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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이 예찬하는 신부들 (아4:1-15)

본문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지만 본문의 말씀을 같이 읽고 생각하려는 것은 '신랑이 예찬하는 신부들'인데 너울 속에 있는 신부의 아름다움, 귀함을 신랑 되신 주께서 예찬하는 내용입니다. 신랑이라 신부라 하는 말은 우리 가 알아듣기 위해서 쓰는 말이지 육신의 신부나 신랑이 아님을 여러분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신랑은 하나요, 신부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 교인들 중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신부가 되는 사람은 극히 적다 하는 것을 늘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도 신자요, 여러분도 신자요, 어느 교회에 나가든지 다 신자입니다. 또 과거로부터 오늘까지 수없이 많은 신자 들이 오고 갑니다. 그 중에 술람미 같이 신랑의 예찬을 받는 신부는 누구 이며 또 그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 신부는 피부가 검습니다. 피부만 검은 것이 아니고 백인에 비해 그 차이가 굉장히 많습니다. 백인같이 곱고 아름답고 기묘한 사람이 아니라 검은 사람, 모양도 별로 없는 사람, 과원지기의 딸, 자기의 과원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 여기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 신부를 이렇게 예찬하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 해 보면 오늘도 신랑되신 주님이 찾으시는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 을 알 수 있습니다. 얼굴이 잘난 사람도 아니요, 학식이 많거나 똑똑한 사람도 아닙니다. 신랑이 예찬하는 신부들은 학식이 균등하지 않습니다. 경제가 균등하지 않습니다. 모든 면에서 균등을 이룬 것이 없습니다. 있다고 하면 신령한 일에 균등합니다. 신앙의 균등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초장에 누워 있는 양 들입니다. 갖추어야 할 것을 모두 갖춘 양! 본문의 말씀대로 신랑되신 주께서 예찬하는 예찬을 우리가 마음 속에 받아들일 수 있느냐, '그렇다!' 하고 응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약 중에서 아름다운 신부는 바울입니다. 많은 신부가 있지만 한 사람 을 선택하라고 하면 바울을 꼽을 수 있습니다. 구약에도 많은 신부가 있지 만 한 사람을 꼽는다면 술람미입니다. 동시에 많은 신부들이 있습니다. 다 시 말하면 신랑되신 주님의 예찬은 바울이나 술람미만 받아서 누리는 특 혜가 아닙니다. 오늘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도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의 보 혈을 믿음으로써 이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형성됩니다.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1절) 갖추어야 될 것을 다 갖춘 신자가 길르앗산 기슭에 누워 있는 양들입니다. 길르앗산 기슭에 누워 있기 때문에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었다는 것이 아니고 갖추어야 할 것을 다 갖춘 성도를 향해서 길르앗산 기슭에 누워 있는 양들과 같다고 예찬하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누워 있다고 하는 것은 겉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신앙 상태, 심 령 상태, 신앙의 여부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누워 있는 자체를 아름답다 거나 대단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갖추어야 할 것을 다 갖춘 신앙을 예 찬하는 것입니다. 갖추어야 할 것을 모두 갖춘 심령은 그것이 바로 주님의 초장입니다. 또 그 심령은 누워서 편히 쉬고 안식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님의 풍성한 초장! 나와 여러분에게는 주님의 풍성한 초장이 무엇이 겠습니까 사람이 먹이는 양들에게는 물어볼 것도 없이 그곳이 산이 되었 든지 들판이 되었든지 풀과 물이 있는 곳이면 초장이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초장은 무엇입니까 성도의 초장은 주님의 초장인데 구체적으로 말 하면 기록된 말씀입니다. 기록된 말씀이 없는 심령은 초장이 없는 심령이고 기록된 말씀의 풍성 함을 따라서 쉬고 있는 심령은 주님의 초장에 누워 있는 양들과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곧 주님의 초장이요, 주님의 말씀은 곧 우리가 먹고 쉴 수 있는 초장입니다. 이 점을 여러분들이 귀하게 여겨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 심령과 생활과 인격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풍성하게 되 면 그는 바로 주님의 초장에 누운 양이요, 갖추어야 할 것을 다 갖추고 편 히 쉬는 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성취되면, 곧 회개나 구원이 나 성결이나 의나 영광스러운 것이 스며들게 되면 그 심령은 바로 주님의 초장입니다. 이 초장에는 가뭄이 없습니다. 홍수도 없습니다. 비가 와서 초 장이 망가지거나 바람이 불어서 초장이 거칠어질 염려가 없는 영적 신령 한 초장입니다. 술람미가 상상의 인물이든지 실물이든지 그것은 우리에게 상관이 없습니다. 