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날개 밑 (룻2:8-16)
본문
인간은 과학을 통하여 자연을 지배한다고 하지만, 자연은 과학을 수단으로 인간의 마음과 꿈을 피우게 깃들여 살 보금자리를 제공합니다. 정직한 자연은 주는 만큼 되돌려주며 되돌려 준 만큼 다시 요구합니다. 자연과 사람의 관계는 말하자면 입술과 치아와도 같은 관계입니다. 이는 우리 몸이 흙에서 난 때문이며 우리의 삶을 위한 터전이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후 육신의 쉴 곳도 자연인 것은 참으로 자연스런 진리가 아닙니까 고향은 그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입니다. 우리 개개인을 존재케 한 곳이며 따뜻한 품으로 안아 길러 낸 곳입니다. 그러기에 나오미도 마라로 불릴망정 고향 베들레헴을 다시 찾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리워하는 곳이 아닙니까
그런데 정작 우리의 영혼이 깃들일 곳은 어디입니까 육신의 고향도 그토록 그립다면 영혼이 안식할 포근한 날개 밑, 그 고향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1. 보아스의 날개 밑 시어머니의 백성과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이제 나의 백성 나의 하나님으로 의지하며 부끄럽고 어려운 걸음이지만 이삭 줍기에 나섰습니다. “어머니 저로 누구든지 은혜 베푸는 자의 밭에 나가 이삭을 줍게 하소서.” “내 딸아, 갈지어다.” 이 얼마나 예의와 사랑이 깃들인 대화입니까 작은 일일지라도 시모의 허락을 구하는 룻과 며느리를 항상 “딸”로 부르는 그 어머니, 하나님은 이들의 인정어린 대화 속에서 인간의 참된 모습을 보시며 강복의 손을 거두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연히 룻이 친족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다”고 기록하였지만 이는 인간 룻과 나오미가 의도한 것이 아니란 말일 뿐 분명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와 기뻐하시는 뜻의 결과였습니다. 소문대로 보아스는 유력자일 뿐만 아니라 유덕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유대인 남자요 밭의 주인이며 성의 유력자였으나, 한 사람은 이방 여인이요 그의 시녀도 못 되는 이삭 줍는 신분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로 베푸는 자의 위치였으나 한 사람은 가난한 자로 그의 동정을 받아야 연명이라도 할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말합니다. “내 딸아 들으라! 너는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이 밭을 떠나지 말며,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여기서 이삭을 줍되 목이 마르면 소년들이 길어 온 물을 마시라. 이는 네 행위를 내가 들었음이니라. 그리고 소년들아, 이 소녀를 건드리지 말라.” 너무나 뜻밖의 음성이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인간의 따스한 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보아스의 넉넉한 날개 밑이었습니다.
2. 여호와의 날개 밑 보아스의 후덕은 말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넉넉히 이삭을 줍도록 보리 베는 소년들에게 이삭의 줌을 버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녀만이 아니라 그녀의 시모를 생각했음이며 비록 고인이지만 자신의 친족 엘리멜렉까지 생각했음일 것입니다. “(룻2:20)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 행위에 보응하시고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너를 보호하시고 여호와께서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은 너무도 기뻤습니다. “나는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이방 여인이거늘 하물며 범인도 아닌 이 성의 유력지안 보아스까지 나를 알고 나를 후대하다니., 보리 이삭을 많이 줍는 것도 기뻤지만 무엇보다도 유대인에게 인간 대접을 받다니, 그래 나는 이제 참으로 유대인의 아내 되었음을 느끼는구나.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었구나.” 너무도 기쁘고 자부심 넘치는 하루였습니다. 저녁까지 열심히 주웠습니다. 온 몸이 땀에 젖고 온통 흙먼지가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엔 희열이 넘쳤습니다. “아! 이렇게 기쁜 날이 내게도 있다니.” 이삭을 떠니 한 에바나 되었습니다. 시모에게 빨리 돌아가 오늘 일을 말씀드리리라. 그녀는 그날의 수확과 일어난 모든 일을 시모에게 고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난 시모가 감격하여 외쳤습니다.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룻은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여호와의 복 그래, 보아스가 바로 내게 한 말이었어. 여호와께서 그 날개로 이 룻을 보호하시고 온전한 상 주시길.” 했었지. 사람인 보아스의 날개 밑도 이렇게 따뜻하고 기쁨이 넘치는데 여호와의 날개 밑은 과연 얼마나 좋을까 이방 여인 룻에겐 못내 궁금하면서도 무언가 “여호와의 날개 밑”이 그리움으로 느껴지는 하루였습니다.
