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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로에서 (룻1:6-18)

본문

지난 주일 아침에 우리는 흉년을 만나서 모압으로 도피했던 엘리멜렉의 가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흉년은 두가지 경우에 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든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떠난 삶을 살고 있을 때에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보여주시고, 영적인 상태가 얼마나 빈곤하며, 또 인생이 얼마나 나약하고, 허무한 가를 보여주시는 것이 징계로 내리시는 흉년입니다. 이 흉년이 지금 우리에게 와 있지 않습니까 성경 열왕기하6장에서 이스라엘이 아람사람들에게 성이 오랫동안 포로되어 있을 때에 성중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을 잡아먹고 팔고 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했는데, 지금 북한에는 이 흉년으로 아이들을 잡아 먹고, 그 고기를 판다고하는데 이런 물질의 흉년도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영적인 흉년은 더 무섭습니다. 지금 이북의 심각한 흉년은 하나님떠난 유물주의, 무신론주의의 영적인 흉년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 남한은 괜찮습니까 우리들은 영적으로 풍년입니까 곤고하고 궁핍한 상태이지만, 느끼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곧 물질의 흉년도 찾아옵니다. 우리가 지금 북한을 도와야합니다. 지금 우리가 도울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지만 어쩌면 우리에게도 이런 물질 흉년의 때가 있을 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들을 생각해야합니다. 이 흉년의 때가 올 때에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합니까 지난 주에 현실을 만날 때에 특별히 고난의 흉년을 만났을 때에 어떤 자세를 가지라고 했습니까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에서 공식과 같은 것입니다.
첫째는 이 현실도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믿어야합니다.
둘째는 그 현실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합니다.
셋째로, 그 뜻을 찾았으면, 이제 할 일이 무엇입니까 회개와 순종입니다. 우리 할 일은 이때 믿음을 가지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해 보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도 큰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더 크고 귀한 믿음입니다. 평소에 하나님 말씀에 잘 순종한다고 하다가도 어떤 이해할 수 없는 흉년의 현실이 다가오면 그만 넘어집니다. “왜 내게 이런 현실이 오는가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생활을 잘 하는데 왜 이런 고난이 오는가”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현실이 구원의 현실, 믿음을 만드는 현실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음에도 정작 현실을 만나면 그 깨달음 다 어디갔는지, 그 현실에서 원망하고, 믿음 다 던져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현실을 그 현실이 어떠하든지 자족하며, 그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를 위해 엎드리는 믿음. 이 믿음이 귀합니다. 이 엘리멜렉 가정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제 마음대로 행하던 죄악이 가득찼던 사사시대의 가정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시는 징계의 흉년의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모압이라는 이방 땅으로 도피했습니다. 그곳에서 일시 기근은 면했지만, 곧이어서 그 가정에 찾아온 것은 질병과 고통과 죽음의 더 큰 징계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압지방에서 남편과 두 아들 까지 다 잃고 허탈과 절망에 빠진 나오미가 다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것은 소망없던 나오미에게 기쁜 소식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룻1:6)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하여 6절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실은 양식을 주신 것을 기뻐한 것 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권고하셨다는 사실이 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양식은 지금 모압 땅에서 얻을 수도 있는데, 베들레헴에 양식을 주셨다고 기뻐하고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려하다가 더 큰 징계를 겪은 나오미로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아보셨다는 하나님께서 진노를 푸시고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양식을 주신 것으로 알고 기뻐했던 것입니다. 이제 이 기쁜소식을 들었던 나오미는 지체하지 않고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가려고 일어납니다. (룻1:6하)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하여 (룻1:7)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 려고 길을 행합니다. 나오미는 고향의 희소식을 듣고 과감히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려고 모압을 떠나서 길을 갑니다. 이제 모압에서의 삶을 청산합니다. 돌아섭니다. 방향을 베들레헴을 향하고 길을 행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나오미는 유다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육신 때문에 모압의 신 바알브올과 그모스를 섬기면서 세속에 물든 육신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거리낌 없이 자부들도 모압여인들을 보았습니다. 