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주의 큰 날과 신자들의 큰 날들 (습1:7-9)

본문

앞에서 생각한 말씀을 일생 동안 잊지 마시고 그 내용이 여러분의 신앙 생활이 되도록 기도하고 힘써야 됩니다. 주의 큰 날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날도 아니고 주님을 위한 날도 아니고 바로 우리를 위한 날입니다. 주의 큰 날 중에서도 성육신 하신 날이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신 날이 모두 우리를 위한 날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날은 죄와 사망과 음부의 권세와 사탄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날이요, 우리의 죄와 의를 보장하신 날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수없이 많은 약속을 열거하시고 그 열거된 말씀 위에, 마치 문서 맨 마지막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이 십자가로 당신의 죽으심과 사심으로 인을 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약속된 것을 믿으면 하나님도 부인하지 못하며 변경하지 못합니다. 이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재림의 날입니다. 주의 재림은 성도를 초청하는 날입니다. 우리를 영접하시는 날입니다. 초림의 주와 재림의 주는 다릅니다. 초림의 주는 탕자같은 우리들, 죄로 말미암아 피투성이가 된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성육신도 하시고 십자가도 지시고 부활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재림의 주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일은 다 끝났습니다. 재림의 주는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기다리는 신자를 영접하러 오십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기다리는 자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9:27-28) 말씀대로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두번째 나타나십니다. 과연 나는 죄와 상관 없이 주님을 기다리는가, 아니면 죄의 종이 되어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죄와 싸우면서 죄와 격투하면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성경은 주님이 죄와 싸우고 있는 사람이나 죄를 피해서 멀리 멀리 달아난 사람을 위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아예 죄와 상관 없는 자에게 두번째 나타나셔서 영접하신다고 했습니다. 초림의 주를 영접하지 못하면 재림의 주님을 심판의 주님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나 초림의 주를 영접한 신자는 재림의 주님을 자신을 영접하러 오시는 주님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참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 신자는 주님의 재림의 날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주님, 언제 오십니까 어서 오시옵소서!’ 하며 사모하고 기다립니다. 신부가 남편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로 주님이 임하시든지 저기로 주님이 임하시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 안의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의 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재림할 장소가 한국이다, 미국이다, 제주도다 하는 말은 도무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말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은 초림의 주님처럼 오시지 않습니다. 초림의 주님은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성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 땅에 가야 초림의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재림의 주님은 그런 주님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주님, 신령한 주님으로 오시는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일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주님에게 속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시간과 공간 안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과 공간이 벗겨지면서 다시 말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동양에 오시든지 서양에 오시든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오시는 재림의 주님을 만나는 성도들은 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며칠이다, 어디로 오신다 하는 말은 우리가 삼가해서 들어야 할 것이고 또 그런 신앙은 삼가해야 됩니다. 언제 오실른지 모릅니다. 아침에 오실른지 저녁에 오실른지, 내가 예배 드릴 때 오실른지 시장에서 장사할 때 오실른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언제 어디서나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되 그들을 영접하러 오십니다. 주님의 재림의 날은 신자들에게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지금도 판가름이 나서 갈라지고 있습니다만 그 때 가서는 다시는 합할 수 없도록 영원히 갈라냅니다. 알곡과 쭉정이입니다. 알곡된 심령에게는 크고 영광스러운 날이지만 쭉정이로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그 날이 영원히 감당할 수 없는 통곡의 날이요, 슬픔의 날입니다. 나와 여러분이 성경의 말씀대로 알곡이라고 하면 시장에 있든지 집에서 쉬든지 돈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 안이라고 해서 주님을 맞이하기에 나은 것이 없고 교회 밖이라고 해서 주님을 맞이하기에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알곡은 완전히 준비된 사람인데, 그 준비란 한마디로 말하면 ‘죄와 상관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죄와 상관 없는 사람이 알곡입니다. 그가 주님을 맞이합니다. 이 알곡에게는 주의 재림의 날이 참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똑같은 말씀이지만 산양과 면양을 가르러 오십니다. 