실물을 놓고 말씀하거나 상상의 인물을 놓고 말씀하거나 주님이 기 뻐하시는 내용은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술람미라고 하는 인물을 우리가 흠모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어떻게 생겼든지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 자체를 흠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안에 있는 신앙, 그들 안에 있는 주 님과의 관계를 우리가 흠모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사람들 중에도 신자들에게는 가장 귀한 것이 그 마음 속 에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얻어 먹든지 환란과 역경 가운데 서 유리 걸식을 하든지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면 이미 구원이 성취된 사람이요, 성결이 성취된 사람입니다. 의로움이 성취된 사람 입니다. 갖은 영광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하는 말씀 가운데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 밖에는 귀한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아름다운 직위를 가졌어도 그 직위가 귀한 것이 아닙니다. 직위는 겉사람입니다. 겉사람 안에 있는 내적 사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성취된다고 하면 참 귀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지 않는다고 하면 아무리 귀한 직위를 가졌다 해도 그 직위가 하나님 앞에서 그를 세우지 못합니다. 이 점을 우리가 알아야 될 것입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1절) 주님이 신자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인데 무엇 때문에 어여쁘다고 하십니 까 헌금을 많이 하거나 열심이 특출하기 때문에 어여쁘다고 하십니까 바울은 주를 알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아주 특출했습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아름다운 것이 열이나 백이 있다 해도, 교회가 흠모하고 부러워 할 수 있는 것이 천 가지나 만 가지가 된다 해도 (잘 들으시오) 그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너울입니다. '너울 속에 있는 신부'입니다. 너울 속에 있는 신부!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도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너울 속에 있는 눈입니다. 여자라고 해서 다 신부가 아닙니다. 그 중에는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 부유한 사람, 재주가 많은 사람 등 여러 부류 의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주가 많은 것도 똑똑한 것도 주님이 예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검고 못났어도 신랑이 선택해서 너울 속에 둔 신부를 예찬합니다. 여러분의 심령이 너울 속에 가려져 있다면 남이야 못났다고 검다고 없 다고 수없는 돌을 던져도 여러분은 신부입니다. 세상이 인정하지 않아도 신랑이 인정하는 신부입니다. 신자는 이 너울을 알아야 합니다. 너울을 알 지 못하면 신부의 자격이 없습니다. 너울 속에 있는 신부로서 쉴 수 있는 자리에 누울 수 있는 자리에 누워서 쉬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영적으로 신자가 누울 수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신령한 곳으로서 신자 가 쉴 만한 곳이 어디입니까 못 쉽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살인을 해서 보복자가 따라 오는데 보복자에게 추격을 당하는 나는 누워 있을 곳이 없 습니다. 쉴 만한 곳이 없습니다. 잘 아시기 바랍니다. 바울 자신이 외친 것처럼 '나는 죄의 종이라, 죽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원하랴!' 하는 부르짖음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도피성 밖에서는 로마서 8장 이후의 안식하는 내용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죄인이 누워서 쉴 만한 곳이 있다고 하면 도피성 안입니다. 제단 뿔을 붙잡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들이 경제나 지위나 지식이나 가정이나 자녀 나 이런 외적인 생활들이 내 마음을 편안히 누워서 쉬게 해 주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누워서 쉴 수 있는 곳은 오직 주님 안입니다. 도피성 밖에는 없습니다. 신자는 그의 마음과 생애가 주님이 흘리신 보혈에 잠긴 바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님의 보혈이 그를 삼킨 바 되어야 합니다. 그 렇게 되어야 보혈이 귀합니다. 우리가 입으로만 십자가, 십자가 하지 말고 (보혈 충만이 성령님 충만인 데) 우리가 쉴 만한 곳에서 쉬고 누워야 할 곳에 누워야 신랑의 예찬이 그때부터 나옵니다. 성경을 보면 열심 있는 사람이나 돈 많이 내는 사람이 나 심지어 전도를 많이 하는 사람조차도 주님의 예찬 가운데 들어가지 못 했습니다. 다만 너울 속에 있는 신부, 주님의 보혈에 삼킨 바 된 사람을 극도로 예찬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우리는 누울 곳에 눕고 쉴 곳에서 쉬는 심령인가, 보복자가 해 하지 못할 곳에 내 심령이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너를 야곱 이라 하지 말라, 이스라엘이라 하라' 하시는 말씀 안에 있는 야곱은 이 말씀대로 보면 너울 속에 감춰져 있는 생명입니다. 