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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자 보아스 (룻2:1-7)

본문

교만과 겸손의 정의가 어떤 것입니까 교만은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와 입장,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존재와 위치와 입장과 처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인생임을 바로 아는 사람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를 원합니다. 또 이 사람이 은혜를 입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물리친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바로 아는 사람은 부러 겸손함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됩니다. 본문의 룻은 은혜를 입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람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이 룻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입장과 처지를 아는 사람이요, 은혜를 구했습니다. 은혜 없이는 안되는 줄 알았습니다. 겸손히 은혜를 구했고, 그래서 은혜를 입었습니다. 종종 우리들이 당하는 어려움이 견딜만한 것도 있고, 또 도저히 견딜수 없는 때도 있습니다.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때에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럴 때에 우리를 도울 자가 있다면 어려움을 당한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이요, 기쁜 소식이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때에도 일어나는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이 고통의 현실에서의 구원자가 있어도, 눈이 어두워 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또 하나는 이 구원자가 있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르는 길을 가면서도 그 자존심 때문에 길을 묻지 않습니다. 당하는 어려움에서 도움을 구하는 것이 하등의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참 자기를 모르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을 은혜를 구하지 않는 사람이라, 그래서 은혜를 입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도 교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히 현실에 어려움이 있고, 그 어려움에서 하나님께 구해야함에도 그 얄팍한 자존심에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 사람, 이 사람은 은혜를 입을 수 없습니다. 본문의 룻은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처지를 바로 알았습니다. 또 겸손하게 은혜를 구했습니다. (룻2: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그녀는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은혜를 베풀 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보아스를 만나서 한 말입니다. 13절에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우리도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살 수 있는 급한 현실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으려면 룻과 같이 하나님께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룻은 어떤 처지였습니까
첫째로, 그는 이방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을 잃어버리고 유대까지 따라온 룻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방여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사람들을 용납하지 않는 때였습니다. 그들이 드리는 아침 감사기도 중 하나가, “주여. 감사합니다. 저를 이방인 아닌 선민으로 삼으신 것을 감사합니다.”할 정도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한 자리에 있지도 않으려하고 짐승과 같이 여기는 그런 때입니다. 그래서 다른 며느리 오르바는 자기 나라로 돌아갔는지 모릅니다.
둘째로, 그녀가 처한 입장은 먹을 만한 양식도, 어떤 사람이 도와주겠다는 말도 없는 때입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막막한 때입니다. 지극한 효성의 마음으로 어머니를 따라서 유대땅으로 왔지만, 그녀에게 생존의 수단과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럴 때에 룻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바로 알았습니다. 자신에게 아무 것도 없음과 자신이 냉대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았을 때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분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일입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호의라는 뜻입니다. 아무런 받을 자격이나 한 일 없는 룻이 구한 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입장 아닙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믿기 이전에 어떤 자였습니까 (엡2:1-5)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룻이 받을 자격 없는 이방여인이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우리들이 다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 아니었습니까 우리들이 이전에 어떻게 살았습니까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 죄를 범하였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라서 불순종으로 살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이전에 살던 방법은 우리가 마귀의 미혹을 받아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고, 우리의 마음에 원하는 대로 행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우리가 이방이었습니다. (엡2:11-13)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런데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한 마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뿐입니다. 