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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룻1: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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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는 4개 장에 불과한 책입니다. 그러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책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이 책을 접한 사람이면 감명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하면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빚어내는 아름답고 희생적인 사랑과, 이들 사랑의 찬란하고 영과스런 결실 때문입니다. 이 작은 책은 위대한 문학 작품 중 하나이며 이들이 엮는 사랑 이야기는 오늘처럼 사랑이 메마른 시대에 엘림의 열두 샘물과 70 종려나무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감동과 함께 “룻기”하면 전광석화처럼 생각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주인공 룻과 나오미는 물론이며 신실하고 사려 깊은 베들레헴의 유력 인사 보아스, 그리고 보아스와 룻 사에에 태어난 “나오미가 낳았다”는 이름의 오벳, 그의 아들 이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기에 양치기에서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왕이 된 다윗(룻 4:17-22), 연이어 만 주의 주, 만 왕의 왕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까지 실타래 이어지듯 연상됩니다.
1. 사람의 이름 사람을 대표하는 것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0 글과 행위입니다. 말에는 그 사람의 사소한 생각부터 깊은 사상까지 들어 있습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자신의 약속이며 책임을 나타내는 증표입니다.행위는 사상과 외적 표현이며 실현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는 사람의 인격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말과 글과 행위를 묶어서 한꺼번에 사람을 대변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이름은 곧 그 사람의 말이요 글이며 행위요 인격입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역사요 모든 것입니다. 말과 글은 수정이 가능하지만 이름으로 표현된 인격은 수정이 불가합니다. 말과 글은 유한하지만 타인의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무한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출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사람이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은 그래서 더욱 의미 있는 말입니다. 고향을 떠날 때 그녀의 이름은 나오미였습니다. 그러나 고향을 다시 찾아와서는 “(룻1: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 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2. 나의 이름은 마라 이스라엘 나라에 왕이 없어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사사시대였습니다. “(삿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난세에 설상가상으로 극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룻1:1)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나오미도 그 남편 엘리멜렉을 따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고향을 등져야만 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하여 정든 고향, 약속의 땅을 떠나 정착한 곳은 다름 아닌 “모압” 지방이었습니다. 그러나 잘 살아 보자던 꿈도 잠깐, 모압 땅 타향살이 10년 세월에 남은 것은 황혼에 홀로 되어 외롭게 늙어 가는 자신과 청상에 과부 된 두 자부뿐이었습니다. “(룻1: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 글자 그대로 빈 손이었습니다. 사랑하던 남편도 병약한 두 아들도 떠났습니다. 인생무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고향은 더욱 그리움으로 다가왔습니다. 나 돌아가리., 하나님 약속하신 땅 베들레헴 에브랏으로! 나오미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하였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두 자부를 불러 위로와 함께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효성스런 두 자부는 시어머니를 따라 귀향길에 올랐습니다 나오미에겐 귀향길이지만 두 자부에겐 타향길이었습니다. 노중에 나오미가 다시 권고하였습니다. “내게는 더 이상 아들도 없고 낳을 기력도 없고 낳은들 언제자라서 너희에게 남편 구실을 하랴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니 내겐 더 이상 희망이 없구나. 그러니 너희도 여호와의 이 뜻을 따르려면 나를 따르되, 이는 너희 생을 포기하는 일이니 나는 권할 수 없구나. 내 딸들아 돌아가라!” 이 말에 오르바는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한결같은 기세로 따랐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계시는 곳에 저도 있고, 어머니 백성이 저의 백성이며, 어머니의 하나님의 저의 하나님이시며, 어머니 죽으시는 곳에서 저도 상자되고, 저는 죽음 외에는 결단코 어머니를 떠나지 않으리니, 이 말을 어기면 하나님이 벌 위에 벌을 제게 내리리이다(룻 1:16-17)”. 이 고백은 우리 모두의 신앙과 사랑의 헌장이 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고향 마을이 눈 앞에 어른거립니다. 동구 밖엔 온통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립니다. 그 중엔 낮익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 앞에 선 나오미는 참담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오! 나의 이름이여, 나는 마라라, 더 이상 감미로움의 나오미가 아니라, 나는 쓰디쓴 패배자요 괴로운 자여라!”
3. 나의 이름은 우리 모두는 나오미처럼 오늘 모압을 살지만 내일은 약속의 땅 본향 베들레헴을 꿈꾸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한순간도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섰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넘어진 자입니다. 감미롭다는 나오미가 쓰디쓴 마라로 변한 것처럼 우리 스스로는 단물이 될 수 없습니다. 가지려 할수록 가난해지고 잡으려 할수록 빠져나갑니다.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런 곳이 모압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습니다. 나오미가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녀에게 많은 재산이라도 있었다면 돌아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곧, 우리가 추구하는 이 땅의 헛된 것들을 훌훌 털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합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마라의 쓴 물이 한 나뭇가지로 말미암아 단물로 변한 것처럼“(출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 끝내는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 그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쓴 이름도 나오미로 중생할 것입니다. “보라!, 주님의 눈이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 위에 있고, 그의 자비 속에서 소망을 품고 있는 그들 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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