이 사실이 없으면 안됩니다. 이 사실이 없으면 죽도록 일해도 나를 보장해 주는 법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만일 우리 심령이 도피성에 들 어가서 편히 쉬고 있다면 도피성 밖의 일은 사실상 간섭할 일이 아닙니다. 누가 이러니 뭐가 저러니 하고 간섭하는 것은 아무리 바람직한 내용이라 해도 옳지 못합니다. 너울 속에 있는 신부가 그렇게 주장이 많고 고집이 세다고 하면 신랑되신 주님은 그를 예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밭입니다. 하나님의 집입니다. 밭이 주인을 향해서 가 부간에 주장하는 것은 안됩니다. 집도 주인의 마음과 뜻대로 세워지는 것 이지, 집의 뜻을 따라서 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마음대 로 했을 때에 아름다운 결과를 얻게 되고 또 나 자신도 기뻐하고 또 주도 기뻐하게 됩니다.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7절) 아무 흠이 없는 사람이 너울 속에 들어 간 것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흠 투성이인데 너울 속에 들어가니까 신랑되신 너울이 모든 허물을 덮고 있 습니까 거기 있고 거기 있는 말씀 같지만 여러분의 심령 안에서 이것이 깊이 밝아져야 됩니다. '나의 사랑, 너는 아무 흠이 없구나' 너울 속에 있는 신부에 대한 주님 의 예찬입니다. 우리는 너울 외에는 예찬 받을 만한 일도 없고 주님이 예 찬하지도 않습니다. 너울 외에는 우리가 쉴 수 있는 곳도 없고 누울 수 있는 곳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사실을 교회가 원치 않습니다. 제가 점점 더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육의 것을 말하면 흥미를 갖는데 신앙의 아름다운 것을 말 하면 흥미를 잃어 버립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9절) 신자가 주님의 마음을 어떻게 빼앗습니까 무슨 일을 해서 빼앗습니까 일을 많이 하면 주님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하면 수가성 여인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주님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이겠습니까 룻 이 보아스의 마음을 빼앗았다고 하면 보아스의 마음을 빼앗는 요소가 무 엇이겠습니까 오늘의 신자들이 주님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요소는 무 엇입니까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주님의 마음을 빼앗았습니다. 열심입니 까, 헌금입니까 봉사입니까, 전도입니까 신자가 무엇을 해야 주님의 사랑을, 주님을 흡수할 수 있습니까 이런 점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약속보다는 그 약속이 성취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성취될 때에 주님은 우리를 흠모하게 됩니다. '나의 누이야, 나의 신부야' 하고 예찬하게 됩니다. 이 '너울 속'이라고 하는 말을 아주 귀하게 여기십시오. '나의 신부 너는, 아무 흠이 없는 너는, 아름다운 너는 내 마음을 빼앗았다.' 너울 속에 가려져서 아무 흠이 없는 아름다운 자가 주님의 마음을 빼앗습니다. 세상은 너울 속에 있는 그 사람을 흠모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흠모하지 않습니다. 종교인들이 흠모하지 않습니다. 비밀입니다. 숨겨져 있습니다. 주님만이 그를 흠모하고 주님만이 '너는 내 사랑을 빼앗았다' 하는 고백을 그에게 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10절, 11절) 너울 속에 있는 그 자체를 지금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살아 있습니다.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그 사랑을 취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 의 사랑을 신자가 취하지 않으면 느끼지 않으면 주님의 사랑도 소용이 없 습니다. 또한 주님을 향한 신자의 사랑을 주께서 취하지 않는다면 이런 노 래, 이런 예찬은 나오지 못합니다. 포도주는 모양에 있지 않습니다. 분량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고 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손을 들어서 포도주를 흡수하는 데 있습니다, 피차에. 포도주를 흡수하지 않으면 저 흘러가는 맹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 이 말씀하는 새 술도 또 포도주도 모양이나 분량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 시는 것을 받고 취하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취할 때에 그 포도주의 맛이 만족스러운 것을 압니다. 취하는 사람만이 압니다. 그러나 백 말이 아니라 백 섬을 놓고 구경해도 취하지 않습니다. 구경 하는 것으로는 절대 안 취합니다. 내가 직n접 마셔야 그 맛을 알 뿐 아니라 취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우리가 보고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흡수해 야 합니다. 주님이 아무리 귀하고 복음이 아무리 귀해도 말로 하거나 보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내가 신부라면 주님에게 취함을 받는 신부 가 되어야 됩니다. 또 나 자신도 신랑되신 주님을 취해야 됩니다. 