또 우리가 이 구원을 받는 데에 한 일이 있습니까 나오미와 룻이 유대 땅으로 왔을 때가 어떤 때입니까 그 때는 추수의 때입니다. 룻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제 보아스의 밭에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 긍휼로 흘려놓은 떨어진 이삭을 줍는 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해 놓은 농사에 그저 와서 이삭을 얻는 일입니다. 룻이 한 일이 없습니다. 룻이 씨를 뿌리지도 않았고, 물 주지도 않은 것을 받기만 하는 것인데, 이것이 또한 은혜입니다. 그래서 (롬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롬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이 크신 은혜를 입는 데에 일한 것이 있습니까 일한 것이 있다면, 천국가는 구원을 얻는 데에 우리의 일한 것이 있다면, 공로가 있다면 우리가 자랑할 것도 있고, 그 것을 은혜라 여기지 않고, 빚으로 여기면서 당연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아니하고, 경건치도 않는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이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구원을 공으로 받았으니, 이 은혜를 받은 자를 다윗은 말하기를 (롬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한마디로 복되다, 행복이다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더 구할 것이 있습니까 받을 자격없는 저주와 진노의 자식으로서, 또 아무 한 일이 없이 이 큰 은혜를 값없이 받았으니, 이 보다 더 큰 복이 있습니까 이를 행복으로 느낍니까 이것이면 다 된 것입니다. 룻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은 이방여인이라, 대우와 환영을 받을 수 없는 처지요, 또 아무 농사 짓는 데에 힘 쓰지 않고, 이미 추수 때이니, 그녀는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는 것도, 하나님의 보호의 은혜를 입는 것도 같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께 무릎꾸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은혜를 구하는 룻에게 구원자로, 구속자로 나타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보아스입니다. 룻기의 기자는 이 보아스의 등장을 서두릅니다. 2장 서두에서부터 이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보아스라는 이름이 룻기의 주제와 같습니다. (룻2: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 이 보아스에 대하여 나오미가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는 말이 있습니다. (룻2:20)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이 보아스는 나오미의 가정에 아주 가까운 친척입니다. 또 이 사람은 그 동네에서 실력있는 사람입니다. 이 나오미가 말한대로 보아스는 나오미의 기업을 무를 자입니다. 기업을 무를 자라는 뜻은 친척으로서 구속할 수 있는 자, 친척으로서 값비싼 대가를 주고서 내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구속이라는 단어의 뜻을 우리가 많이 사용합니다. 우리를 영원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은혜를 일컬어 구속이라합니다. 이 구속이란 단어의 뜻은 이 룻기의 주제요, 룻기에서 잘 나타납니다. 구속은 잃어버렸던 것을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원 상태 보다 더 나은 상태로 돌려 놓는 일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에 이 구속의 제도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이 구속이 세 가지가 나타납니다.
첫째가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을 잃어버린 것은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안식년이나, 희년이란 50년을 말하는데, 이 때가 되면 그 땅은 원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 전에라도 어떤 유력한 친척 가운데서 그 땅을 값을 치러서 대가를 지불하면 다시 그 땅이 원 주인엑로 회복됩니다. 이것을 그 땅을 구속한다고 합니다. 또 노예입니다. 어쩌다가 노예나 종이 되었을 때에라도 어떤 사람이 대가를 지불하면 그 노예된 자리에서 언제든지 풀려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 속의 뜻입니다. 또 과부입니다. 과부는 친척 중에서 구속을 합니다. 나오미와 룻과 같이 남편이 다시 살아 돌아 올 수 없는 때에 실력있는 친척 중에 한 사람이 그와 같이 살아주면 그 가계가 끊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구속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구 속의 대상은 땅과 노예와 과부인데, 이 세 가지 구속에 공통점은 꼭 그에 따른 값을 치를 누군가가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구속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속자에게도 자격이 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 가지 자격이 필요합니다.
첫째, 친족 가운데 있어야합니다. 아무리 돈을 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유력자여야합니다. 값을 치를 유력한 자, 힘이 있는자여야합니다.