주의 날이 어뗜 양에게 크고 영광스러운 날이 되며 어뗜 양에게 심판의 날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산양에 속했습니까, 면양에 속했습니까 목자가 와서 무얼 가릅니까 양은 다 양입니다. 목자가 오기 전에는, 심판이 오기 전에는 산양과 면양이 한 우리에서 살고 한 구유에서 먹습니다. 서로 들이받기도 하고 발로 밟기도 하며 함께 삽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주님이 오셔서 산양과 면양을 가릅니다. 그 후부터 면양은 산양한테 다시는 수모 당하는 일도 없고, 핍박 당하는 일도 없습니다. 아무도 면양을 공박하거나 밟지 못합니다. 남편이라도 아내라도 목사라도 이 면양을 절대 짓밟지 못합니다. 끝납니다. 그러나 산양은 면양이 밟지 않아도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 속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참 신부-결혼한 신부나 약혼한 신부를 영접하러 옵니다. 참 신부! 여러분 자신을 양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신부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지금까지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해도 신랑되신 주님을 향해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 아쉬움이 없어집니다. 다른 남편이 아닙니다. 내 남편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한 14:3) 주님께서 매 들고 심판하러 오시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면양에게는 심판이 없습니다. 알곡에게는 다시 심판이 없습니다. 신부에게는 다시 심판이 없습니다. 영접하러 오십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13) 지금 우리에게는 믿음과 소망이 크게 귀해서 왈가왈부합니다. 내게 믿음이 없어서 소망이 없어서 부족을 느낍니다. 믿음은 왜 필요합니까 언제까지 필요합니까 실물이 오기 전까지 필요합니다. 실물이 오면 믿음은 필요치 않습니다. 실물이 오기 전에 소망이 필요합니다. 실물이 오면 소망이 끝납니다. 땅 위에 있는 교회에게 제일 귀한 것이 믿음이요, 소망입니다. 교회 전체를 다 묶을지라도 믿음만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면 믿음과 소망은 끝납니다. 왜 믿음과 소망이 끝나느냐 하면 그때는 실물과 실물이 같이 한 보좌에서 한 영광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12) 믿음과 소망이 끝나고, 부분적으로 알고 그리워하던 사랑이 그때는 온전히 알고 영원 속에서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이 사랑이 성숙된 사랑입니다. 부자간에도 사랑이 끝이 납니다. 굴곡이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사랑의 굴곡이 있습니다. 지금은 주님과 우리 사이에도 사랑의 굴곡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불만족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되면서 실물이 왔을 때는 전혀 굴곡이 없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완전한 사랑! 영원한 사랑! 끝이 없는 사랑! 누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절대적인 사랑 안에서 그의 영광과 존귀와 거룩함을 찬양하는 일만 있습니다. 성도의 눈물이 언제 그치는고 그때 가야 그칩니다. 실물이 오기 전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그를 사모하는 눈물, 그리워하는 눈물, 아쉬워하는 눈물, 자기의 옛 사람을 발견하고 흘리는 눈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 주님이 오셔서 성도들의 눈물을 다 씻기십니다. 다시는 성도에게 이런 눈물이 없습니다. 이런 날이 주님 앞에 있습니다. 이것이 다 주님을 위한 날이 아니고 교회를 위한 날입니다. 나와 여러분을 위한 날입니다. 만일 우리가 바라고 살 것이 있다고 하면 이 날을 바라보면서 풍성함을 느끼면서 생을 보낼 것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 단독으로 하신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육신 하신 것도 누구의 기도를 듣고 하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 단독으로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도 누구의 권면이 없이 하나님 단독으로 계획하시고 이루셨습니다. 부활도 그렇습니다. 재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단독으로 다 이루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단독으로 이루신 일이 이제 나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양자간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양자간에! 그것이 본문에 있는 말씀을 보면 ‘나를 초청하는 날’입니다. 이 날을 여러분이 기억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초청하는 날은 모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초청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 시기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마태 22:4) 주님이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라고 나를 초청합니다. 이 날이 귀합니다. 누구에게든지 귀합니다. 누구는오고 누구는 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초청입니다. 악한 자도 오시오, 선한 자도 오시오 하는 초청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주님의 초청을 수락하는 날’입니다. 그때가 있어야 합니다. 언제 했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서 감격으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날이 바로 이 사실을 수락하는 날입니다. 이게 없으면 안됩니다. 따라서 하세요. “성경은 하나님이 죄인된 나를 초청하는 초청장이다” 눈을 뜨고 보면, 성경 66권 중에 하나도 예외가 없이 어떤 사건이든지 하나님이 죄인된 나를 (의인이 아닙니다. 옳은 것이 없습니다.) 초청하는 내용입니다. 다른 내용이 없습니다. 이 초청을 등한히 여기거나 불신하는 사람은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큰 죄인입니다. 아무리 살인을 많이 했어도 이 죄인만 못합니다. 