주님은 나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고 나도 주님을 나의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취할 때에 내가 그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은 나 를 만족하게 합니다. 만일 취하는 일이 없으면 사랑을 알 길이 없습니다. 얼마나 긴지 얼마나 높은지 얼마나 깊은지를 모릅니다. 주님의 사랑을 여러분들이 흡수하게 될 때에 비로소 주님의 사랑이 높다고 하는 것을 찬양 할 수 있고 깊다고 하는 것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 신앙 생활 가운데 주님을 노래하지 못하는가 하면 취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양은 있습니다.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난다. 참으로 우리의 신앙은 아주 시적입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것입니다. 이제 이런 신부를 다 한 곳에 모 으시고 영원한 사랑을 속삭일 것입니다. 참 귀한 말씀이 많습니다. 신부의 사랑이 왜 포도주에 지나는고, 왜 포도주보다 진한고 주님과 신 자의 관계는 나무 덩어리나 돌멩이 같은 관계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관계 입니다. 바울과 주님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만일 바울과 주님의 관계가 우리와 주님의 관계 같았다고 하면 성경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름다 운 편지 한 장 제대로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그에게 취함을 받고 내가 그를 취하는 일, 서로 사랑을 주고 받는 일이 없으면 일평생 가야 주님에 대해서 한 마디의 간증도 하지 못합니다. 왜 내가 모르니까. 주님을 모르는데 어떻게 간증합니까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 간의 생활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서로 주고 받고, 먹고 마시는 데 있습니다. 주님과 나의 신령한 생활도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주고 받는 일, 이것이 우리 에게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에 '포도주에 지난다' 하는 예찬이 나옵니다. 세상의 모든 것, 귀 한 것, 아름다운 것, 가치 있는 것을 포도주에 비한다고 하면 이 신부가 가지고 있는 사랑은 그 포도주보다 더 진합니다. 훨씬 더 진합니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아가 2:3)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풀밭의 사과나무와 같습니다. 세상의 모 든 흠모할 만한 것이 풀이라고 하면 주님은 사과나무입니다. 어떻게 아느 냐 먹어 본 사람이 아니면 접근해 본 사람이 아니면 이를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하면서 귀한 은혜를 여러분들이 가지시기 바랍니다. 신자라고 해서 다 신부가 아닙니다. 이름만 신부가 아니고 반드시 너울 속에 있어서 쉴 만한 곳에 쉬고 누울 만한 곳에 누운 신부, 갖추어야 될 것을 갖춘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환상이 아니고 누구든지 자기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4: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 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아무리 좋은 향품이 많아도 네게 있는 기름의 향기가 가장 극심하다' 하는 말씀인데 이런 말씀을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신부가 가지고 있는 기름의 향기를 신랑이 예찬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잘 알아야 됩니다. 이 아가서도 하나에서 열까지 다 신랑되신 분의 것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주님의 것을 다 받아서 자기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잘 생각하 시기 바랍니다. 물론 마리아가 옥합을 깨서 주님의 머리 위에 붓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 있는 기름은 그것과 달리 생각해야 됩니다. 시편 133편에 나오는 '머리 위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형제와 형제끼리 연합한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나 형제와 형제가 연합 하는 것은 다음의 일이고 먼저는 형되시는 주님과의 연합,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과의 연합이 있어야 합니다. 그 연합이 없으면 형제라고 하는 단어 를 그 사람에게 쓸 수 없습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모두 한 형제입니다. 단일 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런 면으로 형제라 하는 것이 아니 고 하나님과 주님과 연합한 형제들입니다. '형제와 연합하여 동거함이.' 동거라고 하는 것은 너는 네 집에 살고, 나는 내 집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한 집, 한 위치에서 사는 것이 동거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거, 주님과 함께 동거, 형제들의 신령한 것이 동거 합니다. 