셋째, 자원해야합니다. 친척이고, 유력자라도, 자원하지 않으면, 이 구속은 할 수 없습니다. 이 고통과 절망 가운데 빠져 은혜를 구하는 룻에게 구속자, 구원자가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룻2: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 보아스로 인하여 룻은 은혜를 입습니다. 어떤 은혜입니까 구속의 은혜를 입습니다. 이 구속의 은혜로 룻의 삶은 완전히 뒤 바뀝니다. 룻에게 있어서 보아스가 구속자가 될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첫째, 보아스는 친척이었습니다. 근친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또 보아스가 룻을 구속할만한 실력이 있습니까 그는 실력자입니다. 보아스는 그 지역의 유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셋째로, 이 보아스가 룻을 구속하기로 자원하였다는 것입니다. (룻2:12)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는 룻이 이방 여인인 것도 압니다. 그러나 그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시어머니를 따라서 이 곳 까지 온 것을 압니다. 이 일에 대하여 보아스는 룻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원했고, 또 그가 은혜를 베풀기로 작정합니다. 겸손히 은혜 구한 룻이 이제 은혜를 받았습니다. 구속자를 만났습니다. 이제 룻의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되었습니다. 보아스를 만난 일밖에 없는데, 이것으로 룻의 모든 것이 다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구속자는 누구입니까 죄와 하물로 죽었던 우리들, 아무 희망이나, 미래조차 없던 우리들에게 찾아오신 구속자가 있습니다. 이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속할 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친척이 되십니다. 그가 우리와 같은 인생의 몸을 입으신 것은 우리 인생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는 그분이 인생이셔야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히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형제라 부르심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연약한 몸을 입고 오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그분은 유력자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 값을치를 만한 실력이 있습니까 보아스가 룻을 구속할만한 실력이 있음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속할 실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히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케 하거든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염소와 황소의 피로서 정함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림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자신을 드림으로 우리를 사했습니다. 그는 죄 없으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셨기 때문에 이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까 인생의 지은 죄이기 때문에 인생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을 함께 가지고 오셨습니까 사람으로서는 자신이 완전하다 할지라도 한 사람밖에 속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많은 사람의 죄를 지실 수 있었습니다.
셋째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자 되심은 당신이 자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보아스가 친척이고, 유력하다고해도 원하지 않으면, 이는 안이루어집니다. 실은 나오미 가정에 보아스보다 더 유력하고, 가까운 친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이 기업을 구속하지 않습니다. 왜 이 구속은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자원하므로 구속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일에 자원하셨습니다. 이 구속의 역사에 희생이 있습니다. 그냥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인생의 몸을 입기 까지 낮아져야하는 종됨과 자신이 죽어지는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이 있습니다. 또 이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원함으로 해야합니다. 주님께서는 유월절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에 오르시는 일을 피할 수 있었지만, 도무지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자원하므로 이 골고다 언덕길로 가셨습니다. 조롱하는 무리들에게 아무 답하지 않고 이 십자가를 끝까지 지심은 당신께서 원하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구속의 은혜를 우리도 입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속의 은혜를 구약에서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보아스와 룻의 관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어떠함을 보여줍니다. (룻2: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여기에 룻이 보아스의 밭에 우연히 이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은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에 우연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경륜의 역사에 우연은 없습니다. 이는 필연입니다. 룻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룻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룻의 발걸음을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하신 것이고, 보아스를 만나게 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은 것도 우연입니까 우연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예수 믿도록하시기 위해서 내게 은혜를 입히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여러 사람을 통해서 여러 환경을 다 조절해서 나의 발걸음을 교회로 들여 놓도록하시고, 이 복음을 받고, 듣고, 믿게하심을 믿어야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필연입니다. 내 삶을 경영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팔자를 내, 운명을 고치기 위해서 룻이 그를 구속할 보아스를 만나게 하신 것 같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했습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서 어떤 은혜를 입었습니까 그녀는 이방인이요, 그의 형편은 거지와 같았는데, 보아스의 신부가 된 이후의 그녀의 모든 것이 다 변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만나서 어떻게 우리의 운명이 바뀝니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신랑의 모든 것은 이제 신부의 것이 아닙니까 불행했던 룻이 행복을 찾은 것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행복한 자가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절망이 이제 환한 미래로 바뀌어졌습니다. 고통의 눈물이 기쁨의 눈물로 바뀌었습니다. 이 행복감이 있습니까 고통과 절망가운데 있으면서 아직까지 주님께로 나아가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겸손히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봐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에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것이 다 바뀝니다. 왜 운명, 팔자라는 말을 씁니까 하도 자신의 절망의 현실을 운명이나, 팔자로 돌리기 때문에 이 말을 씁니다. 불신자들은 운명으로, 팔자로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운명이니, 팔자니 하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운명을 바꾼 사람입니다. 우리는 팔자를 고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서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팔자도 바뀌었습니다. 자신의 불행을 운명이라고, 팔자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요, 필연의 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친척이요, 유력한 자요, 자원하신 분이십니다. 이 분에게 우리의 삶을 맡깁시다.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겸손히 은혜를 구하면, 은혜를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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