현주소가 하늘나라에 있는 자들이 땅에 주소를 두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야할 자들이 자기 나라와 자기 뜻을 이루는 중심으로 무엇을 먹고 마실 것인가에만 관심과 열심을 가졌다면 나오미와 같은 입장입니다. 그래도 아무런 고난이 없이 여전히 형통하십니까 안심하시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진정 사랑하신다면 징계해서라도 돌이킬 것입니다. 징계 가운데 있습니까 하나님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고 회개와 순종을 가지셔야합니다. 아니면 더 큰 고난을 주실지도 모릅니다. 왜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이 다 없어져야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나오미와 같이 징계에 징계를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요, 은혜인줄 알고, 회개하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권고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고 베들레헴으로 돌이키는 나오미의 발걸음은 과감했습니다. 우리도 이제까지의 육신의 삶으로 낭패와 실패 당한 자리에서 앉아 있을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합니다. 모압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나오미같이 우리들도 돌아가기 위하여 이 시간이라도 일어나야합니다. 말로만 뉘우치고 말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을 향하여 길을 행하여 갔던 나오미같이 우리들이 이제 천국 바라보면서, 주님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합니다. 도중에 주저 앉아 버리면 안됩니다. 멈추어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아보셨다는 그 소식을 들은 세 사람이 이제자기 앞길을 두고 선택합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그의 두 며느리인 오르바와 룻입니다. 그들이 이 상황과 사건에서 어떻게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우리들이 이 현실을 살면서 만나게되는 온갖 상황과 사건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 답게 선택할 수 있는가 하는 중대한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먼저, 나오미의 선택이 있습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이 나오미는 이제 그 자신에 대한 선택보다도 두 자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그의 선택의 초점이었습니다. 그의 두 아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처럼 과부가 되어버린 두 자부를 자기의 고향으로 데리고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고향인 이 모압 땅에 머물라고 할 것인가가 나오미가 직면한 선택입니다. 나오미는 두 자부에게 그냥 그들의 고향인 모압에 머물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며느리를 데리고 있으면 편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자신의 편함과 필요보다는 며느리의 장래를 생각하여 돌아갈 것을 권유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훌륭한 시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이 나오미의 며느리에 대한 생각이 신앙적인 시각으로 보면 대단히 잘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 자부들을 생각해서 그들의 젊은 미래를 생각해 재가하고, 고향에 돌아가게하는 결과만 보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엘리멜렉의 가정으로 시집와서 겨우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 며느리들로서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모압으로 세상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순 육신주의입니다. 나오미가 15절에 말한 것을 보면 압니다. (룻1:15)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며느리들의 육신의 행복을 영혼의 영원한 행복보다 더 크게 생각한 것입니다. 나오미의 선택은 며느리들이 하나님을 신앙하므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막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좋은 어머니같으나 결국은 자녀를 망하게하는 인본입니다. 이런 선택을 하는 우리의 부모가 있습니다. 입시공부에 바쁜 자녀들이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며, 바로 살아 보려고 애 를 쓰면, 오히려 “교회는 이 다음에 열심히 해도 되는데. 지금은 열심히 공부할 때야” 이것은 자녀의 장래를 생각하는 슬기로운 부모의 관심입니다. 적어도 내 자녀의 육신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이런 결정을 내려야합니다. 그러나 이 결정과 권면이 그 아이의 영원 장래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은 무지한 결정입니다. 이 부모는 나오미와 같이 자녀를 육적으로 사랑하므로 그들의 육신적인 장래만을 생각하고 영원을 실패케하는 인본주의 신앙입니다. 또 신앙의 첫걸음을 걷는 사람들에게 신앙에 먼저된 자들이 주의해야할 것이 이것입니다.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좋으나, 자신이 경험한 것이지만, 계명지켜 사는 것이 힘들어 보이고, 십자가 지는 것 같아서 그만 지도한다는 것이 인본적이고, 타협적으로 육신의 편리를 추구하는 길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그 사람을 위하는 것 같으나, 그 사람의 영원 장래를 생각지 않고 일시적인 면, 세상의 육신적인면, 당장의 눈 앞의 이익만을 보도록 지도하므로 그에게 미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가로막는 대단히 잘못된 선택입니다.