이것이 어디서부터 이렇게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우리에게 선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구제를 생각합니다만 구제도 일일이 다 들추어 내 면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있는 말씀을 보면서 깊은 생각을 했습니다. 터 위에 금은 보석으로 집을 짓기도 하고 나무와 풀로 집을 짓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 불로 그것을 연단합니다. 심판합니다. 말씀 대로 남아 있으면 다행이지만 불에 타면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내 생활을 잘 압니다. 남은 내 생활을 몰라도 나 자신은 내 생활 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알고 있는 나는 괜찮은데 내가 알 고 있는 나는 형편 없는 것을 크게 한탄했었습니다. 어떤 일을 했을 때, 많은 사람이 예찬해 줍니다. 그러나 그 일을 면밀히 들여다 보면 남은 나를 예찬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나를 예찬할 수가 없습니다. 불 가운데에다가 자기 자신을 넣어 보면 안 타는 것이 없습니다.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신앙 생활하면서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것이 주님의 의 요, 주님의 용서하심이요,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입니다. 주님의 의와 용서 하심과 긍휼 외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없는 생명은 다 타고 맙니다. 신부의 기름의 향기에 주님이 만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 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나도 신자이고 여러분들도 신자입니다. 여러분에게서 향기로운 기름을 주님이 취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게 무엇이겠 습니까 무엇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기름이겠습니까 열 처녀 중에 다섯 처녀가 기름을 가졌습니다. 그 기름은 자기가 노력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선물입니다. 잘 알아야 됩니다. 왜 너울 속에 있는 사람이 아름다운 기 름의 향기냐 하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 위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내려서 그 옷깃까지 내 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편 133편) 자,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형제는 누구와 연합했습니까 형제는 복수입니다. 형제가 아무리 많아도 누구와 연합했습니까 먼저는 주님이 중보자 되시고 아버지와 연합했습니다. 주님과의 연합입니다. 연합하면 한 몸입니 까, 두 몸입니까 한 몸입니다. 본래 기름은 발에다 붓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에 붓습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입니다. 이 연합한 몸의 머리는 누구입니까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위에 부으신 기름이지 내 기름이 아닙니다. 나의 아름다운 미 덕이 아닙니다. 나의 미덕이라고 하면 그 다음을 해석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결코 나의 미덕이 아닙니다. 주님에게 연합한 사람들, 주님에게 붙은 사람들에게 흐르는 기름입니다. 주님의 머리 위에 있는 기름이 아론의 수염으로 (아론은 누구입니까 제사장입니다.) 아론의 가슴으로 또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이 흐르는 기름의 향기를 말씀합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기름의 향기는 여러분에게서 찾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 해도 거기에는 나쁜 것-물론 도덕적으로는 나쁜 것을 찾 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나쁜 것을 압니다. 주님이 흠모할 수 있는 기름의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찾지 못합니다.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다.' 잘 알아야 됩니다. 아마 너울 속에 있는 신부는 너울을 피해서 갈 수 없는 신부는 이 말을, 이 해석을 '그렇습니다.' 하고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에는 꿀과 젖이 있고 참 신자의 입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집니다.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이 떨어진다.' 제 삼자의 말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입니다. 신랑되신 주 님이 신부된 분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어여쁜지 얼마 나 귀한지 얼마나 흠이 없는지 네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에는 꿀과 젖이 있다고 하시는 주님의 예찬입니다. 신부의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 까 사랑하는 신부의 입술에서 떨어지는 꿀방울!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지위입니까, 학식입니까 열심입니까, 충성입니까 아무리 충성이 귀해도 사랑만 못합니다.