아무리 간음을 많이 했어도 이 죄인만 못합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초청하는 초청을 거역하는 죄, 등한히 여기는 죄는 용납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용납한다 해도 이 말씀 자체가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 초청장을 알고 있습니까 초청장을 받았습니까 초청장을 받았다면 내 옷과 초청장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왜 주저주저합니까 실질적으로 왜 여러분이 이 초청장 앞에서 주저주저합니까 내 옷과 초청장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옷을 미끈하게 입었는데 내 옷은 이렇게 거지같으니 어떻게 갈까 하는 생각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보통 배짱 가지고는 안됩니다. 보통 신앙의 결단 가지고는 안됩니다. 대단한 신앙의 결단이 없으면 자꾸 자신의 옷을 보게 됩니다. 무식한 것하고 초청장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자, 남자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지위와 지식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하는 초청장은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초청장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있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내가 무식하니 어떻게 가겠나 내가 거지가 되었으니 어떻게 가겠나 부끄러워서 못간다. 체면 때문에 못간다-자기 체면을 돌아 보면 지옥가기에 합당합니다. 언제 가면 자기 체면을 벗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잘 이해해야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죄인된 나를 초청하는 초청장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 속에 깊이 생각하면서 남은 여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돈이 없어도 옷이 더러워도 자기 행위가 더러워도 귀하게 여길 것은 하나님의 초청장입니다. 나를 초청하는 초청장을 귀하게 여기는 심령, 그 신앙이 성숙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를 초청하는 초청장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우리를 영접하는 초청장이 아닙니까 이것만 가지고 가면 됩니다. 이것만 가지고 가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은 열에 아홉, 열에 열이 세상을 향한 눈물입니다. 주님이 세상적인 눈물을 씻겨 준다는 말이 없습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서 억울한 일을 당해고 흘리는 눈물, 주님이 그 눈물을 씻겨 주려고 십자가 지셨습니까 그걸 해결해 주려고 십자가 지셨습니까 아닙니다. 신령한 눈물입니다. 반드시 씻겨 주어야 될 신령한 눈물이 있습니다. 가치 있는 눈물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말라기 3:17)
하나님께서 청한 사람 또 믿음과 순종으로 오는 사람을 사람이 자기를 공경하는 아들을 아낌같이 아끼겠다는 말씀입니다. 목사라고 해서 아낀다는 말이 아닙니다. ‘너는 목사니까 내가 아끼겠다’ 라는 말은 못들어 봤습니다. 특별한 소유로 삼겠다. 사람은 돈이나 좀 보태려고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초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죽으심과 사심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영적인 초청은 그런 초청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 초청을 따라가면 그의 아량대로 대우해 주십니다. 누구같이 대우해 주십니까 우리가 주께로 나가면 누구같이 대우합니까 주님같이 대우합니다. 하나님같이 대우합니다. 뭐가 보좌가. 내가 앉는 보좌가 하나님의 보좌요, 주님의 보좌요, 바로 성도의 보좌입니다. 참 귀합니다.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말라기 3:17) 다윗은 시편 23편 5절에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원수였는데 그 앞에서 뚜렷하게 나를 치켜세워서 상을 베푸신다. 이 상은 밥상을 말합니다. 초청받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주인과 겸상을 받는 사람, 주인과 함께 한 상에서 먹는 사람은 최고의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니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시편 23:5) 나의 잔이 넘칩니다. 이런 사실입니다. 므비보셋은 왕에게 은혜 받을 조건이 없습니다. 있다고 하면 그의 아버지 요나단입니다. 그는 원수의 손자입니다. 왕을 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양식 없는 곳에서 숨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을 찾은 것이 아니고 왕이 그를 찾았습니다. 잘 아세요. 우리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찾아서 이 은혜의 자리에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므비보셋이 왕 앞에 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마음은 안 그런데 이렇고 저렇고 이래서 그랬습니다’ 하고 변명했습니까 아무 변명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변명이 소용 없습니다.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찌니라 (사무엘상 9:7)
왕이 이렇게 말했을 때 므비보셋은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시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말씀을 합니다. 므비보셋에게서 은혜만 제하면 어제도 죽은 개요, 오늘도 죽은 개요, 내일도 죽은 개입니다. 이 개의 신분을 무엇으로 면합니까 무얼 고쳐서 고칠 수가 없습니다. 어제도 죽은 개요, 오늘도 죽은 개요, 내일도 죽은 개입니다. 죽은 개 위에 하나님의 은혜, 왕의 은혜를 입힌 것입니다. 이 은혜만 벗겨 내면 여전히 죽은 개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죽은 개가 아닌 별 것인 줄 알면 잘못입니다. 여전히 죽은 개이나 그의 은혜가 나와 함께 있을 때에 왕자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고 성령님을 많이 받았어도 이 은혜를 떼어내면 죽은 개요, 썩은 개요, 냄새 나는 개입니다. 그걸 알 때에 일평생 감사하는 것, 감격하는 것이 그의 생활이 됩니다. 