오르바의 선택이 있습니다. 시어머니를 따라서 가려고하다가 시어머니의 인본적인 권유가 생각해보니 그럴 듯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유를 받아들여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오르바의 선택이 단지 자기살던 모압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른 남편을 얻어서 사는 것이겠습니까 결국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다가 다시 세상을 보고 세상으로 돌아 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어떤 동기로 교회에 출석하다가 신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따르다가도 중간에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사는 것이 내 미래에 어려움을 줄 것 같고, 희생이 있을 것 같으니 그 걸음을 포기하고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되는데는 앞선 사람들의 잘못된 모범, 가르침이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 가정의 달, 우리 육신의 부모들이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쳐야합니까 우리가 먼저 행해야하지만, 그렇지 못해도 바른 길은 가르쳐야합니다. 육신의 부모가 물질주의로 살면 그 자녀들은 물질위주의 사람이 됩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살고 가르치면 그 자녀들이 그것을 보고 배웁니다. 우리가 최소한 옳고 바른 것이 무엇인가는 보이고, 가르쳐야합니다. 우리가 다 같이 신앙생활을 하니 겉모습은 알곡 같지만, 누가 알곡이고, 가라지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는 위기가 닥쳐봐야 압니다. 어떤 위기를 당해도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내가 선택한 이 길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세상만 아니라, 영원 장래까지 놓고 볼 때에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오르바와 같은 결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룻의 선택이 있습니다. 룻은 도덕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오르바와 같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그녀에게도 있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가면 재혼할 수 있는 미래의 희망도 없어지고, 또 무엇보다 자기 고향을 버리고 유대로가면 이방여인으로서 괄시 받을 것이 예상되는 좁은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의 선택은 당장에 보이는 자기 실리나, 편리를 중심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도덕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어머니를 떠나 저 혼자 잘 살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룻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 희생과 손해를 각오한 뒤에 이루어집니다. (룻1: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얼마나 단호하며, 확실한 선택입니까 우리에게 닥칠 현실이 고통일까, 평안일까, 가난일까, 부요일까 이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고통을 주는가보다는 내게는 좋든 나쁘던 어느 것이 옳은 길인가를 생각해야합니다. 룻이 선택한 길은 신앙중심이었습니다. 그녀가 시어머니를 선택한 것은 시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믿고 싶고, 시어머니의 백성인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이 되고자하는 길이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선택했고,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이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선택의 길의 앞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것인가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룻1: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붙 좇았다’는 말씀은 그냥 적당히 선택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붙잡았다와그리고 좇았다는 단어의 합성어인데, 이는 전인적으로 마음, 뜻, 힘을 다해서 온 영혼과 마음으로 붙드는 결단을 말합니다. 의지적인 결단으로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는 단어입니다. 이런 선택의 기로가 여러분들의 생에는 없었습니까 실은 만나는 현실마다 이런 선택의 기로가 있습니다. 만나는 기로마다 어느 길을 선택했습니까 인간중심으로 선택하지는 않습니까 나의 안일과 편리를 따라서, 내 육신의 쾌락과 기쁨을 우선하여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습니까 과연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선택으로 결단하고 이 길을 가고 있습니까 또 그 선택한 길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옳은 길인줄 알고 전 인격을 다해 좇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립니까
여러분이 지금 선택한 하나님을 믿고 가기로 선택한 이 길은 후회함이 없는 것입니까 어려움이 있을 것도 알고 각오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가는 길입니까 과연 후회함이 없는 길을 선택했다고 확신하며, 그 길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늘도 달릴 수 있습니까 우리가 만나는 여러 현실의 상황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내 생각대로, 내 좋은대로 선택하고 결정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리스도인 다운 선택과 결단의 경험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선택하고 달려야할 수 많은 인생의 많은 길에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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