3. 믿는 자가 거할 곳 이스라엘 백성들은 최후의 피난처로 여호와의 날개 밑을 찾았습니다. 후에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어 방랑할 때에도 바로 보아스가 룻에게 날개 되어 준 이 베들레헴 언덕을 오르내리며 여호와의 날개 밑을 노래하였습니다. 오늘날 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 된 그리스도인들이 거할 곳은 어디입니까 여전히 여호와의 날개 밑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날개 밑입니다. 왜입니까 이 곳만이 사망과 죽음에서 온전히 보호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그렇습니다. 선지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날개 아래, 그곳이야말로 우리 믿는 자들의 오새며 피난처요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1. 룻과 나오미의 고부 관계를 보며 우리 가정이 배울 점은
2.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내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날개가 되고 있나
3. 하나님의 날개 아래 들어오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런데 정작 우리의 영혼이 깃들일 곳은 어디입니까 육신의 고향도 그토록 그립다면 영혼이 안식할 포근한 날개 밑, 그 고향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1. 보아스의 날개 밑 시어머니의 백성과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이제 나의 백성 나의 하나님으로 의지하며 부끄럽고 어려운 걸음이지만 이삭 줍기에 나섰습니다. “어머니 저로 누구든지 은혜 베푸는 자의 밭에 나가 이삭을 줍게 하소서.” “내 딸아, 갈지어다.” 이 얼마나 예의와 사랑이 깃들인 대화입니까 작은 일일지라도 시모의 허락을 구하는 룻과 며느리를 항상 “딸”로 부르는 그 어머니, 하나님은 이들의 인정어린 대화 속에서 인간의 참된 모습을 보시며 강복의 손을 거두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연히 룻이 친족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다”고 기록하였지만 이는 인간 룻과 나오미가 의도한 것이 아니란 말일 뿐 분명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와 기뻐하시는 뜻의 결과였습니다. 소문대로 보아스는 유력자일 뿐만 아니라 유덕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유대인 남자요 밭의 주인이며 성의 유력자였으나, 한 사람은 이방 여인이요 그의 시녀도 못 되는 이삭 줍는 신분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로 베푸는 자의 위치였으나 한 사람은 가난한 자로 그의 동정을 받아야 연명이라도 할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말합니다. “내 딸아 들으라! 너는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이 밭을 떠나지 말며,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여기서 이삭을 줍되 목이 마르면 소년들이 길어 온 물을 마시라. 이는 네 행위를 내가 들었음이니라. 그리고 소년들아, 이 소녀를 건드리지 말라.” 너무나 뜻밖의 음성이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인간의 따스한 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보아스의 넉넉한 날개 밑이었습니다.
2. 여호와의 날개 밑 보아스의 후덕은 말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넉넉히 이삭을 줍도록 보리 베는 소년들에게 이삭의 줌을 버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녀만이 아니라 그녀의 시모를 생각했음이며 비록 고인이지만 자신의 친족 엘리멜렉까지 생각했음일 것입니다. “(룻2:20)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 행위에 보응하시고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너를 보호하시고 여호와께서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은 너무도 기뻤습니다. “나는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이방 여인이거늘 하물며 범인도 아닌 이 성의 유력지안 보아스까지 나를 알고 나를 후대하다니., 보리 이삭을 많이 줍는 것도 기뻤지만 무엇보다도 유대인에게 인간 대접을 받다니, 그래 나는 이제 참으로 유대인의 아내 되었음을 느끼는구나.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었구나.” 너무도 기쁘고 자부심 넘치는 하루였습니다. 저녁까지 열심히 주웠습니다. 온 몸이 땀에 젖고 온통 흙먼지가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엔 희열이 넘쳤습니다. “아! 이렇게 기쁜 날이 내게도 있다니.” 이삭을 떠니 한 에바나 되었습니다. 시모에게 빨리 돌아가 오늘 일을 말씀드리리라. 그녀는 그날의 수확과 일어난 모든 일을 시모에게 고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난 시모가 감격하여 외쳤습니다.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룻은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여호와의 복 그래, 보아스가 바로 내게 한 말이었어. 여호와께서 그 날개로 이 룻을 보호하시고 온전한 상 주시길.” 했었지. 사람인 보아스의 날개 밑도 이렇게 따뜻하고 기쁨이 넘치는데 여호와의 날개 밑은 과연 얼마나 좋을까 이방 여인 룻에겐 못내 궁금하면서도 무언가 “여호와의 날개 밑”이 그리움으로 느껴지는 하루였습니다.
3. 믿는 자가 거할 곳 이스라엘 백성들은 최후의 피난처로 여호와의 날개 밑을 찾았습니다. 후에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어 방랑할 때에도 바로 보아스가 룻에게 날개 되어 준 이 베들레헴 언덕을 오르내리며 여호와의 날개 밑을 노래하였습니다. 오늘날 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 된 그리스도인들이 거할 곳은 어디입니까 여전히 여호와의 날개 밑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날개 밑입니다. 왜입니까 이 곳만이 사망과 죽음에서 온전히 보호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그렇습니다. 선지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날개 아래, 그곳이야말로 우리 믿는 자들의 오새며 피난처요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1. 룻과 나오미의 고부 관계를 보며 우리 가정이 배울 점은
2.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내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날개가 되고 있나
3. 하나님의 날개 아래 들어오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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