이제 므비보셋이 왕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왕을 아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을 향하신 주님의 심정을 아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왜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는가 왜 주님이 성육신 하셨는가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걸 확실히 알고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과 생활이 되었을 때 므비보셋이 입고 있는 그 은혜를 여러분도 입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서 빗겨가면 안됩니다. 하나는 언제든지 죽은 개같은 나입니다. 또 하나는 왕의 상에서 왕자와 함께 먹는 나입니다. 그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죄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말라기 3:18) 죄인과 악인을 분별하리라. 갈라내리라. 누가 주님이 갈라내기 보다도 ‘너희가 악인과 죄인을 갈라내리라’ 또한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분별하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 생활을 잘 하는 것입니까 므비보셋은 무엇으로 왕을 섬깁니까 왕이 돈이 필요합니까 또 므비보셋이 돈을 벌 수가 있습니까 무엇으로 하나님을 섬깁니까 무엇으로 주님을 섬깁니까 인간인 나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다소의 헌금이라도 바치면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까 물론 섬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므비보셋이 왕을 섬기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왕의 은혜를 깨닫고 왕을 알고 왕자들과 같이 편안하게 먹고 마시는 것뿐입니다. 불한당을 만난 사람은 사마리아인에 의해서 불한당을 만났던 곳과 상관 없는 먼 곳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곳이 주막입니다. 주막에 있는 불한당을 만났던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어떻게 섬깁니까 섬기는 길이 무엇입니까 이 사실을 알면 여러분의 신앙에 얼마나 도움이 되며 얼마나 승리인지 모릅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의인이며 악인을 갈라 내리라. (말라기 3:18) 내가 의인과 악인을 갈라내려면 내 신분이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의인은 무엇이며 악인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알지 못하면 갈라내지 못합니다. 참 신자는 의인이 무엇이며 죄인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또 자기 자신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인이 되어야 의인과 악인을 갈라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으로 야곱은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까 생활입니까, 믿음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 의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의가 되었습니까 믿음입니다. 의지하는 것,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 앞에 이 은혜를 받는 것, 이것을 아는 것,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무엇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까 생활로 섬겼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고 생활을 마음대로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생활로써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생활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해 보십시오. 해 보지 않으니까 뭐가 뭔지도 모르고 넘어가지, 정말 내 생활로 깨끗이 주님을 섬겨보자 하고 섬겨보세요. 바닥이 납니다. 섬겨봐야 바닥이 납니다. 못 섬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것, 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중 누구에게 의인과 죄인을 갈라내라 하실 때에 그가 참 신자라면 의인과 죄인을 갈라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갈라냅니다.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마태 13:49-50) 하는 말씀과 같이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부 의인뿐입니다. 의인의 표시는 무엇이고 악인의 표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 의인뿐인데, 의인이 의인 노릇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생활에 있습니까 생활 외에 다른 것에 있습니까 생활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예복입니다. 예복! 예복을 입은 사람이 의인입니다. 의인된 것이 생활 때문이 아니라고 하면 악인은 악인된 것도 생활 때문이 아닙니다.
생활로는 악인이 의인보다 더 나은 생활이 많습니다. 멸망 받을 사람이 의인보다 훨씬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복이 없습니다. 예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의인이고 예복이 없는 사람은 악인입니다. 이것으로 갈라냅니다. 이들은 언제 예복을 입었습니까 그 날에 가서 한꺼번에 일시에 예복을 입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하는 중에 초청을 받아서 가는 동안에 다 이 의를 알고 의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 잔치에 들어갑니다. 여러분!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변하고 시대가 변하고 인심이 변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는 것은 주님의 재림이 가깝다는 징조입니다. 주님의 재림도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지 않으면 산양과 면양을 갈라내지 못합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지 못합니다. 알곡에게는 그 날이 크고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면양에게는 그 날이 크고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는 참다운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 초조한 마음이 내게서 멀리 물러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737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