열심이 없으면 안되지만 열심이 사랑만 못합니다. 봉사 도 필요하지만 봉사가 입에서 흐르는 꿀방울은 될 수 없습니다. 열심이나 충성이나 봉사가 입에서 흐르는 꿀방울은 아닙니다. 입에서 흐르는 꿀방울-바위 틈 낭떠러지 안에 들어가서 하나밖에 없는 주님을 향해서 마음껏 그 사랑을 쏟을 때, 사랑을 논할 때 주님은 그 신부 를 흠모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른 것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이상입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험한 곳에서 주님께 사랑을 쏟는 심령, 주 님을 흠모하는 그 심령을 말씀합니다. 또한 주님에 대한 신자의 간증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에 대한 간증입니다. 다시 사신 주님에 대한 간증입니다. 그런 간증이 없는 신앙은 무의미 합니다. 우리가 수많은 간증을 들어보지만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간증이 나 주님의 다시 사신 의에 대한 간증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만일 100 명의 간증을 듣는다고 하면 그 중에서 한두 사람, 두세 사람도 주께서 흠 모할 수 있는 간증을 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두 집사님이 앉아서 주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방 종 교인들의 입에서는 주님이 들으시기에 만족한 꿀과 젖이 흐르지 않는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9 나는 이런 것을 마음 속에 두고 많이 생각합니다. 긴긴 시간 동안 교회 앞에 말씀을 했고 교인들과도 많은 말씀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 말을 주님 이 다 듣고 계십니다. 어제 한 말, 오늘 하는 말, 내일 할 말을 계속해서 주님이 듣고 계십니다. 그 말을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감탄하실지 칭찬하실지 아니면 책망하실지를 생각합니다.
또한 10년 전에 했던 설교를 내가 다시 하거나 들을 때에 내 마음 속에 부담이나 책망이 없으면 주님이 용납하시지만 나 자신이 거북함을 느낀다 고 하면 주님도 예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멜이나 음행한 여자같이 사람들한테 버림을 받는 사람이라도 주께 나왔을 때에 주님이 사랑과 자비와 긍휼로 용납해 주신다, 주님이 인 도해 주신다, 주님이 팔로 안으신다, 아름다운 관을 씌우신다 하는 이런 내용, 이런 말은 아무리 반복할지라도 주님이 반복한다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입에서 꿀과 젖이 흐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잘 기억해야 됩니다. 하는 것도 그렇고 듣는 것도 그렇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4:11) 혀 밑이라고 하는 말은 숨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 영향력을 말씀합니다. 참 귀합니다. 내가 신앙의 사람을 대할 때에, 그에게 접근할 때 에 그의 혀 밑에서 흐르는 꿀방울 또 향취와 향기, 그것이 나를 소생케 합니다. 험한 산 바위 낭떠러지에서 주님을 만족케 했던 꿀방울, 그것은 곧 상대방의 심령을 소생케 합니다. 열 번 듣고 백 번 들어도 그의 말을 들어 서 짐이 되거나 심령이 해이해지는 것이 아니고 소생됩니다. 이 신부는 혼자 있든지 둘이 있든지 주님이 흠모할 수 있는 향취이고 또 그의 혀 밑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것은 동류들을 다 소생케 합니다. 잘 알아야 됩니다. 어제도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집 옆에 교회 가 있는데 그 교회의 목사가 기독교 사회주의자랍니다. 기독교 사회주의. 기독교적인 사회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읽기는 읽는데 본문에 대한 말씀은 거의 없이 뚱딴지같은 말만 하고, 혹 본문에 대한 말을 한다 해도 전혀 신앙과 상관 없는 말만 한답니다. 그것을 보면서 입에서 혀 밑에서 흐르는 꿀과 젖은, 주님이 흠향할 수 있는 꿀과 젖은 구원 얻는 모든 사람을 소생케 하는 영적 아름다운 것이라 하는 것을 생각했답니다. 무엇 때문에 주님이 '네 입에서는 꿀과 젖이 흐른다'고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해야 어떤 시간을 보내야 이런 성숙한 결실을 가질 수 있 느냐 하는 것을 잘 생각하세요.
아무리 말이 좋고 귀하다 해도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말을 좋게 해도 주님이 그것을 인정하는 것 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에 맞지 않으면 주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말씀 전하는 교역자뿐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하나에게 다 해당됩니다. 따라서 하십시오. "십자가에 달린 강도나 음행한 여인이나 탕자 같은 사람 이나 그를 향한 말씀이 성취될 때에 이 사실이 성취된다." 여러분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면 그 입에서 꿀과 젖이 흐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말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은 반드시 생명력이 있어서 성취됩니다. 