무언지. 나쁜 것이 뭐고, 좋은 것이 뭔지 판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뿐만 아니라 너무 너무 필요 한 일이 아니겠어요 우리가 현실적인 필요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것인데 어째 서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이 먹지말라고 했는가 그 선악을 판단하는 지식을 겉 으로보면 좋고 필요한데 그것을 가지고 살다 보면 우리는 분열이 생기고 말아 버립니다. 참 이상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데 왜 분열을 가져 오는가 하고 그 근원을 추적해서 올라 가면 그것이 바로 사탄에게서 나왔다 말입니다. 그러 니까 우리가 세상의 어떤 것을 보더라도 그것이 하나됨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 인지, 아니면 분열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인지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하나님의 행정을 아는 사람이 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르냐, 옳으냐. 여호와증인 사람들 만나면 옳고 그른 것을 따지자는 것입니다. 옳다, 그르다만 따지자면, 성경을 누가 옳게 보는가 그르게 보는가 이것만 생각하게 되면 이말도 맞고 그 말도 맞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뒤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렇게 되면 분열이 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근원을 추적해 올라가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행정을 방해하고 있다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별할 수 없으면 우리는 사탄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옳고 그른 것으로 또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끈질기게 자기들 이 연구한 성경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만난 사람들마다 그 렇게 얘기했습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하는 결과가 무엇인가 그렇게 되면은 분 열밖에 되지 않는가 그렇게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이다.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결국은 다 자기의 만찬에 속한 것입니다. 다 하나님을 빙 자하고, 성경을 빙자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다 자기의 만찬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헬라 사회에서도 이런 문제로 문제가 되어 소크라테스도 어디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애찬, 다시 말하면 회식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고 합니다. 그만큼 그 당시 헬라 사회는 회식문화가 유행했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만나서 먹으면서 교제하는, 초대교회에도 만나서 먹으면서 교제하는 그런 풍 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그렇게 먹고 싶고 배가 고프거든 각자 자기 집 에서 먹어라. 이런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모인 이유는 하나님앞에서 교 제하기 위해서 모였는데 너희가 음식을 가지고 잘 가져왔느니, 못가져왔느니, 먼저 먹느니, 나중에 먹느니 할려면 차라리 각자 집에서 먹어라. 이런 얘기를 하게 되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기다려라. 다른 사람과 함께 먹도록 기다려라. 만 일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렇게 하면 세상이 너희를 판단할 것이 아니냐 저 사람들은 모여서 회식연을 한다더니, 애찬을 한다고 하더니, 아가페를 한다고 하더니 보니까 엉 망진창이구나.
이렇게 판단할게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자랑이나 우월감이나 열등감이나 소유를 통해서도 우리가 서로 갈등을 느끼고 있다면 세상이 우리를 볼때 저 사람들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됨을 지킨다고 하더니, 교제 를 한다고 하더니 뭐 열등감이나 교제하고 있네. 우월감 교제하고 있네. 이렇게 비난하지 않겠습니까. 열등감있는 사람은 열등감있는 사람끼리 은혜가 된다고하 고 우월감있는 사람은 우월감있는 사람끼리 은혜가 된다고 하는데 은혜가 되긴 뭐가 은혜가 됩니까 자기가 공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 까 열등감있는 사람끼리 만나서 서로 편하고 좋은 것은 자기가 거기서 위로가 된다는 것이지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행정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딴 사람과는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정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물론 서로 편하기야 하겠지요. 자기가 열등감에 시달리던 사람이 자기 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면 불편하단말입니다. 근데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편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하다고 하나님의 행정을 돕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행정은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것인데 열등감도 하나되게 하지 못하고, 우월감도 하나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쇠고기도시락도 하나되게 하지 못 하고 채소도시락도 하나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때 부한 사람들도 채소 도시락을 좀 싸가지고 오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지만 그렇게 한다고 하나되지 못합니다. 공산주의는 다 가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 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또 다 부자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가 되어도 하나가 안되고, 가난 하다고 해서 하나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가 결국은 하나님의 행정을 방해하는 것은 우월감이나 열등감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큰 자나 적은 자나 마찬가지 입니다. 자기 열등감을 위로 받기 위해서 또 열등감을 찾아가서는 안됩니다. 그래서는 해답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계속 그런데만 찾아 다니게되고 다른 데는 못가게 됩니다. 교회안에서 그런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열등감 있는 사람은 열등감 있는 사람만 찾아 다니게 되고 다른 데는 찾지 않게 됩니다. 또 우월감 있는 사람은 우월감 있는 사람만 찾아 다니게 되지요. 그러니까 이것도 저것도 안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