잘 아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그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가 갈멜과 바산에 서 먹을 것이며 그 마음이 에브라임과 길르앗산에서 만족하리라. (예레 미야 50:19) 누구의 목장입니까 주님의 목장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목장으로 돌아 갔습니까 돌아가야 됩니다. '예' 하고 대답해야 됩니다. 만일 '예'하고 대 답할 수 있다고 하면 만인 중에 귀한 분입니다. 어떤 교파로 돌아갔다, 어떤 교회로 돌아갔다, 어떤 모임으로 돌아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 상입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각각-한 사람이 가는데 세 사람 이상이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 자기가 걷습니다. 갈멜과 바산에서 먹을 것이요. 돌아가면 먹게 되어 있습니다. 목장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안 돌아가니 까 못 먹지, 돌아가면 주님의 초장은 꼴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탕자가 안 돌아가니까 죽게 되었지, 돌아가면 먹을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의 영적 형편이 다 동일합니다. 왜 못 먹습니까, 왜 굶주립 니까, 왜 허기가 집니까 내 심령이 돌아가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돌아온 자를 먹이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 주님이 아닙니다. 그런 십자가나 그런 보혈이 아닙니다. 에브라임과 길르앗산에서 만족하리라.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실컷 먹는 길르앗산 기슭의 주의 목장에 있는 누운 양들입니다. 만족한 먹이입니다. '만족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찌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찌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할 것임이니라. (예레미야 50:20) 그날, 그때가 언제입니까 주님이 재림해서 쭉정이는 불에 다 태우고 알곡만 곡간에 채우는 그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절로 먹습니다. 준비 해 놓은 걸 저절로 먹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그날, 돌아오는 날을 말씀합니다. 내가 주님의 목장에 돌아간 날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성취 되는 날입니다. 내 외적 생활은 참 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이 내 마음 가운데 성취되는 날, 그런지 안 그런지 여러분 자신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찌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악을 찾을찌라도 발 견치 못하리니 여러분, 실감합니까 어디서 어디까지 이런 것은 지금 저도 쾌쾌히 담 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 지 찾아도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아도 없겠다, 또 유다의 죄악을 찾아도 발 견치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찾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과 동일한 말씀이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어떤 말씀이 있습니까 구약에서 신약에서 참 많습니다. 죄에 대해서 이만큼 정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깊은 바다에 던진다. 또 덮어 준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 리 옮기신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진홍 같을지라도 흰 눈같이 양털 같이 깨끗하게 해 주겠다.' 하는 약속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우선 대표적인 말씀 몇 군데만 적으셨다가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스바 냐서 3장 15절, 로마서 4장 7절, 민수기 23장 21절, 시편 103편 12절, 계시 록 16장 15절, 또 히브리서에도 이런 말씀이 참 많습니다. 이런 많은 약속이 내 앞에 있는데 왜 내 심령은 변화가 안됩니까 이 말씀이 내게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기는 한데 이 말씀이 내 게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말씀이 나를 보장해 주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성취되는 날, 이스라엘의 죄를 찾아도 유다의 허물을 찾아도 발견치 못합니다. 자, 이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어디 있는 신부를 말합니까 너 울 속에 있는 신부입니다. 너울 속에 있는 신부는 말씀이 성취된 신부입니다.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 신부는 세상을 향해서 부러워하지 않고 또 세상도 이 신부를 향해서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것 을 취할 때에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가는 길과 열방이 가는 길, 성도의 규례와 열방의 규례가 전혀 다른 것을 알아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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